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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山 정원규님의『법화경 강설(불광출판사), 초판 1쇄』, 이건 아니다(03)

작성자나성거사|작성시간24.09.07|조회수31 목록 댓글 0

覺山 정원규님의『법화경 강설(불광출판사), 초판 1쇄』, 이건 아니다(03)

 

“舍利弗 諸佛隨宜說法 意趣難解

所以者何 我以無數方便 種種因緣 譬喩言辭 演說諸法

是法 非思量分別之所能解 唯有諸佛 乃能知之

所以者何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舍利弗 云何名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諸佛世尊 欲令衆生 開佛知見 使得淸淨故 出現於世

欲示衆生 佛之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悟佛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入佛知見道故 出現於世

舍利弗 是爲諸佛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方便品 第 2)

 

●이 경문에 대한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께서 근기에 따라 설하는 법은 그 도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 때문인가? 나는 무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로써 모든 법을

연설하였기 때문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 세존은

오직 하나의 큰일의 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시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제불세존은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하는가?

제불세존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 지견의 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신다.

사리불이여, 이 모든 부처님께서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다.

 

* * * * * * * *

 

★문제의 경문: 是法 非思量分別之所能解 唯有諸佛 乃能知之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번역서(일본어, 영어 번역 포함)는 마치 한곳에 모여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꼭 같이 이 구절을 잘못 번역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기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하나하나 살펴본다.

 

먼저, <是法>은 어떤 법을 말하는가? 마땅한 이치에 따라 설하는 법, 그것의 취지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법, 즉 <隨宜說法>을 말한다.

바로 이 수의설법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무수한 방편,

온갖 인연, 비유, 언사를 이용하여 설법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또 <非思量分別之所能解>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일류대학에서 강의하는 학과목을

전부 이수하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수많은 석박사학위를 취득해도 <是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 <唯有諸佛 乃能知之>은 우리가 수의설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모름지기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야만(그래서 직접

가르쳐야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오로지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 몸소 가르쳐야 수의설법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다, 는

말씀이다.

시중의 모든 번역서처럼, 또 覺山 정원규님처럼 이 경문 <唯有諸佛 乃能知之>를

<부처만 그것을 알 수 있다>라고 번역한다면,

첫째, 경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 부처님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중생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 외 어떤 의미도 없게 된다.

 

부처님이 당신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과시하려고 이 세상에 출현하셨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여기서 <唯有>는 <오로지 모습을 드러낸다>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들과 살을

맞대며 그들을 가르친다는 뜻까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중생들이 이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乃能知之>에서 <乃>는 <~에 다다른다, 이른다>는 뜻이므로 이 경문의 정확한 번역은

<(중생들이)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가 된다.

다시 말해, 오로지 부처님이 계셔야만(모습을 드러내야만) (중생들이)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는 말이다.

 

중생과 부처의 만남은 <一大事因緣>이라는 거창한 말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길지도 않은 경문에서 <一大事因緣>이라는 꼭 같은 구절을 세 번, <出現於世>라는 구절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하는 데는 모두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 覺山 정원규님은 위 경문 중의 한 구절,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에

대해 거의 3 쪽에 가까운 해설을 달았다.

그 가운데 앞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무슨 까닭인가? 시방의 제불과 세존은 하나의 큰일의 인연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셨다는데, 무엇이 큰일의 인연인가? 어떤 일이 큰일인가?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님을 말한다. 만약 작은 일이라면 큰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되는가? 이것은 간단한 하나의 대답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매우 깊은 해답이 있는데,

너희 스스로 생각해보아라. 그것은 매우 묘하며, 너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하고

또한 불가사의하다.

그런데 이것은 “사량분별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도 완전히 옳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분별하는 것도 틀렸다. 분별하지 않고

사량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묘법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문제에 답해보라고 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답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답은 오직

석가모니부처님만이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이 문제를 판단할 자격이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잊는 것이 가장 좋으며,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반드시 잊어버릴 수가 없다고 믿는다. 무엇 때문인가? 작은 일의 인연이

아니라 큰일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만약 작은 일의 인연이라면 잊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큰일의 인연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너희는 잊어버릴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는가? 잊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는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일대사인연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서 너희로 하여금 무엇이 일대사인연인지 모르지 않도록 하겠다.

일대사인연은 마치 지금 내 손안에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보라. 무슨 물건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이며, 또한 바로 이러하다. 일대사인연은 곧

일이 없는 것이다. 일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일을 찾아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바로 <법화경>을 설하는 것이 일대사인연이다.

 

그러면 <법화경>은 무엇을 설하는가? <법화경>의 묘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 묘법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가 한번 생각하면 곧 묘하지 않을 것이며, 한번

무엇을 물으면 곧 묘하지 않고 묘함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경을 들어

무엇을 하는가? 우리가 경을 듣지 않는 것이 더욱 묘하지 않은가? 누가 너희로 하여금

경을 들으러 오게 하였는가? 너희는 듣지 않을 수도 있으며, 너희에게 듣도록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너희는 이제 듣지 않으려고 생각해도 멈출 수가 없다.

 

또 하나의 큰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생사대사이다. 우리 각자는 생이

있으면 곧 죽음이 있다. 너희는 바로 우리 각자의 생사의 문제를 이해하는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는가? 모른다. 어떻게 죽는지 아는가? 또한 모른다. 아무 총명한 사람도

생사의 문제를 모른다. 우리의 이러한 큰일의 인연이 바로 생사의 문제다. 만약 생사의

문제를 명료하게 할 수 있으면 이 큰일은 비로소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생사의 문제에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큰일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이다.

(이상 覺山 정원규님의 해설 중 앞부분)

 

(읽어봐도 읽어봐도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 이 해설을 쓰면서 과연 覺山 정원규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자신의 해설을 자신은 제대로 이해하고 계실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번역만 정확하면 이와 같은 장황한 말장난, 글장난이 왜 필요한가? 나성거사는

이러한 그림을 시중의 법화경 해설서에서 수없이 본다.

 

●이 경문에 대한 나성거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의 수의설법(隨宜說法)은 그것이

뜻하는바 취지가 무엇인지 터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

내가 무수한 방편을 구사하고 온갖 인연과 갖가지 비유와 언사를

사용하여 모든 이치를 펼쳐 설하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깊이 생각하고, 깊이 분별하고, 깊이 헤아린다하여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내

직접 가르침을 펼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 법을 능히 깨칠 수

없습니다.

<모든 부처가 세간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더없이

큰 불사(佛事)의 인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가 세간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더없이 큰 불사(佛事)의 인연 때문이다>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열게 하여 청정함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이 세간에 몸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을 보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간에 몸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 세간에 몸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에 확실히 몰입하도록 하기 위해

이 세간에 몸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가 세간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더없이 큰 불사(佛事)의 인연 때문이다>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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