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5회 참선과 명상, 같은 점과 다른 점 – 8
유교에서 말하는,
中ㆍ진여문→ 未發之中(미발지중) = 大本(대본) = 體(체) =
靜(정) = 上達(상달)
주역으로 말하면 中ㆍ진여문→ 寂然不動(적연부동)이라 그럽니다.
주역 대사전에서 가장 중요한 말중의 하나가,
“한 생각도 안 일어난 상태가 寂然不動이다.” 라고 하는 것이고요.
주역에서 말하는 和ㆍ생멸문→ 感而遂通(감이수통)이라 그럽니다.
“感해서!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서 전체가 통하게 된다.”
寂然不動과 感而遂通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유교적ㆍ주역적
형태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유교 4서의 대학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이요.”
밝아 있는 본래의 덕! ←이것이 明德입니다. 본래 밝아져 있는 덕
이지요. 이것은 本覺자리이고,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한 생각
일어나지 않은 자리지요.
그런데 그것이
“在明明德이다. 밝아져 있는 덕을 다시금 밝히는 것이다.”
도표의 밑 부분에 나오는 明이지요.
“明明德”이라고 했을 때, 원래의 明德은 本覺이고,
“다시 밝힌다.”라고 하는 것은 始覺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中ㆍ진여문→ 靜과, 和.
和ㆍ생멸문→ 慧가 되겠지요.
中ㆍ진여문→ 存養(존양) : 근본으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
和ㆍ생멸문→ 省察(성찰) : 한 생각 일어났을 때.
“省察”이라는 용어가 유교적 용어지만,
우리 불교적으로 볼 때는 “샤띠”라고 하는 ‘알아차림ㆍ마음 챙김.’
이렇게 번역되는, 한 생각 일어났을 때의 그 알아차리는 그것이
유교로 말하면 省察이 되겠지요.
中은 불성의 다른 이름이고,
和라고 하는 것은 6바라밀과 6도만행, 보살행의 총칭이 되겠습
니다.
↑이런 형태로 전체가 구현이 될 수 있겠더라는 말입니다.
中과 和ㆍ진여문과 생멸문. 사마타와 위빠사나.
定과 慧. 止와 觀. ←이 양태가 똑 떨어져서 나뉘어져가지고 화합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그것이 一心으로써 하나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