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1회 2 – 5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4.12.18|조회수55 목록 댓글 13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1회 노자와 불교의 회통 2 – 5 

 

 

 

   “無의 극치의 세계가 무극의 세계다.”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설명하시는 부분을 보시면 완전히 이해가 되실겁니다.

 

   교재 255쪽에 보시면,

       [도덕경을 보면 “故로 常無欲以觀其妙(상무욕이관기묘)라.”

        항상 없는 것으로서 妙(묘. 만물의 본체 良知(양지) 자리)를

        보고자하고, 常有로 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하니,

        항상 있는 것으로서 徼를 관하고자 하는 것이니,]

‘현상이라고 하는 徼(돌 요)자를 우주 만물이 기숙하는 자리다.’ ←이렇

게 본 겁니다.

器(그릇 기) = 있음의 세계.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器世間(기세간)이

라고 그러지요? 3종세간 가운데 器世間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숙하는 자리. ←이 세계를 徼라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此兩者(차양자)는, 묘와 요는 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이다.

      한 근본에서 나와서 이름이 달라져서 玄이라고 한다.

      왜 그러냐? 있다고 하자니 동서남북 고금으로 찾아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없다고 하자니

       昭昭明明(소소명명)해서 다 드러난다.] 그래서 “玄하다.”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玄之又玄이다. 다시 또 현하고 또 다시 현하다.]고 했을 때,

“또 현하다.”고 하는 것은 ‘玄이라는 말도 붙을 수 없는 자리다.’ 이렇게

탄허스님이 해석을 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衆妙之門(중묘지문)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핵심이다.] 이렇게 표

현을 한 것이지요. ←이런 부분을 보면 탄허스님이 “妙”라고 하는 자리를

유교의 맹자의 “良知”에서 가져온다든지, 노자 도덕경의 내용들을 전부

주역과 회통을 하고 있다든지, ←이런 것들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시사

점을 굉장히 많이 줍니다. 개발될 부분이 많지요.

 

그리고 이 내용들을 “생각이 끊어진 자리다. 언어 문자가 붙을 수 없는

세계다.” ←이렇게 표현해 주신 것은 선적인 회통이라고 그렇게 보실 수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게 되면,

‘탄허스님이 얼마나 넓게 동양학을 회통해서 보려고 했느냐?’고 하는

그런 의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흔히 책에 있는,

텍스트에 있는 액면만 보고 ‘이것이 불교보다 못하다.’ 이런 얘기하기

급급한 그런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열을 가리기 보다는

‘근본 원리ㆍ근본 뜻의 종지가 통해져 있다. 근본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하시고요.

 

우리 종교. 우리 사상을 강조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상과 종교도 우리가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불교의 넓고 깊은 이런

뜻을 가지고 해석을 해줌으로 인해서 그 종교사상이 또한 더 발전되고,

해석의 집행이 훨씬 넓어질 수 있도록 영역을 확장 시켜주는 것. ←이런

것이 탄허스님의 아주 굉장히 큰 기여이고, 장점이라고 이렇게 생각이 됩

니다.

 

   258쪽에 보시면 탄허스님이 말씀하신 아주 좋은 말씀이 하나 있는데요.

그래서 제가 책에 써놨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소강절. 역학의 최고 대가였다고 하는,

       [소강절이 이르기를,

       “노자는 易(역)의 體(체)를 얻고, 맹자는 易의 用(용)을 얻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소강절은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 라고 하는

아주 최고의 명작을 남겨 주셨잖아요.


象數學(상수학)의 최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소강절이라는 분이 易을

가지고 다 비교를 해놨습니다.

“노자는 주역의 본체. 맹자는 주역의 용을 얻었다. 體와 用을 얻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을 인용을 하면서 탄허스님은,

 

        [어찌 體가 없는 用과, 用이 없는 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체에 즉한 용인 까닭에 용이 체를 여의지 않고,

         용에 즉한 체인 까닭에 체가 용을 여의지 않나니,

         이것은 하나면서 異(이)고, 둘[異]이면서도 또 하나인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는 일찍이 노자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훼담하지도 않았다.] 이런 말을 써놨습니다.

 

이것이 탄허스님이 주역을 보셨던 그런 황들의 얘기를 가지고 오셔서,

       “주역의 체와 용이, 노장과 맹자에 함께 나타나있다.”

이렇게 설명 해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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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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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自明華 | 작성시간 24.12.19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여연행 | 작성시간 24.12.19 “노자는 주역의 본체. 맹자는 주역의 용을 얻었다. 體와 用을 얻었다.”...고맙습니다 _()()()_
  • 작성자妙法樹 | 작성시간 24.12.19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 작성시간 24.12.21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1-2-5. 老子와 佛敎의 會通.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4.12.25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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