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7회 看話禪과 話頭에 대하여 – 2
유교의 대학이라고 하는 텍스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心不在焉(심부재언)이면,
視而不見(시이불견)하고 聽而不聞(청이불문)하며,
食而不知其味(식이부지기미)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心不在焉이면,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뭘할 때 마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視而不見하고,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聽而不聞하며,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食而不知其味라.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뭘 먹는데,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는 경우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옆에서 누가 얘기하는데 못 듣고 있다가, 그냥 흘려 지나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소리는 분명히 났는데, 그런 내용이 된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이런 말이 있는데요.
‘보다.’ 라고 하는 뜻인 視ㆍ볼 見.
‘듣는다.’ 라고 하는 聽ㆍ들을 聞. ←이것이 層差(층차)가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 “視聽한다.”와 “見聞한다.”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視聽한다는 것은 “TV를 視聽한다.” 라고 하지만,
TV를 켜놓고 나서 딴짓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딴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래서 見聞이라고 하는 것과, 視聽이라고 하는 것은 뜻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것이지요.
뭐냐하면, 눈은 가있고 보고는 있어도 心不在焉이면,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見 ←“본다.”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8정도에 “正見”이라 그러지,
“正視”라 그러지 않는 것이지요? 8정도에 그렇지요?
正見이라 그럽니다.
“見性했다.” 이렇게 얘기하지, “視性했다.” 이런 말 쓰지 않습니다.
見 ←이것은 정확하게ㆍ완벽하게ㆍ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것을 말
합니다. 見 ←이것은 진짜 본 것입니다. 제대로 본 것이지요.
聽而不聞이라.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옆에 그냥 웅웅 거리고 소리만 들리게 해놓고 딴 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들을 聽.
그러나 들을 聞자는 확실하게 제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見聞이라고 했을 때는 그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본다는 것에 있어서 “간화선” 할 때 볼 看자가 있고, 볼 視자가 있고,
觀世音菩薩이라고 하는 볼 觀자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다.” 여러분 이것 의문을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소리를 “관자재보살이라.”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쨌든 觀은 본다는 뜻인데요.
觀世音菩薩 ←“세상의 소리를 본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聞世音菩薩이 아닐까요?
문세음보살이라고 해야 되지 않나요?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라고
해야지 왜? “觀한다.”고 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