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3회 1 – 5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5.01.02|조회수49 목록 댓글 13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3회 장자와 불교의 융회 1 – 5

 

 

 

   포정이 소를 잡는데 어떻게 해부를 하느냐?

닭고기 드셔보시면 살하고 뼈가 저절로 나눠지는 부위가 있잖아요.

뼈 위에 살이 안 붙어 있고 얹혀 있는 것 아닙니까?

살과 뼈 사이에 빈 공간이 있잖아요.


포정은 그 공간 사이로 칼이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허하게 비어있는 가운데 자리를 任督脈(임독맥)찾아 다니

듯이 칼이 완벽하게 해부를 하고 다닌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은 칼이 뼈에 부딪히지도 않고, 칼날이 상하지

않게 자유자재로 다닌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도인인 겁니다.

 

  養生(양생)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養生이라고 하는 것이 채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허하게 비어있는 자

리를, 우리가 그 자리를 어떻게 쓸 것이냐?

그것이 바로 건강과 양생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養生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氣가 다니고 있는 비어있는 자리들을 정확하게 알아서 그 자리를

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인데요.

 

   中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뭡니까?

마음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마음이 비어져 있을 때, 비어있는 자리가 보이고, 그랬을 때 포정이

소를 해부하듯이 바깥에 있는데도 안에 있는 비어있는 자리가 보여서

칼이 자유자재로 다닌다.’ 이 말입니다. 탄허스님이 이렇게 해석을 하신

겁니다.

 

   緣督(연독)이라고 하는 緣자는,

인연 緣자라고 하는 것은 따를 順(순)자라고 그랬으니까,

그 中 자리, 비어있는 中 자리를 따라서 잘 다니는 것이니까 緣督은 결

국은 “중도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많은 주석들 중에 이 주석을 썼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養生主의 핵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포정해우거든요.

齊物論(제물론)이 胡蝶夢(호접몽)이듯이요.

 

    교재 p 283~284

여기는 뭐라고 그랬느냐? 보시지요.

       [칼날은 뭐냐?] 칼이 중간에 다니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칼날은 뭐냐? 우리의 정신입니다.] 칼이 우리의 정신이래요.

 

      [소는 뭐냐? 소는 우주 만유의 객관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우도” 할 때, 소를 찾아서 나가는 그림 열 개를 보면 소가

뭡니까? 道요, 진리잖아요? 찾아야 될 진리라고 하는 비유를 들듯이

여기도 “소는 우주 만물의 객관경계다.”

우주 만물의 객관경계가 있는데, “칼”이라고 하는 내 정신이 빈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있어야 내 마음이 상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養生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도교에서 나오는 모든 과학적인 원

리들이 다 나오게 됩니다. 양생술이 다 나오게 되지요.

 

어떻게 건강하게 할 것이냐? 어떻게 단전이라든지, 주변에 한의학에 나

오는 혈 자리라든지, 奇經八脈(기경팔맥)이라고 했던 그런 것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의 연구가 養生主의 바탕에서 다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中자리”

 

       [中 자리에 합해야만 한다.

        中자리는 지극히 허한 자리요ㆍ진공자리요ㆍ

      생사가 끊어진 자리를 中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양생주의 골자입니다.

      포정해우는 19년 동안 칼을 갈아쓰지 않았다.] 라고 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탄허스님이 아주 멋진 주석을 남겼습니다.

 

       [고금 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주석을 잘 못 냈는데,

        역학의 원리로 말할 것 같으면 10이라고 하는 숫자는

        음수의 극수이고, 9라는 숫자는 양수의 극수니,

        음과 양의 극수를 합하여 무한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표현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19년 동안 내가 칼을 안 갈아 썼다. 그랬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고금 학자들이 주석을 안 달아놓은 겁니다.

탄허스님이 “10이라는 숫자는 음의 극수고, 9라는 숫자는 양의 극수니까,

10과 9는 음양의 극수니까 무한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20년 되면 이 포정이 칼을 갈아서 쓰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음양의 극수니까

“무한대로 갈아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주석은 제가 다른 데서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탄허스님이 역학을 가져와서,

“장자 포정해우 19년. 칼 갈아쓰지 않은 19년.”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

니다.

 

   영원히 이 사람은 뭡니까? 칼을 갈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비어있는 그 자리를 = 中 자리를 = 연독의 자리를 정확하게 다 보고 다니

니까요. 탄허스님의 이 멋진 주석이 포정해우에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養生의 핵심은 몸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비어있는 마음자리에 양생의 핵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재 p 284

       [몸뚱이에 구애받지 않아야 진정한 양생이다.

        몸뚱이가 있는지 없는지 잊어버려야 양생이다.

        잘 먹고 사는 것이 양생이 아니라 마음이 자유로워야 양생이며,

        의식주에 구애받지 않고 생사에 구애받지 않아야 진정한 양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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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一眞華 | 작성시간 25.01.03 '우리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中 자리"에 합해야만 한다.
    "이" 자리는 지극히 허한 자리요, 진공 자리요,
    생사가 끊어진 자리다. (養生主의 골자)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마니주 | 작성시간 25.01.03 任督脈. 살과 뼈 사이의 빈 공간. 포정의 칼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 中.
    포정해우 19년. 양과 음의 극수. 무한대.
    養生은 비어있는 자리에 그 핵심이 있다.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일심행 | 작성시간 25.01.03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 작성시간 25.01.03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3-1-5. 莊子와 佛敎의 融會.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5.01.06 _()()()_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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