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런 행사 첨이야.”
12월인데도 부산에는 아직도 가을이 곱게 남아 있었다.
상주에 사시는 혜일성 보살님이 1년간의 문수경전연구회 재정 보고를 하시려고 재무스님과 함께 화엄전에 오셨다. 큰스님 뵙는 일이 너무 설레서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치고 빨리 날이 새길 바랬다고 하셨다.
큰스님도 반가워하시면서 이것저것 일상을 물으셨다.
차를 배우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는 ‘다도를 하면 사람이 까칠해지는데?’하셨다.
“그럼 저는 즐기는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지. 어떻게 자기 앞날이 흘러가는 건지는 자기도 몰라.”
그 말씀이 맞다고 모두 웃으셨다.
*
요즘 큰스님께서는 유튜브 법문중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자주 강조하신다.
큰스님과 함께 두 번째로 읽는 유튜브 화엄경은 입법계품 제61권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뇌과학자고 의사고 심리학자고 자기계발의 주제가 모두 일체유심조예요. 이걸 마치 지금 새로 발견한 듯이 야단이지만 벌써 2600년 전 부처님이 화엄경에서 다 말씀하신 거예요”
종교 기자로 유명한 조현기자가 화엄전에 내려와서 큰스님과 화중연화 인터뷰를 해서 유튜브에 시리즈로 올렸다. 시리즈마다 제목이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는 ‘불교 배신하고 떠날 수 있다’라는 제목이었다. 용학스님께서 큰스님 강의 중에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대목이라고 이번 USB에 대표 강의로 담으신 내용이었다. 탄허스님도 성철스님도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라는 말씀, 의리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큰스님도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는 법문 내용이었다.
이 글을 작성하는 12월 26일 유튜브 염화실TV 법문에서는 큰스님이 원력에 대해 말씀하셨다.
“말사 주지든 본사 주지든 평소에 자기 꿈이 있어야 해요. 꿈을 잔뜩 갖고 있는 사람들이 기회가 있을 때 그 꿈을 이루지요.”
*
경산의 지묘스님이 화엄전에 오셨다. 봉정법회가 좋았다는 인사부터 하셨다.
“불자들 몇 명을 데리고 참석했는데요. 불자들이 너무 좋다고 감동해서, 다 못 데리고 온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럴 때는 그 절 신도님들을 다 동원해서 와야지. 그런 좋은 행사는 그 자체가 교육이거든.”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지묘스님이 대만순례 이야기 끝에 말씀하셨다.
“불광산사의 성운대사님이 세납 97세로 열반하셨는데 큰스님께서는 108 장수하셔서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계셔 주셔요.”
큰스님이 빙그레 웃으셨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할 말은 그것밖에 없어.”
“사부대중이 그렇게 염원하니까 꼭 그렇게 되시리라고 믿습니다.”
하고 지묘스님이 말씀하셨다.
“그거 누구 법문하고 비슷한데?”
하고 큰스님께서 웃으셨다.
이야기가 봉정법회날의 축사로 이어졌다.
“여러 어른스님들께서 주거니 받거니 덕담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고 재무스님이 말씀하셨다.
“그 스님들 최고 노련한 스님들인거라. 종정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덕민스님 무관스님 우리 방장스님 다 노련한 스님들이야. ”
“암도스님의 노래가 압권이었어요.”
“암도스님은 완전히 노호고.”
“노호가 뭐예요?”
“늙은 호랑이.”
*
그렇게나 노련하신 스님들께서 마음까지 오직 하나로 모으셨으니 그날의 법회를 모두가 잊지 못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큰스님께서도 동의하셨다.
“나도 불교 행사 중에 그런 행사 못 봤어. ”
“마음이 활짝 열리는 느낌, 뭔가 큰 획을 하나 그은 느낌이었어요.”
하고 지묘스님이 말씀하셨다.
*
“선물이 넉넉해서 넘쳐났어야 하는데 예상보다 사람이 많아서. 와서 한마디라도 할 스님들이 많은데 그것도 넘쳐났고.”
큰스님께서는 안타까와 하셨는데 어느날 아침 유튜브법회에서 엄청 기쁘신 얼굴로 USB는 요청하는 대로 보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BTN 소나무를 진행하시는 광우스님도 오셔서 인사하시면서 USB만 받겠다고 하시고, 자현스님도 오셔서 앞으로 종이책은 사장될 거라고 PDF로 자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원창스님도 ‘아 난 책 필요없습니다’ 하더라고. 그래서 용학스님이 추진했지. PDF 파일로 만든 건 모두 용학스님의 공로야.”
그리고 큰스님은 무엇보다 큰마음을 내 준 출판사에 감사를 하셨다.
큰스님은 벌써 ‘화중연화’ 책들을 거래하는 작은 출판사에 부탁을 해서 ‘화중연화’를 큰 책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사이즈가 큰 책을 보여주셨다.
*
‘종이책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발명품이어서 그 자체로서 완벽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현재의 읽는 도구는 빛으로 바뀌었다’는 책에 관한 책을 봉정식 즈음에 부산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큰스님은 부처님의 법을 전달하는 책에 관한한 알파와 오메가 모든 형태를 선물로 주신 셈이다. ‘부처님 법을 세상에 전하자, 모두가 부처님으로 살자’는 큰스님의 목표에 모두가 동의하고 고스란히 그렇게 한 번 살아본 11월 봉정식의 순간은 다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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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마음으로 내려온 문수선원에서 용학스님이 다실에서 노스님들을 대상으로 USB를 핸드폰으로 옮기는 강의를 해주셨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참 재미있다’고 법문 중에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지치는 기색없이 노스님들이 기뻐 웃으며 진귀하게 USB를 들여다 보시는 모습은 부처님도 참 재밌어서 자꾸만 보고 싶은 장면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五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三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반갑다. 문수경전연구회 화엄경 이세간품 현하이천(懸河二千)이라. 폭포수가 쏟아지듯이 2천 가지로 답하는 와중이다.
오늘은 십회향에 대한 답 29문 363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할 차례다.
제가 나눠드린 유인물에는 29문이 아니라 30문의 십회향답이라고 해놓았다. 29개의 방편과 30개의 방편이 어디에서 차이점이 있는가는 나중에 말씀드리겠다.
책에는 스물아홉 가지 방편이라고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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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53권부터 59권까지가 이세간품이다. 지금 우리는 55권째, 이세간품의 절반쯤에 왔다.
유인물의 제목을 제가 빨갛게 칠해 놓았는데 ‘십회향의 갈래’들이다.
제 1번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밑에는 몇 갈래가 있는가? 네 갈래가 있다.
두 번째 불괴회향(不壞廻向)은 두 갈래, 세 번째 등일체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은 두 갈래, 네 번째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은 한 갈래로 해놨다.
옛날 소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정리해서 여러분께 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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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2페이지에 보면 여덟 번째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이 있다.
진여상회향은 십회향품 내용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다. 여기에 와서 이십아홉 문항이냐, 삼십 방편이냐 하는 것이 갈라진다. 진여상 회향 첫대목을 넣으면 30방편이 되고, 빠지면 29방편이 된다.
나중에 56권 넘어갈 때 한번 짚겠다.
제가 여러분들 보시라고 파란색으로 글씨를 쓰고 참고 마크까지 친절하게 (菩薩의 十種無礙用 보살은 열 가지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해놓았다.
거기서는 방편이라기보다는 열 가지 무애용을 나열해 놓았다. ‘어떤 것이 무애용입니까? 운하무애용(云何無礙用)’ 다음으로 열 가지 답이 나열된다.
무엇이 무애용이냐고 묻는 것은 수행하는 방편에 대한 질문이 아니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열 가지 답이 나오기 때문에, ‘질문이 30가지다’라고 보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이 스물아홉 개냐, 삼십 개냐가 헷갈리지 않으시도록 제가 유인물에 딱 잡아 놓았다.
거기 소초하고 책하고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편하게 1번부터 10번 등법계무향회향까지 낱낱이 과목을 쳐놓았다.
참고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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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 대목을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과판을 먼저 보겠다.
<유인물 p.1>
제 55권 : 이세간품 권제55, 우리가 지금 55권을 공부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의(大意) : 이 대의를 쓰신 분이 당나라 시대 통현(通玄)장자인 조백대사(棗柏大士)가 글을 쓰신 대목이다.
십종무상지의(十種無常之意) : 열 가지 무상의 뜻, 여기 이세간품 55권의 뜻은 ‘열 가지의 떳떳함이 없는 무상한 뜻’이라고 해놓았다.
후창자재등문(後彰自在等門): 뒤에 가서는 창(彰) 밝힌다. 무엇을? 자재등의 방편을, 자재등문을 밝힌다.
기중지취무변(其中旨趣無邊) : 그 가운데 지취가 무변한 것이라 하고
술전회향지위(術傳廻向之位) : 앞의 회향의 위를 서술한다. 그리고
삼십문(三十門)의 십회향답(十回向答)이라: 삼십문 십회향답이라. 지난시간까지 십행이 끝났지 않은가. 십행이 서른 가지였다. 오늘 십회향이 29문이고 십지에 들어가면 50개로 막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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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 1번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이라. 들어가기 전에 제목을 가지고 주제를 봐 버리고 나면 본문을 보기가 상당히 수월하다.
그 제목이라든지 본문은 앞의 것을 깨물고 뒤의 것이 점차 순차적으로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씨를 뿌리면 싹이 돋아나고 떡잎을 세우고 줄기가 돋아나고 자라면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다시 텅 빈 나무가 된다. 또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게 된다.
그런 것을 교리쪽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 다른 말로는 교리행과(敎理行果)라고 한다.
수행할 때도 교(敎)라는 가르침에 대해서 이(理) 이해를 하고, 이해를 했으면 실천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행동을 계속 무진장 반복하다 보면 결과물인 깨달음이 도출된다. 자비와 지혜가 체득된다.
십회향에서 회향하는 사람의 인생은 어떠냐?
여보주(如(寶住) : 보주(寶住) 보배와 같이 머무른다. 보배와 같이 살아간다. 그래서
즉명소회선근(卽明所廻善根) : 그것은 곧 뭘 밝히느냐? 소회선근이라. 돌이킨 바의 선근 공덕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보배와 같다.
흔히 인생에서 수행자를 네 가지 보배로 나눈다. 경전에는 우리 가슴 속, 마음에는 네 가지 투명한 마니 보배가 있다고 나온다.
성문 보배는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충분히 아는 마니 보배다.
그것도 아주 보배스러운 것인데, 그것은 월장, 달빛과 같다.
무슨 뜻이냐? 달빛은 서늘하게 해주기 때문에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달빛 같은 인생이다. 성문과 같은 인생이다.
연각은 어떠냐? 일장과 같다. 어떤 이유인가? 지혜롭게 12연기를 꿰뚫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햇빛과 같다. 해의 창고와 같다. 광명장과 같다.
요즘에 보면 국화가 시들었다. 가을이 되면 꽃들이 시들해서 풀이 죽은 듯이 보이는 꽃들이 많다.
보살은 어떤가? 위화(萎華) 시들 위(萎)자 꽃이 시들어 있는 위화보마니(萎華寶摩尼)다.
범부는 어떠냐?
범부는 금방 피어난 꽃처럼 생글생글하게 생생하게 잘난척하며 산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체하면서 산다.
보살은 어떠냐? 다 안다 하더라도 시들한 꽃처럼 산다. 그런 행을 보살행이라고 한다.
마지막에 보배 하나는 부처님의 마니 보배가 있다.
보배 보(寶)자 깨끗할 정(淨)자 보정(寶淨)마니 보배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인생살이를 어른스님은 화중연화라고 했지만, 월장마니보배는 뜨거운 불, 작은 불에만 넣어도 파닥거린다. 조그만 불에 넣어도 파닥거려서 왕소금을 뿌려 놓은 미꾸라지처럼 난리굿이다.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그것을 핑계대고 얍쌉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성문, 월장보배는 불에 집어 넣어 버리면 들어가기 전에도 못 쓰고 플라스틱 칼 같아서 끄집어 내놔도 못쓴다.
조금 근기가 되는 사람들, 연각은 어떠냐?
연각쯤 되면 불에 넣으면 못 쓸 것 같은데, 끄집어내면 조금 쓸만하다. 그러니까 어떤 역경계를 당해서 고통 속에서는 찌그러들지만 또 끄집어 내면 평상시에서는 본심을 되찾는 사람들이 연각 정도 된다.
보살은 어떠냐?
불에 들어가나 불에서 나오나 변함이 없다.
지금 우리가 여기 경전에서 보는 것, 보배처럼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보배를 뜻한다. 들어가나 나오나 상관없이, 불 속에 있을 때나 불 밖에 나올 때나 항상 그 모습을 유지하기는 한다. 그런데 보살 정도의 근기를 가지고는 한 번 되게 인생살이의 쓰디쓴 맛을 보면 수행하는 데 다시 보배를 내리고 생기를 찾는 데 조금 힘에 버거운 것이 있다. 경전에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부처님 같은 입장은 어떠냐?
용광로에 집어넣든지 용광로에서 나오든지 간에 변함이 없다. 들어가서도 불가사의한 기능을 상실하지 않고, 실컷 불에 끄실렀는데도 끄집어 내놔도 변함이 없다.
남한테 실컷 쥐어뜯기고 팔다리 다 짤렸어도 쓸만하다.
왜 그런가? 허공 같기 때문이다. 허공은 불 속에 들어가든지 나오든지 상관없다. 폭풍우가 지나가더라도 허공은 다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다.
이런 표현들이 경전에 있다.
거기 여보주라는 말이 보배처럼 보살은 열 가지 머무른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한번 이해하시기 바란다.
그렇게 보배처럼 머무르는 마음, 정신상태가 된 사람, 보배처럼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냐?
십종여금강심(十種如金剛心) : 금강심이다. 플라스틱은 불에 넣어 버리면 그릇이 되기도 전에 타버리고 없지만, 순금은 불에 넣어서 아무리 불이 희롱하더라도 금그릇으로 되고, 촛대도 되고 병도 되고 병반차천(甁盤釵釧)이라. 목걸이도 되고 귀고리도 된다.
금은 들어가서 불에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더욱더 철썩같은 마음이 된다. 왜 그런가? 보배같은 마음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심이 길러진다. 금강심이 길러지면 어떤가?
즉대원구호(卽大願救護) : 남을 구원하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렇다. 우리 어른 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자리이타가 아니라 보살은 오직 이타행이다.
화엄경에는 그 이타행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타행을 하는 사람은, 자리행이 저절로 수립된다’고 한다.
우리는 불교를 잘못 가르쳐서 자리행을 잘하는 사람이 이타행을 한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범부적인 시각이다.
이타행을 하면 할수록 내 것은 다듬지 않아도, 자리(自利)는 저절로 다듬어져 있다고 한다. 이미 이타행에 들어간 사람은 자리행이 구족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화엄경은 오직 자리이타가 아니라 완전이타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살면서 옆에서 많이 본다. 같이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나 어디 공부를 할 때나 보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금방 느껴진다.
십종발기(十種發起) :그다음 열 가지 발심이 있다. 발기하는 것이 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선근으로 다 착하게 회향하려고 하고, 큰 원력으로 남을 구하려고 하고, 회향하는 바 그 마음씀씀이가 어떤가?
즉회향소위(卽迴向所爲) : 즉회향소위다. 회향소위를 제가 빨간 글씨로 써 놓았다.
구경대사(究竟大事) : 그런 발심으로 완전한 마음이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가 있다. 옹졸한 마음 탐진치로써는 큰일이 안된다.
신심공덕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부지런하게 정진하게 되어 있고, 정진하는 사람은 참회하게 되어 있다. 양심과 체면 쪽에서 참회를 하고 내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은 점점 탐심과 진심과 욕심, 집착과 골내는 일, 삿된 소견머리가 점점 줄어든다. 탐진치가 점점 줄어들면 정신과 몸이 홀가분해진다.
그다음에 오는 것들은 마음이 공평하게 되고, 그 공평한 마음 평등심이 유지되면서 자비심이 일어나고, 자비심이 일어났다면 남 해코지는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그렇게 산다고 하는 것이 경전에서 천친스님이나 원효스님이나 공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도 물론 그렇게 순서대로 되어 있다.
*
그다음에는 불괴회향에 들어가겠지만, 오늘은 우리가 우선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을 자세히 공부한다.
제1번 회향이 아주 중요하다.
회향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1번, 그다음에 6번, 8번 마지막 10번 그렇게 된다.
십지품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1번 6번 8번 10번이 중요하다. 나머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그냥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와 같다면, 1번이나 마지막 종착은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에서 꽉 잡아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야 언덕이 무너지지 않는다.
중간에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롭게 넘어가는 것이 여섯 번째
단계다.
십회향품도 보면 여섯 번째 단계에서 60가지 보시하는 것, 무차보시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는다.
진여상회향이라고 하는 부분, 여덟 번째 단계는 무생법인을 얻는 단계이기 때문에 순풍에 돛단 것과 같다. 이 여덟 번째 단계는 경전의 부동지에서 굉장히 자세히 설명한다.
반야지혜가 갖추어졌을 때, 방편을 넘나드는 아집이 빠진 일곱 번째도 물론 소중하다. 그렇지만 여덟 번째가 일곱 번째의 완성을 보는 것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제 첫번째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 회향에 들어가겠다.
4. 二十九門의 十廻向答
(1)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가. 菩薩의 十種如寶住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有十種如寶住하니 何等이 爲十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悉能往詣無數世界諸如來所하야 瞻覲頂禮하고 承事供養이 是爲第一如寶住요 於不思議諸如來所에聽聞正法하고受持憶念하야 不令忘失하며 分別思惟하야 覺慧增長하야 如是所作이充滿十方이是爲第二如寶住요 於此刹歿하야 餘處現生호대 而於佛法에 無所迷惑이 是爲第三如寶住요 知從一法으로 出一切法하야 而能各各分別演說하나니 以一切法種種義가究竟皆是一義故가是爲第四如寶住요 知厭離煩惱하며 知止息煩惱하며 知防護煩惱하며 知除斷煩惱하며 修菩薩行하야 不證實際하고 究竟到於實際彼岸하며 方便善巧로善學所學하야 令往昔願行으로 皆得成滿호대 身不疲倦이是爲第五如寶住요 知一切衆生의心所分別이皆無處所호대 而亦說有種種方處하며 雖無分別하고 無所造作이나 爲欲調伏一切衆生하야 而有修行하며 而有所作이是爲第六如寶住요
知一切法이 皆同一性하나니 所謂無性이며 無種種性이며 無無量性이며 無可算數性이며 無可稱量性이며 無色無相이며 若一若多를 皆不可得이나 而決定了知此是諸佛法이며 此是菩薩法이며 此是獨覺法이며 此是聲聞法이며 此是凡夫法이며 此是善法이며 此是不善法이며 此是世間法이며 此是出世間法이며 此是過失法이며 此是無過失法이며 此是有漏法이며 此是無漏法이며 乃至此是有爲法이며 此是無爲法이 是爲第七如寶住요 菩薩摩訶薩이 求佛不可得이며 求菩薩不可得이며 求法不可得이며 求衆生不可得이나 而亦不捨調伏衆生하야 令於諸法에 成正覺願하나니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善巧觀察하야 知一切衆生分別하며 知一切衆生境界하며 方便化導하야令得涅槃하며 爲欲滿足化衆生願하야 熾然修行菩薩行故가是爲第八如寶住요 菩薩摩訶薩이 知善巧說法하며 示現涅槃하야 爲度衆生한 所有方便이 一切皆是心想建立이라 非是顚倒며 亦非虛誑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了知一切諸法이 三世平等하야 如如不動하며 實際無住하야 不見有一衆生도 已受化와 今受化와 當受化하며 亦自了知無所修行하야 無有少法도 若生若滅을 而可得者나 而依於一切法하야 令所願不空이是爲第九如寶住요 菩薩摩訶薩이 於不思議無量諸佛의 一一佛所에 聞不可說不可說授記法의 名號各異와 劫數不同호대 從於一劫으로 乃至不可說不可說劫토록 常如是聞이라도 聞已修行하야 不驚不怖하며 不迷不惑하나니라 知如來智의 不思議故며 如來授記가 言無二故며 自身行願의 殊勝力故며 隨應受化하야 令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야 滿等法界一切願故가 是爲第十如寶住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十種如寶住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諸佛無上大智慧寶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열 가지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무수한 세계의 모든 부처님 계신 데마다 나아가서 뵈옵고 정례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나니, 이것이 첫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부사의한 모든 여래의 계신 데서 바른 법을 듣고 받아 지니고 기억하여 잊지 않게 하며, 분별하여 생각하고 깨닫는 지혜가 증장하며, 이와 같이 하는 일이 시방에 가득하나니, 이것이 둘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이 세계에서 죽어서 다른 곳에 태어나면서도 부처님의 법에 미혹함이 없나니, 이것이 셋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한 법으로부터 모든 법이 나오는 줄을 알고서 각각 분별하여 연설함은 모든 법의 갖가지 뜻이 구경에는 한 가지 뜻인 연고이니, 이것이 넷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번뇌를 싫어하여 떠날 줄 알고, 번뇌를 쉴 줄 알고, 번뇌를 막아 보호할 줄 알고, 번뇌를 끊을 줄 알고서 보살의 행을 닦되 진실한 경계를 증득하지 않지마는 구경에 실제인 저 언덕에 이르며, 교묘한 방편으로 배울 것을 잘 배우며, 옛적의 원과 행을 다 만족케 하되 몸은 고달프지 않나니, 이것이 다섯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일체 중생의 마음으로 분별함이 모두 처소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또한 갖가지 처소를 말하며, 비록 분별이 없고 짓는 일이 없지마는 일체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수행함도 있고 짓는 일도 있나니, 이것이 여섯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모든 법이 다 동일한 성품임을 아나니, 이른바 성품이 없으며 여러 가지 성품이 없으며, 한량없는 성품이 없으며, 셀만한 성품이 없으며, 헤아릴 만한 성품이 없으며, 물질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하나다 여럿이다 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나 이것은 모든 불법이며, 이것은 보살법이며, 이것은 독각법이며, 이것은 성문법이며, 이것은 범부법이며, 이것은 착한 법이며, 이것은 착하지 않은 법이며, 이것은 세간법이며, 이것은 출세간법이며, 이것은 잘못된 법이며, 이것은 잘못되지 않은 법이며, 이것은 새는 법이며, 이것은 새지 않는 법이며, 내지 이것은 함이 있는 법이며, 이것은 함이 없는 법인 줄을 결정코 아나니, 이것이 일곱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을 구하여 얻을 수 없고, 보살을 구하여 얻을 수 없고, 법을 구하여 얻을 수 없고, 중생을 구하여 얻을 수 없지만 그래도 중생을 조복해서 모든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려는 서원을 버리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교묘하게 관찰하여 일체중생의 분별을 알고, 일체 중생의 경계를 알고, 방편으로 교화하여 열반을 얻게 하며, 중생을 교화하려는 소원을 만족하기 위하여 치성하게 보살의 행을 닦는 연고이니, 이것이 여덟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보살마하살이 교묘하게 법을 말하며 열반을 나타냄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체가 모두 생각으로 건립한 것이요, 뒤바뀜도 아니고 또한 헛되게 속임도 아님을 아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일체 모든 법이 세 세상에 평등하고 여여(如如)하여 동요하지 않고 진실한 경계라 머무름이 없어서 한 중생도 이미 교화를 받았거나, 지금 교화를 받거나, 장차 교화를 받을 것을 보지 못함을 아느니라.
또 닦을 행도 없고 조그만 법도 나거나 없어지거나 하여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스스로 알지마는 그러나 모든 법을 의지하여 소원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나니, 이것이 아홉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보살마하살이 헤아릴 수 없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낱낱 계신 곳마다에서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수기 주는 법의 이름이 각각 다르고 겁의 수효도 같지 아니함을 듣느니라. 한 겁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에 이르도록 항상 이와 같이 듣고, 듣고는 닦아 행하여 놀라지 않고, 두렵지 않고, 아득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느니라.
여래의 지혜가 부사의함을 아는 연고며, 여래의 수기라는 말이 둘이 없는 연고며, 자신의 행과 원의 수승한 힘인 연고며, 마땅함을 따라 교화를 받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법계의 평등한 모든 서원을 만족케 하려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열 가지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큰 지혜의 보배를 얻느니라.”
*
이십구문(二十九門)의 십회향답(十廻向答)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
보살(菩薩)의 십종여보주(十種如寶住)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유십종여보주(有十種如寶住)하니 : 열 가지 머무름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인가.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실능왕예무수세계제여래소(悉能往詣無數世界諸如來所)하야: 무수한 세계에 부처님 계신 데마다 나아가서 뵈옵고
첨근정례(瞻覲頂禮)하고 :첨근하고 정례하고
승사공양(承事供養)이 :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나니
시위제일여보주(是爲第一如寶住)요: 이것을 제일 첫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라.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부처님 계신 데,
많은 부처님, 일불 이불 삼불 사불 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 천만불소하듯이
*
어부사의제여래소(於不思議諸如來所)에: 부사의한 여래 부처님들께서 계시는 데서
청문정법(聽聞正法)하고 : 정법을 듣고, 첫째는 불, 그다음에 법, 이렇게 순서대로 나간다. 경전의 원리는 딱 그렇게 되어 있다.
수지억념(受持憶念)하야 : 법을 듣고는 반드시
불령망실(不令忘失)하며 : 백골난망이라. 뼈에 가슴속에 명심해서 새겨야 된다. 실천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새기게 되어 있다. 부사의한 여래들이 계신 데서 바른 법을 듣고 받들어 지니고 불령망실이라. 하여금 망실하지 않게 하고
분별사유(分別思惟)하야 : 아주 지혜롭게 분별해서 깊이 사유하고
각혜증장(覺慧增長)하야 : 깨닫는 지혜가 증장되어서
여시소작(如是所作)이 : 보는 것, 아는 것이 남다르다.
충만시방(充滿十方)이 : 이와 같이 하는 일이 시방에 가득하나니
시위제이여보주(是爲第二如寶住)요 : 이것이 둘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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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찰몰(於此刹歿)하야 : 이 세계에서 죽어서 다른 곳에 태어나면서도
여처현생(餘處現生)호대 : 어느 곳에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천당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이어불법( 而於佛法)에 : 부처님 법에
무소미혹(無所迷惑)이 : 미혹함이 없나니
시위제삼여보주(是爲第三如寶住)요 : 이것이 셋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밤이 되든 낮이 되든 자유자재하게 수생한다. 축생이 되어도 영리하게 살고 어디를 가나 정법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만 바뀌면 홀딱 까먹어 버린다.
*
지종일법(知從一法)으로 : 한 법으로부터
출일체법(出一切法)하야 : 모든 법이 나오는 줄을 알고.
‘한 법으로부터’ 이것을 갖다가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하는가? 종체기용(從體起用)이라고 한다. 본체는 다 일상이 무상인데, 한 상, 무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
모양 없는 데서부터 다 나왔다.
조금 전에 노스님하고 저 방에 앉아서 “하나도 없으니까 다 있지요?” 농담하면서 USB에 있는 어른 스님의 전집을 옮겨드렸다.
“한 개 가지고 무한정 나눠줘도 줄어드는 게 없지요?”
그러면서 핸드폰이나 아이패드에도 한참 옮겼다.
그런 일들이 참 재미있다.
저는 이렇게 경전연구회 스님네들 모시고 같이 공부하면서 제가 강의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연세가 87세이신 스님이 와서 앉아서 공부를 하신다’는 것은 배우시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각성하도록 일깨워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저는 팔십 일곱 될 때까지 강의할 자신은 없다.
황룡원에서 강의할 때는 93세 된 노스님이 오셔서 가만 앉아서 강의들으시고는 “니 공부 안 하면 알지?” 이러셨다.
그러면 드릴 말씀이 없다.
홍시도 가만히 있는데 땡감이 꺼떡거린다는 말이 있다.
땡감은 곶감도 안 된다.
우리 같이 아직 새파란 사람들은, 여기서 문자 쫄쫄쫄쫄 하고 이런 것을 저는 중강이라고 한다. 버금 중(仲)자. 중강(仲講)이고, 강의는 오셔서 각자가 다 하시는 것이다.
그 먼거리에서 전라도 해남에서 오시고 서울에서도 오시고, 진주 세종, 심지어 강원도에서도 한달에 한번씩 오셔서 공부를 하신다.
각자 자기의 중심이 서 있으면 ‘한 법에서 일체법이 나왔다’ 이 한구절만 가지고도 오늘 화엄경이 넉넉하다.
이능각각분별연설(而能各各分別演說)하나니 : 그러나 각각 분별연설하니 그렇게 일체법이 나와서 그렇게 능히 각각으로 분별하고 연설한다. 밀가루 하나만 하더라도 하나의 밀가루로 짜장 만들었다가 우동 만들었다가 라면 만들고 빵 만들고 찐빵 만들고 카스테라 만들고 갖가지로 만들듯이
이일체법종종의(以一切法種種義)가 : 일체법의 갖가지 뜻이
구경개시일의고(究竟皆是一義故)가 :필경, 구경에는 전부 한 뜻이다.
그 뜻이 뭐냐? 진공(眞空)이다. 진여(眞如)다 무상(無相)이다. 그래서 금강경 같은 데는 이런 구절을 뭐라고 했는가?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32상 80종호가 각각이 다 찬란하다 하더라도 개시허망한 것이다. 다 뻥이다.
화엄경에서 그런 구절을 의상스님께서는 어떻게 해놓으셨는가? 무명무상절일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라고 해놨다.
모양이 있어야 어디 걸릴 텐데 ‘1도 없는데 3 4 5 6 7이 어딨겠노’ 이렇게 해놓았다.
그렇지만 갖가지 법을 출생한다.
화엄경은 어떻게 하는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그러나 모든 인연을 따라가지만 한 번도 따라간 적이 없다.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로다’라고 해놓았다.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로다. 왜그런가?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차 있는가? 텅 비었으므로 꽉 차 있다.
불신(佛身)은 충만어법계(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로다.
묘보리좌(妙菩提座) 승장엄(勝莊嚴) 제불좌이성정각(諸佛坐已) 이로다.
여기 종종이라는 뜻은 인연을 따라간다는 말이고 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생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법의 갖가지 뜻이 필경에는 한 가지 뜻인 연고니 일상도 무상이라.
시위제사여보주(是爲第四如寶住)요 : 이것이 네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체기용(從體起用) 섭용귀체(攝用歸體)다.
안이비설신의가 있다. 종종의 갖가지의 뜻이 있다. 그러나 안이비설신의가 일심에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손오공이 오만 재주를 부리고 천변만변 천 가지 만 가지 재주를 부리고 날아가도 부처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가 없고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더라. 일심자리에서 놀고 있더라.
그런 것을 뭐라고 하는가? 섭용귀체라고 한다.
신심명에도 그 대목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
다섯 번째 넘어간다.
지염리번뇌(知厭離煩惱)하며 : 번뇌를 싫어하며 떠날 줄 알고
지지식번뇌(知止息煩惱)하며 : 번뇌를 쉴 줄도 알고
지방호번뇌(知防護煩惱)하며 : 번뇌를 막아 보호할 줄도 알고
지제단번뇌(知除斷煩惱)하며: 번뇌를 끊을 줄도 알고 여기서 염(厭) 식(息) 방호(防護) 제단(除斷) 이런 것들은 전래적으로 순서를 그냥 막 써놓은 것이 아니다.
싫어하다 보면 떨어지게 된다.
떨어지다 보면, 싫어하다 보면, 쉬게 된다.
순서가 쉬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어떤 것부터 하는가?
어떤 사람이 담배를 끊고 싶다. 담배를 끊으려면 담배를 좋아하는 생각을 내야 되겠는가? 계속 담배를 피우면 암덩어리가 생긴다고 싫어하는 생각을 계속 하다 보면 어떤가?
점점 끊어지고, 끊어지다 보면 나중에 담배는 없어지잖는가?
술 끊어야지 하면서 맨날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언제 끊는가? 못 끊는다. 뭐든지 그렇다. 사람이든지 번뇌든지 끊으려면 일단은 싫어해야 된다. 싫어하면 떨어진다. 이(離) 떨어지고 나면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 무(無)다. 경전에도 그렇게 해 놓았다.
그러면 염, 식, 하고 난 뒤에 방호는 뭐냐?
실컷 쉰 뒤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젠가 쳐들어올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방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염,식은 정진이라고 하고, 방호,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불방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정진은 뭐냐?
착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쉬는 것을 이야기하고, 불방일이란 악한 것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다.
약을 먹으면서 덧나지 않도록 상처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해놓았다.
그래서 염식이라고 하는 것은 십회향 정도다. 유식으로 보면 자량위(資糧位)라고 한다.
방호(防護) 번뇌를 막는다 하는 것은 우리 몸의 횡경막쯤 된다. 십회향 보살이 십지보살로 올라가기 전에 하복부와 상복부 위장 있는 데 잘려서 횡경막이 있는 것처럼 횡경막 같은 것을 방호라고 한다.
제단(除斷)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개공을 뜻하는 것인데 번뇌를 끊을 줄 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도를 아는 겸도의 입장에서 정심지(淨心地) 마음이 지극히 맑아졌을 때 끊을 줄 아는 것이다. 아무나 보고 ‘마약 끊어라’해서 마약이 끊어질 리 없다. 마약을 끊으려면 일단은 가둬서 구속시켜 버린다. 그래 놓고 나서 여기도 나온다. 그다음에는
수보살행(修菩薩行)하야 : 수보살행하야. 번뇌를 끊을 줄 알고서 보살행을 닦되, 보살행을 닦지만
부증실제(不證實際)하고 :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의상스님의 제자인 표훈스님의 서원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절대 열반에 들지 않겠다. 불입어열반이라. 나는 열반에 안 들어간다’
표훈스님은 금강산에 표훈사 절도 짓고, 범어사 주지도 하셨고 불국사 주지도 하셨다.
의상스님의 고족(高族)상좌로서 신라 왕자 출신 아닌가.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나는 절대 열반에 들지 않겠다’ 화엄경의 주제는 그 의미다.
그럼 어디 가노?
오탁악세에 들어가겠다. 그것도 서입탁악세(誓入濁惡世)라. 맹세컨대 나는 오탁악세에 중생들이 있는 저 자리에 가겠다.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들 때문에 ‘극락 안 가고 나는 지옥간다’고 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내 혼자 극락 안 간다. 저 중생들이 성불할 때까지 나는 사바에서 머문다. 내 성불을 미룬다’ 라고 수미산 꼭대기에서 외쳤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좋아한다.
화엄경의 바로 이 구절이다.
보살행을 닦지만 절대 부증실제라.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이다.
실제라고 하는 것은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시간과 공간이 다 끊어진 니르바나다. 시공이 없으면 인연이 침탈하지 못하는 열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다.
실제라고 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무상무념 무념무상절일체 염도염궁무념처가 바로 실제가 아닌가. 실제의 공간, 실제의 시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구경도어실제피안(究竟到於實際彼岸)하며: 진실한 경계를 증득하지 아니하면 필경에 실제인 저 언덕에 이른다.
구경도어실제피안 얍삽한 깨달음 정도로 깨쳤다고 하지 않는다.
방편선교(方便善巧)로 : 아주 훌륭한 방편선교로써
선학소학(善學所學)하야 :배울 것을 잘 배우고, 배울 바를 배우고
영왕석원행(令往昔願行)으로 : 옛적의 원과 행으로
개득성만(皆得成滿)호대 : 모두 다 만족하게 하되
신불피권(身不疲倦)이 : 몸이 고달프지 않나니
시이제오여보주(是爲第五如寶住)요 : 이것이 제 다섯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
지일체중생(知一切衆生)의 : 또 무엇을 아느냐. 일체중생이
심소분별(心所分別)이 : 마음에 분별하는 바가
개무처소(皆無處所)호대 : 개무처소라. 마음에 분별하는 것이 모두 유식인 줄 안다. 오직 뇌피셜, 유식일 뿐, 지 생각일 뿐이다. 전부 꿈과 같은 것일 뿐이지 실제로 꿈속에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 모두 처소가 없는 줄 알면서도, 꿈속에서 무슨 장소가 있겠는가. 꿈속에서 무슨 시간이 있겠는가. 마음에 분별하는 것이 본래 허망한 것이다.
이역설유종종방처(而亦說有種種方處)하며 : 그렇지만,그걸 알지만 이(而) 그러나, 또한 설유종종방처라. 갖가지 처소를 말한다.
수무분별(雖無分別)하고 : 비록 분별이 없고
무소조작(無所造作)이나 : 짓는 일이 없지마는 그러나
위욕조복일체중생(爲欲調伏一切衆生)하야 : 일체 중생을 조복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주먹질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간절하게도 하고 애절하게도 하고 부드럽게도 하고 잡스럽게도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다른 말로는 비지쌍행(悲智雙行)이라. 자비와 지혜를 겸비한다. 지혜롭게 자비롭게.
잡된 사람한테는 같이 잡스럽게 해서 제도해야 한다.
이유수행(而有修行)하며: 그렇게 수행하고
이유소작(而有所作)이 : 짓는 바도 있나니
시위제육여보주(是爲第六如寶住)요 : 이것이 제 여섯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다.
*
그다음에 일곱 번째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모든 법이
개동일성(皆同一性)하나니: 동일한 성품을 아나니, 성품과 모양이 무애자재한 것을 이제 제대로 안다는 것이다.
소위무성(所謂無性)이며 : 소위무성이며
무종종성(無種種性)이며 : 무종종성이며 여러 가지의 성품도 없고 무성인 줄도 알고
무무량성(無無量性)이며 : 한량없는 성품도 없다. 본래 없다는 것이다.
무가산수성(無可算數性)이며 : 셀 만한 성품이 없으며
무가칭량성(無可稱量性)이며 : 헤아릴만한 성품도 없고
무색무상(無色無相)이며 : 빛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약일약다(若一若多)를 : 하나다 여럿이다 하는 것을
개불가득(皆不可得)이나 : 개불가득이다. 이무소득고다. 불가득이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요 동서남북이 전부 불가득이지만 얻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
이결정요지차시제불법(而決定了知此是諸佛法)이며: 결정적으로 확실히 분명하게 안다. 이것이 불법이며
차시보살법(此是菩薩法)이며: 이것이 보살법이고
차시독각법(此是獨覺法)이며: 이것이 독각법이고
차시성문법(此是聲聞法)이며: 이것이 성문법이고
차시범부법(此是凡夫法)이며 : 이것이 범부의 법이며
차시선법(此是善法)이며 : 이것이 착한 법이고
차시불선법(此是不善法)이며 : 이것이 착하지 않은 법이며
차시세간법(此是世間法)이며 : 이것이 세간법이며
차시출세간법(此是出世間法)이며: 이것이 출세간법이며
차시과실법(此是過失法)이며 : 이것이 허물이 있는 잘못된 법이고
차시무과실법(此是無過失法)이며 : 이것이 무과실법이다. 잘못되지 않은 법이며
차시유루법(此是有漏法)이며 : 이것이 새는 법이고
차시무루법(此是無漏法)이며 : 이것이 새지 않는 법이며
내지차시유위법(乃至此是有爲法)이며 : 내지는 차시 유위법이며, 여기서는 아만이 빠졌을 때, 집착이 없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아만이 주로 빠지기 시작할 때, 종기의 핵이 흔들흔들해서 빠지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날 것이다.
아집이 있으면 유루법에 딱 붙어서 고집하고, 무루법에 딱 붙어서 고집할 것이다. 세간법이나 출세간 법에 ‘니가 옳다, 내가 옳다’ 그럴텐데, 이것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양변을 다 여의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차시무위법(此是無爲法)이 : 이것이 차시무위법이 유위법이다 무위법인 줄 분명히 아나니,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의심없이 아나니
시위제칠여보주(是爲第七如寶住)요 :이것이 일곱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다.
*
여덟 번째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구불불가득(求佛不可得)이며 : 부처를 구하되 가히 얻을 수도 없고.
이것이 금강경에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나온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 법이 있느냐? 유소득법부(有所得法不)아?’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있느냐? 유소설법야(有所說法耶)아’
이렇게 나오지 않는가. 금강경 말씀이다.
금강경에 견주어 보면 이것이 금방 이해가 간다.
써보겠다.
‘무득지득(無得之得)이다. 얻을 바 없는 것을 얻는다.’
원효스님께서는 무득지득을 ‘무리지(無理之)가 지리(至理)다’
이치 없는 것이 지극한 이치요 ‘불연지(不然之)가 대연(大然)이다’ 그러하지 않은 것이 정말 그러하다, 이렇게 해놓으셨다.
기신론 별기 서문부터 기신론 소의 서문에, 또 금강삼매경론에 이르기까지 원효스님의 주제는 무리지가 지리다.
피카소 같은 사람들은 응용하면서 ‘무기교가 기교다’라고 해놓았다.
바둑두는 사람들은 그런다. 수학이라든지 정석 공식을 다 알고 나면 그다음에는 변화 통일 균형이다.
그림 그릴 때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완전히 자기가 익숙해진 사람은 그다음부터는 자기의 솜씨를 발한다.
요 대목이 그런 대목이다. 부처를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구보살불가득(求菩薩不可得)이며 : 보살을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구법불가득(求法不可得)이며 : 법을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구중생불가득(求衆生不可得)이나 : 중생을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다.
육조스님은 딱 잘라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다’라고 했다.
영가 현각스님은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라’고 했다.
진짜 부처도 구하지도 않고 망상 중생도 구하지 아니한다.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번뇌가 즉불성이고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구할 수 없지만 부처도 중생도 본래 없지만
이역불사조복중생(而亦不捨調伏衆生)하야 : 그래도 불사 버리지 않는다. 중생도 없지만 조복중생하야 그들을
영어제법(令於諸法)에 : 모든 법에서
성정각원(成正覺願)하나니 : 정법을 얻게 하고 부처를 이루게도 한다. 중생을 조복시켜서 모든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서원을 버리지 않느니라.
이 대목을 자세히 보려면 화엄경 37권 십지품의 원행지에 보면 정말 자세하게 나온다.
우리가 어릴 때 강원에서 배울 때 서장에서 대혜 종고스님께서 행장을 써놓은 것을 보면 ‘칠지보살(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활연대오하고 앙굴리마라가 산모를 구하는 화두가 타파되어버렸다.
이렇게 서장(書狀)에 자세히 써 놓았다.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 간화선 화두를 주창하셨는데 그 스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책이 화엄경이었던가 보다.
‘호구사(虎丘寺)에서 하안거를 지내면서 열화엄(閱華嚴)이다가’ 화엄경을 보시다가 ‘칠지보살(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라고 나온다.
무생법인이 무엇인가? 방금 이것처럼, 얻을 바가 없지만 장엄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도 똑같이 해놓았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로’ 보살은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얻을 바가 없는 까닭으로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 라고 하였다. 무득지득이라.
*
하이고(何以故)오 : 무슨 까닭이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선교관찰(善巧觀察)하야 : 교묘하게 관찰하여
지일체중생분별(知一切衆生分別)하며 :일체중생의 분별을 알고
지일체중생경계( 知一切衆生境界)하며 :일체중생의 경계를 알고
방편화도(方便化導)하야 : 잘 알맞은 방편으로 교화해서,
피부병약을 쓸 때는 연고도 발라야 하지만 더 심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좀이 되게 심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약을 먹어야 된다. 약 먹고 레이저로 수술하고 지지고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방편화도다.
예를 들어서 피부병약을 쓰려면 약사가 약을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 아무거나 먹으라고 했다가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속병이 더 난다.
여기서 방편화도라고 하는 것은 ‘완전 선지식이 되었구나’ 이 말씀이다. 방편화도하야
영득열반(令得涅槃)하며 : 열반을 얻게 하며, 남들이 불교에 대해서 물으면 정확하게 그 사람의 근기를 보고 ‘요거 하세요’‘저거 하세요’ 딱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내 법랍이 얼마 됐습니다’ 이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내가 아상(我相) 안 피우고 정확하게, 모르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금강경 보세요. 화엄경 몇 권 보세요.”
우리처럼 자신이 없으면 그것만 말해준다.
“약국에 한 번 가보세요.” “그 약 한 번 먹어보세요.”
안 그렇겠는가? 약만 소개시켜 주면 되지, 되도 안 하는 게 “이리와보세요.” 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부산 온천장에는 간첩침쟁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이제 돌아가셨을 텐데 간첩침쟁이라고 하면 부산 계신 스님들은 다 알 것이다. 우리 어릴 때 거기서 침을 많이 맞았다. 저도 운동하다가 발목을 다쳐서 몇 번 침을 맞았더니 금방 나았다. 어릴 때 발목을 삐어서 가면 그분은 침 서너 대만 놓으면 다 나았는데 저도 흉내내어서 바늘을 갖고서 누가 아프다고 오면 “대보이소.”하고 침을 놓아선 안 된다.
그런데 팔 밑이나 관절 밑, 무릎 밑으로는 아무 데나 침을 찔러도 엔간하면 사람이 잘 안 다친다. 별로 급소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시지는 마라.
위욕만족화중생원(爲欲滿足化衆生願)하야 : 중생을 교화하려는 서원을 만족하게 하기위하여
치연수행보살행고(熾然修行菩薩行故)가 : 치성하게 보살의 행을 닦는 연고다. 아주 치열하게 보살의 행을 닦는 연고다. 치열하게. 완전히 불꽃 같은 삶이다.
시위제팔여보주(是爲第八如寶住)요 :이것이 여덟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이때는 순풍에 돛단 듯이 간다.
자기가 노저어서 의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가는 대로, 인연이 오는 대로 그렇게 사는 삶이라서 치열하게 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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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지선교설법(知善巧說法)하며 : 교묘하게 법을 말한다. 선교설법이라. 법을 잘 말하고
시현열반(示現涅槃)하야 : 열반을 나타내는 것은
위도중생(爲度衆生)한 :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유방편(所有方便)이 : 소유방편이
일체개시심상건립(一切皆是心想建立)이라 :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건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공을 관할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공으로 관할 수 있는 사람은 원력이 저절로 원만해지고 이루어진다. 마음이 건립되는 것이다.
비시전도(非是顚倒)며 : 뒤바뀌는 것도 아니고
역비허광(亦非虛誑)하나니 : 허망한 것도 아니나니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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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요지일체제법(了知一切諸法)이 : 모든 법이
삼세평등(三世平等)하야 : 삼세가 평등하야.
장수자선(長水子璿) 선사가 능엄경을 요약하면서 그렇게 해놨다. 요달삼세(了達三世) 실공적(悉空寂)이라고 하는 화엄경 십회향품에 나오는 말씀이지만, ‘삼제구심(三際求尋)에 심불유(心不有)라’ 과거 현재 미래 삼제(三際)에 구심(求尋) 마음을 구해도 심불유(心不有)라 마음은 있지 않다.
진짜 마음은 있지 않더라. 진짜도 없는데 가짜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삼제구심(三際求尋)에 심불유(心不有)라. 우리는 유식이라고 하는 망상을 가지고 산다.
형악혜사(衡岳惠思)선사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삼제구심에 심불유요, 심이 불유고로 진짜 마음에 있지 않기 때문에 결택진망(決擇眞妄) 이위밀인(以爲密印)이다. 능엄경 1번 과판에 그렇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묻는다.
“니가 왜 출가했느냐? 왜 홀딱 벗고 설치고 야단이야.”
“제가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은 욕기추택해서 낳으신 것이 아니라 정말 유리알처럼 투명하시고 그래서 부처님은 모습이 보기가 좋고 제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경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출가했습니다.”
“그래? 니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니가 내 모습을 아름답다고 보는데 니 보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부처님이 묻는다.
그러자 아난존자가 오만 데를 이야기한다.
“그건 망상이고 진짜 마음 이야기 해 봐. 니가 잔머리 굴려서 이야기하는 것 말고 마음을 얘기하라니까?”
그래도 아난존자가 자꾸 생각을 말하니까
“생각 말고 마음을 얘기해라. 마음 얘기해라.”
재내(在內), 재외(在外), 잠근(潛根), 장암(藏暗), 수합(隨合), 중간(中間), 무착(無着)의 이 일곱 가지 칠처징심(七處徵心)에서 아난존자가 결국 진심을 못 밝힌다.
그러다가 사약장(四若章)에 넘어가서도 못 밝히고 명암(明暗) 통색(通塞) 연공 울청 여덟 가지 팔환변견(八還辨見)에 가서도 진짜 마음은 못 밝혔다.
그런 대목을 장수 자선선사는 ‘삼제(三際) 구심(求尋)에 심(心)은 불유(不有)라’ 어디에 찾아봐도 과거 현재 미래 마음은 없더라. 심이 불유고라.
진짜 마음이 없는 까닭에 ‘망원무(妄原無)라’ 망상도 있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 없는데 손자가 어디 있겠느냐. 망원무라.
단군도 없는데 그 자손들이 어디 있겠느냐.
씨앗도 없는데 그 나무나 잎사귀들이 어디에 있겠느냐.
심불유고로 망원무라. 망상이 원래 없구나. 본래 무일물이구나. 망상도 없고 진심도 없구나.
‘망심무처(妄心無處)가 즉보리(卽菩提)라’ 허망한 생각이 없는 그 자리가 니 본래 그 자리다. 망심무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래서 생사와 생멸과 열반이 불생불멸이 본평등이라.
본래 둘다 무게가 똑같은 것이다.
옛날 허공이나 지금 허공이나 달아보면 무게가 똑같다. 길이도 똑같고 넓이도 똑같다.
왜냐하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장수 자선선사는 그렇게 통렬하게 하고, 원효스님의 의견을 받들어서 현수법장 화엄의 대종장의 기신론 현수소 필삭기(筆削記)를 한 스무 권 썼다.
우리 강원에 있을 때 필삭기 보신 바로 그분이다.
의상스님께서는 생사열반상공화라고 했지만 장수 자선선사는 생사열반이 본평등이라.
여기 평등 나왔잖은가.
삼세가 평등하다는 말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어야 조금도 안 기울고 딱 평등하다.
평등한 것, 공평한 것은 본래 없는 거나 공평하지 있는 것은 평등할 수가 없다.
니 꿈이나 내 꿈이나 똑같은 것은 꿈이 없기 때문에 똑같을 수밖에 없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하며 : 진여와 같아서 동요하지도 않고
실제무주(實際無住)하야 : 구래부동명위불이라. 실제무주라. 무주이주라. 머무름 없이 머문다. 진실한 경계란 머무름이 없으며, 이 대목을 읽으니까 너무 신심이 나서 빨리 마쳐야되겠다.
불견유일중생(不見有一衆生)도 : 한 중생도
이수화(已受化)와 :. 교화를 받았다거나
영수화(今受化)와 : 지금 교화를 받는다거나
당수화(當受化)하며 : 앞으로 교화를 받을 것을 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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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요지무소수행(亦自了知無所修行)하야 : 또 닦을 행도 없고
무유소법(無有少法)도 : 무유소법이다.
사실 화엄경의 이런 구절은 거의 선어록 몇 배 이상의 핵폭탄 같은 구절이다.
여기서 이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았으면 남들하고 인간의 세상을 사는 것이다.
화엄경은 부처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의 요지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다운 것이다.
어른스님 말씀하시는 인불사상(人佛思想), 가장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무유소법도 조그마한 한 법도 없다. 뭐가?
약생약멸(若生若滅)을 : 약생약멸, 생멸이 없고
이가득자(而可得者)나 :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알지마는
이의어일체법(而依於一切法)하야 : 그러나 모든 법에 의지해서 색성향미촉법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영소원불공(令所願不空)이 : 소원하는 것이 공하지 않게 하나니
시위제구여보주(是爲第九如寶住)요 :이것이 제 아홉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뜻에 대해서도 잘 알고 방편에 말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그렇지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이것이 아홉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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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어부사의무량제불(於不思議無量諸佛)의 : 헤아릴 수 없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계신
일일불소(一一佛所)에 : 낱낱 부처님 처소마다
문불가설불가설수기법(聞不可說不可說授記法)의 : 불가설 불가설 수기법의
명호각이(名號各異)와 : 명호의 각기 다름과
겁수부동(劫數不同)호대 : 겁수의 부동과, 어떤 부처님의 이름이 무엇이고 명호가 무엇이고 어떤 부처님은 얼마나 긴 세월 중생을 제도했는지 겁수가 다 같지는 않지만
종어일겁(從於一劫)으로 : 일겁으로
내지불가설불가설겁(乃至不可說不可說劫)토록 :내지는 불가설 불가설 겁에
상여시문(常如是聞)이라도 : 이르도록 항상 이렇게 들으며
문이수행(聞已修行)하야 : 문이수행하여 문사수라고 한다. 듣고는 사유하고 수행하고 듣고는 닦아 행하고
불경불포(不驚不怖)하며 : 그런 법이 있더라도 놀라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불미불혹(不迷不惑)하나니라 :불미불혹이라. 아득하지도 않고 의혹하지도 않나니
지여래지(知如來智)의 : 여기서부터는 성취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여래 지혜가
부사의고(不思議故)며 : 부사의한 까닭이며
여래수기(如來授記)가 : 여래 수기라는
언무이고(言無二故)며 : 말이 둘이 없는 연고이고, 한번 말했으면 똑같다는 것이다.
자신행원(自身行願)의 : 자기의 행과 원이
수승력고(殊勝力故)며 : 수승한 힘인 연고이고
수응수화(隨應受化)하야 : 마땅히 교화를 받아서
영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令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해서
만등법계일체원고(滿等法界一切願故)가 : 법계에 평등한 모든 서원을 만족하게 하는 연고이니라
시위제십여실주(是爲第十如寶住)니라 : 이것이 제 열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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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보살마하살의
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십종여보주(十種如寶住)니 : 열 가지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 있으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제불무상대지혜보(則得諸佛無上大智慧寶)니라: 그 자리에서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대지혜의 보배를 얻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