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2회 – 6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4.12.27|조회수54 목록 댓글 11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2회 탄허와 장자 – 6 

 

 

 

   보통 예전에 3교 회통을 하는 분들도,

“유교보다는 노장이 좀 높고,

노장보다는 불교가 훨씬 높은 경지에 있다.” 이렇게만 주로 많이 설명

하지, 탄허스님 처럼 다 회통을 해서 인정을 다 해주려고 방대하게

했던 경우는 좀 드물지요.

 

    釋拔根(석발근)이라 해서,

“우열이 좀 있다. 불교가 그래도 가장 깊다.” 이런 말씀은 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노장과 불교를 같은 동격으로 봐서 설명을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스님의 특징입니다.

 

   無己라고 했을 때, 克己復禮(극기복례)라고 했을 때 “나를 극복한다.”

나를 극복한다는 것이 몸뚱이 하나만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망상을 극복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의 망상을 극복해서 그 다음에 復禮한다. 예의 근본으로 돌아간다.”

동양학에서는 가장 중시했던 禮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는 3종이 있다.

          禮로 사는 사람이 있고,

        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情(정)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최상 근기는 禮에서 산다.’ 이 것이지요.

 

禮라고 하는 것은 “物我가 兩忘(물아양망)된 경지다.”

일단 나와 바깥세계가 한 덩어리가 돼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세계.

忘我(망아)가 된 세계. 무아지경이 된 세계라야 진정한 禮에서 노닐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자기의 행위와 언어와 사유가 우주자연의 理法(이법)과 딱 들어

맞아서 절도있게 가려면 이것은 어거지로, 억지로 禮를 지키려고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禮라고 하는 경지는, 天理之節文(천리지절문)이니까요.

“天理가 하나하나 펼쳐진 세계다.” 이렇게 보니까 禮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세계로 보는 겁니다.

 

   克己復禮라고 했을 때,

“나를 극복하고 예를 회복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이츄얼. 형식적인 것. 그 다음에 아주 사소한 예의범절.’ ←이것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최고의 제자 안회에게 얘기했을 때는, 克己復禮라고 하는 것은

나의 망상을 극복해서 우주자체의 “道”로 보는 것이지요.

道로 보아서 이 天理의 節文으로 하나하나 돌아가는 세계에 딱 들어맞

하는 것을 克己復禮라고 본 것입니다.

 

   禮로 사는 사람이 있고,

禮로 살지 못해서 物我兩忘이 되지 못하면 법의 세계가 멀어진다는 것

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사회의 규범과 이치에 따라서

대로 못하게 될 때, 지금 우리 사회가 법치국가 아닙니까?

법치국가가 법이 있기 이전에는 그냥 禮로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법이 없습니다.

 

그냥 내가 이 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상황윤리에 따라서 적당하게 해서,

딱 절도에 맞게 하는 것에 의지해서 살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안 되니까,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패턴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 세계가 오면서, 법치라고 하는 형태가 나옵니다.

법에 입각해서 처벌도 하고 형벌도 주고, ←이런 세계가 펼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법치세계 보다 못한 세계가 情으로 사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 겁니다. 그냥 내 감정에 따라서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친하면 친한 것이고, 불공평해도 할 수 없다. 그냥 情으로 사는 것이

하근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허스님은,

       “정과 법과 예가 있다.

        예라고 하는 것이, 법 이전의 예를 생각해 봐라. ←이것은 도에

        입각해서 사는 것이다. 예가 안 될 때 법이 생겼고,

        법도 잘 지키못하는 감정만 가지고 사는 정의 세계가 되면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살게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克己復禮의 해석은,

       “나의 망상을 극복해서 도의 세계로 회복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십니다.

 

         克己之極功(극기지극공).

        나의 망상을 극복하는 것이 극도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 공부가 극치에 달했을 때, 克己之極功을 無己라고 한다.

        장자가 말한 무기라고 하는 것은 克己가 極功에 도달했을 때

          無己가 된다.

        무기라고 하는 것은 아공과 법공이 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결국 다르지 않다.”

  무아와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유교에서 말한 克己.

“나의 망상을 극복하고, 나를 극복하는 것이 최고에 도달하면 그 경지를

장자에서는 무기라고 하고, 우리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신 것이지요. 3법인에 “제법은 무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아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그냥 연기로 이루어졌을 뿐이지, 영원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

무아사상이고, 부처님의 핵심이론 아니겠습니까?

불교에 입문하면 누구나 다 배우는 것이 무아입니다.

 

   탄허스님은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무아라고 하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고 늘 염두에 두어야할
        내용이지만, 이것이 가만히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망상을 제거하려는 수행을 끊임없이 하고 노력을 할 때,

        무아라고 하는 진리와 아공 법공이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망상을 버리게 되는,

        번뇌를 버리게 되는 것이 합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으로 도달해야 될 경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극기의, 극공의 장자의 無己요.

무기에서도 아공과 법공이 함께 이루어지면, 똑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같다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극기와 무기와 무아를 하나로 꿰뚫어서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탄허스님의 아주 굉장한 특징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한 마디 꼭 잊으시면 안 되는 것이,

“극기지극공이 무기요 무아다.” 이 말은 현대인에게 굉장히 임팩트 있는,

우리가 영원히 우리의 공부하는데 있어서 “指南(지남)이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무아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하고 배워도 무아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늘 아상에 시달리고 있고, 죽을 때까지 아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상에서 벗어나려면 극기라고 하는 것의 극공에 도달해야 된다.”

이런 설명을 하시는 부분이 탄허스님의 장자 첫 편. 소요유에서 가장 중시

하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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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마니주 | 작성시간 24.12.28 克己復禮 : 자신의 망상을 극복해서 도의 세계로 회복해 간다.
    禮 : 天理가 하나하나 펼쳐진 세계. 최고의 세계. 法治 이전의 세계.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自明華 | 작성시간 24.12.28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 작성시간 24.12.30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2-6. 呑虛와 莊子.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4.12.31 극기복례
    들은 적이 있지만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배우는 즐거움...
    고맙습니다
  • 작성자여연행 | 작성시간 25.01.01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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