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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嚴經 參考 資料

李通玄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34권 [장순용 譯]

작성자문수법공양회|작성시간24.09.18|조회수6 목록 댓글 0
신화엄경론 제34권



39) 입법계품③

이 이하의 7권은 모두 선재동자의 선지식이며, 여기부터 이하의 열 선지식은 10주문(住門)이다.
첫째, 선지식이 거처하는 방면을 제시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째서 남방으로 가게 했는가? 이는 방우(方隅)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니, 남쪽이 정(正)이 되고 이(離)가 되고 명(明)이 되고, 이 가운데 허(虛)로써 중허(中虛)를 쓰기 때문에 이(離)가 명(明)이 되고 일(日)이 되고 구천(九天)이 되고, 몸에서는 머리가 되고 눈이 되고 심(心)이 되는 것이니, 심이 허무를 요달하매 지혜의 태양이 스스로 밝기 때문에 상(像)을 취하여 그 도(道)를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경문에서 “시방의 일체 의식(儀式)을 명련(明鍊)하는 주방신(主方神)이다”라고 한 것이니, 방(方)이란 것은 법이니 다만 그 법의 방위가 없는 대상(大像)을 취한 것이다. 태양이 하늘을 운행하매 밝음이 대지에 환한 것과 같아서 지혜가 허공에 행하매 밝음이 만물에 환해서 알지 못함이 없고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한 법을 취하매 시방이 혼연한 것이다.
둘째, 선지식이 거처하는 국토를 제시한다는 것을 설명하자면, 남방에 있는 나라의 명칭이 승낙(勝樂)인 것은 이지(理智)가 허무하여 능히 번뇌를 청정케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승낙이 됨을 밝힌 것이다.
셋째, 선지식이 거처하는 처소를 제시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나라에 잇는 산의 명칭이 묘봉(妙峰)이라고 말한 것은 무념(無念)의 청정한 선(禪)을 이름하여 산이라 하고, 마음이 텅 비어 지혜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묘(妙)라 하고, 이(理)가 청정하고 지혜가 밝아서 슬기가 능히 미혹을 타파하는 것을 이름하여 봉(峰)이라 하니, 간(艮)이 산이 되고 지(止)가 되고 동몽(童蒙)이 되고 소남(小男)이 되고 문궐(門闕)이 된다. 그리하여 정(正)이 초명(初明)이 되고, 3양(陽)의 효(爻)가 생기는 시초가 정월이 되니, 일(一) 아래에 지(止)를 쓰면 정(正)이란 글자이다. 그래서 11월에 1양(陽)이 생기고 12월에 2양이 생기고 정월에 3양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취해 정월을 삼은 것이니 3양이 생기기 때문에 3으로 정(正)을 삼으며, 또 3양이 생기는 곳에 불이 인(寅)에서 생기므로 불을 일(日)로 삼아서 일(日)이 인(寅)에서 생기고, 일(日)이 인(寅)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명(明)이 처음 생기는 곳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동몽과 소남의 지위라 하는 것이니, 상(像)으로 취하여 법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문수사리가 동북방 청량산에 거처한 것은 마갈제국 보리도량의 동북방을 취하는 것이니, 이 산이 남염부제(南閻浮提) 보리도량의 동북이며, 이것이 염부제의 온갖 산의 왕이니 간(艮)으로 산을 삼기 때문이다. 1만 보살이 그 속에 지주(止住)하는 것은 문수사리의 주(主)와 반(伴)의 만행이 원만한 반려이기 때문에 문수로써 법신근본지의 묘한 슬기를 주재하여 일체 모든 부처의 계몽(啓蒙)의 스승이 되기에 곧 일체처에 문수사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에 일체 중생이 다 스스로 있으면서 모두 이 법으로부터 처음 성지(聖智)에 들어가는 것이며, 처음 부처님 집안에 태어나니 일체 모든 부처와 더불어 동일한 지혜의 해탈지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나중에 차별지를 배워서 원행(願行)을 발기하여 대자비를 성취하는 것을 보현의 법계행이라 호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가 상(像)을 세간의 법칙에서 취함으로써 그 법을 나타내어 알기 쉽게 한 것이다. 즉 승낙국(勝樂國)의 묘봉산으로써 상(像)을 취한 것은 3양이 생기는 곳에서 간(艮)이 지(止)가 됨을 밝힌 것이니, 지(止)하면 명(明)이 최초로 생기기 때문이다. 명(明)이 처음 생기는 것을 동몽(童蒙)이라 호칭하는 것이니 또한 문수사리가 몽(蒙)을 발해 성(聖)에 들게 하는 시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수를 동자보살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화(化)를 말미암아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일체 중생을 발기(發起)하여 모습 없는 이(理)의 묘한 지혜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방편삼매로써 근본지를 나타내 처음으로 일체 모든 부처의 지혜 집안에 태어남을 밝힌 것이기에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 때문에 상(像)을 취해 법을 나타낸 것이니, 배우는 자로 하여금 먼저 마음에 염려(念慮)가 없어서 적정부동(寂靜不動)한 것이 마치 산왕(山王) 같아서 모습 없는 묘한 이(理)의 지혜가 문득 나타나서 자기 마음의 지혜가 해탈의 청량함을 얻도록 한 것이지, 몸과 발이 산에 오르는 것을 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10주위를 수미산 정상에서 설하면서 열 개의 지위에 따른 승진의 불과를 모두 월(月)이라 호칭한 것이니, 이 묘봉산 덕운비구 이하의 열 개 선지식이 맨 처음 범부의 자리에서부터 법의 청량한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선재동자의 행동을 밝힘으로써 10주문을 드러낸 것이니, 묘봉산이라 말한 것은 그 뜻이 정(定)으로부터 바야흐로 능히 자기 마음의 근본 지혜를 현발(顯發)함을 밝힌 것이다.
가령 모든 부처가 만법의 성품 없음과 만법의 모습 없음과 만법의 의지함 없음과 만법의 본말(本末)의 머무는 곳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이 법에 계합해 마치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가 머무는 바에 머무는 것”이 되니, 바야흐로 견(見)이 없어지고 업이 물러남을 얻으매 성스러운 지혜의 흐름 속에 태어나 차별지를 배워서 법계의 무한한 보현 대용(大用)을 성취하고, 널리 다함없는 일체 법계 중생을 교화해서 모두를 근본지(根本智)의 지견(知見)에 들게 하는 것이다. 또한 처음 배우는 범부가 우선은 산에 들어가 고요함을 즐겨야 비로소 정심(定心)을 배워서 바른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방편이며 또한 승낙국 묘봉산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세속의 경계를 여의어서 산의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 또한 승낙(勝樂)의 뜻이니, 이는 범부를 인도하는 방편으로 갖가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이지 다만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넷째, 선지식의 덕을 잡아 명칭을 세움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이 덕운인 것은 덕운이 능히 법을 비내리 듯 중생을 윤택케 해서 청량함을 얻게 한다는 뜻이다. 비구(比丘)란 것은 한역하면 멸쟁(滅諍)이니, 유무(有無)와 시비(是非) 같은 번뇌의 다툼을 멸하기 때문에 멸쟁이라 말하는 것이며, 신변(身邊) 등의 5견과 유무의 2견이 능히 도를 가로막기 때문에 먼저 반드시 무념무사(無念無思)의 삼매로써 지(止)해야 바른 지혜가 나타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멸쟁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묘봉산으로 그 비구의 삼매행을 표시한 것이니, 지혜가 나타나고 정(定)이 없어져 적용(寂用)이 자재로워야 비로소 능히 가르침을 설해서 동몽을 윤택케 하므로 그 명칭이 덕운이 되는 것이다.
간(艮)에 거처하는 것이 몽위(蒙位)가 되고 지(止)가 중생을 윤택케 하고 명(明)을 계발하는 시초이기 때문에 비구 덕운이 산의 정상에 거처하는 것으로써 상(像)을 취해 법을 나타낸 것이니, 이 지우가 신심 있는 범부에서부터 애초부터 삼매의 가행으로 계몽하여 성취(聖位) 중 10주의 첫머리에 들어가서 법의 정상에 이름을 밝힌 것이다. 모습 없는 묘한 지혜와 더불어 회통한 곳을 묘봉이라 호칭하고, 묘한 지혜로 능히 가르침을 설하는 곳에서 중생을 윤택케 함을 덕운이라 호칭하는 것이니, 이 같은 방편을 배우고 닦아서 그 스스로의 마음을 나타내 바른 지혜가 현전한다면 묘봉산 덕운비구의 뜻이 다 자기 몸에 있고 나아가 문수와 보현과 불과가 총체적으로 모두 스스로 있는 것이다. 방편삼매로 이지(理智)가 현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되니, 한결같이 경문에 갖추어져 밝히고 있다.
이것은 법계품 속에서 이 같은 5위의 행문을 안립함으로써 5위 방편의 수행하는 행문(行門)이 모두 법계의 불과로 체(體)를 삼고 법계 보광명근본지가 보현의 차별지를 갖춤으로써 대용이 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시종본말(始終本末)이 여기서 옮기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니, 닦아 나아감의 생경(生硬)하거나 익숙한 곳으로써 모든 지위를 안립하여 1백 10성(城)의 법문을 일으키는 것이 모두 공통적으로 동일한 10바라밀행이며 동일한 37조도품이며 동일한 4선법과 4무량심이라서 총별동이성괴(摠別同異成壞)의 여섯 가지 문이 그 속에 있으니 지혜로 비추어 보면 볼 수 있을 것이다. 1백 10성의 뜻은 앞의 복성동(福城東)에서 이미 다 해석해 마쳤다.
다섯째, 선지식의 도덕이 능한 바를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선지식이 능히 보살행의 가행을 제시함으로써 보현행의 5위의 문호(門戶)를 갖추는 것을 감당하기 때문에 문수가 선재동자로 하여금 덕운비구에게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어떻게 보살도를 닦으며 나아가 어떻게 보현행에 조속히 원만해짐을 얻습니까?”라고 묻게 하자 덕운비구가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한다”고 하시니, 이는 바로 10주 초심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이름하여 초발심주(初發心住)라 한다.
또 “이때 선재동자가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자 기뻐 날뛰면서” 이하 “나만이 이 일체 모든 부처의 경계를 억념(憶念)하여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얻었다”에 이르기까지 38행의 경문은 그 뜻에 11문(門)이 있다. 첫 번째는 선지식의 명칭을 듣게 되서 환희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문수의 발밑에 고개 숙여 절하고서 무수히 돌고 난 뒤 물러나 남행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처소에 이르러 덕운비구를 찾아 구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찾아 구함이 7일이 지난 것이며 다섯 번째는 비구가 다른 산 위에서 느린 걸음으로 경행함을 보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구하는 바를 신청하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덕운이 선재동자가 두 가지 어려운 법을 모두 능히 발하여 행함을 찬탄한 것이며, 아홉 번째는 우선 선재동자가 구해야 할 열 가지 보살행을 드는 것이며, 열 번째는 스스로 자기의 덕을 펴서 선재동자에게 수여하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나만이 이 일체 모든 부처의 경계를 억념하여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해당 지위 법문을 모두 매듭지어서 선재동자에게 주는 것이다. 이하는 다시 미루어서 앞의 지위에 승진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선지식의 명칭을 얻게 되어 환희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경문에서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자 기뻐 날뛴다〔歡喜踊躍〕”고 했는데, 몸을 들어 올려서 땅에서 떨어진 것이 용(踊:뜀)이고 다시 뛰어 그치지 않는 것이 약(躍)이다.
두 번째, 문수의 발밑에 고개 숙여 절하고서 무수히 돌고 난 뒤 물러나 남행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정수리〔頭項〕로 발에다 절하는 것은 자기의 존귀함으로 상대의 발밑에 이르는 것으로서 지극히 공경하는 예(禮)이며, 무수히 돌았다는 것은 법을 공경하여 따르는 마음이며, 물러나 남행한다는 것은 밝은 지혜로 승진하는 것이다.
세 번째, 처소에 이르러 덕운비구를 찾아 구한다는 것은, 승낙국 묘봉산에 이르름을 밝힌 것은 오염 없는 적정(寂靜)이 승낙(勝樂)이 되고, 몸과 마음이 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습정(習定)임을 나타낸 것이며, 시방으로 찾아 구하는 것은 관(觀)이니, 이 시방의 관(觀)이 마음과 경계를 원융하여 가없게 함으로써 허공과 같게 한 것이다.
네 번째, 찾아 구함이 7일이 지났다는 것은 7각분(覺分)으로 추구하고 승진해서 가라앉거나 들뜨는 마음을 없앰을 밝힌 것이다. 정(定)에 처하는 것을 침(沈:가라앉음)이라 말하고 정(定)에서 벗어남을 도(掉:들뜸)라 말하니, 이 두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비구가 다른 산 위에서 느린 걸음으로 경행함을 본다는 것은 그 체(體)와 동일하며 이미 산 정상에 올랐다는 뜻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처음 정체(定體)에 거처할 때는 오히려 정심(定心)이 있다가 7각지분으로 정각의 법신을 추구하자 본래 정(定)ㆍ난(亂)의 체(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니, 초심(初心)에서 선정이라 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멀리 덕운이 다른 산 정상에 거처함을 본다고 말한 것이다. 느린 걸음이란 것은 난체(亂體)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경행(經行)이란 것은 청정한 마음에 머무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정(定)과 난(亂)이 원융해야 비로소 계합해 회통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비록 시방 일체 모든 부처의 정각 슬기가 현전하는 것과 동일함을 얻더라도 이때부터 바야흐로 보살행을 구하면서 보현의 행을 성취함을 감당하는 것이니, 이는 용(用)에 머물지 않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느린 걸음이라고 말한 것이며, 정(定)에 머물지 않고 보살행을 닦기 때문에 경행이라고 말한 것이니, 무릇 수도하는 자는 모두가 신심을 구한 뒤에는 반드시 정문(定門)으로 방편을 삼는 것이 필요하고, 정(定)을 얻은 뒤에는 시방관(十方觀)과 7각지의 관(觀)을 일으킴을 감당함으로써 마음과 경계의 두루 함을 회통해서 정(定)과 난(亂)이 원융하여 신변(身邊)의 2견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 이름을 견도(見道)라 하는 것이며 바야흐로 보살도를 닦고 보살행을 갖춤을 감당하는 것이니, 세속을 따르면 다생(多生)이지만 진(眞)에 있으면 일념(一念)이다.
여섯 번째, 오른쪽으로 세 번 돈다는 것은 승진하여 공손히 따라서 체(體)에 회통하는 마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돈다는 것은 왼쪽은 존귀하고 오른쪽은 낮은 것이니, 스스로 자기를 낮춰서 정교(正敎)를 수순하여 존중하는 것이다. 세 번 돈다는 것에서 1ㆍ3ㆍ5ㆍ7ㆍ9는 양(陽)의 지위이고 2ㆍ4ㆍ6ㆍ8ㆍ10은 음(陰)의 지위인데, 양은 낳고 음은 죽이는 것이니 3은 생(生:낳음)의 뜻이다.
일곱 번째, 구하는 바를 신청한다는 것은 경문에서 “내가 이미 먼저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으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 하고, 나아가 “어떻게 조속히 보현행의 원만함을 얻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여덟 번째, 덕운비구가 선재동자가 두 가지 어려운 법을 모두 능히 발하여 행함을 찬탄한다는 것은 보리심의 발하기 어려운 것을 이미 먼저 발하고, 보살행의 행하기 어려운 것을 이제 능히 행함을 찬탄한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다”고 말한 것은 이미 문수사리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발한 것이니, 보리가 증명해 닦을 것도 없고 구할 바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에 다만 보살의 방편삼매로 가행함을 구하니 그 보리심이 자연히 명백해지면서 더러움이 없는 허공을 구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보살의 삼매로 관조함을 닦아서 집착의 장애를 다스리는데, 그러나 보리심은 닦아 지음〔修作〕과 머물러 없앰〔留除〕의 체(體)가 없어서 범부에 있어서도 줄어들지 않고 성인에 있어서도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묘봉산 정상에서 지(止)ㆍ관(觀)의 두 문과 7보리문의 조현(助顯) 방편으로 보리심이 스스로 명백해지고, 아울러 보리가 명백함에 이르니 곧 보살행의 모든 삼매가 바로 보리라서 다시 따로 별다른 보리가 있어 명백해진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보살이 세간에 처해서 모든 만행을 닦으니, 세간의 만행과 나아가 보리 열반의 성품이 스스로 여읨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법을 가지고 이것을 요달치 못한 미혹된 부류를 교화해 성품이 공(空)한 무구한 지혜를 깨달아 요달케 함으로써 모든 업을 청정케 하여 고(苦)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대비(大悲)라 하니, 마치 화인(化人)이 환사(幻士)를 교화하는 것과 같아서 지혜로 업을 관하여 때〔時〕를 따르고 근기를 따라서 시방에 평등하고 이롭게 하면서도 심의식(心意識)이 없이 지환(智幻)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단지 보살의 일체 모든 행을 구하는 것이니, 이는 곧 행이 보리라서 일체가 생멸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다”고 말한 것은 신심의 보리가 비록 삼매의 가행으로 현발(顯發)함은 아직 없더라도 이미 닦을 바가 없고 구할 바가 없음을 알고 있음을 밝힌 것이며, 이제 보살행을 구한 것은 방편삼매로 서로 인(印)을 침을 밝힘으로써 행과 보리가 실제로는 둘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모든 행이 무상하니 이는 생멸법이다”라고 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경문에서 “일체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법이 멸하지도 않으니, 만약 능히 이같이 본다면 모든 부처가 늘 현전한다”고 했는데, 이로써 아래 경문에서 사유상하(四維上下) 시방의 무수한 부처들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 견해를 얻기 때문이다.
여래가 삼승 속에서 모든 행은 무상(無常)하다고 설한 것은 모든 행에 집착해서 실(實)을 짓는 자를 위해 설한 것이지, 단박에 법계 불승(佛乘)의 이지체용(理智體用)이 걸림이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근(大根)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보리심을 발한 자는 반드시 교리의 권(權)과 실(實)을 알아서 대심을 발함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문】어째서 문수사리라는 한 사람의 선지식 주변에서 법을 구하지 않았으며, 왜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반드시 53선지식을 거치면서 보살행을 구했습니까?
【답】숙세(宿世)의 습기를 다스리는 깊고 얕음과 차별지를 닦는 넓고 좁음과 대자비의 두텁고 엷음과 섭화(攝化)의 많고 적음을 밝힌 것이니, 이로써 5위의 수행 법칙인 지위에 따른 선지식 53인의 1백 10중(重) 인과의 총별동이성과 상(相)을 안립해 닦아 나아가는 법을 잘못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 공(功)에 걸리지 않고 그 행에 우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부터 묘봉산은 방편삼매의 가행 인연으로 자기 법신의 자체 청정하고 본래 의주(依住)함이 없는 보광명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보살행과 더불어 적용(寂用)이 둘이 아닌 문이며, 이하 모든 지위는 보광명지혜로 차별지를 닦고 습기를 다스리며, 아울러 대원(大願)으로 비지(悲智)의 문을 일으켜서 대자비를 길이 길러 행이 법계에 두루 한 것이니, 아래에서 하나하나의 차례를 갖추어 밝히는 것과 같다.
아홉 번째, 덕운이 선재동자가 구해야 할 열 가지 보살행을 먼저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소위 보살행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이하로 모든 열 가지 보살행이 있는 것이 바로 총체적으로 든 것이니 10주의 10, 10행의 10, 10회향의 10, 10지의 10, 11지의 10과 같은 각각의 십십(十十)이 모두 이 열 가지 보살행 속에 있다.
우선 처음 제1의 소위 보살행을 구한다는 것은 10주를 향하는 가운데 초발심주에 짝하는 것이니, 단바라밀문(檀波羅蜜門)으로 주(主)를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으므로 방편삼매로 단행(檀行)의 체(體)를 삼는 것이니, 능히 일체법을 버리기 때문이다.
제2의 보살의 경계를 구한다는 것은 치지주(治地住)에 짝하는 것이니, 계(戒)바라밀로 체를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는 것이다. 법신의 근본지로 계(戒)의 체를 삼고 대자비와 차별지로 용(用)을 삼나니, 가령 해운비구 처소에서 큰 바다를 관찰하여 부처의 출현을 보고 12연생(緣生)을 요달해서 근본지를 이루고 문득 차별지로써 보안경(普眼鏡)과 10왕을 설하는 것은 지혜와 자비의 행이다. 아래 지위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밝힌 것과 같으니, 이는 10지 중 제2지에서 욕계의 미혹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제3의 보살의 벗어나 여의는 도를 구한다는 것은 수행의 주(主)에 짝하는 것이니, 이는 10지 중 제3지에서 상계 2계의 선을 닦아서 저 선정(禪定)의 지위를 초월하기 때문에 상계 2계의 미혹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수행의 주(住) 안에서 제3선지식인 해안국의 선주비구(善住比丘)가 허공 중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경행하는 것은 3계와 선정에 머물지 않음을 얻어서 지혜의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며, 10왕이 공경한다는 것은 지혜와 자비를 아울러 제도하여 편벽되게 수행치 않음을 밝힌 것이니, 지위에 이르면 밝히겠다. 이는 인(忍)바라밀을 체(體)로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는 것이니, 이것은 삼계의 미혹을 멸진하는 것이 바로 벗어나 여의는 도임을 밝힌 것이다.
제4의 보살의 청정한 도를 구한다는 것은 10주 중 제4의 생귀주(生貴住)와 10지의 제4지에서 삼계의 마음이 멸진하고 출세간의 지혜가 현전해야 비로소 세간의 문자와 지혜의 뜻을 배워서 5주와 5지에서 바야흐로 원만하고, 6주 중에서 저 해당비구가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여읜 적멸의 신통으로 화신(化身)이 시방에 두루 함을 얻은 것과 같으니, 이처럼 열 가지 구할 바와 닦을 바의 보살도인 하나 속의 십십(十十)의 행이 5위에 가지런히 드러나서 하나하나가 위와 같이 짝한다. 그 가운데 뜻의 정황과 경문의 뜻이 분명하지만, 깨닫지 않고 읽으면 헛된 얘기로 또한 지나칠 것이니, 하나하나에서 반드시 그 뜻을 얻어야 한다. 10주의 법이 나중의 지위와 10지와 더불어 양식을 짓는 것처럼 이후의 모든 지위도 이 규모를 본받으니, 관습(慣習)이 이미 종결되어 바야흐로 원래 처음의 법에 의거하는 것이다.
열 번째, 스스로 자기의 덕을 펴서 선재동자에게 수여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경문에서 “선남자야, 내가 자재롭고 결정적인 이해력을 얻어서 믿음의 눈이 청정하고 지혜의 광명이 비추고 경계를 널리 관(觀)하고 일체 장애를 여의고 선교(善巧)로 관찰하고 보안(普眼)이 명철해서 청정함을 갖추고 시방 일체 불국토에 가 이르러서〔往詣〕 일체 모든 부처를 공경하고 공양한다”고 한 것은 근본 과법(果法)을 들어 범부로 하여금 즐겁게 믿고 수행케 함으로써 초발심에서부터 수행해 익혀 10지의 공이 종결되매 바야흐로 초시(初時)의 근본 양식의 과법에 의거함을 밝힌 것이다. 또한 법계 속에서 때〔時〕가 옮기지 않고 지혜가 다르지 않고 자비가 다르지 않고 원행이 다르지 않음의 성취한 바로써 법계 대지혜의 늦고 빠름이 없는 가운데서 수행하기 때문에 정견(情見)의 지해(知解)와는 같지 않은 것이니, 수행하는 자는 늦고 빠름이 있는 시분(時分)의 수학(修學)을 짓지 말고 반드시 법계의 채용을 잘 관해서 세정(世情)으로 1찰나라는 계교를 짓거나 삼승지라는 계교를 짓지 말아야 한다.
가령 법계 속에는 길고 짧음이나 멀고 가까움이 전혀 없는 것이니, 이 해행(解行)으로 법답게 수행해 모든 경계에서 생멸을 잘 비추어 집착을 소진시키고, 지혜의 대용을 성취하여 스스로의 마음 경계에 헛되이 섭지(攝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놓아서 탕연(蕩然)할 줄 알면 성품에 맡겨 탄연(坦然)하고, 선정을 익혀 관조하면 집착이 소진하고 지혜가 나타나니, 생멸이 스스로 없고 업의 더러움이 스스로 청정해져서 부처 경계를 회통하여 여래의 마음과 같아진다. 그리하면 불견(佛見)이 스스로 회통할 뿐 거머잡는 것을 말미암지 않는데도 쓸데없이 별다른 다스림을 지어서 마음을 광혹(狂惑)시키니, 다만 스스로 심경의 견(見)이 융통함을 밝히면 집착의 업이 문득 물러나고 견이 없어지며, 집착이 물러나면 일체 민법이 본래 스스로 부스럼〔瘡〕이 없어서 지혜 경계가 낭연(朗然)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불국(佛國)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번거롭게 억지로 견집(見執)을 일으켜 영원히 스스로 빠져들지 말 것이니,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재앙을 얻는 것이지 남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한 번째, “선남자야, 내가 자재롭고 결정적인 신해력(信解力)을 얻어서” 이하 “선남자야, 나만이 일체 모든 부처의 경계를 억념해서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얻었다”에 이르기까지 19행 반의 경문은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와 모든 불국토의 경계를 널리 보는 무애문(無礙門)을 밝히는 것이니, 이는 이 지위 속의 과(果)이다. 이것은 본래 이처럼 부처 경계가 청정한데도 비래(比來)에 망령되게 객진(客塵)을 짓다가, 이제 문수사리로부터 결정적인 믿음의 눈을 얻어 지(止)ㆍ관(觀) 두 문과 7각지분으로 이 참경계에 이르러 계합하는 것이 차이가 없어서 널리 일체 중생의 심경과 자기 마음이 본래 해탈의 불국(佛國)인 줄을 봄을 밝힌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초발심주에서 자기 마음으로 부처의 머무는 바를 회통하는 것이라 한다. 단바라밀로 주(主)를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으니, 이로부터 이하에 단지 소견(所見)의 부처와 부처의 경계가 있는 것은 모두 이 해당 지위 중의 과(果)이며, 이로부터 이하는 공(功)을 앞의 지위인 치지주(治地住)에 천거하는 것이다. 이하 하나하나의 선지식 주변에 모두 본위(本位)와 승진(昇進)의 두 문이 있다.
제2 치지주의 선지식은 명자(名字)와 법문(法門)이 아래와 같으니, 첫 번째 처음 승진문에서 “어찌 모든 대보살의 가없는 지혜와 청정한 행문을 능히 요달해 알겠는가?” 이하 “물러나서 떠났다”에 이르기까지 38행 반의 경문은 덕을 높이 받들어 승진케 한 분(分)이다. 이 단락을 대략 네 단락으로 나누리니, 첫째 “어찌 모든 대보살의 가없는 지혜를 능히 요달해 있겠는가?” 이하 “어떻게 저 공덕행을 능히 알고 능히 설한다고 말하겠는가?”에 이르기까지 29행 반의 경문은 뛰어난 덕을 우러러서 선재동자로 하여금 닦아 나아가게 함을 밝힌 분(分)이며, 둘째 남방에 나라가 있으니 그 명칭이 해문(海門)인 것은 이 선지식의 처소를 제시한 것이며, 셋째 그 곳에 비구가 있으니 명칭이 행운(海雲)인 것은 선지식의 명호를 제시한 것이며, 넷째 덕운의 발에 절한 것은 물러 나가면서 앞의 지위로 승진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하나의 지위 속에 10법문을 주어서 들어가게 하고 10법문을 주어 수행케 함으로써 모두가 1위(位)에서 근본 지위의 과(果)에 올바로 들어가는 것과 앞의 지위의 인(因)을 주는 것이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하는 이를 본받아 유례(類例)한 것이다. 처음 29행 반의 경문은 선지식의 이름을 펴지 않고 미리 그 덕을 찬탄함으로써 스스로 능(能)함이 없음을 추양함을 밝힌 것이며, 나중 9행 반의 경문은 선지식 명칭을 들고 거듭 10법을 듦으로써 미리 듣게 함을 밝힌 것이니, 하나하나 경문에서 갖추어 밝히고 있다.
치지주(治地住)의 두 번째인1)본위문(本位門)을 다시 다섯 단락으로 나누겠다. 첫째 “이때 선재동자” 이하는 정념으로 10법을 관하는 것이며, 둘째 남행해서 해문국에 이르는 것이며, 셋째 해운비구의 처소에 이르러 그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는 것이며, 넷째 구하는 바를 올바로 펴는 것이며, 다섯째 해운비구가 선재동자를 칭찬하면서 소관법(所觀法)을 제시한 것이다.
가령 해문국이란 것은 생사의 바다를 관하여 광대한 불해(佛海)를 삼음을 밝힌 것이다. 해운비구라는 것은 관(觀)할 바의 법을 말미암아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그 마음이 바다와 같아서 법으로 중생을 윤택케 함이 구름과 같으며, 또 성계(性戒)가 바다와 같아서 죽은 시체를 묵혀 두지 않는 것이니, 일체 생멸의 죽은 시체가 근본지의 바다에 이르르니 모두 지혜의 바다가 되어 생멸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 해운비구가 선재동자를 칭찬하여 관(觀)할 바의 법을 주었다는 것은 이른바 대해를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이 해문국에 머문 지 12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12인연의 생사 바다를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이 같은 12유지(有支)에서 일체 범부는 무명으로 덮인 바라서 늘 그 속에 처해 있고, 권교의 보살과 이승은 모두 싫증을 내서 버렸지만, 일승 보살은 이 무명의 12유지를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의 바다로 여겨서 커다란 지혜의 바다로 삼는다. 이는 생멸이 없어서 본래 이 같은 것인데도 범부는 요달치 못하고 망령되게 생사의 무명에 속박되기 때문에 “내가 이 해문국에 머문 지 12년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경문에서 “항상 대해로써 그 경계를 삼는다”고 한 이하에 열 가지 사유의 대해가 있는 것은 그 뜻이 일체 중생이 12연생(緣生)하는 생사의 바다가 광대하고 한량이 없어서 중간이나 변두리, 성품과 모습을 얻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문득 불해(佛海)를 삼음을 밝힌 것이다. 즉 “사유의 대해가 한량없는 온갖 보배로 기묘히 장엄되었다”고 한 것은 생사가 연생하는 바다를 관하여 문득 자성청정불(自性淸淨佛)의 지혜 바다를 이루는 것이 곧 일체지의 보배 공덕으로 장엄함을 밝힌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한량없는 물을 집적했다”고 한 것은 모든 애수(愛水)로써 대자비의 물을 삼는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물의 빛깔이 동일치 않다”는 것은 근본지 속에서 한량없는 차별의 지혜와 자비를 일으키는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한량없는 중생이 머무는 곳”이란 것은 불해(佛海) 속에 한량없는 중생의 머무는 곳이 있는데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을 밝힌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갖가지 대신(大身)의 중생을 수용한다”는 것은 한량없는 보살이 모두 생사의 바다에 처해 하나하나의 신토(身土)가 모두 그 속에 충만하면서도 그림과 같고 빛과 같아서 서로 장애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능히 커다란 구름이 내리는 비를 수용한다”는 것은 보살의 심해(心海)가 커다란 구름의 모든 부처의 법우(法雨)를 감당해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유의 대해가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는 것은 모든 부처의 지혜 성품의 바다가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으며 나아가 네 가지가 광대하고 깊고 넓은 것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문득 바다 속에서 커다란 연꽃이 홀연히 출현해 그 위에 있는 부처가 보안경(普眼鏡)을 설함을 본다”는 것의 뜻은 스스로 생사의 바다를 관해서 문득 자기 여래의 청정한 지혜 바다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자기 부처가 출현하니 근본지와 차별지가 궁극적으로 이 생사의 바다 속을 여의지 않고 원만한 것이다. 10력과 4무외와 일체지(一切智)의 지혜 바다가 모두 생사 바다의 광대한 업력을 돌이켜 성취하기 때문에 생사의 업과(業果)가 다 일체지의 지혜 바다이니, 이처럼 자기 여래의 광대한 지혜 바다와 보현행의 바다를 성취하는 것이 일체 중생과 자기의 12유지연생행(有支緣生行)의 바다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이를 여의고 따로 성불하는 처소와 법이 있다면 옳지 않은 것이다. 바다에서 연꽃이 생기고 그 연꽃 위에 있는 장엄의 온갖 보배는 무명과 모든 유지(有支)가 대지혜 바다가 됨을 요달함으로써 지혜로 행을 따르는 공덕으로 보생(報生)하는 것이다. 인다라(因陀羅)란 것은 주(主)이고 니라(尼羅)란 것은 청색이니, 이 보배 청색이 온갖 보배 중의 주(主)가 되어서 연꽃 줄기가 된다. “분부포호(芬敷布濩)”라는 것은 연꽃이 피는 것이 광대해서 대해에 두루 분포함을 말한 것이니, 이는 행으로써 지혜 작용을 따르는 오염 없는 업으로 성취한 바임을 밝힌 것이다.
“백만의 아수라왕이 그 줄기를 집지(執持)한다”라는 것은 백만의 지혜에 따른 작용이 생사에 처하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 아수라가 대해에 처해서도 겨우 몸의 절반만 가라앉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만행이 지혜를 따르면서 지혜로 주(主)를 삼음을 나타낸 것이니, 지혜와 자비의 만행이 생사의 바다에 처하면서도 늘 일체 온갖 고통의 물결에 함몰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근본지와 차별지와 대자비의 만행을 일시에 똑같이 듦을 밝힌 것이니, 앞의 묘봉산에서 부처 경계인 모습 없는 지혜 광명의 바다를 얻는 것은 다만 모든 부처의 지혜 광명 경계문을 널리 봄을 얻는 것이며, 이 치지주에선 모습 없는 지혜 광명을 갖고서 12유지(有支)를 비추어 근본지의 차별적인 대자비를 성취함으로써 만행이 가지런히 구비됨을 밝힌 것이다. “백만의 마니 보배로 장엄한 그물로 그 땅을 가득 덮었다”는 것은 근본지로써 차별지를 일으켜 가르침을 시설한 것이 두루 함의 보생(報生)임을 밝힌 것이다. “백만의 용왕이 향수로써 비를 내렸다”는 것은 지혜로 자비행을 따르면서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지견(知見)의 향수를 비내려 중생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줌을 밝힌 것이다. “백만 가루라왕이 모두 영락(瓔珞)과 보증대(寶繒帶)를 머금고서 두루 돌면서 아래로 드리웠다”는 것은 지혜가 만행을 따르면서 대자비를 드리워 생사와 함께 함으로써 인접(引接)한다는 뜻이다.
“백만 나찰왕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나찰왕은 곧 비사문왕이니 이 대중을 주관하여 명령하여 한역하면 지국(持國)이니, 수미산 북쪽에 거처하는데 수호(守護)의 뜻을 밝힌 것이요, 그 상(像)을 취해서 법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보살이 대자비로써 늘 생사 바다에 거처하면서 중생을 수호하여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 향하게 함을 밝힌 것이다. “백만 야차왕이 공경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상(像)을 취하여 교만과 잔해(殘害)를 여의자야차가 늘 공경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왕이라 호칭한 것이다. 이는 생사의 악해심(惡害心)을 억누름을 밝힌 것으로서 생사를 수호하여 악해(惡害)가 나지 않아 자재로운 것이 마치 왕과 같은 것에 주로 해당함을 밝힌 것이다. “백만 건달바 왕이 갖가지 음악으로 찬탄하면서 공양한다”는 것은 법락(法樂)으로 중생을 즐겁게 함을 밝힌 것이다. “백만 천왕이 모든 천(天)의 화만(華鬘)ㆍ향(香)과 의복ㆍ당기(幢旗)ㆍ번기(幡旗)ㆍ덮개〔蓋〕 등을 비내린 것은 광대한 요익(饒益)이 다 자재하여 만사가 두루 갖추어진 것이 천왕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하는 유례하면 마찬가지이니, 생사 바다 속의 한량없는 불선(不善)을 돌이켜서 한량없는 선근을 지음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10왕으로 나타낸 것은 생사의 바다에서 무명 12연행(緣行)의 일체 불선(不善)을 요달해 대지혜와 대자비의 선행이 만족함을 성취하는 것이 왕과 같은 것에 의탁해서 비유함을 밝힌 것이다. 모든 보배의 장엄이 대해에 충만하다는 것을 드는 것도 뜻이 또한 이 같은 것이니, 일체의 선하지 못한 행을 돌이켜서 일체의 선행을 짓는 것으로 보생(報生)한 것이다. 즉 지혜를 따르고 자비를 따라서 충만한 찰토를 장엄하는 것이 모두 함도 없고 성품도 없는 지혜의 법인(法印)으로 널리 생사의 바다를 인(印)쳐서 다 복(福)의 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법신의 의주(依住)함이 없는 자성청정한 보광명의 대평등 지혜의 인(印)으로 생사의 바다를 인쳐서 다 법계의 해탈법문을 성취하고, 차별지의 인으로 중생 근기의 조복할 바를 인쳐서 법을 설하는 것을 ‘부처의 출현’이라 호칭하는 것이며, 보안(普眼)으로 모든 법의 연기를 두루 알아서 총별동이(摠別同異)의 본말의 생기(生起)를 잘 아는 것을 ‘보안법문’이라 호칭하니, 마땅히 이같이 생사의 바다를 관하고, 여래의 바다를 관하고, 여래의 차별 없는 지혜 바다를 관하고, 여래의 차별지의 바다를 관하고, 여래의 대자비해(大慈悲海)와 나아가 보현행의 원해(願海)와 가없는 법문의 바다가 모두 이 일체 중생의 12유지(有支)의 생사 바다에 존재하면서 생겨남을 관해야 한다. 만약 이 바다를 벗어나서 따로 성불하는 처소가 있다면 잘못된 것이니, 반드시 알라. 모든 부처와 국토가 이 생(生)에서 거처해 살고 이 주(住)에서 거처해 머무는 것이지 별다른 처소가 없는 것이다.
“그때 해운비구가 선재동자에게 고하길, 선남자야, 네가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했다” 이하 “선남자야, 나만이 이 보안법문(普眼法門)을 안다”에 이르기까지 92행의 경문은 근본 지위에 올바로 들어가는 법문이며, “가령 모든 보살” 이하는 앞의 지위로 승진하는 법문이다. 앞서의 묘봉산은 지관문(止觀門)으로 모든 부처의 경계인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드러냄으로써 진제(眞諦)를 이루는 것이지만, 이 지위는 곧바로 지혜로 세간 속제(俗諦)의 12유지가 부처 경계가 됨을 관찰함으로써 대자비의 보현의 원행(願行)을 통틀어 닦는다. 그리하여 계(戒)바라밀을 주(主)로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으니, 지혜를 기준으로 하면 삼계를 통틀어 관(觀)해서 똑같이 다스리고, 지위를 기준으로 하면 욕계의 미혹과 장애를 치우쳐 다스리는 것이다. 이하 모든 지위에서 다만 보는 바의 경계와 여래의 명호가 있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의 불과(佛果)가 회통한 법이니, 만약 자기 마음을 회통하지 못하면 대면하여도 볼 기억이 없다.
제3 수행주(修行住)에서 첫째 “만약 모든 보살마하살” 이하 “작별하고 물러갔다”에 이르기까지는 이 지위 가운데 덕을 미루어서 승진하는 것이요, 둘째 “이때 선재동자” 이하 “나는 오로지 널리 조속히 모든 부처를 공양하여 중생을 성취하는 무애해탈문(無礙解脫門)만을 안다”에 이르기까지 80행의 경문은 근본 지위에 드는 법문을 밝힌 것이다.
앞의 승진문(昇進門) 중에서 “만약 모든 보살이” 이하 “작별하고 물러갔다”에 이르기까지 13행의 경문은 승진을 밝힌 분이다. 이 단락을 대략 네 문으로 나누겠으니, 첫째 선덕(先德)을 찬탄해 추대하는 것이며, 둘째 선지식의 머무는 곳을 제시한 것이며, 셋째 그 명호를 드는 것이며, 넷째 공경히 예(禮)를 드리고서 물러나 가는 것이니, 문장의 뜻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60유순을 갔다”는 것에서 남행(南行)의 뜻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고, 60유순이라는 것은 이 지위가 상계 2계의 4선(禪) 4공(空)인 8선(禪)의 미혹을 다스려서 이미 이전 지위인 욕계 6천의 업을 초월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60유순이라고 말한 것이다. “해안(海岸)의 취락(聚落)”이란 것은 욕계의 제6욕천을 초월했기 때문에 이 지위는 상계 2계의 선(禪)에 머무는 식념(息念)의 장애를 다스림을 밝힌 것이니 승진의 덕을 잡아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 지위는 삼계의 미혹을 남김없이 다스려서 머무는 바 없음에 머물기 때문에 그 명칭이 선주(善住)가 되는 것이다. 이 지위는 제6 해당비구와 더불어 삼계의 업견(業見)이 없음을 얻는 것은 똑같지만, 아직 습기가 있어서 제6주(住)의 적멸정(寂滅定)의 신통 자재함은 얻지 못하며, 또 세간의 문자기예(文字技藝)도 갖추지 못하고 있고, 또 1분(分)의 삼계 추업(麤業)을 벗어나 여의어서 1분(分)의 신통을 얻긴 하지만 세간 속에서 출세간은 자재롭지 못하다. 그러나 저 여래의 해당비구는 삼계의 정(定)과 난(亂) 두 업이 능히 구속치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2)해당 지위의 법문에 들어가는 것을 대략 다섯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선지식이 수여한 가르침을 염(念)하는 것이며, 둘째 차례대로 남행하는 것이며, 셋째 선지식의 처소에 나아가는 것이며, 넷째 선지식을 보고 공손히 예배하는 것이며, 다섯째 구할 바를 올바로 펴는 것이다.
이 비구가 허공 속에서 왕래하며 경행함을 본 것은 상계 2계의 식심주념선(息心住念禪)에 머물지 않고 삼계를 벗어나는 선에도 머물지 않아서 머물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왕래하며 경행한다고 말한 것이다. 10왕이 공경하여 공양하는 것은 중생을 다스리는 행이 두루 함을 밝힌 것이며, 10바라밀행이 지혜가 자재롭기 때문에 왕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니, 공(空) 중의 장엄은 법공 속에서 일으키는 행으로 보생(報生)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용왕은 지혜가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니, 진뢰(震雷)는 법음(法音)이 널리 진동함을 밝힌 것이며, 격전(激電)은 지혜가 미혹을 타파함을 밝힌 것이다. 긴나라왕이 온갖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법음으로 일체 중생을 열락(悅樂)케 함을 밝힌 것이며, 마후라가는 공경의 뜻이며, 아수라는 생사 바다에 처하면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며, 가루라왕이 동자의 형상을 지어서 채녀(婇女)에게 둘러싸인 것은 만(慢)을 여의어 겸하(謙下)하는 지혜와 자비의 뜻이며, 나찰왕이란 것은 생사 바다에 머물면서 대자비로 중생을 수호한다는 뜻이며, 아차왕이란 것은 대지혜로 중생을 수호하는 뜻이니, 능히 허공을 다니는 것이 빠르기 때문에 지혜가 빠르고 자재로운 것과 같으며, 범천왕은 공경의 뜻이며, 정거천(淨居天)이 공중에서 궁전과 함께 하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이 양육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니, 이처럼 모두가 부사의한 수(數)라고 말한 것은 모두 행이 만유에 두루 하면서 함생(含生)에 널리 두루 함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다섯째, “구할 바를 올바로 편다”는 것 중에서 보살이 닦을 바인 열 가지 불법을 청하는 것과 아울러 열 가지 버리지 않는 법을 구하는 것은 경문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때 선주비구가 선재동자에게 고하길” 이하는 그 법을 올바르게 받는 것이다. 경문에서 “선남자야, 내가 이미 보살의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었다”라고 한 것은 법공의 지혜를 얻음을 밝힌 것이며, 공중에서 경행하는 것은 고요함과 시끄러움에 집착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오염과 청정 두 장애에 능히 걸려 있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무애해탈이라 하고, 해탈을 얻고 나니 오는 듯 가는 듯 행하는 듯 멈추는 듯 수순(隨順)하고 사유하고 관찰하여 즉시 지혜의 광명을 획득하는 것을 이름하여 구경무애(究竟無礙)라 한다. 이로부터 이거(已去)에 타심(他心)과 숙명(宿命)과 신족(神足) 등의 열 가지 무장애(無障礙)는 법공으로 삼계의 미세한 습기를 관찰하여 청정한 업이 현전하매 곧 이 열 가지 무장애 법문을 얻음을 밝힌 것이니, 이는 법공의 관조력(觀照力)으로 삼계의 습기를 다스리고 아울러 삼계를 벗어나는 습기를 다스리고 나니 자연히 이 열 가지 무장애법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선재동자를 찬탄하면서 “이제 다시 발심하여 불법과 일체지의 법과 자연자(自然者)의 법을 구하여 묻는다”고 말씀한 것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와서 일체지의 법으로 세간을 비춤을 밝히는 것이니, 그 뜻은 얻은 바 법공으로 오염과 청정 두 습기를 다스려서 신통의 도력이 자연히 드러나고 일체의 자재로움이 다 자연히 현전함을 밝힌 것이다.
이하 “나는 오로지 널리 조속하게 모든 부처를 공양하여 중생의 무애해탈문을 성취함만을 안다”에 이르기까지는 들어가는 해당 지위의 법문을 모두 매듭지어 마친 것이며, 이하는 앞의 지위로 승진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은 방편의 관조문을 갖고서 부처 지혜와 자연 지혜와 신통의 도력이 스스로 이르름을 밝힌 것이니, 이로써 방편을 버리지 않고 불법을 성취하며 불법을 버리지 않고 보살행을 성취하여 중생을 교화하니, 이는 인(忍)바라밀로 주(主)를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는 것이다. 이 세 비구는 10주 중에 들어가 삼계를 벗어나는 해탈심을 얻음을 밝히므로 또한 비구로써 나타낸 것이며, 이하의 미가(彌伽)는 세속의 사람인데 저자에 거주하는 것은 번뇌에 처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윤자(輪子)의 장엄 법문을 가르친 것은 세간의 기예와 문자를 닦아서 원만케 함을 밝힌 것이니, 그 뜻은 삼계를 벗어난 해탈을 먼저 닦고 나서 바야흐로 세간법을 닦아서 생사에 머묾을 밝힌 것이다. 지혜를 기준으로 하면 하나의 지위가 모든 법을 통틀어 닦지만, 지위를 기준으로 하면 세간의 지혜를 치우쳐 닦는 것이니, 앞이 세 지식(智識)은 이미 삼계를 벗어난 해탈의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먼저 출세간을 닦아야 비로소 세간을 배워서 자재로이 업이 없어서 세간에 염착(染着)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또 출세간의 지혜로 세간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 쉽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3)앞의 지위에 승진(昇進)하는 것 중에 “가령 모든 보살이 대비계(大悲戒)를 지녀서” 이하 “작별하고 물러갔다”에 이르기까지 9행 반의 경문을 대략 다섯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선덕(先德)을 찬탄하면서 추대하는 것이며, 둘째 선지식이 거처하는 나라를 제시하는 것이며, 셋째 그 거처하는 곳을 제시하는 것이며, 넷째 지식의 명칭을 드는 것이며, 다섯째 작별하고 물러가는 것이다.
나라의 명칭이 달리비다(達里鼻茶)인 것은 그 나라가 남인도 경계에 있는데 명칭의 뜻은 번역하지 않았다. 미가(彌伽)는 한역하면 능복(能伏)이니, 출세간의 지혜가 이미 늘 현전하고 세간의 지혜가 이미 구족함을 얻어서 진(眞)과 속(俗) 두 지혜가 이미 원만하면서 능히 사견(邪見)과 이론(異論)을 조복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능복(能伏)이다. 또한 운(雲)이라고도 칭하는데 능히 덕(德)으로 세속에 그늘을 드리워 법을 비내리 듯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운(雲)이 되는 것이다. 성(城)의 명칭이 자재(自在)인 것은 출세간의 지혜가 이미 현전함을 얻어서 세간의 명언(名言)의 뜻에 지혜가 자재롭기 때문에 성의 명칭이 자재임을 밝힌 것이니, 이는 의주(依住)로 명칭을 세운 것이다.
첫 번째의4)해당되는 지위에 들어가는 법문에서 “이때 선재동자” 이하 “묘음다라니(妙音陀羅尼) 광명법문”에 이르기까지 67행의 경문을 대략 열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그 수여한 바의 법을 올바로 염(念)해서 사유하여 승진한 것이다.
둘째, 남행하여 처소에 이르자 미가(彌伽)를 미루어 찾는 것이다.
셋째, 뵙고 나서 공경을 드리는 예(禮)를 마치는 것이다.
넷째, 구할 바를 올바로 펴는 것이다.
다섯째, 미가가 급히 법좌에서 내려와 오체투지(五體投地)로써 초발심을 공경하는 것이다.
여섯째, 금과 은으로 된 꽃과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를 흩어 법좌로 삼아서 선재동자로 하여금 위에 앉게 한 것이다.
일곱째, 선재동자가 능히 위없는 대보리심을 발하여 세간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칭찬한 것이다.
여덟째, 미가의 얼굴에 광명을 놓아서 대중을 모으는 것이다.
아홉째, 미가가 대중을 위해 윤자품(輪字品) 장엄문을 설하는 것이다.
열째, 미가가 선재동자에게 묘음다라니 광명법문을 수여하는 것이다.
“내가 오로지 이 묘음다라니만을 안다”에서부터 이하는 덕을 추양(推讓)해서 승진케 한 것이다. “미가가 급히 스스로 그 법좌에서 내려와 오체투지하여 선재동자에게 공경을 드린 것”에서 거(遽)라는 것은 질(疾)이다. 미가가 대보리심을 능히 발한 자에게 공경을 드림을 밝힌 것이니, 시방 모든 부처와 더불어 동일한 체성이고 동일한 지혜이고 동일한 해탈이라서 인천(人天)이 의지할 바이니 어찌 공경치 않겠는가? 그리하여 선재동자가 먼저 앞의 세 선지식에게 이미 출세간의 보리심을 얻어서 이미 시방 모든 부처의 법신근본지와 같음을 얻고, 미가의 처소에 이르러 세간의 차별적인 언음(言音)과 명자(名字)와 구의(句義)의 지혜를 배움은 세간의 세속 지혜로 출세간의 참지혜에 공경함을 밝힌 것이니, 진(眞)을 잡고서도 세간의 세속 지혜가 있는 것은 곧 진(眞)ㆍ속(俗)이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성(城)의 명칭이 자재(自在)인 것이니, 그러므로 미가가 선재동자가 얻은 모든 부처의 출세간 지혜를 공경하는 것은 바로 세간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공경함으로써 속제(俗諦)의 차별지로 진제(眞諦)의 근본지를 공경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세속 지혜가 근본지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출세간도의 근본지를 귀하게 여기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지가 일체 중생과 더불어 무명생사(無明生死)의 인과를 지으므로 선재동자가 처음으로 깨닫자 미가가 공경한 것이다. 시방 일체 모든 보살이 늘 초발심에 대해 정례(頂禮)하는 것은 처음 깨달은 근본지가 삼계를 벗어나는 지혜로 상응해서 일체 모든 부처의 지혜 해탈과 더불어 동일한 체성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보현행의 바다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이 때문에 미가가 공손히 예를 드리고 또한 법을 안다는 것으로서 만(慢)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 제4 생귀주(生貴住)는 삼계의 업이 물러나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 집안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며, 제4지도 또한 그 명칭이 부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라서 이 주(住)의 지위와 더불어 똑같이 알고 똑같이 얻고 똑같이 보는 것이다. 그 법이 근본에 의거해서 안립했기에 배우는 자가 처음엔 생경하고 나중엔 익숙한 것이다.
“윤자품(輪字品)의 장엄 법문”이란 것은 하나의 명자(名字) 법문과 하나의 음성에서 언음(言音)의 둘이 없는 체(體)와 명자의 둘이 없는 성품으로 갖가지 명자를 장엄하여 조반(助伴)으로 삼아서 인천의 6도 중생을 위하여 갖가지 법문을 설하여 환희를 내게 하고 해탈을 얻게 하지만, 그러나 그 소리 없는 1성(聲)과 명자 없는 1명(名)을 여의지는 않고 중생의 세간 언사(言詞)를 수순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일체 세간 모든 법의 없음을 설할 땐 곧 명자가 없는 것으로 주(主)를 삼고서 곧 일체의 출세간법이 있는 것으로 장엄하고, 만약 있음이 없는 출세간법을 설할 땐 곧 일체 세간의 있음으로써 장엄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주와 반(伴)이 되고 서로 장엄이 됨으로써 유무의 연기가 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장자 중생을 교화하는 데 근기에 따라 개해(開解)하여 허탈을 얻게 함을 밝힌 것이다.
중생과 명자와 언음(言音)이 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 명자의 원만청정한 음성륜(音聲輪)이 걸릴 바가 없어서 하나의 음성으로 한량없는 명자를 설하여 모두 하나의 음성이 한량없는 이름〔名〕과 한량없는 문자〔字〕와 더불어 체(體)를 짓는 것이니, 곧 한량없는 이름과 한량없는 문자가 모두 1자(字)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의 성품이 체가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명자가 일체 소리와 더불어 체를 짓는 것이니, 곧 명자의 체가 스스로 능소(能所)를 분별하는 성상(性相)이 없기 때문이다. 또 중생이 스스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이 소리 없는 소리와 명자 없는 명자와 언설 없는 언설로써 일체의 성품 없는 중생을 교화해 그로 하여금 업을 타파하여 본지(本地)에 이르도록 한다. 또 의지함이 없는 지혜와 소리 없는 소리와 명자 없는 명자가 마치 허공 같아서 일체 6도 중생의 음성에 두루 하니 그 유음(類音)과 같아서 그를 위해 설법하여 환희케 한다. 그러나 신심과 지혜와 명자와 6근(根)은 모두 받는 자와 설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1자 중에 많은 문자의 뜻을 두루 포함해서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지만, 또한 저마다 서로 알지를 못해서 피(彼)도 없고 차(此)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라. 일체의 명자가 모두 유와 무 두 문자로 서로 연기가 되는 것이니, 만약 일체법의 유자(有字)를 설할 때는 곧 일체의 유법(有法)이 스스로 무(無)를 갖추기 때문에 스스로 서로 생성하고 파괴하면서 자유(自有)와 자무(自無)가 자재로우며, 일체법이 본래 스스로 무(無)임을 설할 때는 곧 유법(有法)이 스스로 갖추어져서 유와 무가 스스로 서로 생성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곧 무와 유가 자재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유무의 체(體)를 따라서 법답게 연생(緣生)하기 때문에 다함없는 명언(名言)이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어 세간을 따라 안립하여 다시 서로 생성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모두 하나하나의 문자 속에 다함없는 뜻이 있는 것이 마치 인드라망의 영상(影像)이 서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만약 본원(本源)을 궁구한다면 모두가 연(緣)이 있음을 잡아서 저마다 주재함이 없는 것이니, 반드시 알라. 명자는 소리와 더불어 소리를 짓지 않고 소리는 명자와 더불어 문자를 짓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혜가 본래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처에 두루 하고 중생계와 동등하매 지혜의 체성으로써 그 유음(類音)을 따라 모두 환희케 하고 해탈을 얻게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묘음다라니 광명법문이니, 이는 제4 생귀주의 선지식이다. 정진바라밀을 체(體)로 삼고 나머지 아홉으로 반(伴)을 삼으니, 만약 지혜를 잡는다면 5위를 통틀어 닦는 것이지만 만약 지위를 잡는다면 세속 지혜의 윤자(輪字) 장엄법문을 치우쳐 닦는 것이다. 이전의 세 선우(善友)는 출세간의 지혜를 밝히기 때문에 세 비구로써 나타냈지만, 이 미가와 해탈장자(解脫長者) 두 사람은 세간에 처한 해탈을 밝히기 때문에 또한 세속의 선비로 나타낸 것이다. 나머지 뜻은 경문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앞의 지위로 승진하는 문 중에서 “가령 모든 보살마하살” 이하 “작별하고 물러갔다”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대략 네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덕을 앞선 자에게 추양(推讓)하는 것이며, 둘째 그 선우(善友)의 소재를 제시한 것이며, 셋째 선우의 명칭을 드는 것이며, 넷째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고 나서 작별하고 가는 것이다.
이 따로 국토가 있다고 미루지 않고 다만 남행을 하니, 하나의 취락(聚落)이 있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똑같이 처함을 밝힌 것이니, 정진바라밀이 선바라밀과 더불어 대체(大體)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라를 따로 세우지 않은 것이니, 이 두 벗이 모두 속류(俗流)이기 때문에 진(眞)으로부터 세속에 들어가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문을 융화 회통함으로써 세간과 출세간의 체(體)가 둘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 해당되는 지위에 바로 들어가는 법문 중에서 “이때 선재동자” 이하 “선남자야, 나는 오로지 이 여래의 걸림없는 장엄해탈문으로써 들어가고 나간다”에 이르기까지 1백 40행 반의 경문이 있는데, 이 단락을 대략 열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주어진 법을 올바로 염(念)해서 사유하여 승진하는 것이다.
둘째, 점차적으로 유행(遊行)한 지 12년 만에 주림성(住林城)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 해탈장자를 미루어 구하는 것이다.
넷째, 보고 나서는 공경을 드리면서 구할 바를 바로 펴는 것이다.
다섯째, 해탈장자가 즉각 보살 삼매에 들어가 그 몸속에 시방 각각의 10불찰토(佛刹土)를 나타냄으로써 선재동자의 요청에 답해 그로 하여금 똑같이 들어가게 한 것이다.
여섯째, 해탈장자가 정(定)으로부터 일어나 또한 연설로써 그 정(定) 중 10불(佛) 경계의 대회 도량을 설한 것이다.
일곱째, 해탈장자가 마음을 따르고 염(念)에 응하여 모든 부처가 현전함을 밝힌 것이다.
여덟째, 심념(心念)이 체(體)가 없어서 부처를 그림자처럼 보는 것이다.
아홉째, 마음이 겉과 속이 없어서 시방에 두루 이르면서도 가고 옴이 없는 것이다.
열째, “선남자야, 내가 이 여래의 걸림없는 장엄해탈문에 들어가고 나감을 얻었다”고 한 것은 삼매의 명칭과 출입의 자재로움을 바로 제시한 분(分)이다.
이로부터 이하는 앞의 지위로 승진(昇進)하는 것이다.
“점차 유행한다”고 말한 것은 승진으로 이전 법에 머물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12년”이란 것에서, 앞에서 제2의 해문국 해운비구가 해문국에서 머문 12년은 곧바로 12연(緣)을 관하여 출세간의 해탈을 삼음을 밝힌 것과 같은 것이니, 비구는 바로 출세간의 해탈이기 때문에 생사 바다로써 부처의 체(體)를 삼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주림성(住林城)에 이르기까지 점차 유행한 지 12년이란 것은 12연생법 속에서 세간에 행하긴 하지만 12연생을 선체(禪體)로 삼음을 밝힌 것이니, 해탈장자는 바로 세속의 선비라서 세속에 처해 진(眞)을 행하는 것을 해탈이라 칭함을 나타낸 것이다. 앞서 해운비구는 생사에 머물지 않고 12연생을 관하여 출세간의 마음을 얻었지만, 이 해탈장자는 12연생법 속에서 생사에 처하면서도 연생(緣生)을 무너뜨리지 않고 연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유행한 지 12년”이라 말한 것이니, 이는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고, 이는 생사와 열반에 출몰함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지혜의 통틀어 다스림〔通治〕을 기준으로 하면 10바라밀로 체(體)를 삼지만, 여기선 지위와 별개의 다스림〔別治〕를 기준으로 해서 동별(同別)이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제5의 선바라밀문은 법계 자체의 작위 없는 선(禪) 중에 있는 모든 연생(緣生)은 스스로 성품을 여의기 때문에 일체의 심경이 스스로 법계의 걸림없는 해탈의 선정림(禪定林)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의 명칭이 주림(住林)이니, 일체의 심경(心境)을 지으면서도 용(用)이 없어서 성품이 스스로 머물기 때문이다. “미루어 구한다”는 것은 관찰하여 승진하는 것이며, “해탈장자를 보게 된다”는 것은 진(眞)으로 세속을 회통해서 진과 속 자체의 본성이 해탈임을 밝힌 것이다. “보고 나서 오체투지한다”는 것은 진과 속이 의지함이 없어서 5위가 똑같이 회통한 것이며, 또한 5온과 12연이 다 선림(禪林)임을 밝힌 것이다. “합장”이란 것은 진과속이 회통해서 둘이 아닌 것이니, 이상은 관조의 선정(禪定)으로 그윽이 회통한 것이며, 이하는 말로써 다시 구할 바를 편 것이다.
이하 삼매에 들어가서 시방으로 제각기 10불찰을 나타낸 것은 정체(定體)의 두루 하고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10으로 원만한 수(數)를 삼는다. 또 이하 정(定) 속에서부터 본 10불(佛) 여래와 상수 보살(上首菩薩)은 삼매가 나타낸 자위(自位)의 불과와 행인 것이며, 또 이하 염(念)을 따라 모든 부처를 본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진(眞)에 응하는 것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염(念)하는 바가 다 부처의 경계이며 다시 나머지가 없는 것이니,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모든 염(念)이 다 부처임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제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선바라밀로 체(體)를 삼고 나머지 아홉이 반(伴)이 되는 것이니, 만약 지혜 경계로써 한다면 곧 5위를 통틀어 닦는 것이지만, 만약 지위를 잡아서 한다면 진ㆍ속의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두 장애를 치우쳐 다스려서 5온 12연이 법계 성품의 자체 선용(禪用)이 됨을 회통해 작위 없는 연생(緣生)의 정문(定門)으로써 일체 세간의 심경이 모두 다 선(禪)임을 밝힌 것이다.

新華嚴經論卷第三十四 長者李 通玄 撰從此已下七卷,摠是善財善知識,自此已下,十箇善知識,是十住門。一示善知識所居方面者,何故令往南方?以明託方隅而表法,以南爲正,爲离爲明,以离中虛,以中虛故,离爲明爲日,爲九天,在身爲頭爲目爲心,心達虛無智日自明故取之像表其道也。是故經云:明鍊十方一切儀式主方神。方者法也,但取其法大像無方如日行於天明麗於地,智行於空,明麗於萬物,無不知無不明,取之一法十方混然。二示善知識所居國土者,南方有國名爲勝樂者,爲明理智虛無能淨煩惱,名爲勝樂。三示善知識所居處所者,其國有山名曰妙峯,無念靜禪名之爲山,心空智現名之爲妙理,淨智明慧能破惑名之爲峯,以艮爲山,爲止,爲童蒙,爲小男,爲門闕,以正爲初,明以三陽爻生之始爲正月,一下止則正字也。以十一月一陽生十二月二陽生正月三陽生故取之,爲正月故三,陽生故以三爲正。又三陽生處火生於寅,以火爲日,日生於寅,以日生於寅,是明初生處故,名爲童蒙小男位故,取之以像,表之以法,以文殊師利居東北方淸涼山者,取摩竭提國菩提場之東北方,此山是此南閻浮提菩提場之東北,是此閻浮提之衆山之王,以艮爲山故,萬菩薩於中止住,是文殊師利主伴萬行圓滿之侶也。故以文殊主法,身根本智之妙慧,爲一切諸佛啓蒙之師,有一切處文殊師利,亦乃一切衆生皆自有之,皆從此法初入聖智也。初生佛家與一切諸佛同一智慧解脫知見,從茲之後,學差別智發起願行成大慈悲,號曰普賢法界行也。是故如來取像世間法則用表其法,令易解故,卽以勝樂國妙峯山取像,明其三陽生處以艮爲止,以止則明初生故,以明初生號曰童蒙。亦以文殊師利以發蒙入聖之初故,故號文殊爲童子,菩薩因化立名故,以發起一切衆生,入無相妙智慧故,此明以方便三昧現根本智,初生一切諸佛智慧家故,故立名也,故以取像表法,令學者先以心無念慮寂靜不動如山王,無相妙理智慧便現,自心智慧得解脫,淸涼卽不要身足登山也。是故十住位於須彌山頂上,說十箇隨位昇進佛果,皆號之爲月同此,妙峯山德雲比丘已下十箇善知識,創從凡得法淸涼樂也,此明善財擧行用彰十住門。言妙峯山者,意明從定方能顯發自心根本智慧,如諸佛見萬法無性萬法無相萬法無依萬法無有本末住處,契此法已,名爲住佛所,住方得見亡業謝,生聖智流中,學差別智,成就法界無限普賢大用,廣化無盡一切法界衆生,皆使入於根本智之知見故,亦可凡初學先入山樂靜方學定心用現正智,亦是方便,亦可得名勝樂國妙峯山也。以心離俗境樂山寂靜,亦是勝樂義,引凡方便種種利生,但不住其中也。四擧善知識約德立名,名爲德雲者,以德雲能雨法灑潤衆生令得淸涼之義。此丘者此云滅諍,以滅有無是非煩惱之諍,故云滅諍。以身邊等五見及有無二見能障道故,先須以無念無思三昧止之正智方現,故云滅諍,故以妙峯山表其比丘三昧行,智現定亡寂用自在,方能說教以潤童蒙,名爲德雲。故居艮爲蒙位,以止是潤生啓明之。初以比丘德雲居山之頂,取像表法,明此位從信心凡夫,創始以三昧加行啓蒙,入聖位中,十位之首至法頂故,與無相妙智慧會處,號爲妙峯,以妙智慧能說教處潤益含生,號名德雲,修學如是方便現其自心正智現前,其妙峯山德雲比丘之義,摠在己躬,乃至文殊普賢佛果,摠皆自有,以方便三昧理智現前利衆生行,行之,卽是一。如經具明。此明於法界品中安立如是五位行門,明五位方便修行行門,摠以法界佛果爲體,以法界普光明根本智具普賢差別智爲大用故,始終本末不移此也。以進修生熟處安立諸位,起一百一十城之法門,摠共同一十波羅蜜行,一三十七道品,一四攝四無量心,摠別同異成壞六門,在其中也。以智照之可見,一百一十城義如前福城東已釋訖。五擧善知識道德所能者,此善知識堪說示菩薩行之加行,具普賢行五位門戶。是故文殊令善財問德雲比丘:云何學菩薩行,云何修菩薩道,乃至云何於普賢行,疾得圓滿?德雲比丘當爲汝說,此是入十住之初心名初發心住。又爾時善財童子聞是語已歡喜踊躍已下,至我唯得此憶念一切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法門,有三十八行經,義有十一門,一得聞善知識名歡喜,二頂禮文殊足下遶無數帀辭退南行,三至處求覓德雲比丘,四求經七日,五見比丘在別山上徐步經行,六右遶三帀,七申請所求,八德雲歎善財二種難法皆能發行,九先擧善財所求十種菩薩之行,十自申己德授與善財,十一我唯得此憶念一切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法門,是都結自己當位法門授與善財竟。已下是更推勝進前位。一得聞善知識名歡喜者,經云聞是語已歡喜踊躍,擧身離地爲踊,再踊不已爲躍。二頂禮文殊足下遶無數帀辭退南行者。頭頂禮足,以已之尊高,至彼之足下,是敬極之禮也。遶無數帀,敬順法心,辭退南行,昇進明智。三至處求覓德雲比丘者,明至勝樂國妙峯山,表無染寂靜爲勝樂,身心不動如山,是習定也。十方求覓是觀也。是十方觀圓融心境,使無邊等虛空故。四求經七日者,明七覺分推求勝進除沈掉心也。處定曰沈,出定曰掉,去此二障。五見比丘在別山上徐步經行者,表同其體,已登山頂義也。明初居定,體猶有定心以七覺支分推求正覺法身本無定亂體故,初心有禪可定。故云:遙見德雲住居別山頂也。徐步者,不居亂體也。經行者,表不住靜心也。定亂兩融方明契會。又雖得同十方一切諸佛正覺慧現前,自此方堪求菩薩之行成普賢行,爲明不住用故,故云徐步不住定故,修菩薩行故,故云經行。夫修道者,皆須信心之後當須要,以定門以爲方便,得定之後方堪起十方觀七覺支觀,用會心境遍周,定亂雙融,身邊見謝始名見道,方堪修菩薩道,具菩薩行,隨俗多生在眞一念。六右遶三帀者,勝進敬順體會心成也。右遶者,左尊右卑以自卑已順尊正教。三帀者一三五七九是陽之位,二四六八十是陰之位,陽生陰殺,以三生義也。七申請所求者,經云我已先發無上菩提心而未知菩薩云何學菩薩行如是乃至云何於普賢行速得圓滿。八德雲比丘歎善財二種難法皆能發行者,歎菩提心難發先已發,菩薩行難修今能行云:我已發無上菩提心者,已於文殊師利所發菩提心,爲知菩提無證修無所求故,但求菩薩方便三昧加行,其菩提心自然明白無垢,猶如空中有雲雲亡其虛空自空,不復云求虛空也。以明但修菩薩三昧觀照以治執障,然菩提心無有修作留除之體,在凡不減在聖不增。是故今以妙峯山頂,以止觀二門七菩提分助顯方便菩提心自明白,及至菩提明白卽菩薩行諸三昧卽是菩提,不復別有菩提而自明白,以明菩薩處於世間修諸萬行,世閒萬行乃至菩提涅槃性自離故,以將此法教化迷流不了此者,而令悟達性空無垢之智,以淨諸業令苦不生,名爲大悲,猶如化人教化幻士,以智觀業,隨時隨根,十方等利,無心意識,智幻利生,以此義故,但求菩薩一切諸行,以明卽行是菩提一切無生滅故,云我已發無上菩提心者,以明信心菩提雖未有三昧加行顯發以知無所修無所求故。今菩薩行者以明方便三昧相印,方明行及菩提如實無二,於此之中不可說言諸行無常是生滅法。經云:一切法不生,一切法不滅。若能如是見諸佛常現前,以是下文,得見四維上下十方無數佛等,爲得此見解故。如來於三乘中說諸行無常者,爲執諸行作實者說,非爲大根衆生頓受法界佛乘理智體用無㝵者說故。是故發菩提心者,須識教之權實,可以堪發大心。問曰:何故不於文殊師利一箇善知識邊求法,豈不足耶?何故須經歷五十三善知識處求菩薩行也?荅曰:明治習氣淺深,修差別智之廣狹,大慈悲之厚薄,攝化之多少,以此安立五位修行法則,隨位善知識五十三人,一百一十因果,摠別同異成壞之相,令進修法界不謬,不滯其功,不迂其行故。從此妙峯山,以方便三昧加行因緣,顯自法身自體淸淨本無依住,普光明智與菩薩行寂用無二門已下,諸位以普光明智用修差別智,及治習氣,幷以大願起悲智門長養大悲行周法界,如下具明一一次第。九德雲先擧善財所求十種菩薩之行者,從所謂求菩薩行已下,摠有十種菩薩行,是摠擧十住十,十行十,十迴向十,十地十,十一地十,如是五位中各十十,摠在此十種菩薩行中。且如初第一所謂求菩薩行者向十住中,配初發心住,以檀波羅蜜門爲主,餘九爲伴,以方便三昧爲檀行體,能捨一切法故。二求菩薩境界者,配治地住,以戒波羅蜜爲體,餘九爲伴,以法身根本智爲戒體,大悲及差別智爲用,如海雲比丘所觀察大海見佛出興,達十二緣生成根本智,便以差別智說普眼經,及十王是悲智之行,如下至位方明,此同十地中第二地治欲界惑。三求菩薩出離道者,配修行住,此同十地中第三地,修上二界禪超彼禪定位故,治上二界惑,如此修行住中第三善知識,於海岸國善住比丘,在於虛空中來往經行,明得不住三界及禪定,得智自在故,十王恭敬者,明智悲竝濟不偏修故,至位方明,此以忍波羅蜜爲體,餘九爲伴,此明三界惑盡是出離道故。四求菩薩淸淨道者,如十住中第四生貴住及十地中第四地,三界心盡出世智現前,方學世間文字句義智,五住五地方滿。六住中如海幢比丘得離出入息,寂滅神通化身周遍十方,如是十種所求所修菩薩道一中,十十之行五位齊彰,一一如上配之,於中意況文義炳然?不悟讀之,虛談且過,一一須得其意,如十住法,與後位及十地作樣,已後諸位倣此規模慣習已終。方依初法,十自申己德授與善財者。經云:善男子,我得自在決定解力信眼淸淨智光照,曜普觀境界離一切障善巧觀察普眼明,徹具淸淨行往詣十方一切國土,恭敬供養一切諸佛,此明擧本果法令凡信樂修行從初發心修行慣習十地功終,方依此初時本樣果法也。還以法界中時不遷智不異慈悲不異願行不異之所成就,以於法界大智無延促中修行故,不如情解,有修行者,莫作延促,時分修學,應須善觀法界體用,莫如世情作一剎那計作三僧祇計,如法界中都無脩短遠近故,以此解行如法修行,於諸境界善照生滅,令使執盡而成智之大用,於自心境莫浪攝持,但知放蕩任性坦然,習定觀照執盡智現,生滅自無業垢自淨,會佛境界同如來心,佛見自會非由捉搦,謾作別治令心狂惑,但自明心境見融執業便謝見亡執謝,一切萬法本自無瘡,智境朗然名爲佛國也。無煩强生見執,永自沈淪,自作自殃非他能與。十一自此善男子我得自在決定信解力已下,至善男子我唯得此憶念一切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法門,有十九行半經,明普見十方一切諸佛,又諸國土境界無㝵門,是此位中之果也。此明本來如是佛境淸淨,比來妄作客塵,今從文殊師利所得決定信眼,以止觀二門七覺支分,至此眞境,契會無差別,普見一切衆生心境及以自心本來解脫佛國,此名初發心住,以自心會佛所住故,以檀波羅蜜爲主,餘九爲伴,自此已下,但有所見佛及佛境界,摠是位中之果也。自此已下,推功前位,治地住中已下,一一善知識邊,皆有本位昇進二門。第二治地住善知識名字法門,如下一初昇進門中,從豈能了知諸大菩薩無邊智慧淸淨行門已下至辭退而去,有三十八行半經,是推德勝進分。於此段中約分四段。一豈能了知諸大菩薩無邊智慧已下,至云何能知能說彼功德行,有二十九行半經,明仰推勝德令善財進修分。二南方有國名爲海門,是示善知識處。三彼有比丘名爲海雲,是示善知識名。四禮德雲足是辭去而昇進前位,此明一一位中與十法門令入授十法門令修,皆一位有正入本位之果授前位之因,已下倣此例然,初二十九行半經,明未申善知識名玄歎其德自推無能,後九行半經,明擧善知識名重擧十法而令預聞一,一如經具明。第二治地住本位門中復分爲五段。一爾時善財已下,正念觀十法,二南行至海門國,三至海雲比丘頂禮其足,四正申所求,五海雲比丘稱歎善財示所觀法。如海門國者,明觀生死海,爲廣大佛海。海雲比丘者,因所觀法立名,其心如海,以法潤生如雲。又性戒如海不宿死屍,一切生滅死屍至於根本智海,皆爲智海無生滅故。五海雲比丘稱歎善財與所觀之法者,所謂觀察大海,云我住此海門國十有二年者,明不離十二緣生生死海故,如是十二有支。一切凡夫無明所覆常處其中,權教菩薩及以二乘,皆厭而捨之,一乘菩薩以此無明十二有支,以爲如來一切智智之海,爲大智海無有生滅,本來如是凡夫不了,妄繫生死無明故,云我住此海門國十有二年。經云常以大海爲其境界已下,有十種思惟大海,意明一切衆生十二緣生生死之海廣大無量,無有中邊性相可得,便爲佛海思惟大海無量衆寶奇妙莊嚴者,明觀生死緣生海,便成自性淸淨佛之智海,卽一切智寶功德莊嚴思惟大海,積無量水者,以諸愛水爲大悲水思惟大海。水色不同者,根本智中起無量差別智慈思惟大海,無量衆生之所住處者,以明佛海中有無量衆生之所住處不覺不知思惟大海,容受種種大身衆生者,明無量菩薩咸處生死海中,一一身土咸滿其中如影如光不相障蔽思惟大海。能受大雲所雨之雨者,菩薩心海堪受大雲諸佛法雨思惟大海,無增無減者,諸佛智性之海無有增減,乃至四種無過廣大深廣,便見海中有大蓮華,忽然出現其上有佛說普眼經,意明自觀生死海,便爲自己如來淸淨智海,自佛出興根本智差別智,究竟不離此生死海中圓滿故,十力、四無畏、一切智智海皆迴生死海廣大業力而成就之,生死業果盡一切智智海如是,成自己如來廣大智海普賢行海,不離一切衆生及自己十二有支緣生行海中。若離此者,別有成佛處所法者,無有是處。從海出蓮華,其蓮華上所有莊嚴衆寶,是達無明及諸有支爲大智海,以智隨行功德報生。因陁羅者主也。尼羅者靑色。此寶靑色爲衆寶中之主,爲蓮華莖芬敷布濩者,言此蓮華開敷廣大遍布大海,此明以行隨智用無染業所成,百萬阿修羅王執持其莖者,百萬隨智用處生死而不沒,像阿修羅處大海而纔沒半身,表萬行隨智以智爲主,明智悲萬行處生死海而恒不沒,一切衆苦波濤故,此明根本智差別智大悲萬行一時同擧,明前妙峯山得佛境界無相智慧光明海但得普見諸佛智慧光明境界門。此治地住中,以將無相智慧光明,照十二有支,成根本智,差別智,大悲萬行齊備,百萬摩尼寶莊嚴網彌覆其上者,明以根本智起差別智,設教遍周之所報生,百萬龍王雨以香水者,明以智隨悲行雨戒定慧解脫知見香水浴衆生心垢,百萬迦樓羅王銜諸瓔珞及寶繒帶周帀垂下者,智隨萬行垂大慈悲,同於生死引接義也。百萬羅剎王慈心觀察者,羅剎王者卽毘沙門王,主令此衆也。此云持國,在須彌北面而居,明守護義,取其像以表法,明菩薩以大慈悲常居生死海守護衆生,令一切衆生慈心相向,百萬夜叉王恭敬禮拜者,取之像表離憍慢殘害,夜叉常恭敬,號之爲王,明勝於生死惡害心故,明主當護持生死惡害不生自在如王也。百萬乾闥婆王種種音樂讚歎供養者,明法樂以樂衆生故,百萬天王雨諸天華鬘香及衣服幢幡蓋等者,明廣大饒益皆悉自在,萬事備周如天王,已下例然,摠明迴生死海中無量不善,作無量善根,表以十王,明於生死海達無明十二緣行一切不善,成大智大悲善行滿足,寄喩如王,擧諸寶莊嚴充滿大海,義亦如之。以迴一切不善行,作一切善行之所報生,隨智隨悲莊嚴滿剎,皆以無爲無性智法印,普印生死海,摠成福海,以法身無依住自性淸淨普光明大平等智印,印生死海,摠成法界解脫法門。以差別智印,印衆生根之所調伏,而爲說法,號之爲佛出興也。普眼遍知諸法緣起,善知摠別同異本末生起,號之爲普眼法門,應當如是觀生死海,觀如來海,觀如來無差別智海,觀如來差別智海,觀如來大慈悲海,乃至普賢行願海,無邊法門海,摠在此一切衆生十二有支生死海生。若出此海外,別有成佛處所,無有是處。當知諸佛及以國土生居此生住居,此住無別處也。從時海雲比丘告善財言善男子,汝已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已下,至善男子我唯知此普眼法門,有九十二行經,是正入本位法門,從如諸菩薩已下,是昇進前位法門,前妙峯山以止觀門顯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法門,以成眞諦。此位直以智慧觀察世間俗諦十二有支爲佛境界,通修大悲普賢願行,以戒波羅蜜爲主,餘九爲伴,約智三界通觀同治,約位偏治欲界惑障,已下諸位,但有所見境界及如來名號,摠是自心佛果所會之法。若自心不會對面無睹見之期,第三修行住。一從如諸菩薩摩訶薩已下至辭退而去,是此位中推德昇進。二爾時善財童子已下,至我唯知此普速疾供養諸佛成就衆生無㝵解脫門,有八十行經,明入本位法門。於前昇進門中,從如諸菩薩已下,至辭退而去,有十三行經,明昇進分。於此段中約分四門。一歎推先德,二示善知識住處,三擧其名號,四禮敬辭去。文義如經自具。如從此南行六十由旬者,南行如前所釋,六十由旬者,明此位治上二界、四禪、四空、八禪惑也。過前位欲界六天業故。故言六十由旬,海岸聚落者,明超過欲界第六欲天故。此位治上二界住禪息念障約昇進之德立名此位治三界惑盡住無所住,名爲善住。此位與第六海幢比丘得無三界業見,齊有習氣,未得第六住寂滅定神通自在。又世間文字技藝未具,且得一分出三界麤業,得一分神通,未於世間中出世間,卽如下海幢比丘是。三界定亂二業不能拘留也。第二入當位法門中,約分五門。一念善知識所授之教,二次第南行,三詣善知識處,四見善知識恭敬禮拜,五正申所求。見此比丘於虛空中來往經行者,明不住上二界息心住念禪,不住出三界禪,不住不出故,言來往經行,十王恭敬供養,明攝衆生行遍故,表十波羅蜜行智自在故。如王空中莊嚴,約法空中起行報生龍王,表智自在,震雷明法音普震激電,明智慧破惑,緊那羅王奏衆樂音,明以法音悅樂一切衆生故。摩睺羅是恭敬義,阿修羅是處生死海不沒義,迦樓羅王作童子形婇女之所圍遶,是離慢謙下智悲義。羅剎王者是住生死海,大悲守護衆生義。夜叉王者是大智守護衆生義。爲能行於虛空速疾故,如智速疾自在故。梵天王恭敬義。淨居天空中與宮殿俱,表智悲自在含育義。如是皆云不思議數者,皆表行周萬有普遍含生故。此第五正申所求中請菩薩所修十種佛法幷求十種不捨之法,具如經文。時善住比丘告善財言已下,是正受其法。經云:善男子我已成就菩薩無㝵解脫門者,明得法空智慧,在空中經行,明不著靜亂,於染淨二障不能留滯,名爲無㝵解脫,得解脫已,若來若去若行若止,隨順思惟觀察卽時獲得智慧光明,名究竟無㝵。從此已去卽他心宿命神足等十無障㝵,明以法空觀察三界細習,淨業現前,卽得此十無障㝵法門,此明以法空觀照力治三界習氣及出三界習氣已,自然而得此十無障㝵法。是故歎善財言:今復發心求問佛法一切智法自然者,法明佛出世一切智法用照世間,意明以所得法空用治染淨二習,神通道力自然顯著,一切自在皆自然現前,已下至我唯知此普速疾供養諸佛成就衆生無㝵解脫門,是都結所入當位法門竟。已下以明昇進前位門,此段以明將方便觀照門佛智自然智神通道力自至以此不捨方便而成就佛法,不捨佛法成菩薩行教化衆生,此以忍波羅蜜爲主,餘九爲伴,此三比丘明入十住中得出三界解脫心,還以比丘表之。已下彌伽是俗人居住市肆,明處煩闠而不亂故,教諸人衆輪字莊嚴法門者,明修世技文字令圓滿故,意明先修出三界解脫方修世法住於生死故。約智一位通修諸法,約位偏修世智,爲明前三知識已得出三界解脫神通故,先修出世方學世間自在無業不染著世間故。又以出世間智學世間智易明了故。第二昇進前位中,從諸菩薩持大悲戒已下,至辭退而去,有九行半經,約分爲五門。一歎推先德,二示善知識所居之國,三示其居處,四擧知識之名,五辭退而去。國名達里鼻茶者,其國在南印土境,名義未譯。彌伽此云能伏,爲出世智,已恒現前,世間智已得具足,眞俗二智已滿,能伏邪見異論故,故名能伏,亦名爲雲,以能有德蔭俗雨法故,故名爲雲,城名自在者,明出世智已得現前,於世名言義智自在故,名自在,此依主立名也。第一正入當位法門,從爾時善財童子已下,至妙音陁羅尼光明法門,有六十七行經,約分爲十門。一正念其所授之法思惟勝進,二南行至處推覓彌伽,三見已致敬禮畢,四正申所求,五彌伽遽自下座五體投地敬初發心,六散金銀華無價寶爲座令善財坐上,七稱讚善財而能發無上大菩提心爲世所依,八彌伽面門放光集衆,九彌伽爲衆說輪字品莊嚴門,十彌伽授與善財妙音陁羅尼光明法門。自我唯知此妙音陁羅尼已下,是推德昇進,彌伽所以遽自下座五體投地致敬善財者,遽者疾也。明彌伽致敬能發大菩提心者,與十方諸佛,同一體性,同一智慧,同一解脫,人天所依,何得不敬?以善財先於前三善知識已得出世菩提心已,得同於十方諸佛法身根本智,至彌伽所,學世間差別言音名字句義智,明世間俗智,敬出世間眞智慧故,以明約眞而有世間俗智卽眞俗自在故,故城名自在。是以彌伽敬彼善財所得諸佛出世間智慧,是世間智慧根本故,是以敬之,以表俗諦差別智敬眞諦根本智,以俗智是根本智中起故,令後學者貴出世道根本智故,以根本智與一切衆生作無明生死之因果,善財初覺,彌伽敬之。十方一切諸菩薩恒常頂禮初發心,以貴初覺根本智,是出三界智慧相應,與一切諸佛智慧解脫,同一體性故,普賢行海因茲而起。是故彌伽敬之而禮。又表無知法慢故。又此第四生貴住,明三界業謝,名生在佛家。第四地亦名生在佛家,與此住位同知同得,同見其法,依本而安立之,修學者,初生後熟,輪字品莊嚴法門者,明於一名字法門於一音聲,言音無二體,名字無二性,莊嚴種種名字,以爲助伴,而爲人天六道衆生,說種種法門,令生歡喜令得解脫。然其不離無聲一聲無名一名,爲隨順衆生世間言詞故,說一切世間諸法,無時卽以無名字爲主,卽以有一切出世間法爲莊嚴。若說無有出世間法時,卽以有一切世間爲莊嚴,如是互爲主伴,互爲莊嚴,有無緣起,皆無自性,將用教化衆生,隨根開解,令得解脫,衆生及名字言音皆無自性,以此名字圓滿淸淨音聲無所障㝵。以一音聲說無量名,皆以一音聲,與無量名無量字作體故,卽無量名,無量字,摠是一字故,以聲性無體故,無量名字與一切聲作體故,卽以名字體,自無能所分別性相故,以衆生自無性故,以此無聲之聲,無名之名,無說之說。教化一切無性衆生,令其破業至其本地。又以無依之智,無聲之聲,無名之名,猶如虛空,遍一切六道衆生音聲,同其類音爲其說法,令其歡喜,然身心智慧名字六根,摠無受者說者,然一字中遍含多字之義,互爲主伴,然亦各不相知無彼無此故。是故當知一切名字皆以有無二字爲緣起。若說一切法有字時,卽一切有法自具無故,自相成壞自有自無,自在說一切法本自無,卽有法自具,以有無自相成壞故,卽無與有自在從有無體如法緣生無盡名言,互爲主伴,隨世安立更相成壞皆一一字中有無盡義猶如帝網影像相入。若究之本源,皆約緣有各無主宰,當知名不與聲作聲,聲不與名作字,智慧本無,猶如虛空,遍一切處,等衆生界,以智體性隨其類音,皆令歡喜而得解脫故,名妙音陁羅尼光明法門。此第四生貴住善知識,以精進波羅蜜爲體,餘九爲伴。若約智通修五位,若約位偏修俗智輪字莊嚴法門,前三善友明出世智慧,以三比丘表之。此彌伽及解脫長者二人,明處世間解脫故,還以俗士表之,餘義如文自具。第二昇進,前位門中,從如諸菩薩摩訶薩已下至辭退而行,有十四行經,約分爲四門。一推德於先,二示其善友所在,三擧善友之名,四頂禮辭去。此不推別有國土但南行有一聚落者,明同處俗流,以精進波羅蜜與禪波羅蜜,大體不二故,所以不別國也。爲此二友竝是俗流故,明從眞入俗以和會眞俗無二門,世與出世體無有二,第一正入當位法門中,從時善財童子已下,至善男子我唯於此如來無㝵莊嚴解脫門而得入出,有一百四十行半經,於此段中約分十門,一正念所授之法思惟勝進,二漸次遊行十有二年至住林城,三推求解脫長者,四見已致敬正申所求,五解脫長者卽入菩薩三昧,現其身中十方各十佛剎土,荅善財所請令其同入,六解脫長者從定而起,又以言說說其定中十佛境界大會道場,七明解脫長者隨心應念諸佛現前,八心念無體見佛如影,九心無表裏遍至十方而無去來,十善男子我於此如來無㝵莊嚴解脫門而得入出,是正示三昧之名及出入自在分。自此已下是昇進前位,云漸次遊行者,明勝進不住於前法也。十有二年者,如前第二海門國海雲比丘住海門國十有二年,明直觀十二緣以爲出世間解脫,以表比丘是出世解脫故,以生死海爲佛體故。善財來至此住林城漸次遊行十有二年,爲明十二緣生法中行於世間,然以十二緣生以爲禪體,以解脫長者,是世間俗士,表處俗行眞名爲解脫前海雲比丘,不住生死,觀十二緣生,得出世心。此解脫長者,於十二緣生法中,處於生死,不壞緣生,不著緣生故,云遊行十二年。是不住義故,是生死涅槃無二義故,是生死涅槃無出沒義故。若約智通治,以十波羅蜜爲體,此約位別治,以明同別自在,以此第五禪波羅蜜門。以法界自體無作禪中,諸有緣生性自離故,一切心境莫不自是法界無㝵解脫禪定林故,是故城名住林。一切心境作而無用,性自住故,推求者,觀察勝進也。得見解脫長者者,明以眞會俗眞俗自體本性解脫也。見已五體投地,眞俗無依五位同會也。亦明五蘊十二緣摠禪林也。合掌者,眞俗會而不二也。已上以觀照禪定冥會,已下以言更申所求,已下入三昧十方各現十佛剎者,明定體遍周圓滿故,以十爲圓數也。又已下以從定中所見十佛如來及上首菩薩,是三昧所現自位佛果及行故。又已下隨念而見諸佛者,以自心應眞是佛故,所念皆是佛境界更無餘也。明自心是佛諸念摠佛,餘如文自具。此是第五具足方便住。以禪波羅蜜爲體,餘九爲伴,若以智境之中,卽五位通修。若以約位之中,偏治眞俗靜亂二障,會五蘊十二緣,爲法界性自禪用而無作緣生之定,門以明一切世間心境摠皆禪也。第二明昇進前位中也。新華嚴經論卷第三十四丙午歲分司大藏都監開板

1)여기서 두 번째란 제2치지주 중 첫째 승진문, 둘째 본위문의 그 두 번째를 말한다.
2)제3 수행주(修行住)에서 첫 번째 승진문, 두 번째 본위문 중 두 번째를 말한다.
3)해당 지위 법문을 모두 매듭지어 마친 단락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 단락을 말한다.
4)두 번째의 승진문을 먼저 설명하였고, 이제 첫 번째를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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