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3회 1 – 6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5.01.03|조회수44 목록 댓글 10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3회 장자와 불교의 융회 1 – 6 

 

 

 

   예전에 비해서 우리가 잘 먹고 삽니다.

예전에는 세 끼 먹기가 어려웠는데요. 지금은 얼마나 많이 먹고,

얼마나 많이 낭비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양생이 됩니까?

마음이 불안ㆍ초조ㆍ스트레스가 많고ㆍ불만이 많고ㆍ욕심이 많은데,

예전에 비해서 훨씬 우리가 양생이 잘 됐고, 건강하고 행복합니까?

 

여기 다 나와 있지 않습니까?

“몸뚱이 잘 간수하는 것. 양생 아니다.” 이 말이지요.

잘 먹고 잘사는 것. 양생 아닙니다. 복지국가가 되더라도 양생 안 됩니

다. 복지가 아무리 다 잘 되어있어도 내 마음이 허한데 무슨 양생이 됩

니까?

 

“마음이 비어있는 자리ㆍ中 자리ㆍ허한 자리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것이 순하지 못하면 복지는 없다.” ←이렇게 장자에서 말해

놓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양생의 골자는 정신이 죽지 않고 중도에 합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질이 근본이 아닙니다.

 

“정신이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사에 구애받지 않는, 생사를 둘 아닌 것으로 철저히,

        투철히 보아버린 것을 양생주에서는 ‘매달려 있는 것을 풀었다.’는

        의미로 “懸解(현해)다.”] 이러는 것입니다.

매달릴 현자. “현판”할 때 현자지요.

“매달려 있는 것을 풀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양생주에 나옵니다.

탄허스님은 懸解는 불교의 해탈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비어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알아서 中 자리의 이치에

맞춰서, 중도의 이치에 정확하게 맞춰서 잘살게 된다면요?

“끄달려 있는 것ㆍ집착해 있는 매달려 있는 것에서 부터 벗어난다.” 이것

이 “해탈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장자에서 얘기하는 “懸解”라고 하는 것.

“현해”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해탈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탄허스님의 불교와 장자를 회통하는 그런 멋진 주석들 아닙니까?

우리는 전부 뭐에 끄달려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전부 다 끄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부귀한 사람이라도 전부 다 뭐에 끄달려 살고 있

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스님은 정확하게 이 장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벌써 얼마나 된 지혜입니까? 2000년 넘은 겁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인간들은ㆍ인류는ㆍ지구에 있는 모든 사는 사람

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좋은 것 먹고 몸뚱이 건강한 것에 양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인간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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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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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일심행 | 작성시간 25.01.04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自明華 | 작성시간 25.01.04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여연행 | 작성시간 25.01.04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 작성시간 25.01.05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3-1-6. 莊子와 佛敎의 融會.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5.01.06 훌륭한 가르침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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