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0회 노자와 불교의 회통 1 – 8
노자 도덕경 1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위에는 탄허스님의 현토고요. 밑에는 탄허스님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놨습니다.
[道可道면 非常道(도가도비상도)요.
名可名이면 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니
無名은 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요
有名은 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라
故로 常無로 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하고
常有로 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니
此兩者는 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이라
同謂之玄(동위지현)이니 玄之又玄(현지우현)이라
衆妙之門(중묘지문)이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이요?
탄허스님이 ↑저렇게 현토를 달아서 끊어 읽기를 해놨는데요.
다른 분들은 끊는 장소를 다르게 할 수 있겠지요.
끊는 장소를 다르게하면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고, 사상이 완전히 달라
지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無名은 天地之始요.” ←이렇게 할 수 있지만,
“無는 名天地之始요.” ←이렇게 해석하는 분이 있고요.
“常無로 欲以觀其妙하고”는 “常 無” ←無를 따로 떨어져서 해석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無라고 하는 것을 어디에 붙일것이냐?
그 다음에
“此兩者는 同出而異名”인데요. “同 出而 異名이라”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나오면서 달라졌다.”로 해석할 것이냐?
“此兩者는 같은 곳에서 나왔는데 이름이 달라졌다.”로 해석할 것이냐?
어디서 끊어서 어떻게 현토를 하느냐에 따라서 노자 도덕경 1장은 완벽
하게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탄허스님이 현토를 하신 것을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道可道면 非常道(도가도비상도)요.
도를 가히 도라고 한다면 常道가 아니요.]
[名可名이면 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니,
名을, 이름을 가히 名이라 한다면 常名이 아니니,] ←이랬습니다.
道可道 ←여기에서 앞의 道는 “진리” 라는 뜻이고요.
可道라고 했을 때 뒤의 道는 “말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道를 道라고 하는 것이지요? “말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항상된 道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道敎입니다.
타오이즘입니다. 노자 도덕경이라고 하는 것은 제 1장이 “道”로 시작
됩니다. 그 다음에 하경이라고 하는 38장부터 “덕경”으로 시작이됩니다.
상경은 도경이고, 하경은 덕경입니다. 그래서 “도덕경”입니다.
道라고 하는 것은 언어가 끊어진 세계이고,
德이라고 하는 것은 “得也(득야)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진리의 세계! 말이 끊어진 세계인 道를 德이 얻은 것이지요.
목적어가 道가 됩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도덕경입니다.
앞에는 “道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오는 것이 道의
본체에 대한 얘기가 나오겠지요? 그 다음에 그 道를 내가 얻고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활용하고 어떤 양태로 나타내느냐고 하는
것이 德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덕이라고 하는 큰 德자는 내가 道를 얻었을 때,
밖으로 나온 것이 德이됩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1장이 도경이거
든요. 처음 말이 “道는 이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道는 말로 할 수 없다.” 그래서 禪的입니다. 선적이지요.
“名을, 이름을 가히 이름이라 한다면 이것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 10년 전에도 똑같은 이름입니다.
20년 전에도 똑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항상된 이름이 아닙니다. 왜요?
이름은 똑같지만, 사람은 바뀌었거든요. 사람은 無自性이지 않습니까?
계속 변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에 속지말고, 언어에 속지말라.’ ←이것이 노자 도덕경
1장의 메시지입니다.
[無名은 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요.]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입니다. 처음부터 이름있는 것이 없지요.
이전 소식이라고 하는, 太初(태초)의 이전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有名은 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라
이름이 있고 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 이름이 있고 난 다음부터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잖아요. 만물이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그럽니다.
‘말로 표현했느냐? 표현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는, 이름 있음과 이름 없
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럼 道는 뭡니까?
“언어 문자를 떠난 소식이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다.”
탄허스님이 성품 性자리를 이렇게 설명을 하셨는데요.
노자 도덕경 1장에서 바로 이렇게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와 선과 회통이 될 수 있겠지요.
[故로 常無로 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하고
항상된 無를 가지고 그 妙를 관하고자 하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있는 세계 이전의 소식을 가지고 근본의 오묘
함을 우리가 항상 본다.’ 는 겁니다.
뭔가 ‘세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끊어진 세계였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常有로 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하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들이 “徼”거든요.
그러니까 본체가 있으면 현상이 있지 않습니까?
전기가 현상이 일어나서 전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려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전기의 이치가 있지요. 전기의 이치가 현상으로 들어났을 때를
“徼” 라고 그러고요.
전기의 이치가 안으로 숨어 있는 것을 바깥으로 나타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오묘할 妙자, 妙입니다.
이치가 숨어 있을 때와, 이치가 현상으로 들어났을 때를 體와 用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뭡니까?
無와 有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상은 있음의 세계이고요. 있음의 세계 배면에 無의 세계가 있다는 겁
니다. 그러니까 유무가 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공과 묘유를 다 중시하는 것!!!!!!!
空을 공이라고 하는 것과, 假有(가유)의 세계를 함께 보는 것이
空假中(공가중)!!!!!! 中道거든요. 그래서
無만 중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 불교의 空사상입니다. 그래서
有와 無를 대칭으로 놓고 보았던 것입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釋대원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2.13 흔한 대표적인 예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띄어쓰기가 날마다 갈팡질팡입니다. -
작성자여연행 작성시간 24.12.13 ! 道 德經...현토에 따라,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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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自明華 작성시간 24.12.13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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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작성시간 24.12.14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0-1-8. 老子와 佛敎의 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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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묘심행 작성시간 24.12.16 있음의 세계 배면에 無의 세계가 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