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나성거사는
<爲諸菩薩 說大乘經>을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 대승경을 설한다>가 아니라
<(중생들에게) 모름지기 보살이 되라고 대승경을 설한다>라고 번역해야 맞다, 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청을 높인다.
또 <但敎化菩薩>을
<오로지 보살들만을 교화한다>가 아니라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오로지 보살이 되게 한다>라고 번역해야 맞다, 고
입이 몸살을 앓도록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앞서 올린 5개의 글을 읽은 분이라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다.
다시 말해, 보살은 부처님처럼
<上求菩提>하여 <下化衆生>하고 있는 존재다.
여기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다>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5 가지 사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 사례 1. 『世說新語』에서
法華經曰 三乘者 一曰聲聞乘, 二曰緣覺乘, 三曰菩薩乘.
聲聞者 悟四諦而得道也
緣覺者 悟因緣而得道也
菩薩者 行六度而得道也
然則羅漢得道 全由佛敎 故以聲聞爲名也
辟支佛得道 或聞因緣而解 或聽環佩而得悟 神能獨達 故以緣覺爲名也
菩薩者 大道之人也 方便則行六度 眞敎則通脩萬善
功不爲己 悉皆廣濟 故以大道爲名也.
법화경에 이르기를, 삼승이란 첫째 성문승, 둘째 연각승, 셋째 보살승을 가리킨다.
성문이란 사체(四諦)를 깨달아 득도한 것이다.
연각이란 12 인연(因緣)을 깨달아 득도한 것이다.
보살이란 육도(六度)를 행하여 득도한 것이다.
따라서 아라한이 득도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얻는
것이기에 성문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벽지불(즉 연각)이 득도하는 것은 혹은 12 인연을 들어 해탈하고,
혹은 패옥(佩玉)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 인연에 의해 홀로 도(道)에 이르는 능력이 있으므로 연각이라 했던
것이다.
보살이란 대도(大道)를 성취한 사람이며 방편(方便)에 있어서는 육도만을
행하고, 진교(眞敎)에 있어서는 모든 선을 두루 갖추되, 그 공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아니하고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까닭에 대도(大道)라고
한다.
* 여기서 <大道>라함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범어)이고, 무상정등정각(한자)이고,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대각(大覺)과 동의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처:
『世說新語』 明文堂 출판, 安吉煥 역, 上 p. 355
남조 송(宋)나라 사람 유의경(劉義慶, AD403-444)이 편집하고, 역시
남조 양(梁)나라 사람 유효표(劉孝標, AD458-522)가 내용을 보충하고
주를 달았다(서문).
★ 사례 2, 沙門 李 法華
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是諸菩薩 莫不皆是法身大士 戒定慧解脫 解脫知見之所成就
其心禪寂 常在三昧 恬安憺怕 無爲無欲 顚倒亂想 不復得入
靜寂淸澄 志玄虛漠 守之不動 億百千劫 無量法門 悉現在前
得大智慧 通達諸法 曉了分別 性相眞實 有無長短 明現顯白
又善能知諸根性欲
以陀羅尼 無礙辯才 諸佛轉法輪 隨順能轉 微渧先墮
以淹欲塵 開涅槃門 扇解脫風 除世惱熱 致法淸凉
이 모든 보살은 다 법신대사(法身大士)이니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성취함이라. 그 마음이 선적(禪寂)하고 항상 삼매에 있어 편안하고
담파(憺怕)해서 무위무욕(無爲無欲)함이라. 전도(顚倒)되는 어지러운 생각이 다시 들지 못하며
고요하고도 밝고 뜻이 심오해서 항상 넓고 편안함이라. 억百千劫을 지키되 동하지 아니하며
한량 없는 법문(法門)이 모두 앞에 나타나 있음이라. 큰 지혜를 얻어 모든 법을 통달하고
성(性)과 상(相)의 진실을 밝히어 분별하되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을 밝게 나타냄이라.
또 모든 근(根)과 성(性)과 욕(欲)을 잘 알며, 다라니와 걸림이 없는 변재로써 부처님의
법륜 전하심을 순히 좇아 전함이라. 작은 물방울을 먼저 떨어뜨리어 욕망의 먼지를 씻어주며,
열반의 문을 열고 해탈의 바람을 일으키어 세상의 괴로운 열풍을 제하고 (중생들로 햐여금)
청정한 법에 이르도록 함이라.
출처:
國譯 및 懸吐 『法華 三部經』 佛敎敎團 靈山法華寺出版部 1995, 12-27, 6판, p. 448-450
[無量義經 德行品 第 一] 가운데 보살의 존재에 대해 기술한 부분
★ 사례 3, 南懷瑾의 『金剛經강의』에서
보살은 어떤 사람인가?
보살이라는 명사는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것으로 ‘보리살타’를 줄인 말입니다. ‘보리’란
‘覺悟’, 즉 깨닫는다는 뜻이요, ‘살타’는 ‘유정(有情)’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 말을
‘각오유정(覺悟有情)’이라 번역했다면 정말 멋대가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의 음을
빌려 ‘보살’이라고 했고, 현재 우리는 간단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그것의 뜻대로
번역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부처의 경계입니다. 소위 스스로 이롭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自利利他), 스스로 깨달아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自覺覺他), 바로 그
깨달음입니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면, “먼저 아는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깨우쳐 알게
만드는(以先知覺後知)”겁니다.
만약 도를 깨친 후, 일체의 부귀와 공명을 돌보지 않고 만사를 제쳐두고 발바닥에 기름 바른
듯 쪼르르 빠져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나한(羅漢)이라 합니다. 보살의 경계는
이렇지 않습니다. 깨닫고 나서 세간의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려 합니다. 세상의
중생들이 아직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가 중생을 제도하려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희생 시켜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유정’입니다.
소위 대승보살도입니다.
출처:
南懷瑾의 『金剛經강의』, 신원봉 번역 p. 56-58
문예출판사, 제 1판 8쇄, 2006년 5월 25일
★ 사례 4, Paul Knitter 의 책에서
What and who is Bodhisattva?
The role and example of a Boddhisattva is appealingly illustrated in
the familiar story of the four men lost in the desert. After days of wan-
dering on the sultry sands without water, they come upon a large area
surrounded by a high wall. All of them scuttle up the wall and behold
on the other side a lush oasis, abounding in water and fruit. Three of
them jump over to immerse themselves in this desert Nirvana. One of
them goes back to tell others about this oasis. That last fellow us the
Bodhisattva. He doesn't keep Nirvana for himself but shares it with
others. That is what we are to be for others, because that's what
Buddha is for us. p. 35
For Mahayanists, the goal is to become, like Buddha. a Bodhisattva.
p. 109
보살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인가?
보살의 역할과 본보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찌는 듯한 사막을 물도
없이 헤맨 후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곳에 이르렀다. 허둥지둥 담 위로
기어 올라간 그들은 그 너머에 물과 과일이 풍부한 오아시스가 있는 것을 본다.
그들 중 셋은 담을 넘어가 그 사막의 열반에 몸을 담근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다른 이들에게 이 오아시스에 대해 말해주려고 사막으로 되돌아간다.
이 마지막 사람이 보살이다. 그는 열반을 혼자만 누리려 하지 않고 남과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남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붓다가 우리를 위해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불자의 최종 목표는 부처님처럼 보살이 되는 것이다.
출처:
『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 written by Paul Knitter
★ 사례 5, 『법화경』 본문에서
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菩薩摩訶薩 八萬人 皆於阿褥多羅三藐三菩提 不退轉
皆得陀羅尼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供養無量百千諸佛 於諸佛所 殖衆德本 常爲諸佛之所稱歎
以慈修身 善入佛慧 通達大智 到於彼岸
名稱普聞 無量世界 能度無數 百千衆生
대보살 팔만 명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으니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고하게 터득하여 잠시도
물러서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라니를 몸에 익히고 이치를 밝히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감에 털끝만큼의
빈틈도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무량 백 천에 이르는 많은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그 부처님들의 도량에서 덕(德)의 본(本)을 심었던
분들이었습니다.
또한 자비로 육신을 닦아 깨달음의 지혜를 빈틈없이 익히고
대지혜를 통달하여 피안(彼岸)에 도달하였으니
부처님들이 항시 칭송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또 이름이 무수히 많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수많은
중생들을 능히 제도하는 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법화경』 본문, 서품 제 일, 앞 부분
* * *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다>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떤 존재인가?
답은 간단하다,
<부처는 보살 중의 보살, 대표보살이시다.>
이처럼 부처와 다름없는 보살들을 위해 부처님은 대승경을 설하셨다는 오역.
이처럼 부처와 다름없는 보살들만을 부처님은 교화하셨다는 엉터리 번역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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