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회 탄허스님의 기본사상 – 8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조선조에 커다란 논쟁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四端七情(사단칠정) 논쟁이 있었고요.
四端 : 인의예지라고 하는 것과
七情 :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던 아주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禮訟論爭(예송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송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發而皆中節謂之和다.”에서 節자에 해당하는
겁니다. 和라고 하는 것.
어느 정도까지 喪服(상복)을 입어야 되느냐? → 節度(절도)
“1년 상을 입을거냐? 3년 상을 입을거냐?” 하는 것은 和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봤던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떤 이는 굉장히 슬피 몇 날 며칠을
그냥 울기만 합니다.
어떤 자제분은 울음이 잘 안 납니다. 잘 안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둘 다 和에 미치지 못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節文(절문)을 위해서 禮라고 하는 것을 만든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禮가 중요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아이고ㆍ아이고 라고 곡을 해라.” 그 다음에
“어이ㆍ어이. 애고ㆍ애고” 그 다음에
服은 몇 년을 입어야 되고, 상주 노릇을 몇 년을 해야 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감정이 어떻든가 떠나서 기본적인 절도에
입각해서 이 정도 복을 입어야 되고, 예를 어떻게,
禮라고 하는 리추얼을 통해서 그 사회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될 기본적인
절도와 조화 하모니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 다음에
禮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和의 마지막이 아니라,
和의 마지막 덕목은 樂입니다.
유교에서는 成於樂(성어악)입니다. 음악에서 완성되는 겁니다.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하모니의 최고의 절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 감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興於詩(흥어시)입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詩거든요. 興於詩! 그 다음에
立於禮(입어례)입니다.
禮에서 사람들이 세상사는 위치를 정해서 절도있게 삽니다.
그러나 너무나 이렇게 禮만 강조하면 조화를 이룰 수 없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엔 음악이라고 하는 하모니를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을
유교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면,
和라고 하는 것은 절도가 있다가 마지막 음악처럼 조화롭게 되는
부분을 양편을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유교의 핵심적인 내용인데요.
이 내용을 다 가지고 禮訟論爭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너무나 지나치게 禮에 취해서 들어가다 보면 그런 양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금 보면 법전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 양상처럼 그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 있는 것이 湖落論爭(호락논쟁)이라는 겁니다.
湖落論爭에 보면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이요. ←에서 未發謂之中하고,
發而皆中節謂之和다. ←에 謂之和가 있는데요.
“未發한 中은 순전히 善이기만 하냐?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것는 순 善이냐? 아니면
善ㆍ惡이 조금 섞여 있을 수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未發已發(미발이발)론이라고 그럽니다.
유교의 아주 중요한 논쟁.
모든 논쟁에 中ㆍ和가 다 관련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우리 조선조의 한국학적인 사유를 할 때,
“탁상공론” 이라고 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어디까지 허용해주고,
어디까지 이해해주고,
어디까지는 봐 줄 수 있느냐? 그 다음에
어디까지는 우리가 차단을 해야 되느냐?
어떻게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야 되느냐?’라고 하는 부분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논쟁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 불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8아뢰야식 가운데, 아뢰야식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섞여
있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제9식 백정식이라고 해서 아말라식이라고
하는 것을 또 새로 하나 만들어 냈지 않습니까?
“아뢰야식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다.
제9식 아말라식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순수한 것이다.” ←진제 삼장 같은 경우는 이것을 주장합
니다.
그러면 “8식으로 충분하다.”라고 하는 쪽과, 그 다음에
“제9식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그 논쟁이 불교사에 있지요.
그와 동일하게 조선조에는,
“中이 순 善이냐? 善惡이 섞여 있느냐?” 그러면
“순 善에 해당하는 中 안에도 층차가 나눠지는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
예송논쟁 ←이 논쟁이 8식 논쟁과 9식 논쟁에도 다 관여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 때, 中ㆍ和의 湖落論爭에서 이런 것까지
다 알았다고 한다면, 불교의 8식ㆍ9식 논쟁설까지 다 알았다고 한다면,
논쟁이 좀 더 활성화되고 좋은 결론으로 이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
을 해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논쟁 꺼리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부분에 우리 선조들은 논쟁을 해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