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회 탄허스님의 기본사상 – 2
우리가 中庸(중용)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겁니다.
항상 그때ㆍ그때 시간과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합한 순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용의 妙거든요.
여러분, 빵이 다섯 개가 있으면 무조건 가운데라 해서,
세 개만 먹는 것이 중용입니까?
배고플 땐 다섯 개 다 먹을 수 있고, 배부를 땐 하나도 안 먹을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그 中에 처하는 겁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過不及이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디 한 곳에다 치우치지도 않고, 의존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중용이라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저울대를
가지고 얘기합니다. 저울대를요.
저의 속가 성이 안동 權(권)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權道(권도)”라고 표현합니다.
權道라고 하는 것을 “권세 권” ←이렇게 얘기하지만,
이것이 “권세”라는 뜻이 아닙니다.
權 ←여기에 나무 木(목)이 있지 않습니까?
權 ←이것을 “저울대 권” 이렇게 얘기합니다.
옛날에는 무게를 잴 때 저울을 사용합니다.
저울에는 가운데 추가 있고요. 밑 부분에 뭘 담는 조그만 접시 같은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에 뭘 담아 놓고 저울대의 가운데 자리에
추를 갖다 왔다 옮깁니다. 옮기면서 균형을 잡아서 물건의 무게를 달던
그런 저울이 있었습니다.
↑ 저 저울대를 “權”이라고 그럽니다.
그럼 저울대는 항상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 “開權顯實(개권현실)이다.”이런 표현을 합니다.
開權 : 권을 열고, 顯 : 드러날 현자입니다.
開權顯實이라는 표현을 쓸 때 實은 진리ㆍ진여라는 뜻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權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을 말하는 겁니다. 방편입니다.
이것은 좀 옮겨 다닐 수 있는 겁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방편을 좀 쓸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천태학에서는 “開權顯實”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權道”입니다. 그런데 저울대의 무게의 그 중심을 옮겨 다닐 수
있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되냐하면 세상의 도량형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무게는 얼마를 얼마로 해서 어떻게 해서 세금을 부여하고,
여기에서 도량형은 얼마를 얼마로 결정한다.’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권세 권ㆍ권력 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겁니다.
權 ← 원래 뜻은 저울대입니다. 그러니까 유교에서 말하는 中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隨時處中(수시처중)”입니다.
中이 딱 정해져 있지 않지요.
우리 말에 “적당하게 한다. 딱 맞게 한다.”
이렇게 그때ㆍ그때 맞춰서 가장 정확하게 하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
다. “알맞게ㆍ딱 맞게ㆍ네가 알아서 적당하게 하라.” 너무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이 바로 中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유교에서 말하는 中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