(9) 善法行
가. 菩薩의 十種不動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發十種不動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於一切所有에 悉皆能捨不動心과 思惟觀察一切佛法不動心과 憶念供養一切諸佛不動心과 於一切衆生에誓無惱害不動心과普攝衆生하야 不揀怨親不動心과求一切佛法호대 無有休息不動心과一切衆生數等不可說不可說劫에行菩薩行호대 不生疲厭하고 亦無退轉不動心과 成就有根信과 無濁信과 淸淨信과 極淸淨信과 離垢信과 明徹信과 恭敬供養一切佛信과 不退轉信과 不可盡信과 無能壞信과 大歡喜踊躍信不動心과 成就出生一切智方便道不動心과 聞一切菩薩行法하고 信受不謗不動心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無上一切智不動心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부동심(不動心)을 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온갖 있는 것을 다 버리는 부동심과, 모든 불법을 생각하고 관찰하는 부동심과, 일체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공양하는 부동심이니라.
일체 중생을 맹세코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으려는 부동심과, 중생을 두루 포섭하고 원수와 친한 이를 가리지 않는 부동심과, 모든 불법을 구하여 쉬지 않는 부동심과, 일체 중생의 수와 같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보살의 행을 행하되 고달프지도 않고 또한 물러나지 않는 부동심이니라.
뿌리가 있는 믿음과, 흐리지 않는 믿음과, 청정한 믿음과, 매우 청정한 믿음과, 때를 여읜 믿음과, 밝게 사무친 믿음과, 모든 부처님께 공경하고 공양하는 믿음과, 물러나지 않는 믿음과, 다할 수 없는 믿음과, 깨뜨릴 수 없는 믿음과, 매우 즐거워 날뛰는 믿음을 성취하는 부동심이니라.
일체 지혜를 내는 방편의 길을 성취하는 부동심과, 모든 보살의 행하는 법을 듣고는 믿어 비방하지 않는 부동심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위없는 일체 지혜의 부동심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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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행(善法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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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부동심(十種不動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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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발십종부동심(發十種不動心)하나니: 발십종부동심이라.
십종부동심이 왜 생길 수 있겠는가?
앞에 이미 장엄하고 변화하고 이런 것이 있었잖은가.
변화에 대해서 유연한 마음이 있으니까 이 부동심이 생겨지는 것이다.
어디에 가도 다이아몬드가 똥물에 처박혀 있든지 뻘밭에 처박혀 있든지 결코 썩지 않는다, 부동심이다.
법회 전에 <무비스님 이야기> 이 책에 대해서 “책을 왜 만들었노?” 뭐라뭐라 한참 이야기하다가 “스님 그거 잘못 만든 거예요?” “아니 굳이 어른스님 책을 안 만들어도 조개가 썩으면 썩었지 진주가 썩겠냐?”하고 말했다.
조개가 살아 있다 한들 진주가 조개 것이 되고, 조개가 다 썩어 문들어지고 없어졌다 한들 진주가 조개 것이 되겠는가?
생멸의 이 몸을 딛고 가기는 하지만, 생멸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 있다.
49재를 지내다 보면 꼭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묘체(妙體)는 담연(湛然)해서 무처소(無處所)요’
사람이 잘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람이 살았던 이야기도 안 하고, 돌아가신 이야기도 안 한다.
이 책 <무비스님 이야기>에는 분명히 생멸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우리가 눈 밝게 불생불멸을 찾아보면 ‘야 어른 스님의 자취를, 그 불생불멸’을 따라갈 수가 있을 것이다.
49재 지낼 때는 전부다 불생불멸만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고혼청(孤魂請)을 할 때 뭐라고 하는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게송을 딱 당겨준다.
‘약인욕식불경계(若人慾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게송을 가지고 49재 지낼 때 우리가 많이 써 먹는다.
어떻든지 열 가지 부동심 있다.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그러니까 여기서 부동심이 돼 버리면, 다음에는 ‘바깥에 흔들림이 없으면 안쪽에 마음이 견고해진다’ 미리 말씀드리고 간다.
유인물 선법행을 한 번 보시기 바란다.
3페이지 제일 밑에 보면 나온다.
선법행에 열 가지 부동심이 있으니까 나머지는 무엇인가?
불사(不捨) 깊고도 큰 마음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 따라온다.
그러니까 외연에 부동하면 내심이 불사라.
우리가 아주 심오하고 광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게 된다.
깊고 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은 마음이 전제 조건이 됐을 때 나온다.
직심(直心) 다음에 심심(深心) 광대심(廣大心)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기신론 같은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걸 보면 화엄경이 바로 회통된다.
직심이 있고 난 뒤에, 직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까 저 앞에 정념이 있었잖은가.정념 그런 것이 쭉 유지되어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웅장한 장엄의 격이 있는 사람은 들락날락거리고 촐싹대지 않는다. 여기 부동심, 열 가지 부동심
소위어일체소유(所謂於一切所有)에 : 소위 일체 유위법에 대해서
실개능사부동심(悉皆能捨不動心)과 : 다 버리는 부동심과
사유관찰일체불법부동심(思惟觀察一切佛法不動心)과 : 일체 불법에 대해서 세밀하게 관찰하는 부동심과
억념공양일체제불부동심(憶念供養一切諸佛不動心)과 :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공양하는 부동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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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일체중생(於一切衆生)에 : 네 번째 일체 중생에게
서무뇌해부동심(誓無惱害不動心)과 : 자꾸 고뇌스럽게 하거나 해코지하지 않으려는 부동심, 중생에게 못되게 하면 안 된다.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 자꾸 못되게 하면 안 된다.
육조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그렇게 해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절대 나무라지 아니한다’
우리는 똑똑한 척하고, 나한테 모지리 같은 사람들에겐 막 뭐라고 하지 않는가.
제가 옛날 통도사에 살 때 한 3년 법당 기도를 했다. 청소도 잘 안 해주고 하니까 노보살에게 좀 미안했다.
“할매 내 좀 모자라지요?”
“아니요. 스님은 많이 모자라요.”
저는 ‘좀 모자라지요’ 이러면 ‘안 모자라는데’ 이 소리를 들으려고 딱 기대했는데 ‘아니요. 무슨 소리 하는교. 스님은 많이 모자라요’ 좀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다. 그 할머니께서 정확하게 보셨다. 많이 모자란다.
스님들은 부목 처사님들이나 공양간에서 일하고 허드렛일 하시는 분들에게 대접 잘하고 이래야 되는데 막 함부로 대한다.
그걸 보시고 통도사 방장 스님께서 말씀하시곤 했다.
“좀 모자라니까 절에 왔지. 잘났으면 저거 집에 살지 여 뭐할라고 왔겠어요? 그 사람들 나무라지 말라고.”
조실스님은 그런 마음이 있으셨다.
모자라는 사람들 자꾸 뭐라고 하는 것을 옆에서 못 봐주는 것이다.
저는 제가 더 많이 모자라면서도, 강사가 되어서 모자라는 학인들 옆에서 계속 뭐라고 한다.
여기는 계속 그런 것으로 쭉 되어 있다.
화엄경이 눈에 들어왔으면 좀 모자라는 사람에게 그렇게 안할 텐데 화엄경을 읽고도 건성으로 읽어버리니까 뭐라고 한다. 모자라는 중생을 시끄럽게 고뇌스럽게 하지 않는다.
*
보섭중생(普攝衆生)하야 : 널리 중생을 두루 포섭하고
불간원친부동심(不揀怨親不動心)과 : 원수와 친한 사람, 친하고 안 친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 부동심이라.
이런 내용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우리는 친한 사람들끼리만 밥 먹지, 안 친한 사람이 오면 밥 먹다가도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전화번호를 차단하는 것은 부지기수다.
이런 일이 여기서 실제로 있었다. 어제 아레 멀리서 오셨기에 ‘아이고 칼국수 한 그릇 같이 먹읍시다’ 이러고 딱 나가려 하는데 누가 한 사람 더 ‘낑긴다’는 것이다.
그래 ‘나 안 갈란다’라고 빠져버렸다. 그게 저다. 밴댕이라고.
대원경상(大圓鏡上)에는 절친소(絶親疎)라 큰 거울에서는 친소가 다 끊어진다 했는데.
잘 읽어보면 글은 읽을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실천하기는 상당히 버겁다. 책이 틀린 것이 아니고 우리 수행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
우리가 현수위를 거쳐 왔다. 현수위 다음은 무엇인가?
경문스님, 현수위가 무엇인가? 현수법장 우리 현수품 있잖은가. 정행품 다음에 뭐가 나오는가? 현수품.
우리 다 배웠지 않은가?
현수품이 무엇인가?
제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자는 의미다.
현수라고 하는 것은 삼현의 머리맡에 있다. 십신이 완전히 원만해진 상태를 현수라고 한다.
십주 십행 삼현이 있잖은가. 다시 그것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된다.
십행 다음에는 십회향, 충분히 십회향이 완성되면 어디로 가는가? 십지품으로 넘어간다.
현수품은 십신이 완전히 무르익은 상태를 현수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수품에 나오는 그 유명한 게송이 뭐가 있는가?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단제의망출애류(斷除疑網出愛流) 개시열반무상도(開示涅槃無上道)’ 누구나 외우는 게송이 신심에 대해서 현수품에 쫙 써 놨잖은가.
신심의 완결판이 현수품이다.
현수품이 전부 일곱 자 배기 게송으로 되어있다.
현수품 넘어가기 전에는 무슨 품이 있었는가?
정행품이 있었다.
정행품은 재가와 출가가 공히 신심을 행동으로써 옮기는 것이다. 운전교습소에서 완전히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을 때까지 운전하는 상태다.
그래서 면허증을 딱 따면 현수품이다.
그다음부터 바깥에서 운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서 거기서부터는 십주 십행 십회향이라고 하는 삼현의 보살행으로 나아가게 된다.
거기서 박사학위까지 완전히 다 끝내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는 정도가 누구인가? 십지보살이다. 십지보살부터는 경계가 다 끊어지기 때문에 분별식이 싹 끊어진다.
넘어가자.
그러면 현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현(賢)이라는 것은 어질다는 뜻이고, 신심이 있으니까 공덕을 짓고 자비로워진다는 뜻이다.
수는 무엇인가?
현수품에 가면 수(首)자 돌림이다. 재수보살 목수보살 현수보살 다 이렇게 나온다.
머리 수(首)자라고 하는 것은 뿌리를 말한다.
현수는 어진 뿌리다.
그것도 청량스님이나 법장스님이 정확하게 해놨다.
여기 머리 수(首)자라고 하는 것은 식물로 비유하면 선근의 뿌리 있잖은가. 뿌리에 해당되고, 어진 뿌리가 완전히 박히니까 그다음부터 발아를 해서 발심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저한테 한 10년 넘게 공부했는데도 현수품을 모르고 있는 분이 바로 우리 경문스님이라고 온 방송에 떠들어 버려야겠다.
지리산 화엄사에 가면 여기는 믿음을 기르고 오라고 해서 보제루에 가면 현수품 게송이 쫙 붙어 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에 가면 법성게가 붙어 있다.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眞珠)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하는 것이 대웅전에 붙어 있다.
관음전에는 뭐가 붙어 있는가? 일엽홍련재해중(一葉紅蓮在海中)
해인사에 가든지 통도사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곳곳에 주련에 붙어 있는 것은 화엄경의 실천 사항들이다.
특히 통도사 천자각 같은 데는 ‘백전영웅(百戰英雄) 지불법(知佛法)이라’ 산전수전 다 겪어야, 보살행, 오만 만행을 다 해야 불법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써 놓았다. 조용히 앉아가지고는 안 된다, 이렇게 써 놓았다.
백전영웅이라야 지불법이라.
통도사 천자각에 그렇게 써 놓았다.
하여튼 여기서 중생을 안 괴롭힌다든지 원수와 친한 사람을 동등하게 여긴다든지, 우리의 지금 심보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읽어가면서 돌아보는 것이다.
구일체불법(求一切佛法)호대 : 일체 불법을 구하여
무유휴식부동심(無有休息不動心)과 : 휴식하지 않는 부동심과, 우리 어른스님은 8시만 되면, 8시 통근길에 매일 아침마다 화엄경 강설을 하신다. 휴식이 없다.
요즘만 편찮으셔서 그러시는 게 아니다.
건강하실 때도 그랬다. 부지런하시니까 은해사에 살 때도 우리가 죽다 살아났다. 1월 1일에도 공부를 했다.
방학 갔다 오면 조금 쉬고 오리엔테이션도 하고 엠티도 하고 ‘방학 잘 갔다 왔어?’ 이렇게 해야 되지 않는가? 이튿날 수업에 들어가면 “오늘 몇 페이지인가? 누가 한번 해봐요.” 조금만큼의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하셨다.
그러면서 스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그렇다.
“자투리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라. 자투리 시간 무시하면 공부 못 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런 어른 스님 회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것도, 지금 스님들 다 떠나시고 잔당만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남아 계신 분들은 참 대단하시다고 본다.
여기 오신 분들을 얼핏 봐도 서울서 세종서 진주서 전라도 강진 해남까지에서 오신 스님들이 계신다.
근데 스님을 보니까 화엄경을 아무것도 모르신다.
강진에서 ‘화엄경 하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가’ 싶어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별 것 없다.
“스님 실망이 많지예? 어떻습니까?”
“스님들 보니까 감회가 깊고, 스님들 너무 존경스럽고 그런 마음입니다.”
방금 말씀 들어보셨다시피 그렇다. 화엄경 아무것도 모르신다.
화엄경을 저부터라도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망발이다.
유인물 이런 것을 가지고 글 몇 조각 분석하는 것은 화엄경도 아니다. 그냥 스님들이 계시니까 좋고, 여기서 같이 익어가는 것이 좋고 그렇다.
일체중생수등불가설불가설겁(一切衆生數等不可說不可說劫)에 : 일체 중생 수와 같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의
행보살행(行菩薩行)호대 : 보살의 행을 행하고
불생피염(不生疲厭)하고 : 고달프지 않고
역무퇴전부동심(亦無退轉不動心)과 : 물러나지 않는 부동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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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여덟 번째는 아주 중요하다.
성취유근신(成就有根信)과 : 성취유근신과 뿌리가 있는 믿음, 뿌리가 없는 믿음을 우리는 맹신이라고 한다. 허망하다고 한다. 진리도 아닌 것을 진리로 믿는 이들이 있다.
외도들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 사람들을 저는 환자라고 한다. 있다고 착각을 한다.
‘다른 종교를 그렇게 폄하하면 됩니까?’ 그러는데 제가 폄하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화엄경에다 폄하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 인생도 소중하니까 그 사람 인생을 정도(正道)로 이끌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놓으셨다.
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결과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탁신(無濁信)과 :흐리지 않는 무탁한 것, 흐리지 않는 믿음, 탁하지 않는 믿음, 이것은 절대 잡되거나 믿지 못할 것이 아니다.
청정신(淸淨信)과 :청정신이라. 청정한 믿음, 청정한 믿음은 번뇌가 아주 깨끗해서 번뇌가 없는 것을 청정신이라고 한다.
극청정신(極淸淨信)과 : 극청정신이라. 아주 청정한 믿음이라 미세한 미세 먼지까지도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미세번뇌까지 없이
이구신(離垢信)과 : 이구신이라, 땟구정물, 때나 번뇌가 없는 것, 소지장에 땟구정물을 다 벗어난 것을 이구신이라고 한다.명철신(明徹信)과 : 밝게 사무치는, 끝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환한 것, 어떤 사건을 만날 때마다 그 원소의 뿌리까지 DNA까지 확 추려내 버리는 것이 명철신이다.
오온개공해서 그냥 확 밝게 사무쳐 버린 믿음이라.
공경공양일체불신(恭敬供養一切佛信)과: 모든 부처님께 공경하고 공양하는 믿음이다.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아주 지극하다는 것이다.
불퇴전신(不退轉信)과 : 물러나지 않는 신심이라.
물러나지 않는 신심, 내가 해야 될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전쟁이 터져도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불가진신(不可盡信)과 : 다할 수 없는 믿음이라. 뭐가 다할 수 없는가? 내가 공덕을 짓는 것이다. 일불 이불 삼불 사불 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 천만불소에 내가 공덕을 짓겠다, 다하지 않는 믿음이 있다.
적당하게 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전에 갈수록 더 어려운 걸 써놓았다.
무능괴신(無能壞信)과 :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인연이 와도 요동치지 않는다. 구래부동명위불이라.
대환희용약신부동심(大歡喜踊躍信不動心)과 : 대환희하고 팔딱팔딱 뛸 정도로 좋은 믿음을 성취하는 부동심이 있다.
팔딱팔딱 뛸 정도로 좋아하는 대환희심은 언제 일어나는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진여를 증득했고, 내 본심을 만났을 때 본지풍광(本地風光) 견성성불 했을 때 그렇다고 한다.
성취출생일체지방편도부동심(成就出生一切智方便道不動心)과 : 일체 지혜를 내는 방편의 길을 성취하는 부동심과
문일체보살행법(聞一切菩薩行法)하고: 일체 보살의 행법을 듣고는
신수불방부동심(信受不謗不動心)이: 완전히 믿고 받아지니고 비방하지 않는 부동심이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일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무상일체지부동심(則得無上一切智不動心)이니라 : 위없는 온갖 지혜의 부동심을 얻느니라.
나. 菩薩의 十種不捨深大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有十種不捨深大心하니何等이 爲十고所謂不捨成滿一切佛菩提深大心과 不捨敎化調伏一切衆生深大心과不捨不斷一切諸佛種性深大心과 不捨親近一切善知識深大心과不捨供養一切諸佛深大心과不捨專求一切大乘功德法深大心과不捨於一切佛所에修行梵行하야護持淨戒深大心과 不捨親近一切菩薩深大心과 不捨求一切佛法하야 方便護持深大心과 不捨滿一切菩薩行願하야 集一切諸佛法深大心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則能不捨一切佛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보리를 만족할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일체 모든 부처님의 종자 성품을 끊지 않음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니라.
모든 선지식 친근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모든 대승의 공덕법 구하기를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청정한 행을 닦아 깨끗한 계행을 보호할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니라.
모든 보살 친근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모든 불법을 구하여 방편으로 보호해 지님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모든 보살의 행과 원을 만족하고 일체 모든 불법 모은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모든 불법을 버리지 않게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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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불사심대심(十種不捨深大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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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행 두 번째 단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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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불사심대심(有十種不捨深大心)하니 :열 가지의 불사심 대심이 있으니 불사심대심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어떤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앞에 부동심을 말미암아서 이사(理事)를 회통 통달하고, 이치가 깊어지면, 사람이 사(事)적으로 이치를 알아버리면 통달한다. 요리할 때 무의 이치를 알아버리면 무가 하나라도 반찬을 열두 가지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감초 하나라도 다양하게 쓴다.
칼 한 개 가지고도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다양하게 만들어 낸다. 명인은 일침이다. 침 한 개를 가지고 온갖 병을 다 고친다. 앞에 부동심이 왔기 때문에 불사심대심, 직심으로 넘어간다.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냐
소위불사성만일체불보리심대심(所謂不捨成滿一切佛菩提深大心)과 : 이른바 불사 버리지 않는다. 성만일체불보리라, 모든 부처님의 불 보리를 만족할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교화조복일체중생심대심(不捨敎化調伏一切衆生深大心)과:
불사 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교화 조복 일체 중생을.
위에는 상구보리요 밑에는 하화중생을 대표적으로 해놓고 이제 나머지 말씀들로 이어간다.
불사부단일체제불종성심대심(不捨不斷一切諸佛種性深大心)과 : 일체 모든 부처님의 종성을 끊지 않음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친근일체선지식심대심(不捨親近一切善知識深大心)과 :일체 선지식을 친근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공양일체제불심대심(不捨供養一切諸佛深大心)과 :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전구일체대승공덕법심대심(不捨專求一切大乘功德法深大心)과 :여섯 번째 불사 전구 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오로지 구해서 무엇을? 일체 대승 공덕법, 대승 공덕법 구하기를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어일체불소(不捨於一切佛所)에 : 불사 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어일체불소에 모든 부처님 처소에 도량이 있는 절간마다 가서는
수행범행(修行梵行)하야 : 범행을 수행해서
호지정계심대심(護持淨戒深大心)과 : 청정한 계율을 호지하는, 보호할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친근일체보살대심(不捨親近一切菩薩深大心)과 : 일체 보살을 친근함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불사구일체불법(不捨求一切佛法)하야 : 일체 불법을 구해서
방편호지심대심(方便護持深大心)과 : 방편으로 보호해 가지고 지님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과
*
불사만일체보살행원(不捨滿一切菩薩行願)하야 :열 번째 불사 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일체 보살의 행원을 원만히 해서, 만족케 해서
집일체제불법심대심(集一切諸佛法深大心)이 :집 모은다 무엇을? 일체 모든 불법을 모아서 닦아서, 모으는 것을 버리지 않는 깊고 큰 마음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안주기중(安住其中)하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러
즉능불사일체불법(則能不捨一切佛法)이니라 : 바로 그 자리에서 일체 불법을 버리지 않게 되느니라.
그다음 다음 시간에 할 것이 진실행이다.
과표를 한 번 보겠다.
진실행은 아홉 꼭지로 되어 있다.
아홉 개의 지혜 중에 1번은 관찰지(觀察智)다. 잘 관찰하는 지혜가 있음으로써 그 관찰을 통해서 얻어진 능력을 가지고 법을 설명할 수 있는 설법지(說法智) 설법하는 힘, 지혜가 온다.
그리고 3번 설법하는 지혜가 오다 보면 점점 설법을 하다 보면, 법을 듣고 설하고 이러다 보면 안쪽에 있던 장애물이라든지 땟구정물이 벗겨지는 느낌이 있잖은가.
일체 지혜의 장애 되는 것이 점점 벗겨져서 그러다 보면 알 심(審)자 결정할 결(決)자, 환하게 설법하고 장애물이 없고 이러면 잘 닦아내서 테이프를 붙일 때도 먼지 같은 게 없으면 잘 달라붙는다.
심결지(審決智)라. 알 심자 심판볼 때 심자 결정적으로 알아진다.
결정적으로 모르는 것을 우리는 족제비라고 한다.
재판할 때 집행유예, 족제비 유자 족제비 예자 우리 치문 배울 때 유예를 배웠다.
족제비라는 놈이 나무를 잘 타고 올라가는데 사람 인기척이 딱 들리면 나무 위를 뽀르르 올라갔다가 사람 가고 나면 한참 간 뒤에 솔 내려왔다가 또다시 있는가 싶어서 뽀르르 올라갔다가 또 내려왔다가 뽀르르 올라간다.
사람이 간 지 한 나절이 지나도 지혼자 올라갔다 내려왔다 결정을 못하고 어떻게 하는가?
‘사람 갔다’ 하고 딱 내려와 버려야 되는데 의심이 많아서 그걸 못한다.
금강경에서는 그 족제비 같은 놈을 여우라 한다.
호의불신(狐疑不信)이라, 그것도 치문에 나온다.
여우라는 놈이 내를 건너다가 보면 물이 쫄쫄쫄쫄 흘러 내리는데 겨울이 되어 요렇게 살얼음이 얼어서 여우가 건너려고 하다가 물소리가 쫄쫄쫄쫄 들리면 빠질까 싶어서 안 건너고 돌아갔다가 또다시 와서 물소리가 들리면 안 건넌다.
똑같이 치문을 배웠는데 신기하게 기억 못 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렇다.
세종에서 멀리 오신 스님은 어떻게 기억하시는가?
“예.”
“입만 떼면 우리는 거짓말, 그렇게라도 해야지.”
여우라는 놈은 의심이 많아서 절대 함부로 살얼음 같은 것은 안 건넌다. 그것을 호의불신이라고 한다.
여우가 의심이 많아서 그렇게 살짝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쫄쫄 흐르면 안 건넌다는 것이다.
우리는 덥썩 물어서 옆에 홀치고 당기고 밀고, 이런 것이 아니잖는가. 완전히 이 화엄경을 통째로 그냥 한 사발에 다 먹어버린다.
심결지(審決智) 그러니까 완전히 알고 결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뭐가 있는가?
환하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철지(照徹智)라.
사무칠 철자 투명하게 내외명찰이다.
꿀맛이 안팎이 따로 있겠느냐 하듯이 확 뚫어서 보는 지혜가 생겨진다.
그다음에 무등지라.
일반 범부들이 견줄 수 없는 지혜와 방편을 가지고 있다.
반야심경할 때 우리 늘 무등등주 라고 하잖는가.
‘무등주는 곧 무등지다’ 이렇게 해놨다.
앞에 조철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그러므로 불변주착이라. 그 어디에도 치우쳐서 달라붙지 않는다
6번 말씀이다.
순서대로 그렇게 쪽쪽 써 놓았다.
무하열심(無下劣心)이라. 내가 남하고 견줄 수 없는 당당함이 있으면 무하열심이다. 밑으로 쪼그라드는 마음이 없다. 우뚝하다.
그다음에 우뚝한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산과 같은 마음이 생겨지고, 제일 마지막에 가니까 바다와 같은 마음이 생겨진다. 제가 흔히 강의하다 ‘화엄경을 야무지게 읽으면 매일 자기의 산이 하나 생기고, 자기의 바다가 하나 생겨진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요걸 보고 뺏긴 건 아닌데 요런 내용이 나와 있으니까 기분이 상당히 좋다.
화엄경을 잘 읽으면 매일 산이 하나 생겨지고 바다가 하나 생겨진다.
제가 돈이 좀 있어서 경기도 안산에 땅을 좀 샀다.
청산을 샀는데 흰구름이 공짜, 하늘의 달도 공짜, 다람쥐도 공짜, 도토리도 공짜다.
화엄경만 읽었는데 다른 게 다 공짜 붙은 게 많다.
진실행은 이렇게 십행을 마무리하면서 아홉 꼭지 해서 조금 복잡하게 해놨다.
(10) 眞實行
가. 菩薩의 十種智慧觀察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智慧觀察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善巧分別하야 說一切法智慧觀察과了知三世一切善根智慧觀察과 了知一切諸菩薩行自在變化智慧觀察과 了知一切諸法義門智慧觀察과 了知一切諸佛威力智慧觀察과 了知一切陀羅尼門智慧觀察과 於一切世界에 普說正法智慧觀察과 入一切法界智慧觀察과 知一切十方不可思議智慧觀察과 知一切佛法智慧光明無有障礙智慧觀察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則得如來無上大智慧觀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지혜의 관찰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잘 분별하여 일체 법을 연설하는 지혜의 관찰과, 세 세상의 일체 착한 뿌리를 분명히 아는 지혜의 관찰이니라. 일체 모든 보살의 행과 자재하게 변화함을 아는 지혜의 관찰과, 일체 모든 법과 이치의 문을 아는 지혜의 관찰과, 일체 모든 부처님의 위엄과 힘을 아는 지혜의 관찰과, 일체 세계에서 바른 법을 널리 설하는 지혜의 관찰이니라.
일체 법계에 들어가는 지혜의 관찰과 일체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음을 아는 지혜의 관찰과, 일체 불법의 지혜 광명이 장애가 없음을 아는 지혜의 관찰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의 관찰을 얻느니라.”
*
진실행(眞實行)
*
보살(菩薩)의 십종지혜관찰(十種智慧觀察)
*
이세간품을 도세간품 격이라고 하는데 똑같은 내용이다. 도세간품이 이세간품보다 조금 더 치밀하게 잘 된 것 같은 대목들도 있다.
화엄경을 이치로 이해하는 것, 현실로 이해하고, 행으로 이해할 때는 대표적인 품이 제14권 현수품과 같이 묶여 있는 정행품이다.
정행품에는 입측진언(入廁眞言)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 음식 먹을 때, 걸식 나갈 때, 양치할 때, 높은 길을 갈 때, 낮은 길을 갈 때, 그런 일들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화엄행자로서 살아가야 되는 방법에 대해서 청정한 행, 정행품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나서 출가자를 위해서는 조금 수준 높은 화엄경의 수행 관행을 자세하게 이치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범행품이다.
범행품에는 신구의 삼업에 대해서 나온다. 구업이 뭐냐? 말이 뭐냐 말의 업이 무엇이냐, 생각이 뭐냐 생각의 업이 무엇이냐, 행이 뭐냐 몸의 업이 또 무엇이냐, 삼업에 대한 여섯 가지와 불법승이 무엇이냐, 존재하느냐? 부처님은 무엇이냐, 법이 무엇이냐, 승이 무엇이냐, 수행자가 무엇이냐, 그리고 거기에서 맥락을 이어주는 것이 계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계행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 범행에 대해서 전체가 일체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라는 것으로써 확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 게송이 ‘초발심시에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초발심시 변정각 하고 난 뒤에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십주품이다.
십주품하고 범행품하고 초발심공덕품 명법품 그렇게 마무리 된다.
범행품이 십주품 다음에 나와서, 행에 대해서 진공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진공이라고 하는 것, 출세간의 수행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범행품이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 범서방파처럼 완전히 총망라해서 설명하는 것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세간품이다. 행에 대해서 모든 행을 2천 가지로 종합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십지위가 끝나고 십행위를 지금 하고 있는 상태다.
십행위 중에서도 제 열 번째 진실행이다.
얼마나 진실하면 열 번째는 앞의 구절의 몇 배 분량이 뭉쳐져 있다.
십지품에 가도 그렇다.
십지품 가면은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염혜지(焰慧地),난승지(難勝地),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까지도 상당히 내용이 좋다.
그런데 그것을 전체 다 뭉쳐서 마지막 법운지(法雲地)에 이렇게 해놓는다.
‘이제까지, 앞의 9지 보살들까지는 보살도 아니다. 그것은 바다하고 도랑물하고 연못하고 비교하는 것과 똑같다. 앞의 9지까지는 모든 세상의 등불 같다면, 마지막 법운지인 10지는 천상천하무여불 하는 것처럼 10지보살은 태양이 하나 떠 버린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한다.
네 가지를 가지고 마지막에 법운지에 비유를 한다.
산과 같다, 바다와 같다, 마니주와 같다, 이렇게 표현을 한다. 세상의 모든 보배들을 다 모아도 마니주 하나를 이길 수 없다. 여의주 하나를 못 이긴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을 다 두드려 합친다 해도 부처님 한 분을 이길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견주어서 제10지 법운지를 찬란하게 설명하듯이 여기 진실행이 바로 법운지에 해당하는 꼭지라고 보면 된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지혜관찰(有十種智慧觀察)하니 :열 가지 지혜 관찰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선교분별(所謂善巧分別)하야 :소위 잘 분별해서
설일체법지혜관찰(說一切法智慧觀察)과 : 모든 법을 선교 분별 연설하는 지혜 관찰과
요지삼세일체선근지혜관찰(了知三世一切善根智慧觀察)과 : 삼세의 모든 착한 뿌리 선근을 분명히 아는 지혜 관찰과
요지일체제보살행자재변화지혜관찰(了知一切諸菩薩行自在變化智慧觀察)과 :요지, 요지가 너무 많이 나온다.
모든 보살의 행과 자재변화를 요지하는 분명하게 아는, 변화함을 분명히 확실히 아는 지혜 관찰과
요지일체제법의문지혜관찰(了知一切諸法義門智慧觀察)과 : 일체 제법의 문을 아는 지혜관찰과, 진실행이니까 요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다.
화엄경에는 요지라는 말은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또 무슨 요지가 있는가?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즉견노사나(則見盧舍那)’
그리고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범행품 제일 말미에 나오는 지일체법, 그것도 요지일체법인데 ‘지일체법(知一切法) 즉심자성(卽心自性)’ 모든 일체법은 마음의 자성으로 되어있다. ‘성취혜신(成就慧身)에 불유타오(不由他悟)라’ 그다음 구절이 뭔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이렇게 나온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요지일체제법, 요지일체제법이 어떻다는 말이냐?
일체제법은 일체유위법은 오온이 개공하다는 것이다.
일체제법을 표현할 때는 ‘유위법이다, 무위법이다, 선법이다, 악법이다, 오온이다, 18경계다, 12처다, 12연기다, 사성제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일체 제법을 표현한다.
요지일체제불위력지혜관찰(了知一切諸佛威力智慧觀察)과 : 일체제불의 위력을 요지하는, 제대로 아는 지혜 관찰과
요지일체다라니문지혜관찰(了知一切陀羅尼門智慧觀察)과 : 일체 다라니문을 요지하는 지혜 관찰과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 : 일체 세계에
보설정법지혜관찰(普說正法智慧觀察)과 :정법을 널리 말하는 관찰과
입일체법계지혜관찰(入一切法界智慧觀察)과 : 일체 법계에 들어가서, 법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법계를 꿰뚫어서 환하게 안다는 뜻이다. 증입하는 지혜 관찰과 응관법계성하라, 일체유심조니라.
지일체시방불가사의지혜관찰(知一切十方不可思議智慧觀察)과 : 일체 시방의 불가사의함을 아는, 헤아릴 수 없음을 아는 지혜관찰과
지일체불법지혜광명무유장애지혜관찰(知一切佛法智慧光明無有障礙智慧觀察)이 : 모든 불법의 지혜 광명이 장애가 없음을 아는 지혜 관찰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모든 보살이
안주기중(安住其中)하면 : 이 법에 안주하면
즉득여래무상대지혜관찰(則得如來無上大智慧觀察)이니라 : 즉득 여래의 무상 대지혜관찰이 된다.
나. 菩薩의 十種說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說法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說一切法이 皆從緣起와說一切法이 皆悉如幻과說一切法이無有乖諍과 說一切法이無有邊際와說一切法이無所依止와說一切法이猶如金剛과說一切法이皆悉如如와說一切法이皆悉寂靜과 說一切法이 皆悉出離와 說一切法이 皆住一義하야 本性成就가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則能善巧로 說一切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법을 말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법이 다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을 말하며, 일체 법이 모두 다 환술과 같음을 말하며, 일체 법이 어기거나 다툼이 없음을 말하느니라.
일체 법이 끝이 없음을 말하며, 일체 법이 의지한 데 없음을 말하며, 일체 법이 마치 금강과 같음을 말하며, 일체 법이 모두 다 여여함을 말하며, 일체 법이 모두 다 고요함을 말하느니라.
일체 법이 모두 다 벗어남인 것을 말하며, 일체 법이 다 한 가지 이치에 머물러서 본성품을 성취함을 말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곧 능히 훌륭하고 교묘하게 일체 법을 말하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설법(十種說法)
*
그다음에는 보살의 십종설법이라.
안쪽으로 우리가 그런 지혜 관찰이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설법이 나온다.
안의 지혜가 없는 사람이 떠들면 중구난방 아닌가. 겨울 되니까 스님들 아홉 명 모이면 난방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중구난방, 한 번 웃고 가자. 죄송하다. 너무 딱딱하잖은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많이 모자란다. 모자란 사람, 뭐라고 하지 마시기 바란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유십종설법(有十種說法)하니: 십종의 설법이 있다. 풍선이 부풀려면 안에 바람이 들어가야 폼이 날 것이 아닌가.
안에 지혜 관찰이 있어야 설법이 튀어 나온다.
열 가지에 법을 말함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밖으로 술술 설법하려면 안에 지혜 관찰력이 있어야 된다. 일단은 먼저 세속 진리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소위설일체법(所謂說一切法)이: 이르되 설일체법이
개종연기(皆從緣起)와 : 모두 인연으로 생긴 것을 말한다.
흔히 마승비구의 그 유명한 게송이 무엇인가.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제법종연멸(諸法從緣滅)이라.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나고 연기의 법, 인연이 다하면 법도 다 하리니 아불대사문(我佛大沙門)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상작여시설(常作如是說)이라.
그런데 우리가 하는 지금 이 부분은 출세간의 진리가 아니고 속제에 관한 것이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설일체법이
개실여환(皆悉如幻)과 : 개실여환이라.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 환술과 같음을 말하며, 그다음은 진제 출세간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설일체법(說一切法)이: 일체법이
무유괴쟁(無有乖諍)과 : 모두 어그러지고 다툼이 없는 것을 말하며
설일체법(說一切法)이 : 설 말한다. 무엇을? 일체법이
무유변제(無有邊際)와 : 끝이 없는 것을 말한다
본체가 광대한 것이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모든 법이
무소의지(無所依止)와: 의지하는 데가 없음을 말한다.
너무 심오하고도 광원하기 때문이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일체법이 모든 법이
유여금강(猶如金剛)과: 금강과 같음을 말한다. 마음의 본체는 허공처럼 막 두드리고 깨고 째고 부숴도 안 부서진다는 것이다. 허공과 같아서
설일체법(說一切法)이 : 일체법이
개실여여(皆悉如如)와 : 모두 여여라. 여여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진여라고 한다.
여여부동이라고 청량국사는 해석을 한다.
금강경에는 뭐라고 해놨는가?
여여부동(如如不動)은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
한결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부처라고 한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일체법이
개실적정(皆悉寂靜)과: 모두 고요함을 말한다.
모두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다 여러 개다 1이다 2다 둘이다 셋이다 이런 것이 있잖은가? 그것이 같다 다르다 있다 없다가 다 끊어진 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 일체법이
개실출리(皆悉出離)와 : 개실출리라. 일체법이 다 벗어났다. 어디에서 벗어났는가? 번뇌에 있지만 오염되지 않는다.
설일체법(說一切法)이: 일체법이
개주일의(皆住一義)하야 : 한 가지 이치에 머물러서
본성성취(本性成就)가 : 본성성취라. 최상이 일미라. 이런 것을 화엄경에서는 동시구족상응문이라고 한다.
바닷물 한 방울만 찍어 먹으면 LA 바다나 부산 앞바다나 물이 똑같은 맛인 줄 알 것이다. 동시구족상응문이다.
금강경 같은 데는 이렇게 해놓았다. 저 하늘이 청청히 있다하더라도 전부 일양천(一樣天)이다. 한 모양의 하늘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지막 열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우리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몇 분인가?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그러면 화엄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보현보살이 보현삼매품에 비로자나여래장신 삼매에 들어가실 때, 여기에 보현보살이 삼매에 들어가실 때 시방 일체 모든 보현보살도 동시에 삼매에 들었다.
똑같은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뒤에 보면 뭐라고 나오는가?
보살문명품에 문수보살이 게송을 설명하실 때 시방 일체 문수보살이 같은 음성으로 같은 게송을 동시에 설하신다. 왜?
금강경에는 해석을 이렇게 했다.
안횡비직(眼橫鼻直)이라. 누구나 코는 세로로 세워지고 눈은 가로로 떠 있다. 동일법성이다 ‘사람 똑같구먼’ 눈 세로로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안횡비직이라고 간단히 말해 버린다.
긴 놈은 길고 짧은 놈은 짧지만 길고 짧은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안횡비직이다. 본성이 똑같다 이래 버린다.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고제보살(若諸菩薩)이: 만일 보살마하살이
안주기중(安住其中)하면 :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즉능선교(則能善巧)로 : 교묘하게
설일체법(說一切法)이니라 : 모든 법을 말하느니라.
다. 菩薩의 十種淸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淸淨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深心淸淨과斷疑淸淨과離見淸淨과境界淸淨과求一切智淸淨과辯才淸淨과無畏淸淨과 住一切菩薩智淸淨과 受一切菩薩律儀淸淨과 具足成就無上菩提三十二種百福相白淨法과 一切善根淸淨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則得一切如來無上淸淨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청정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의심을 끊음이 청정하고, 소견을 여읨이 청정하고, 경계가 청정하고, 온갖 지혜를 구함이 청정하고, 변재가 청정하고, 두려움 없음이 청정하느니라. 모든 보살의 지혜에 머무름이 청정하고, 모든 보살의 계율을 받음이 청정하고, 위없는 보리와 32종의 온전한 복된 모습과 희고 깨끗한 법과 모든 선근을 구족히 성취함이 청정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곧 모든 여래의 위없는 청정한 법을 얻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청정(十種淸淨)
*
그다음 보살의 십종청정에 들어간다.
앞에 뭐가 있어서 청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가?
설법을 할 수 있으니까 제대로 알았다. 제대로 알고 나면 달라붙지도 않는다. 땟구정물이 없다.
장애 없는 지혜를 쭉 들어간다.
60화엄경에서는 무구(無垢)라고 나온다.
불자(佛子)야 : 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청정(有十種淸淨)하니 : 열 가지 청정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심심청정(所謂深心淸淨)과 : 이른바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단의청정(斷疑淸淨)과 : 의심을 끊음이 청정하고
이견청정(離見淸淨)과 : 소견을 떠나는 것이 청정하고
경계청정(境界淸淨)과 : 경계가 청정하고
구일체지청정(求一切智淸淨)과 : 일체지를 구함이 청정하고
변재청정(辯才淸淨)과 : 변재가 청정하고
무외청정(無畏淸淨)과 : 놀라고 두려움 없음이 청정하고
주일체보살지청정(住一切菩薩智淸淨)과 : 일체 보살의 지혜가 청정하고
수일체보살율의청정(受一切菩薩律儀淸淨)과 : 일체 보살의 율의를 받음이 청정하고
구족성취무상보리삼십이종백복상백정법(具足成就無上菩提三十二種百福相白淨法)과 : 지혜도 본래 없고 계율도 본래 없고 변재도 본래 없고 두려움도 본래 없고 이렇게 해석하시면 맞겠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 무소주가 바로 청청이다. 청정하다.집착하는 바가 없다. 주착하는 바가 없다. 청정은 자기 색깔이 없다는 것이다.
구족 성취 무상보리, 위없는 무상 보리와 32종의 복된 모습과, 32종의 백복상과 백정법, 무위법, 백정법의 일체 선근 청정이니. 백정법을 구족하야,
일체선근청정(一切善根淸淨)이 : 일체 모든 선근이 청정함이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모든 보살이
안주기중(安住其中)하면 :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즉득일체여래무상청정법(則得一切如來無上淸淨法)이니라 :곧 여래의 무상청정법을 얻게 된다.
사람이 청정해지니까 어떠냐? 물이 깨끗하게 맑아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확 찍혀 버린다.
이걸 갖다 완전히 찍히면 뭐라고 하는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한다.
인(忍)이라고 하는 것은 그 청정한 선정의 고요로부터 얻어지는 지혜를 인이라고 한다. 십종인.
청정한 지혜가 있어야 제대로 확정적으로 도장을 찍어서, 인가(印可)를 해서 확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까 네 번째 심결지라고 했다.
지금 제가 이 강의하는 것도 내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여기 청량국사께서 여기 해놓은 대목에 견주해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