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7회 看話禪과 話頭에 대하여 – 4
서장에 대해서 번역을 하시면서 탄허스님은 幷入私記(병입사기)라는
표현을 본인이 직접 쓰셨습니다.
우리 조선시대 때에 私記가 많습니다.
私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전이 있으면 그 경전에 대한 주석이 좀
부족하거나 할 때에, 거기에 큰스님들이 본인의 뜻을 직접 주석으로
남겨 놓는 것을 私記라고 그럽니다.
私記는 어떤 경전을 볼 때 굉장한 도움이 되는 우리나라에 私記가 많
이 있거든요. 여기에 탄허스님이 서장에 대해서 번역을 하시면서,
幷入私記 ←‘아울러 나의 사기를 넣어놨다.’ 이 뜻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기존의 번역본들은 항상 어떤 경전이 있으면,
그 경전에 대한 훌륭한 주석본들을 正으로쓰는 주석을 하나쓰시고,
그 다음에 도움으로ㆍ보조로쓰는 助의 주석을 써서 최소한 두 개 정도
의 주석을 쓰시고, 그 가운데 주석을 충실하게 번역을 하신 다음에 조
금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스님의 견해를 집어넣는 형태로 일반적으로
번역을 하셨는데요.
서장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다짜고짜 私記라고 해서 스님의 살림살이를 그대로 딱 공개를 하
시면서 서문에, “나는 다른 분의 私記를 참조했지만, 어떤 스님의 생평
이라든지, 서지 목록이라든지 이런 역사적인 부분은 좀 참조를 했으되,
서장의 大旨(대지)! 큰 본래의 宗旨(종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나의 私記
다. 사기를 쓴 것이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스님은 간화선에 대해서 자신이 있으시고,
‘간화선에 대해서만은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주석도 참고하는 것이 아니
라 나의 주석을 남겨 놓겠다.’ 라고 자신감을 표출해 놓으셨던 것 같습
니다.
그래서 앞으로 탄허스님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서장의 私記를 연구를 해서 스님의 “본장 대지는 하면서” ←이렇게
해서 매 장마다 사기를 남겨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게 되면 탄허스님의 간화선 사상에 대한
연구는 더 깊어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가지 아쉬운 것이...
우리나라 普照國師(보조국사)의 제자이셨고,
송광사 제2대 법주였으면서 國師셨던, 진각 혜심국사가 보조스님의
사상을 이어서 우리 선종의 모든 어록들을 집결을 해서 “선문염송”
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놨거든요.
중국에는 30권으로 된 “전등록”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때, 無衣子(무의자), 진각 혜심국사의 선문염송을
똑같이 30권을 만들어 남겨 뒀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해서 “화두공안이 1700공안이다.” 라고 얘기했을
때에, 그 1700의 숫자는 景德傳燈錄(경덕전등록)에서 따온 것이고요.
우리나라의 선문염송에는 1400여 공안들이 일일이 나열되어있습니다.
너무 잘 되어있거든요.
탄허스님이 이 선문염송에 대해서 현토를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부분들의 선문염송 현토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는데요. 그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 선문염송 현토를 찾을 수 있다면,
‘스님이 선문염송에 있는 많은 본식과 염과 송에 대해 어떻게 해석을
하셨던가?’ 하는 것을 정확히 다 알 수 있습니다.
한문했던 분들은 현토만 봐도 어떻게 번역했다는 것을 그대로 다
역출해 낼 수 있거든요.
선문염송 현토를 하셨다는 ←이것을 찾는 것이 많은 분들의 중요한
관건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면 선문염송에 대한 탄허스님의
30권 번역이 그대로 나올수 있는 부분이어서, 그 부분을 좀 어른 스님
이나 많은 분들이 지금 보신다면 찾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렇듯이 탄허스님은 선적인,
‘우리 간화선의 전통에 관해서도 깊이 있게 연구를 많이 하셨고,
번역도 남겨 놓으시고, 스스로 자부하셨다.’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