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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嚴經 參考 資料

李通玄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4권 [장순용 譯]

작성자문수법공양회|작성시간24.09.17|조회수4 목록 댓글 0
신화엄경론 제4권



3. 교의의 차별을 밝힘②

넷째,1)인과의 원만함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불과(佛果)를 나타내는 데 세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말을 잊고 행을 끊어서[亡言絶行] 홀로 법신의 작위 없음을 밝힌 과(果)요, 둘째는 행(行)으로부터 수행을 쌓아서 행이 원만하고 공(功)이 이루어지는 것이 많은 겁을 지나서야 비로소 성취되는 과(果)이며, 셋째는 초발심 때 10주(住) 초위(初位)에서 체용이 연(緣)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果)이다.
첫째, 말을 잊고 행을 끊어서 홀로 법신의 작위 없음을 밝힌 과(果)라는 것은 『열반무행(涅槃無行)』 등의 경전이 해당된다. “몸을 감추고서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만사(萬事)가 휴식하는 것이다. 또 나찰이 설산동자를 위해 “온갖 행이 무상하니 이는 생멸법이다. 이 생멸마저 소멸하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고 설한 것은 바로 작위 없는 과9果)이니, 행(行)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행으로부터 수행을 쌓아서 행이 원만하고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많은 겁을 지나야 비로소 성취도는 과(果)라는 것은, 권교(權敎) 중에서 행을 닦아가는데 3승기겁이 지나서야 행이 원만해지면서 성취되는 불과(佛果)를 설한 것이다. 무명의 12연기(緣起)가 본래 법신의 지혜란 걸 요달하지 못하고, 세간을 싫어하면서 공관(空觀)으로 현행번뇌(現行煩惱)2)를 굴복시켜 따로 청정한 문(門)을 기뻐하는 것이다.
셋째, 범부로부터 시작해서 10주의 초심에 처음 증득하고 연(緣)에 따른 운용(運用)으로 이루어진 과(果)라는 것은, 『화엄경』이 이에 해당된다. 10신(信)의 마지막 마음이 바로 방펴남매(方便三昧)로써 무명의 12연기를 요달하여 이지(理智)와 대비(大悲)를 성취한 것이니, 바로 문수와 보현의 체용인 법계법문을 갖춘 것이다.
또 화신불이 시설한 인과의 가르침과 행(行)은 결정코 3승기(僧祇)를 지나서 갖게 된 부처님의 모두 수행으로 생긴 것이다. 백 겁 동안 상호(相好)의 업(業)을 닦아야 연등(燃燈)은 광명을 얻고, 불살(不殺)은 장수함을 얻고, 보시(布施)는 자산과 재물을 얻고, 인욕(忍辱)은 단정함을 얻는다. 그리하여 하나하나의 인과가 상대에 속해서 서로 구족한 것 같으니, 이에 갖가지 법문을 대치함으로써 비로소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 않다. 일념(一念)에 단박 법계의 법문을 증득해서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본래 법체(法體)일 뿐이며, 이 법을 시설하고 운용하고 움직이고 고요해지는[動寂] 것은 참되게 운행되는 작위 없는 지혜에 맡기고 있으니, 이 작위 업는 지혜가 바로 부처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도 반드시 이와 같아서 길고 짧음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두 법이 그러한 것이다. 즉 일진법계(一眞法界)에서 법에 맡겨 시위(施爲)하는데, 모두 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덕의 공용(功用)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인(因)에 즉(卽)하고 과(果)에 즉하는 것을 이 보문법계(普門法界)의 이지(理智)로써 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가 저절로 없어지면서 따로 대치하고 따로 닦고 따로 끊을 게 없으며, 변화를 보지 못하는 것은 변화와 불변의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널리 관찰해보면 일체가 법문 아닌 것이 없으며, 해탈 아닌 것이 없다. 다만 스스로의 마음이 억지로 집착을 내서 일이 번잡해지기 때문에 고통의 흐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인 말씀 속의 갖가지 차별을 수고롭혀서 그 설한 곳에서 다시 집착심을 일으킨다. 바로 이런 뜻 때문에 성인의 말씀이 같지 않은 것이니, 어떤 때는 점진적으로[漸] 어떤 때는 원만하게[圓] 함으로써 모든 근기에 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화엄경』은 단박에 원승(圓乘)을 보이고 있으니, 상상승인(上上乘人)은 응당 감당해서 받아들인다. 설사 감당할 수 없는 자라도 반드시 즐겁게 수행해서 궁극적으로는 이 화엄의 대해로 귀류(歸流)해서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파에서 말하는 먼저 인이 있고 나서 나중에 과가 있는[先因後界] 것은 이 화엄교의 인과 과가 동시에 있는[因果同時] 것과는 같지 않으니, 법성(法性)의 지해(智海) 속에선 인과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 인과가 동시(同時)이기에 장애가 없는 것이다. 인과를 얻을 수 있다면 바로 먼저와 나중이 있는 것이니, 얻는 바가 있는 것은 모두가 무상이지 궁극적인 교설은 아니다.
만약 먼저 인이 있고 나서 나중에 과가 있다면, 인(因)도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과(果) 역시 무너진다. 왜냐 하면 연생법(緣生法)은 상속(相續)하지 않기 때문이며, 즉시 단멸(斷滅)하기 때문이며, 자타(自他)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돈 1전(錢)을 셀 때 나중의 돈을 세지 못하면, 나중의 2전이 없기 때문에 1전도 세지 못하는 것과 같다. 찰나는 상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찰나의 인(因)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과(果) 역시 무너지고, 많은 겁(劫)이 상속하지 못하면 많은 겁의 인과도 무너진다. 요컨대 나중의 돈을 셀 때를 기다리고 나서야 앞의 1전이 비로소 성립되듯이 인과 역시 마찬가지다. 요컨대 일시(一時) 중에 사이가 없는[無間] 것을 기다리고 나서야 인과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마치 동전 두 개를 같이 셀 때 앞도 없고 뒤도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겠는가? 또 두 손가락을 세울 때는 누가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가? 이 두 손가락은 마음의 세는 곳을 따라 인(因)이 되고 나중에 세는 것이 과(果)가 된다. 만약 이렇게 앞도 있고 뒤도 있다면, 그 즉시 중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오히려 찰나의 끊어짐[間斷]이 있으니, 찰나의 끊어짐이 있는 것은 인과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동시(同時)라면 손가락 두 개를 세울 때 앞뒤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니, 누가 인(因)이 되고 누가 과(果)가 되겠는가? 역시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화엄경』의 인과동시(因果同時)는 이 같은 먼저와 나중이 없고, 동시(同時)라는 정(情)의 헤아림으로 망상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며, 유(有)와 무(無), 구(俱)와 불구(不俱), 상(常)과 무상(無常) 등의 고착된 인과가 없다. 다만 법체(法體)를 요달할 뿐 시설한 것이 아니며 ,인과가 고착되지 않은 그것을 인과라고 이름붙이며, 정(情)으로 세운 동시(同時)나 먼저와 나중의 망상이 아니다. 만약 이렇다면 『능가경』에서 설한 점교(漸敎)의 설과는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앞에서 말한 교주(敎主)가 다르다는 것이나 문답의 주체가 다르다는 것 등은 바로 문수와 보현과 부처님 등 세 가지 덕의 체(體)와 용(用), 주(主)와 반(伴)이 걸림이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능가경』 속에서는 화신불과 대혜보살이 문답을 통해서 상(相)을 타파하고 있는데, 이는 다만 이(理)에 집착이 없음을 드러나게 했을 뿐이지 연기(緣起)의 법계는 논하지 않았다. 연기의 법계란 것은 법계가 이루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니, 다만 법이 그러한[如是] 줄 요달해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가경』에서는 “먼저 비슷한 사물을 보여주고 나중에 진실함을 준다”고 하였으며, 또 “상(相)을 얻는 것은 바로 식(識)이요, 상(相)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지혜[智]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루어짐[成]과 파괴됨[壞]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엄경』 속의 뜻은 곧바로 참[眞]일 뿐 거짓된 법[仮法]이 없어서 온갖 법이 모두 참되고 순진(純眞)해서 거짓[仮]이 없다. 그리하여 다시 비슷한 참[眞]을 간직하거나 거짓을 간직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중생계가 바로 불계(佛界)”라고 설한다. 이 경전 속에서 문수는 이(理)로써 행(行)을 회통하고, 보현은 행(行)으로써 이(理)를 회통해 두분의 체용이 서로 사무치면서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이루어 먼저와 나중이 서로를 수용한다. 그리하여 경전의 40품이 서로를 포괄하여 먼저와나중이 서로 사무치고 글의 뜻이 서로를 수용해서 한 법문 속에 많은 법을 같추고 있다. 이 때문에 경전에서는 “많은 법 속에서 일법(一法)이 되고, 일법 속에서 많은 법이 된다”고 설한 것이니, 까닭인즉 점교(漸敎) 속에서 설사 뜻이 같은 내용이 약간 있다 해도 대부분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각수(覺首) 등 10수보살(首菩薩)이 제각기 하나의 법을 설해서 10신(信)을 이루고, 10신 중에서 다 같이 1신(信)을 이루어서 열 개의 신위(信位)를 삼으니, 상호간의 체(體)가 이루어지면서 단독으로 시설하질 않는다. 그리하여 10신으로 1신을 이루고 1신으로 10신을 이루니, 원만하게 이해하는 자는 편벽되게 1문(門)만을 취해서는 안 된다. 즉 10혜(慧) 보살과 10림(林) 보살과 10당(幢) 보살과 10장(藏) 보살인 것이며, 또한 10정(定)과 10통(通)과 10인(忍)을 설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단계적 법문이 모두 이같이 상호 성취하는 것이 마치 제석천(帝釋天)의 그물처럼 서로 사무쳐 들어가면서 하나 속에 무량(無量)이요 무량 속에 하나이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체용이 서로 이루어지고 인과가 서로 들어가면서 동시(同時)일 뿐 둘[二]이 아니다. 마치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법혜(法慧)보살이 선정[定]에 들자마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법혜불(法慧佛)이 오고,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선정에 들자마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공덕림불(功德林佛)이 오고, 금강당(金剛幢)보살이 선정에 들자마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금강당불이 오고, 금강장(金剛藏)보살이 선정에 들자마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금강장불이 와서 정수리를 문지른다. 이처럼 각 지위의 안[內]과 각 경지의 속[中]에서 부처님과 보살의 인과가 서로 이루어지고 체용이 서로 사무치니, 도래한 모든 부처님은 바로 과(果)를 밝히는 것이요, 선정에 들어간 보살은 바로 인(因)을 밝히는 것이다.
인과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신지체(法身智體) 위에서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나 11지(地) 등의 행상(行相)으로 세속의 범부들을 인도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문을 세우는 것이니, 각각의 지위가 바로 부처요 부처가 바로 각각의 지위인 것이다.
만약 상상(上上) 근기의 사람 중에서 이 가르침에 믿음을 일으키는 자는 이 법을 의지해서 최초인 10주(住)의 초심에서 올바르게 여래불과지법(如來佛果智法)을 증득하고 나서 일체 보살의 만행(萬行)을 행하는 것이다. 처음 증득한 시초부터 법체(法體)의 지성(智性)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설사 범부와 함께 하면서 많은 겁의 행(行)을 거치더라도 자신의 지견(知見)은 본질적으로 때[時]를 옮기지 않는다. 왜냐 하면 초발심을 할 때 이미 삼세의 부처님과 함께 똑같은 정각을 이루어서 전제(前際)와 후제(後際)가 없기 때문이다.
법이 그렇기[如是] 때문에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는 3승기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불과(佛果)를 성취하는 권교(權敎)와는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과(果)를 얻는 것이 3승과는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또 『화엄경』은 여래의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타고서 불과를 얻기 때문에 2승들이 얻는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3)가 없으며, 또 먼저 인(因)이 있고 나서 나중에 과(果)가 있는 권교 보살의 행상(行相)도 없다.
다섯째,4)각 지위(地位)에서 행하는 행상(行相)이 아름을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무릇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그 근기에 의거해서 여섯 가지 수레(乘)와 세 가지 오위십지(五位十地)의 차별적이 행상이 같지 않다.
여섯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 염불(念佛)을 통해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문이다. 둘째, 정토의 관행(觀行)을 지어서 정토에 태어나는 문이다. 셋째, 공관(空觀)과 무아관(無我觀)을 닦아서 타고 가는 문이다. 넷째, 유(有)와 무(無)를 회통하는 관지(觀智)의 문이다. 다섯째, 점진적으로 불성을 보아서 닦아 나아가는 문이다. 여섯째, 불성을 단박에 증명하는 원융(圓融)의 문이다. 대승을 수행하는 자는 이 여섯 가지 수레의 행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 가지 오위십지(五位十地)란 무엇인가? 첫째는 가전(仮詮)5)과 가지(仮智)6)와 가진여(仮眞如) 등을 닦아서 오위십지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는 분수(分修)와 분진(分眞)과 분증(分證)의 일분진여(一分眞如)7)로 오위십지를 세우는 것이다. 셋째는 돈수(頓修)와 돈진(頓眞)과 돈증(頓證)인 부처님 경계의 원만진여(圓滿眞如)로 오위십지의 행상을 세우는 것이니, 이 불승(佛乘) 중에서는 가법(仮法)이 없어서 언설과 명상(名相)이 모두 참이다. 이상 세 가지 오위십지의 행상 속에는 보리(菩提)를 향하는 자와 보살행을 행하는 자와 불과를 원만하게 하는 자가 모두 들어 있다.
이제 총체적으로 거론해 저마다 자기가 타고 있는 종지(宗旨)로 방편과 실제를 분간해서 장애를 벗어나게 하며, 수행의 공(功)이 있어서 서로를 비방하지 않게 하며, 차별을 분명히 요달함으로써 의심이나 후회가 없게 하니, 이는 수행이 진척된 자로 하여금 방편과 실제를 분명히 요달하게 했기 때문이며, 성불한 자로 하여금 그 공(功)에 막히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첫째, 염불의 힘과 계(戒)를 닦아 염원을 발하는 힘으로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은 화신불의 정토이지 진실한 정토가 아니다. 성품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명(無明)이 바로 모든 여래의 근본지(根本智)임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유위인 것이다. 예컨대 『아미타경(阿彌陀經)』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정토의 관행(觀行)을 지어서 정토에 태어나다는 것도 화신불의 정토이니, 마음의 상념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며, 유위이기 때문이며, 불성의 근본지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이 이에 해당된다.
셋째, 공관과 무아관을 닦아서 타고 가는 문이라는 것은, 처음으로 반야를 설해서 범부의 실유(實有)와 2승의 생공(生空)의 아집(我執)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즉 공법(空法)을 많이 닦기 때문에 유(有)와 무(無)가 다 공문(空門)이 되면서 공(空)만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데, 비록 6바라밀을 행하고, 갖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서 6신통을 얻고, 보살행을 행해서 그 복(福)이 인천(人天)보다 뛰어나더라도 부처의 집안[佛家]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불성을 보지도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법을 분석해 공(空)을 밝혀서 무명이 바로 여래의 지혜란 것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도 이와 똑같이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이미 서술했다.
가령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8만 4천 법문을 갈무리한 12부 경전을 다른 사람에게 설해서 듣는 자들로 하여금 6신통을 얻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다.”
이 같은 설법은 『법화경』이 불승(佛乘)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보살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래는 『열반경』 속에서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의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모든 보살들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면서 “우리가 무량겁 동안 생사(生死)에 유전한 것은 단지 무아(無我)에 미혹됐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같은 잘못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야지만[廻心] 비로소 성품을 보아 나[我]가 지혜[智]인 줄 요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반야 속에서 문수사리보살로 문답이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일분(一分)의 법신불성(法身佛性)의 도리를 논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문수반야(文殊般若)가 그것이다. 가령 성문과 함께 문답을 했다면, 이는 다분히 2승의 생공(生空)의 아집을 타파하기 위해서 법의 공(空)함을 설했기 때문이며, 또 보현과 함께 문답을 한 것은 다분히 행문(行門)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무릇 법은 근기에 따라 성하기 때문에 단순히 문답의 주체[主]와 객체[伴]를 보면 그 표면과 이면을 알아서 추측해 볼 수가 있다.
넷째, 유(有)와 무(無)를 회통하는 관지(觀智)의 문이라는 것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해심밀경』의 제3시(時) 교설에서는 9식(識)이 정식(淨識)이 되어서 업 종자와 함께 의지처가 된다고 설했으며, 아울러 3성(性)과 3무성(無性)을 설했다. 이른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상호간에 이루어지고[成] 무너지면서[壞] 온갖 집착과 장애를 벗어나면,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성품이 저절로 열반이다. 그래서 『심밀경』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의 법이 다 성품이 없어서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 본래부터 적멸이라서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항상 열반이니, 지혜 있는 자라면 어느 누가 비밀스런 뜻[密意]이 없겠는가?”
이 경전은 반야의 공(空)만을 두드러지게 닦은 자가 연생법(緣生法)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고, 공견(空見)이 현전해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전에서는 인연 소생의 모든 법은 그 자체가 열반이라서 결코 거부할 필요가 없으며, 유(有)를 말하든 공(空)을 말하든 상호간에 배척시켜서 유(有)도 생각하게 하지 않고 무(無)도 생각하게 하지 않음을 성취하고 있다.
또 이 경전에서는 비록 화엄과 이름이 똑같은 10지(地)를 세우고 있진 하지만, 내용상의 의미와 궤칙(軌則)은 서로가 다르다. 또 지(地) 이전에 3현(賢)이나 10신(信) 등의 지위가 없으며, 다만 10지를 세워 미혹의 행상(行相)을 끊을 뿐이며, 아울러 불지(佛地)가 11지(地)가 되다고 설하면서 그 11지 안에서 다시 열한 가지 번뇌와 스물 두 가지 어리석음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지 이전의 3현과 10신의 행문(行門)을 세우지 못했으니, 그 이유는 이 경전이 지 이전에 도(道)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제3시(時)의 가르침이라서 중간에 단지 유(有)와 무(無)를 회통시켰을 뿐이지, 화엄처럼 문수와 보현의 이(理)와 사(事)가 서로 수용하면서 행(行)이 원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화엄경』 속에서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법문을 설할 때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같이 와서 인가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불국토가 다 이 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열세 가지 종류로 서로 가피(加被)해서 진실을 나타내고 있다. 3승의 경전 속에서 11지를 설했더라도 모든 중생을 완전히 다 수용하지 못했으니, 이는 세 가지 10지 중에서 가전(仮詮)ㆍ가지(仮智)ㆍ가진여(仮眞如)의 10지행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이 11지는 불위(佛位)인데도 그 불위 안에 오히려 장애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11지 이전에는 진리(眞理)와 본지(本智)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참된 이법의 지혜[全眞理智]라면 어찌 11지에 열한 가지 번뇌가 있겠는가? 이미 번뇌가 있다면, 이는 곧 각 경지마다 불지(佛智)가 있어서 인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점진적으로 유(有)와 무(無)를 회통해서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이지, 보현과 문수처럼 이(理)와 사(事)의 지혜로써 대용(大用)을 다해 설한 것은 아니다.
『인왕경(仁王經)』에서는 5위(位)의 10지법문을 설하고 있는데, 범부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익혀 나아가 여러 생의 수행을 쌓으면서 가진여(仮眞如)를 닦는 것을 세우고 있다. 또 어떤 종파의 가르침은 지(地) 이전에 미혹을 굴복시키고, 지(地) 위에서 도(道)를 보는 것을 설하고 있다. 혹은 미혹에 걸려 끊지 못하다가 3승기겁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같은 가르침들은 방편의 근기를 대치하기 위해 임시로 시설한 것일 뿐 진실한 교설은 아니다. 다만 화신불이 설한 것은 모두 중근기나 하근기를 인도하는 것이라서 진실을 다한 교설은 아니니, 나머지는 이에 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2승인이 마음을 돌이켜 권교(權敎)로 나아가면서 우러러 흠모하는 불과(佛果)와 권교의 보살이 우러러 흠모하는 불과는 승기(僧祇)가 다 찬 뒤에 단지 삼천대천세계 부처님의 보과(報果)8)만을 기꺼이 추구하는 것이지, 10불(佛)의 경계인 비로자나의 다함 없는 시방 경계[無盡十方境界]의 보과(報果)를 희구하는 것은 아니라서 『화엄경』 속의 10신보살이 희구하는 불과만 못한 것이다. 즉 승해심(勝解心)9)을 갖춘 구족범부(具足凡夫)는 기꺼이 10신(身) 비로자나의 경계를 닦아서 깊은 마음[深心]이 광대하고 무극중현(無極重玄)10)의 오묘한 경계를 다하고 있으니, 이는 권교의 부처님 경계가 모두 분제(分齊)와 한계를 세우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권교는 여히 근기가 좁고 넓지 못한 자를 위하고 있기 때문에 방편을 세운 것이다.
가령 『해심밀경』 속에서는 10지(地)의 미혹을 끊는 분제(分齊)가 나온다. 제일 초지(初地)에서는 악취(惡趣:악도)의 번뇌업에서 생긴 온갖 오염의 장애를 대치(對治)한다. 제2지(地)에서는 미세하게 잘못 범하는 현행(現行)의 장애를 대치한다. 제3지에서는 탐욕의 장애를 대치한다. 제4지에서는 선정과 법을 애착하는 장애를 대치한다. 제5지에서는 생사와 열반 중에서 일방적으로 등지거나 나아가는 장애를 대치한다. 제6지에서는 거친 모습[★相]인 현행의 장애를 대치한다.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細相]인 현행의 장애를 대치한다. 제8지에서는 무상무작(無相無作)11)의 공용(功用)과 유상(有相)으로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장애를 대치한다. 제9지에서는 일체의 능숙한 언변으로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장애를 대치한다. 제10지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를 대치한다. 선남자(善男子)는 이 사마타(奢摩他)12)와 비발사나(毘鉢舍那)13)로 여래지(如來地)14)에서 지극히 미세하고, 가장 지극히 미세한 번뇌장과 소지장(所地障)15)을 대치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단지 지(地) 이전의 3현(賢)의 초발심에서 불과(佛果)의 법문을 단박에 증득해 널리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등각(等覺) 등의 각 지위를 인(印)칠 수 있다. 마치 도장을 찍을 때 문상(文相)이 구족해 먼저[前際]와 나중[後際]이 없는 것과 같아서 초발심 때에 삼계의 무명(無明)이 바로 불지(佛智)의 바다가 된다는 것을 단박에 인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래의 법신(法身)ㆍ지신(智身)ㆍ대비(大悲)의 인(印)으로써 일시에, 단박에 세간이 법계의 대용(大用)이 되는 것을 인치면서도 먼저와 나중이 없다.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권교(權敎)의 법을 벗어난 시설과는 같지 않으며, 또 세 가지 근기를 인도해 하나의 진실[一實]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16)점진적으로 불성을 보아서 닦아 나아가는 문이라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열반경』에서는 “10주 보살은 불성을 약간 볼 뿐이며, 나아가 10지(地)라도 불성을 분명히 요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으며, 『기신론(起信論)』에서도 “10주 보살이 법신을 약간 보아서 8상성도(相成道)를 화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기시론』의 해석처럼 원력(願力)으로 한 것을 말하는데, 이미 원력이라면 실보(實報)가 되지 않는다. 즉 총체적으로는 불성을 점진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권교의 분수분증(分修分證)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인도하는 종지이지 원교(圓敎)는 아니다.
이같은 부류에게도 초발심에서부터 증득한 불과(佛果)가 승기(僧祇)를 정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령 『열반경』에서 “광액도아(廣額屠兒)가 현겁(賢劫) 중에 성불한다고 수기해다”고 설했듯이, 천제(闡提)가 처음 발심할 때도 겁을 초월한 공(功)이 있거늘 하물며 믿음의 근기[信根]를 갖추고 또 약간이라도 성품을 볼 수 있는 자가 어찌 승기의 겁이 있겠는가? 세상에 덕 있는 자들은 광액도아를 화신으로 만들어진 자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사실을 왜곡해서 인정(人情)을 좇는 것일 뿐 부처님의 뜻[佛意]은 이애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방편으로 인도해서 진실로 나아가게 할 뿐, 어찌 겁을 보고 정을 두게 해서[見劫存情] 근본 종지를 어기게 할까보냐? 점진적으로 인도해서 용녀와 선재가 일념 속에 성불한 데 이르러야 비로소 실다운 교설[實說]을 이루는 것이다. 3승의 협소한 견해는 단지 오랜 시간만을 생각해 시간의 체성(體性)이 없는 데서 쓸데없이 탄식하고 흠모하고 있다. 이는 줄 없이 스스로를 묶는 것이니, 어찌 쉬기를 기약하겠는가?
앞에서 세 가지 10지(地)를 간략히 설명했다. 또 한편 경전의 뜻으로 생각해 보면 여섯 가지 10지가 있는데, 3승의 권교 중에 세 가지 10지가 있고, 또 실교(實敎) 중에 세 가지 10지가 있다. 가령 『인왕경』ㆍ『해심밀경』ㆍ『대품경』의 세 경전에서 설한 10지는 다분히 가진여(仮眞如)의 문을 세워서 10지의 행상(行相)을 이룬 것이니, 이는 권교에 있는 세 가지 10지다.
네 번째는 『열반경』에서 설하고 있다. 즉 “10주(住)보살은 불성을 약간 볼 뿐이며, 10지보살이라도 불성을 분명히 요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불성을 타고 갈 수레로 삼아 분수분증(分修分證)하는 10지를 밝히고 있다.
다섯 번째도 『열반경』에서 설하고 있다. 즉 소가 설산의 비니초(肥膩草)를 먹으면 순수한 제호(醍醐)를 얻는다는 것 등은 바로 초발심에서 이미 부처님의 정각과 같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일승십지(一乘十地)다. 즉 『화엄경』의 교설은 법계문의 한량없고 다함 없는 중현(重玄)17)의 법으로써 10지를 이루고 있다. 이상 여섯 가지로 10지가 된다.
『열반경』에 나오는 광액도아와 『법화경』에 나오는 용녀는 찰나에 성불하는데, 모두 방편으로 인도해 진실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다. 다만 3승의 10지보살이 흠모하는 불과(佛果)의 경계는 삼천대천세계가 보불(報佛)의 과(果)가 되는 것을 흠모하는 것인데, 이는 실교(實敎) 중의 세 번째 화신(化身)이라서 실다운 보신(報身)이 되지는 못한다.
세 가지 화신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화신은 온갖 중생의 몸을 화현해 만드는 거이요, 두 번째 화신은 하나의 4천하(天下)와 28천(天)18)을 교화하는 부처님으로 화현하는 것이요, 세 번째 화신은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으로 화현하는 것이다. 실다운 보신이란 10신(身) 비로자나가 서로 융화하고 사무쳐서 중현(重玄)의 경계가 법계와 그 양(量)이 같으며, 나아가 티끌까지 사무쳐서 하나하나의 티끌 안이 모두 법계와 동등한 것이니, 자세히는 『화엄경』에 설해져 있다.
3승의 가르침은 이미 방편이라서 설하고 있는 법문과 불보(佛報)의 경계가 모두 실다운 교설이 아니다. 그래서 『대품경』 속에서는 3승에 공통인 가르침이라고 이름붙여서 3승 공통으로 10지를 행하고 있다.
제2의 『해심밀경』이 설한 10지는 곧바로 이해가 깊고 은밀한[解深密] 광의(廣意)보살과 광혜(廣慧)보살과 청정혜(淸淨慧)보살 등을 위한 것인데, 다 함께 문답의 주체[主]와 객체[伴]가 돼서 10지문(地門)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성문(聲聞)과는 문답의 주체와 객체가 되는 것을 함께 하지 않으니, 『심밀경』은 반야의 공(空)만을 두드러지게 즐기는 자를 돌이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품경』이나 『심밀경』 등의 경전은 단지 10지의 명칭만을 설하고 있으며 지(地) 이전의 10신(信)과 3현(賢)의 4자량위(資糧位)는 없다.
제3의 『인왕경』 속에는 5위(位)의 행상 법문이 구족해 있다. 이처럼 권교(權敎) 속에서 설한 3현(賢)과 10성(聖)은 다분히 모두 가진여(仮眞如)를 설해 단계적으로 점점 미세해지면서 불성을 밝히고 있으며 ,궁극에는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르는 것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권교는 참[眞]이 아니라서 그 교설의 지위나 단계도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4의 여래승(如來乘) 중 『열반경』 속에서 “10주 보살은 불성을 약간 볼 뿐이며, 10지 보살도 불성을 분명히 요달하지 못하고 있다”한 것은, 『기신론』 속에서 “10주 보살이 불성을 약간만 보고도 서원력(誓願力)으로 8상성도(相成道)한다”고 한 것과 같은 흐름이다. 비록 원만하지는 못하지만 약간이라도 성품을 본 힘 때문에 세력이 이 같은 것이다. 예컨대 태자가 인연이 있게 되면 부왕이 군정(郡政)을 통솔하라고 칙령을 내리는데, 태자는 왕의 진짜 아들이기 때문에 세력이 그 같은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즉 조금이라도 불성을 보았기 때문에 여래의 진짜 자식이 되어서 불가(佛家)에 태어나는 것이니, 이는 가진여와 가지(仮智) 등으로 초지(初地)를 기다린 뒤에나 비로소 불가에 태어나다고 말하는 다른 종파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을 보는 힘이 다른 종파보다 진실로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니, 조금 보는 것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전체를 얻는 것이랴?
제5의 원교(圓敎)의 10지를 밝힌다는 것은, 일념에 도(道)를 체득하니 지혜가 온전한 부처라서 무명(無明)의 바탕[體]이 온전한 지혜인 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하나가 이루어지니 일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니 일체가 무너진다”고 설하고 있으니, 나중에 상세히 다시 밝히겠다.
이상 다섯 가지 10지를 말했다. 이중 원교(圓敎)를 제외한 네 가지 10지의 단계적 행상(行相)은 하근기와 중근기를 교화함으로써 중생을 제접하는 문중과 대동소이하게 본교(本敎)의 법문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권교에서 세 가지 가립(仮立)한 진여로 관지(觀智)를 삼는 것은 법신 불성체 위에서 점(漸)과 돈(頓)의 두 문을 세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령 권교 속에서는 비록 초지(初地)에서부터 악취(惡趣)의 번뇌업에서 생기는 온갖 오염의 장애를 대치하고, 나아가 제7지 속에서는 미세한 모습[細相]의 현행에서 오히려 이루어지는 장애를 대치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상지(無相智)를 장애해서 완전히 자재로지 못하고, 8지의 모습도 없고 작위도 없는[無相無作] 공용(功用)과 모슴이 있는[有相] 공용에 이르러서도 역시 완전히 자재롭지 못하다. 이처럼 각각의 지위 속에서 자재롭지 못한 것은 모두 장애가 있기 때문이니, 앞서 지위에 따라 미혹을 끊는 단계의 법문을 의거해 설한 『해심밀경』이 이에 해당된다.
3승 속에 있는 10지는 모두 이와 같아서 단계적으로 미혹을 끊는 것이 3승기를 거치면서 백 겁 동안 상호(相好)의 업을 닦는다. 저 『열반경』 등의 불성문(佛性門) 속에서는 각 지위의 단계를 세우고 있다고 전에 이미 밝혔지만, 가령 『본업영락경(本業瓔珞經)』에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10주 보살은 동보영락(銅寶瓔珞)19)인 동륜왕(銅輪王)으로서 백 가지 복이 있는 자식으로 권속을 삼고, 하나의 불국토에 태어나서 부처니에게 행(行)을 배워 2천하(天下)를 가르친다. 10행 보살은 은보영락(銀寶瓔珞)인 은륜왕으롯 5백 가지 복이 있는 자식으로 권속을 삼고, 세 불국토에 태어나서 부처의 가르침과 행을 받아 3천하를 교화한다. 10회향 보살은 금강보영락(金剛寶瓔珞)인 금륜왕으로서 천 가지 복이 있는 자식으로 권속을 삼고, 시방 불국토에 들어가 일체 중생을 교화해 4천하에 거처한다.
초지(初地) 이상은 백보영락(百寶瓔珞)이며, 2지(地)는 천보(千寶), 3지는 만보(萬寶), 4지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보배로 영락을 삼으며, 나아가 10지에서는 보배 영락이 점점 더 광대해진다. 아울러 10지와 11지로 불법왕(佛法王)과 3현(賢) 보살을 통해서 모두 열다섯 가지의 윤왕위(輪王位)가 있으니 자세한 것은 『영락경』에서 설한 것과 가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3현 보살은 삼계 번뇌의 조잡한 업의 길[★業道]과 조잡한 상속의 과[★相續果]를 조복(調伏)시키고, 또한 조잡한 번뇌[★見道]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희인(喜忍)20)은 3업(業)의 길을 조복하고, 이구인(離垢忍)21)은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명인(明忍)22)은 6천(天)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염인(炎忍)23)은 온갖 소견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승인(勝忍)24)은 의심하는 생각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현인(現忍)25)은 인업(因業)의 길을 조복하고, 무생인(無生忍)26)은 과업(果業)의 길을 조복하고, 부동인(不動忍)27)은 색인(色因)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광인(廣忍)28)은 심인(心因)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적멸인(寂滅因)29)은 마음과 색(色) 두 습기의 업의 길을 조복하고, 무구인(無垢忍)30)은 습기와 과(果)의 업의 길을 조복하니, 습기는 전에 이미 없앴으나 과(果)는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자야, 3현을 조복과 단절[伏斷]이라 이름붙이고, 희인(喜忍) 이상도 역시 일체 번뇌를 조복하고 단절한다. 그리하여 각인(覺忍:등각위)이 나타날 때는 법계 안의 모든 무명(無明)이 단박에 끊어져 남는 것이 없다. 이상 열한 가지 인(忍)과 3현 보살로써 삼계의 조잡한 번뇌를 없애기 때문에 조복해 단절한다.”
주해(注解)에서는 “3현은 바로 보살이다. 즉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인 지(地) 이전의 3위(位)이다”라고 말한다.
또 『영락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자(佛子)여, 초지에서 일념무상(一念無相)한 법신의 지혜로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성취해서 2제(諸:진제와 속제)를 함께 비추면, 마음마음마다 적멸해서 법류수(法流水) 중에선 범부의 심식(心識)으로는 두 종류의 법신을 측량할 수 없다.”
해석해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의 법신은 하나는 법성신(法性身)이고, 다른 하나는 보화신(報化身)이다. 또 법류수라는 것은 초지 보살이 법성지(法性智)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에 맡겨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닦거나 이룩한 바가 없으니, 어찌 2지(地)나 3지(地)가 있겠는가?”
그래서 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지(地) 이전의 3현 보살이 성인 지위에 들면, 다만 법성의 흐름 속에서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여 자연히 묘각(妙覺)의 대해(大海)로 흘러 들어간다. 불자여, 나아가 3현과 10지의 명칭도 또한 명칭이나 모습이 없는 것이지만, 단지 응화(應化)했기 때문에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에서는 10지의 명칭이 있는 것이다.”
이 경전은 『화엄경』을 설한 뒤 3승인을 교화한 것이다. 즉 별도의 때[別時]에 처음 성불한 보리수 밑에서 화엄의 법문을 거듭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이 『영락경』 속에서 다 말씀하시길, “내가 예전에 보광명당(寶光明堂)에서 정토의 법문31)을 설하고, 나아가 도리천(忉利天)에서 10주를 설했는데, 이제 다시 간략히 설한다”고 했으니, 자세히는 경전에 설해져 있다. 이 견전의 다음 내용에 보면, 10지를 설한 이후에는 제3선(禪)에서 11지 법문을 설했지만, 경전이 서방에서 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경전에선 다음과 같은 설한 것이다.
“불자야, 내가 먼저 제3선 중에서 8선(禪)의 대중들32)을 모아 놓고,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33)이 불화삼매(佛華三昧)에 든 것을 설하면서 백만억의 게송을 읊었는데, 이제 간략하게 한 게송의 뜻만 설해서 중생의 마음을 열겠으니, 그대들은 받아 지녀라.”
또 10지에서 미혹을 끊는 법상(法相)의 문을 세운 『영락경』에 의거해 보자. 경전에서는 “불자여, 앞의 3현은 삼계의 무명을 조복하면서도 조잡한 업[★業]만을 없앤다. 왜냐 하면 생을 받을[受生] 때 인연 있는 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주해(注解)에서는 “3현 보살이 처음 법성의 지혜를 받아 불가(佛家)에 태어날 때는 자비심이 두드러져서 삼계의 모든 중생이 자식이 된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을 것을 서원(誓願)한다. 자비심 때문에 삼계의 업을 윤태하게 하고, 이 때문에 삼계에서 생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경전에서는 “업을 윤택하게 해서 미래의 과(果)를 받기 때문에 그 이름을 식용(息用)이라고 한다”고 설한다. 이에 대한 주해에서는 “삼계에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작용을 쉬게[息用]된다”고 말한다.
또 경전에서는 “그러나 사랑의 작용[愛用]을 끊지 않는다”고 설하는데, 주해에서는 “삼계의 업은 없으나, 자비의 업으로 생을 받는 일은 없지 안다”고 말한다.
경전에서는 “11인(人)이 법계 속에 있는 삼계의 업과(業果)를 조복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는데, 이에 대한 주해에서는 “11인이라는 것은 10지와 등각위(等覺位)를 합쳐서 11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경전에서는 “초지부터 7시까지는 삼계의 업과(業果)가 모두 남김없이 조복되다가 8지에서야 비로소 소진(消盡)한다”고 설하는데, 이에 대한 주해에서는 “7지 이전에는 조복시켜 소진하는 것이요, 8지에선 법에 부합해서 소진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경전에서는 “8지 이상은 부처를 짓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왕궁에 태어나서 출가를 하고, 도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마지막으로 열반에 들어감으로써 모든 화신불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삼계를 사랑하는 과보는 없고, 오직 무명의 습기만이 존재한다”고 설하다. 이에 대한 주해에서는 “이 8지가 현전하니, 무공용지(無功用智)에 맡겨서 중생을 제도하지만 중생의 상(想)이 없다. 7지 이전은 자비가 두드러지고, 8지 이후는 무상지(無相智)와 현전지(現前智)가 두드러져서 비록 생을 받지는 않더라도 운행에 맡겨[任運] 사람을 제도한다. 법을 사랑하는 습기가 없지 않기 때문에 불지(佛地)에서 처음으로 소진하고, 본원력(本願力)을 쓰기 때문에 변화로 태어나다”고 설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내가 옛날 하늘에서 생(生)과 불생(不生)의 뜻과 업생(業生)과 변생(變生:변화의 생)을 설했다. 불자여, 성인의 지위 안에는 두 가지 업이 있다. 하나는 혜업(慧業)이다. 상념도 없고 낳음도 없는 지혜로서 마음마음마다 법을 반연하면서도 비춤이 없음[無照]을 낳으니, 이를 혜업이라고 이름붙인다. 또 하나는 공덕업(功德業)이다. 진실한 지혜[實智]가 유제(有諦:세제)를 초월하여 유위(有爲)와 무루(無漏)에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쌓기 때문에 공덕업이라고 이름붙인다. 초성(初聖) 이상은 생을 받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변역(變易)으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원력으로 하기 때문에 백 겁 또는 천 겁 동안 변화의 생에 머문다.”
이상은 모두 『본업영락경』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이는 바로 원교(圓敎) 속의 돈(頓)이기도 하고 점(漸)이기도 한 두 문(門)이다. 돈(頓)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 경전에서 “3현 보살이 곧바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서 법성의 흐름 속에 들어가 그 흐름에 맡겨 불해(佛海)에 이르면서도 다시 작위하는 것이 없다”고 설한다.점(漸)이라는 것은 미혹을 끊는 단계를 따라 하나하나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이 『영락경』의 3현(賢) 10주(住)에서 곧바로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은 초지(初地)에서 도를 보고, 그 이전에는 미혹을 조복하는 권교와는 다른 것이다. 가령 『화엄경』과 비교해 보면, 「십지품」의 초지는 범부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는 것이지 성인이라야 배운다고는 말하지 않으니, 그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다.
또 나아가고 물러서는[進退] 것을 밝히는 것인데, 『영락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자여, 나아가는 자도 있고 물러서는 자도 있다. 10주 이전에는 항하사(恒河沙) 중생이 모든 범부의 법에서 보리심을 발하여 불법을 배우고 행하는데, 믿는다는 생각[信想心] 속에서 행하는 자가 물러남이 있는[退分] 선근(善根)이다. 온갖 선남자(善男子)가 1겁ㆍ2겁에서부터 10신을 수행하여 10주에 들지만, 이 선남자가 그때 초주부터 제6주(住)에 이르기까지 만약 제6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정관(正觀)이 현전하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이 호념(護念)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제7주(住)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늘 머물면서 물러나지 않고[常住不退] 자재하므로 7주 이전은 물러남이 있는 영역[退分]이라 이름붙인다.
불자여, 만약 물러서지 않는 자라면, 제6 반야바라밀에 들어가 공(空)을 수행하면서 나도 없고[無我] 상대도 없고[無人] 주체도 없는[無主] 자라야 궁극적으로는 태어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정해진 불위(佛位)에 들어간다. 불자여,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자라면, 1겁이든 2겁이든 보리심을 물러서게 되는데, 예를 들면 나의 초회(初會)의 대중 중에서 8만 명이 물러난 것이다. 즉 정목천자(淨目天子)나 법신왕자(法身王子), 사리불(舍利弗) 등은 제7주에 들고자 했지만, 도중에 악한 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범부의 불선(不善) 속으로 물러나게 되어 종자의 성품[種性]을 훈습하는 사람이라 칭하지도 못하고, 외도(外道)로 물러나게 되어 1겁, 10겁, 나아가 천 겁 동안 대사견(大邪見)과 5역(逆)34)을 지어서 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게 없었다.”


『열반경』에서는 “항상 머문다[常住]는 두 글자를 듣고도 오히려 7겁 동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며, 『화엄경』에서도 “설사 여래의 명호와 설법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해도 역시 종자를 성취해 반드시 해탈을 얻어서 성불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제6주(住)의 마음과 범부로부터 믿는 지위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물러남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0신(信) 소에서 뛰어난 이해[勝解]를 성취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면서 문득 교만한 마음을 내어 착한 벗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진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다. 이런 교만한 마음으로 인천(人天)에 오랫동안 거처하면 홀연히 악업이 일어나서 대지옥의 업을 숙성시킬 수 있다. 만약 태만함 없이 한결같이 믿으면서 훌륭한 벗을 구한다면,즉시 이러한 잘못이 없을 것이다. 가령 권교의 제6주심(住心)이라면 물러나는 지위[退位]가 있을 수 있지만, 실교 중에 선 정체된 자를 질책함으로써 닦아 나아가게 한 것이다. 예컨대 사리불은 성문을 나타내 보인 것이지 실제 성문은 아니라서 지어낸 방편이 모두 중생을 제도해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저 권교의 제6주심은 실제로 물러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왜냐 하면 권교에선 지(地) 이전의 3현이 모두 도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행의 작업이 모두 유위(有爲)이고, 간직하고 있는 무명(無明)이 다 절복(折伏i 할 것이라서 공(功)이 강하지 못한 자는 문득 퇴보하는 마음을 낸다. 만약 절복(折伏)하는 것에 힘이 있다면, 또한 퇴보하여 상실하지는 않으리니, 마치 뱀에게 독이 있지만 주문의 힘 때문에 독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불법(佛法) 속에 신심(信心)을 심어서 항상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어진 사람을 공경하고 따를 것이며, 모든 악인에게도 항상 마음이 자애로울 것이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배울 것이며, 뛰어난 법을 들으면 한시라도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할 것이며, 온갖 허망함을 가르침에 의거해 없애버려서 3보리도(菩提道)에 항상 정진하면서 쉬지 말아야 한다. 무릇 인생의 법은 법에 부합하면 그만이다. 다만 악을 키워 나가지만 않는다면 어찌 퇴보할 것을 염려하겠는가?
이상 다섯 가지 10지에서 권교의 세 가지 10지는 양상이 다르다. 즉 『대품반야경』에는 단지 10지의 명칭만이 있는데, 제8지는 대인지(大人地)라 하고, 제9지는 간혜지(乾慧地)라 해서 그 명칭이 약간 다르다.
『해심밀경』에 나오는 10지의 명칭은 『화엄경』에 나오는 10지의 명칭과 같긴 하지만, 초지(初地)에서부터 11지(地)에 이르기까지 열한 가지의 추중(★重:조잡한 번뇌)과 스물두 가지의 어리서음[愚癡]이 있다. 이상의 두 경전에선 단지 10지만이 있을 뿐 지(地) 이전의 4자량위(資糧位)는 없다.
『인왕경』에서는 지(地) 이전에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의 4자량위를 설하고 있긴 하지만, 10신은 내범(內凡)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실교(實敎)의 10주 초심(初心)에서 거룩한 불성에 올라 그 바탕[體]이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것과는 다른 것이니, 10신 속에서 만약 자기 자신과 불신(佛身)의 인과가 둘이 아닌 줄 믿지 못한다면 신해(信解)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출현품」에서는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자기 마음의 일념 속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서 정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 같은 신심(信心)을 믿음이라고 이름붙일진대, 어찌 10주의 지위에서 이 마음을 증명하지 못하겠는가? 만약 이 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찌 주(住)라고 이름을 붙이겠는가“ 바로 이런 의미 때문에 불주(佛住)에 머무는 거을 주(住)라고 이름붙인 것이며, 따라서 초발심의 주(住)에서 문득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또 권교에서 10지를 설할 때는 바탕(地方)에서 온 부처님과 법을 설하는 자가 이름이 같지가 않으며, 또 한편 이름이 같은 부처님께서 증명하고 성취시켜 인과가 같다는 것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 때문에 권교의 지위와 교문(敎門)은 모두 작은 근기의 중생을 제접해서 방편을 시설하고 있으니,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속에 걸리지 말고 마땅히 승진(昇進)을 기뻐해야 한다.
이 때문에 『화엄경』에서는 오위십지(五位十地) 법문의 때를 설하고 있다. 즉 10주(住) 중에 법혜(法慧)보살이 서정에 들어 10주 법문을 설하고자 할 때는 시방의 천불세계(千佛世界) 밖에서 천불세계 미진수(微塵數)의 이름이같은 법혜 부처님께서 손으로 법혜보살의 정수리를 문지르고, 어업(語業)으로 찬탄하며, 법혜에게 10지력(智力)을 주어서 열세 가지로 가지(加持)를 한다. 10행(行)의 지위 때에는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선정에 들어 시방의 만불세계(萬佛世界) 밖에서 만불세계 미진수의 부처님께서 오는데, 모두 이름이 공덕림으로서 역시 열 세 가지로 공덕림보살에게 가지(加持)를 한다. 10회향을 설할 때는 시방의 백만불세계(百萬佛世界) 밖에서 백만불세계 미진수의 부처님께서 오는데, 한결같이 이름이 금강당(金剛幢)으로서 역시 열세 가지로 금강당보상에게 가지(加持)를 한다. 10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 같은 것은 인과가 같음을 밝히는 것이니,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십지론(十地論)』은 천친(天親)보살의 저술로 『십지경(十地境)』을 주석한 것인데, 『십지경』은 『화엄경』 속의 「십지품」이다. 뜻을 해석한 문장의 의미는 3승과 1승의 뜻에 통하였는데, 이해하는 자는 다분히 3승의 뜻만 이해할 뿐 1승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그 이유는 1승의 도리는 정해(情解)로는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정(情)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더라도 의심의 그물이 걷히지 않고 또 한편 부처님의 말씀만 믿기 때문에 스스로 의심이 끊어지지 않는다. 오직 오래도록 사념이 없으면서[無思] 고통을 싫어하지 않는 자와 고요함[寂]에 걸리지 않는 자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깨달은 자라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10지에서 세 가지는 방편이요, 나머지 두 가지 10지는 실교(實敎)이니, 이 때문에 『영락경』에서는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이 10지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3승 권교의 10지가 비록 이름은 같을지라도 시설하고 있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실천과 이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상황[當處]에서는 충분히 설했지만, 이름이 같은 부처님께서 다 같이 그 믿음을 인(印)쳐서 인과가 계증(契證)되는 것은 여전히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섯째,35)단박에 불성을 증명하는 이지(理智)와 만행(萬行)의 원융한 문을 밝힌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화엄경』의 제1회(會)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에서는 여래께서 이빨 사이에서 광명을 놓고, 또 미간(眉間)의 가운데에서 과덕(果德)의 광명을 놓으며, 또 보현보살을 삼매에 들게 하여 「세계성퓌품(世界成就品)」과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과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을 설하게 함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과법(果法)을 설해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내게 한다.
이미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내게 했다면, 제2회에선 문수사리로 하여금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과 「사성제품(四聖諦品)」을 설하게 하고, 두 족륜(足輪) 밑에서 광명을 놓아 그 광명이 10불찰(佛刹)미진수세계를 지나서 제각기 십 불찰미진수보살이 모두 와서 모이고, 또 「광명각품(光明覺品」과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과 「정행품(淨行品)」과 「현수품(賢首品)」을 설해서 10신(信)의 문을 성취한다. 두 족륜 밑의 광명은 가장 밑[最下]이 되니, 이는 믿음에 드는 첫머리에서 믿음을 인(因)으로 삼음으로써 믿음이 최하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래 미간의 과광(果光)이 방출되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앞의 「여래현상품」에서 여래께서 미간에서 광명을 놓아 두 족륜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부처님의 과덕(果德)을 들어 신위(信位)를 이룸으로써 모든 배우는 자로 하여금 과법(果法)을 믿어 초증(初證)을 이루게 해서 10신의 문에 들어가게 함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시방에서 각각 십 불찰미진수의 10수(首) 보살이 모두 십색세계(十色世界)의 10지(智)여래의 처소로부터 와서 10신(信)을 도에 들어가는 시초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모여든 보살은 모두 이름이 수(首)가 된다.
십 색세게란 10신 보살이 실답게 증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범부가 비록 과덕(果德)의 부처 경계를 믿긴 하지만, 여전히 색진(色塵)을 벗어나지 못해서 색(色)으로 국토를 삼음을 밝힌 것이다.
10주 보살은 이(理)와 사(事)가 원만하고 뚜렷해서 화(華)로써 국토를 삼으니, 이는 처음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이(理)와 사(事)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10행 보살은 간택(簡擇)을 통달해서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원만하고 뚜렷하므로 혜(慧)로써 국토를 삼는다.
10회향과 10지 보살은 묘용(妙用)이 자재하기 때문에 묘(妙)로써 국토를 삼는다. 이는 해당되는 지위의 법문의 처소로부터 와서 법으로 국토를 삼는 것이지, 4대(大)인 땅ㆍ물ㆍ불ㆍ바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성스러운 지혜에 들어간 자는 이미 이러한 장애를 벗어나 있다.
10신의 지위 속에 있는 보살은 모두 10지불(智佛)의 처소에서 온 것이니, 이른바 부동지불(不動智佛)ㆍ무애지불(無碍智佛)ㆍ해탈지불(解脫智佛) 같은 10지 불은 지혜가 과덕(果德)이 되고 있다. 따라서 10신의 지위에선 과(果)로써 믿음을 삼기 때문에 믿음이 과로부터 와서 그 과로 인을 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만약 과로써 믿음을 심지 않으면, 곧 믿을 바가 없기 때문에 믿음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무슨 이유로 문수사리가 상수(上首)가 되었는가? 문수사리는 계몽(啓蒙)의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 문수사리의 오묘한 공덕을 신심(信心)을 발하는 시초로 삼음으로써 법신의 근본지(根本智)를 발휘하고 있다. 다라서 항상 문수사리를 과(果) 이전의 믿음으로 삼으며, 보현으로 차별지(差別智)를 밝히는 것은 과(果) 이후의 행이 된다. 그래서 선재동자는 처음 문수를 친견해서 믿음의 문을 삼았으며, 나중에 미륵을 친견해서 불위(佛位)를 삼았고, 또 그 뒤에 자신의 몸이 보현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은 바로 불과(佛果) 이후의 행인 것이다.
문수는 소남(小男)이 되고 보현은 장자(長子)가 되니, 이 두 성인이 합체(合體)한 것을 부처라고 이름붙인다. 문수는 법신의 오묘한 지혜(妙慧)가 되고, 보현은 만행의 위엄 있는 덕[威德]이 되기 때문에 이 체(體)와 용(用)이 자재한 것을 부처라고 이름붙인다. 문수를 소남이라 한 것은 믿음이 법신의 근본지혜를 증명하면서 처음 생기기 때문이니, 처음으로 본지법신(本智法身)을 증명함으로써 불가(佛家)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현을 장자라고 한 것은 근본지에 의거해 행을 일으켜 차별지를 행하면서 불가의 법[佛家法]에 있는 모든 바라밀을 다스려 일[事]마다 자재하기 때문이다. 항상 행문(行門)으로 불가의 법을 건립하고 불가의 일을 다스린다. 다만 경전 중에서 문수를 문답의 주체로 삼은 것은 다분히 법신불성의 문을 밝히기 위한 것이요, 보현을 문답의 주체로 삼은 것은 다분히 그 행(行)을 논하기 위해 보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 문수가 사자(獅子)를 타는 것은 처음으로 법신불성의 근본지가 미혹을 끊는 준마임을 증득한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보현이 향상왕(香象王)을 타는 것은 행(行)이 질서가 있어 위덕(威德)이 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 문수가 항상 동방 금색세계에 있는 부동지불의 처소에서 거처하는 것은, 금(金)이 백색이 되어서 더러움을 벗어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금색은 법신을 나타내는 것이며, 부동지는 법성신의 근본지에 의거해서 지혜의 작용을 일으키면서도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보현보살이 늘 동방에 있는 보위덕상왕불(寶威德上王佛)의 처소에서 거처하는 것은 만행이 보배가 되어서 그 만행 때문에 위덕을 성취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만약 행(行)을 갖춘 자라면, 법보신(法寶身)으로써 자재롭기 때문에 위덕이 두려움 없이 자유로워 왕이 된다. 그러나 행을 갖추지 못한 자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서 설사 높은 지위에 머물더라도 왕이 되지는 못하니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와 함께 동방에 있는 것은 법신과 지신(智身), 이(理)와 사(事), 체(體)와 용(用)이 본래 스스로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문수가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에 거처한다는 것은 간괘(艮卦)가 동북방을 주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간(艮)은 소남이 되고 동몽(童蒙)이 되니, 문수가 늘 범부를 교화해서 계몽으로 견성하게 하고, 아울러 근본지의 첫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 보현과 함께 동방에 있는 것은 동방은 묘위(卯位)이고, 묘(卯)는 진괘(震卦)라서 진은 장남이 된다. 또 해는 동방에서 뜨고 봄볕은 싹을 틔워 만물을 다 생장시키고 고루 다 비추는데, 이는 이(理)와 지(智)가 서로 사무치면서 그 바탕[體]이 하나일 뿐 둘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니, 근본지와 차별지가 별개가 아닌 체(體)와 용(用)으로 만행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子)는 불위(佛位)가 되고, 축(丑)은 10신이 되고, 인(寅)은 10주가 되고, 묘(卯)는 10행이 되고, 진(辰)은 10회향이 되고, 사(巳)는 10지가 되고, 오(午)는 등각(等覺)이 되고, 미(未)는 밝음[明]을 감추고서 세속에 들어가 세속과 함께 하면서 미혹을 교화하는 것이 되고, 신(申)ㆍ유(酉)ㆍ술(戌)ㆍ해(亥)는 교화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처럼 법을 세운 것이니, 법이 응당 그러한 것이다.
역괘(易卦)에서는 감(坎)이 군주가 되고, 이(离)가 신하가 되고, 진(震)이 상상(上相)이 되고, 유(酉)가 상장(上將)이 되고, 동(東)은 청룡이 되고, 서(西)는 백호가 되고, 전(前)은 주작(朱雀)이 되고, 후(後)는 현무(玄武)가 된다. 청룡은 길한 경사로움이 되고, 백호는 흉한 해로움이 되고, 주작은 그 밝음이 되고, 현무는 그 어둠이 된다.
따라서 여래는 감(坎)을 다스려 밝음을 발하고, 보현은 지혜의 재상이 되어서 만행을 주재하며, 관음(觀音)은 대자비의 으뜸이 되어서 흉하고 위급함을 다스리는 상장(上將)이 되고, 문수는 몽매함을 깨우치는 으뜸이 되어서 늘 믿음을 제접하는 스승이 된다. 서로 융화하고 사무침으로써 불가(佛家)의 법을 유지하는데, 모두 중생을 중도에 머물게 하고 온화한 성품에 처하게 하며, 지혜와 자비로써 사물을 이롭게 한다. 그리하여 몸은 모두 금색이고, 눈과 머리카락은 감청색이며, 바탕[體]은 희고 모습[相]은 황색이라서 진(眞)에 응한 화기(和氣)가 되니, 모두 형상 없는 형상요 빛깔 없는 빛깔이 된다.
만약 그 체용으로써 한다면 하나하나의 보살이 모두 지혜와 공덕의 가없음을 갖추고 있고, 그 법칙으로써 한다면 늘 문수를 첫 믿음의 시초로 삼고 있다. 이제 남북(南北)으로, 또한 동서(東西)로 일문(一門)을 세우니, 만약 서로 원융하면서 중중현현(重重玄玄)함을 논한다면 한 방위[一方]가 모두 열[十]을 갖추고 있다. 경전에서는 “어느 곳[一切處]이나 보현보살이고, 어느 곳이나 금색세계이며, 어느 곳이나 문수사리이고, 어느 곳이나 부동지불(不動智佛)이다”라고 설하며, 또 경전에서는 “불신(佛身)이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중생 앞에 두루 나타나서 교화받을 근기(根器)에 응해 다 충만하게 하지만, 부처님은 짐짓 이 보리수에서 거처한다. 일체 불찰(佛刹)의 미진(微塵)들 바로 그곳에서 부처님께서 하나의 털구멍에 앉아 있으니, 한량없는 보살들이 저마다 보현행(普賢行)을 설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 방위가 바로 시방의 다함 없음이요, 한 티끌이 바로 찰해(刹海)의 무궁함이니, 이제 교화의 의식(儀式)을 위해 저마다 방위를 나눠 총(總)과 별(別)을 보이는 것이다.
이제 10신이라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지위를 믿기에 결정코 10신의 문을 이루는 것인가? 경전의 10신위(信位) 중 「광명각품(光明覺品)」에서는 “시방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가 시방 일체처에서 시방 일체처의 법문을 설하여 부처님의 열 가지 과덕(果德)을 찬탄함으로써 믿음의 지위[信位]를 성취한다”고 설해서 믿음의 근기를 일으킨 자를 다시 못하고 청정하게 바꾸고 있다. 문수사리도 10수(首) 보살 등에게 “업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업을 알지 못한다”는 등의열 가지 질문을 하여 믿음을 일으킨 자로 하여금 스스로 관조해서 깊고 견고하게 바꾸도록 하고 있다.
경정에서는 “모든 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體性)도 없기 때문에 일체가 제각기 서로를 알지 못하다”고 설하면서 물이 흐르고 불이 타고 바람이 부는 것은 대지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서로 알지 못한다는 비유를 들고 이다. 또 그 다음의 게송에서는 “분별로써 내신(內身)을 관찰하건대 그 속의 어느 것이 ‘나[我]’이던가? 만약 이렇게 이해해 나간다면, ‘나’가 없다는 것을 요달하리라”고 말한다. 이처럼 문수사리가 10수보살에게 물어서 성취한 10신관행(身觀行)의 문은 「문명품(問明品)」에 자세히 설해져 이다.
또 「현수품(賢首品)」에서는 범부의 지위부터 믿음을 첫머리로 삼으니, 결정코 부처님의 대보리과(大菩提果)를 취하기 때문이다(이는 初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시방의 모든 불심(佛心)의 부동지가 자기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무명에 미혹된 것이라고 믿으니, 무명과 시방의 모든 불심이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는 二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시방의 모든 불신(佛身)의 근본지가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으니, 까닭인즉 모두가 하나의 법성신(法性身)이며 하나의 근본지(根本智)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뭇가지의 한 뿌리에서 많은 잎이 생기지만, 인연에 따라 하나의 나뭇가지에서도 피고 지는[成壞] 것이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이는 三信이다).
범부의 지위부터 여래의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를 내가 몽땅 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건대 무시 이래로 고해(苦海)의 파도에 휩쓸려 이익이 없는 일도 행했거늘, 보살의 만행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현재의 유익한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는 四信이다).
어찌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삼매로부터 생긴 것을 나 역시 반드시 얻는다고 믿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의 삼매가 모두 여래자성(如來自性)의 방편으로부터 나왔는데, 나 역시 여래 자체의 청정한 성품을 갖춘 것이 부처님과 더불어 평등하기 때문이다(이는 五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시방 모든 부처님의 일체 신통을 나 역시 반드시 얻는다고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의 신통은 참다운 지혜[眞智]에 의거해서 얻는 것인데, 나는 다만 참다운 성품의 지혜 속에 번뇌가 없는 것을 의지해 무명이 지혜를 이루니, 일체의 업이 없어지고 오직 지혜와 자비만이 있어 신통조화가 자재하기 때문이다(이는 六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부처님의 지혜를 나도 반드시 얻는다고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다 범부로부터 왔기 때문이다(이는 七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일체를 두루 뒤덮는 부처님의 대자비를 나 역시 반드시 얻는다고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의 대자비는 커다란 서원(誓願)으로부터 일어나는데, 나 역시 부처님처럼 커다란 서원을 발했기 때문이다(이는 八信이다).
버부의 지위에서부터 부처님의 자재함을 나도 반드시 얻는다고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의 자재로움은 성기(性起)의 법문에서 지신(智身)과 법신(法身)으로 중생계에 들면서도 색진(色塵)에 물들지 않아 모든 근(根)이 자재로운데, 나 역시 성기(性起)인 여래의 지혜를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九信이다).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스스로 발심하여 다함이 없는 겁[無盡劫] 동안 닦은 수행공덕이 원만해서 그 지위가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면서도 일념도 옮기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삼세가 때[時]가 없기 때문이다(이는 十信이다).
이처럼 범부의 신해(信解)에서부터 시종일관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사무치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열 가지 믿음이란 반드시 10신의 문을 결정적으로 성취하여 견고한 종성(種性)에 머무르면서 영원히 퇴전(退轉)하지 않는 것이다.
또 10신 속의 문수사리와 각수(覺首) 등의 10수보살은 모두 십색세계(十色世界)로부터 온 것이다. 소위 금색세계(金色世界)는 본래 순수 청정한 법[白淨法] 속에서 왔음을 나타내기 때문인데, 믿는 마음이 근본에 의거해서 믿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묘색세계(妙色世界)는 이(理)와 사(事)가 자재로운 묘용에 의거해서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연화색세계(蓮華色世界)는 행(行)에 의거해서 믿기 때문이니, 연꽃[蓮華]은 만행을 나타내고 있다. 첨복화색세계(瞻蔔花色世界)는 복경(福慶)의 색에서부터 이지(理智)와 대자비의 중화성(中和性)으로 믿는 마음을 내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5색(色) 중에서는 황색(黃色)이 최고가 된다. 이 색은 진(眞)에 감응하는 색이자 중궁(中宮)의 색이라서 중도(中道)의 색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꽃[華]은 황색의 꽃이 되는데, 이 신심(信心)의 보살이 지혜와 자비를 중화하는 색이 되는 응진세계)應眞世界:참에 감응하는 세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우발라화색세계(優鉢羅華色世界)는 그 꽃이 적황색이면서 아울러 자주색 불꽃의 기운이 있는데, 일행(一行)으로 일체의 행을 행하여 순수하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면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보색세계(寶色世界)는 지혜와 자비의 법행(法行)으로 믿음을 성취해서 고귀해질 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금강색세계(金剛色世界)는 부처님의 과덕(果德)으로 믿는 마음을 일으키므로 온갖 번뇌를 반드시 결단할 수 있음을 타나내기 때문이다. 파리색세계(頗梨色世界)는 수정(水精)과 같은데 믿는 마음이 본래 청정함을 타나내기 때문이다. 평등색세계(平等色世界)는 법계가 평등해서 둘이 없음을 믿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같은 10색세계는 모두 10신보살이 믿고 있는 법문이니, 다 스스로 믿는 법문 속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같은 세계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이다. 이하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인 이른바 부동지불과 무애지불과 해탈지불 등과 같은 열 개의 지불(智佛)은 바로 불과(佛果) 속의 부처님이다. 스스로의 지혜가 불지(佛智)의 과(果)로부터 인(因)을 삼기 때문에 왔다고 믿는 것을 밝히고 있으니, 불과(佛果)를 인(因)하지 않으면 믿음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0주위(住位) 속에선 수미산 정상에 올라가 두 발가락 끝에서 백천 묘색(百千妙色)의 광명을 놓고 있다. 앞에서 10신위(信位)를 밝힐 때, 보광명전에서 두 발 밑에 있는 천 복륜(千輻輪)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신위(信位)가 범부에게는 범부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발 아래에서 광명을 방출한 것은 믿음이 첫 씨앗[初因]이 됨으로써 그 지위가 가장 아래란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제 10주의 지위를 설하면서 수미산 정상에 오른 것은 10주의 초심(初心)에서 법의 정상을 증득했기 때문이며, 지(地)로부터 상승해서 모습이 다한 곳[相盡處]에 이르기 때문이며, 산왕(山王)의 정상에 올라서 법왕위(法王位)의 처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지(止)가 산이 됨을 밝힘으로써 진실한 증명에 들어가는 것이니, 지(止)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발가락 끝에서 백천 묘색의 광명을 놓은 것은 발가락은 간(艮)으로써 손발의 지침을 삼으니, 처음 성도(聖道)를 취할 때 지(指)가 아니면 분명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는 실천[履踐]의 처음을 10신 범부의 지위의 극(極)으로부터 시작하고 나서 그 다음 10주의 초수(初首)에서는 여래법왕의 성스러운 자취를 밟아 나아가 그 선정[定]의 문(門)으로써 범부와 성인의 일체 경계가 성(性)과 상(相)이 걸림 없는 지극히 묘한 색(色)임을 널리 관(觀)하기 때문에 광명이라 칭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본업영락경』에서는 “3현법(賢法)을 닦아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니, 법류수(法流水) 속에서 마음마음마다 적멸해서 자연히 묘각(妙覺)의 지위에 흘러 들어간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화엄경』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즉 식(識)이 소멸하고 시간(時)이 없어지니, 정의 티끌[情塵]이 단박에 끊어지면서 오직 참다운 지혜의 경계분이다. 그리하여 일념(一念)에 5위(位)가 가지런히 밝아지면서 온전한 불과(佛果)로써 인(因)을 삼기 때문에 설사 범부처럼 백 년이나 혹은 많은 겁 동안 세상에 머물더라도 잠시라도 옮겨 변화하는 것을 보지 못하므로 앞으로 성불할 일도 보지 못하고, 이미 성불한 일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성불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10주 지위에서 법이 이미 이러하거늘 다시 어느 생(生)에 성불하지 못할 것이며, 다시 어느 생에 정각을 이루겠는가? 이 『화엄경』은 근본법계의 문이라서 일체의 부처님께서 본래부터 거주하는 커다란 집[大宅]이며, 일체의 불자(佛子)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며, 화신불의 권승(權乘)은 모두 이 커다란 집 밖에 거처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만일 깨달아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한 번 깨달아 들어가면서 그대로 언전히 참[全眞]이다.
이 10주 지위 중에서 초발심주(初發心住) 보살의 견도(見道)는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머물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감으로써 곧바로 여래와 더불어 몸[身]ㆍ마음[心]ㆍ성품[性]ㆍ지혜[智]ㆍ모습[相]이 같기 때문에 5위(位)의 행상이 다 그 속에 있음을 단박에 인(印)치고 있다. 마치 밝은 거울을 갖고서 온갖 빛깔을 두루 비치는 것과 같다.
이 『화엄경』의 법문도 법이 마땅히 그와 같은 것이니, 모든 찬탄과 교설을 마땅히 그렇게 알고 마땅히 그렇게 믿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 하면 법계의 법문은 원융하여 비롯함[始]과 마침[終]이 없어서 일념 속에 세월과 밤낮이 겹겹이 겹치며 다함이 없으며, 한 터럭 안에 부처님 경계와 중생 경계의 색상(色相)이 가없어서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면 일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10주 지위 속에 열 개의 보살이 있는데, 하명(下名:이름의 끝자)이 다 똑같아서 그 명칭이 혜(慧)가 되고, 본래 온 국토는 모두 화(華)라 호칭하니 열 개의 화국토(華國土)로부터 온 것이며,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도 하명(下名)이 다 똑같아서 그 명칭이 월(月)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지위가 스스로 참[眞]을 증명해서 정사(正邪)를 잘 간택하는 것을 혜(慧)라고 호칭한다. 이(理)와 사(事)가 일제히 발해서 전개하는 것이 마치 화(華:꽃)와 같으니, 전개한 법문으로 국토의 거처를 삼는 것이다. 법을 얻으면 번뇌가 없어지면서 청량한 것이 마치 월(月)과 같은데, 이를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이라고 호칭한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10주 지위 속에서 증득한 법문이라서 헛된 명칭이 아니다.”
경전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때 법혜(法慧)보살이 불신력(佛神力)으로 보살의 한량없는 방편삼매(方便三昧)에 들면서 삼매의 능력을 썼기 때문에 시방의 천불찰미진수세계(千佛刹微塵數世界) 밖에 있는 천불찰미진수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같이 동일한 칭호인 법혜라고 불리면서 그 앞에 잘 나타나 열세 가지 종류의 법으로 법혜보살을 가지(加持)했다.”
열세 가지 종류의 가지란 무엇인가? 어업(語業)의 가지는 마로써 훌륭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며, 신업(身業)의 가지는 손으로 법혜보살의 정수리를 만지는 것이며, 지업(智業)의 가지는 경전에서 “즉시 법혜보살에게 열가지 무애지(無碍智)를 주고, 아울러 이 국토의 여래가 광명을 그 몸에 비춘다”고 했으니, 이렇게 해서 열세 가지가 된다.

新華嚴經論卷第四長者李 通玄 撰第四明示因圓果滿別者,顯佛果有三種不同,一亡言絕行獨明法身無作果,二從行積修行滿功成多劫始成果,三創發心時十住初位體用隨緣所成果。一亡言絕行獨明法身無作果者,卽涅槃無行等經是。隱身不現萬事休息。又云:羅剎爲雪山童子,說諸行無常是生滅法,生滅滅已,寂滅爲樂,是無作果不具行故。二從行積修行滿多劫方明果者,卽權教之中,說行修成,三僧祇劫行滿所成佛果是也。以不了無明十二有支本是法身智慧,厭而以空觀折伏現行煩惱欣別淨門,三從凡十住初心創證隨緣運用所成果者,卽華嚴經是也。十信終心卽以方便三昧達無明十二有支成理智大悲,卽具文殊普賢體用法界法門。又如化佛所施因果教行,定經三僧祇所有佛功德摠是修生,百劫修相好業,然燈得光明,不殺得長壽,布施得資財,忍辱得端正,一一因果屬對相似具足,仍對治種種法門,始得見性成佛。如華嚴經卽不然,一念頓證法界法門,身心性相本唯法體,施爲運用動寂任眞運無作智卽是佛也,爲一切佛應如是,無長無短,始終畢竟,法皆如是,於一眞法界任法施爲,悉皆具足恒沙德用,卽因卽果,以此普門法界理智諸障自無,無別對治別修別斷,不見變化,變與不變,無異性相故,普觀一切無非法門,無非解脫,但爲自心强生繫著,爲多事故,沈潛苦流,故勞聖說種種差別,於所說處復生繫著。以此義故,聖說不同,或漸或圓,應諸根器,如此經教頓示圓乘上上乘人所應堪受。設不堪受者,當須樂修,究竟歸流畢居此海,是故餘教先因後果,不同此教因果同時,爲法性智海中因果不可得故,爲不可得中因果同時無有障礙也。可得因果卽有前後,有所得者皆是無常,非究竟說也。若先因後果者,因亦不成故果亦壞也。緣生之法,不相續故,卽斷滅故,自他不成故,如數一錢不數後錢,無後二者,一亦不成,爲剎那不相續,剎那因不成果亦壞,多劫不相續,多劫因果壞,要待數後錢時前一始成,因果亦爾。要待一時中無間者,因果始成,若爾者,如數兩錢同數無前無後,誰爲一二?如豎二指,誰爲因果?如二指等隨心數處爲因,後數爲果。若是有前有後,卽有中間者,還有剎那間斷,有間斷者,不成因果,若同時者,如豎二指,無前無後,誰爲因果,亦皆不成?如此華嚴經因果同時者,俱無如是前後及同時情量繫著妄想,有無俱不俱常無常等繫著因果,但了法體非所施設,非因果繫名爲因果,非情所立同時前後之妄想也。如是者何?異楞伽漸教之說。此則不然,前說教主別問荅主別等,卽明文殊普賢佛等三德體用主伴無礙故,楞伽經中,化佛及大慧菩薩,問荅破相,但知顯理,無繫著故,不論緣起法界,如緣起法界者,法界不成不破,但知了法如是故,是故楞伽經云:先示相似物後當與眞實。又云:得相者是識,不得相者,是智卽是明成壞也。如此經中意者,卽眞無有假法,諸法摠眞,純眞無假,更無相似存眞存假。經云:衆生界卽佛界也。如此經中,文殊以理會行,普賢以行會理,二人體用相徹,以成一眞法界,前後相收,四十品經互相該括,前後相徹文義相收,一法門中,具多法也。是故經云:於多法中爲一法,於一法中,爲衆多,於漸教中,設有少分義同,多分不相似故,如覺首等十首菩薩,各說一法以成十信,於十信中,共成一信,爲十箇信位,互體相成不獨施設,以十信成一信,以一信成十信,有解者,不可偏取一門,十慧菩薩,十林菩薩,十幢菩薩,十藏菩薩,又說十定、十通、十忍,如是一一位次法門,皆悉如是,互相成就如帝釋網,互相徹入一中無量無量中一,諸佛菩薩體用相成,因果相入同時無二,如經中說,法慧菩薩入定,卽十方世界同名法慧佛來,功德林菩薩入定,卽十方世界同名功德林佛來,金剛幢菩薩入定,卽十方世界同名金剛憧佛來,金剛藏菩薩入定,卽十方世界同名金剛藏佛來摩頂。如是位位之內地地之中,佛與菩薩因果相成,體用相徹,所來諸佛,卽明是果,入定菩薩,卽明是因,因果無二故,於佛法身智體上,安立十住、十行、十迴向、十地、十一地等行相引接凡俗化生之門,諸位則佛佛則諸位,若上上根人於此教中起信者,還依此法,創首十住初心正證如來佛果智法,方行一切菩薩萬行,爲初證之首,爲知法智體性故,設同凡事,經過多劫行,而於自見本不移時,於初發心時與三世佛同成正覺,無前後際故,法如是故,應如是知,不同權教經三僧祇方成佛果。是故今言與諸三乘得果別故。又於經乘如來一切智乘得佛果故,無二乘人得四沙門果,亦無權教菩薩諸地行相因前果後也。第五明地位所行行相別者,凡發大乘心者,依其根品有六種乘三種五位十地差別行相不同,其名數如何?一念佛願生淨土門,二作淨土觀行所生淨土門,三修空無我觀所乘門,四和會有無觀智門,五漸見佛性進修門,六頓證佛性圓融門,修大乘者,不離此六種所乘行相。何者三種五位十地?一修假詮假眞如等安立五位十地,二分修分眞分證一分眞如安立五位十地,三頓修頓眞頓證佛境界圓滿眞如安立十地五位行相,此佛乘中,無假法言說名相摠眞也。如是三種十地五位行相,向菩提者,行菩薩行者,滿佛果者,莫不摠在其中,今以摠擧,各以已所乘宗辨其權實,使令離障進修有功,不相誹毀,顯了差別令無疑悔,令進修者,分明了知權實故,令成佛者不迂滯其功故。一念佛力修戒發願力生於淨土者,是化淨土,非眞淨土,爲非見性及不了無明是一切如來根本智故,是有爲故,如阿彌陁經是也。二作淨土,觀行所生淨土者,是化淨土,從心想生故,是有爲故,不見佛性本智慧故,則無量壽觀經是也。三修空無我觀所乘門者,爲初說般若破凡夫實有二乘生空我執故,多修空法,有無俱空門爲空觀增勝故,雖行六波羅蜜修種種菩提分法得六神通,行菩薩行,福勝人天,不生佛家,不見佛性,爲析法明空,不了無明是如來智慧故,華嚴經亦同此訶責,如前已述,如法華經云。若持八萬四千法藏十二部經,爲人演說,令諸聽者,得六神通,亦未爲難,聽受此經,是則爲難。法華經成就佛乘故,非菩薩乘故,是故如來於涅槃經中說。一切衆生,皆有佛性常樂我淨,有諸菩薩自悔過言,我於無量劫流轉生死,只爲無我之所惑亂故,如此過故,迴心方可得見性達我是智,諸般若中有文殊師利菩薩爲問荅者,皆論一分法身佛性道理,如文殊般若是也。若與聲聞爲問荅者,多爲破二乘生空我執說法空故,與普賢問荅者,多約行門,凡說法依根,但見問荅主師可知,表裏准之可見。四和會有無觀智門者,卽解深蜜經第三時教說九識爲淨識,與業種爲依,幷說三性三無性,所謂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互相成壞離諸執障不成不壞,性自涅槃,如深密經頌曰:一切諸法皆無性,無生無滅本來寂,諸法自性恒涅槃,誰有智慧無密意,此經爲破般若修空增勝者,壞緣生法,空見現前違道理故,於此經成就緣生,諸法自體涅槃不須誹撥,言空言有,互相破斥,不合計有,不合計無。又此經雖安立十地名同華嚴,於中義意軌則各別。又無地前三賢十信等位,但立十地斷惑行相,及說佛地爲第十一地,於其十一地位之內,復說有十一種麤重二十二種愚癡,所以此經不安立地前三賢十信行門,爲此經地前非見道故。又爲第三時教中,但和會有無,未是文殊普賢理事攝行滿故。是故華嚴經中,說十信、十住、十行、十迴向、十地法門時,十方諸佛同來印可故,一切諸佛國土摠說此門故,十三種相加表眞實故,三乘經中但說十一地,攝諸衆生不盡故,此則是三種十地中假詮假智假眞如十地行故。何以然者?爲此十一地是佛位,佛位之內,猶有障故,明十一地以前未有眞理本智故。若全眞理智,云何十一地有十一麤重旣有麤重?卽非地地中有佛智爲因果故,此經且漸和會有無令無滯住,未似普賢文殊理事智盡大用而說故,如仁王經說,五位十地行門安立,從凡漸習,積行多生,修假眞如。又有教說地前伏惑地上見道,或說留惑不斷要經三僧祇劫方可成佛,如是等教,竝對權根假施設有,未爲實說,但化佛所說,皆是引中下根人未盡實說,餘准可知。又二乘人迴心,向權教中所忻佛果,及權教菩薩所忻佛果,僧祇滿後,但只樂求三千大千世界佛之報果,不忻十佛境界毘盧遮那無盡十方境界之報果也。不如華嚴經中十信菩薩所忻佛果,勝解心上具足凡夫,卽樂忻修十身毘盧遮那之境界,深心廣大、盡無極重玄之妙境界也。不同權教佛境界,皆立分齊限量,此乃爲根狹未廣故,且權安立。如解深密經中,十地斷惑分齊,第一初地中對治惡趣煩惱業生雜染障故,第二地中對治微細悞犯現行障,第三地中,對治欲貪障,第四地中對治定及法愛障,第五地中,對治生死涅槃一向背趣障,第六地中對治麤相現行障,第七地中對治細相現行障,第八地中對治於無相無作功用及於有相不得自在障,第九地中對治於一切種善巧言辯不得自在障,第十地中對治不得圓滿法身證得障。善男子,此奢摩他毘鉢舍那,於如來地對治極微細最極微細障,及所知障,如華嚴經,但於地前三賢初發心住中,卽能頓證佛果法門,普印諸位十住、十行、十迴向、十地等覺等位,如印印時文相具足無前後際,卽以初發心時頓印三界無明,便爲佛智之海,以如來法身智身大悲之印,一時頓印世間,以爲法界大用無前後故,法如是故,不同權教法外施設,且引三根來歸一實故,五漸見佛性進修門者,如涅槃經云:十住菩薩少分見性,乃至十地未能了了。起信論云:十住菩薩少分得見法身,化八相成道故,如彼論釋,言是願力所爲,旣是願力非爲實報,摠爲漸見佛性,皆是權教分分中漸引之宗非爲圓故,如是之類,從初發心所證佛果不定僧祇。何以故?如涅槃經,記屠兒廣額於賢劫中成佛,闡提創發心上有越劫之功,何況具信根?復能少分見性者,何有僧祇之劫哉?世有諸德解屠兒廣額是化作者,此乃曲逐人情,未詳佛意者也。漸漸引權向實,豈令見劫存情令違本耶?漸漸引至龍女善財一念之中得成佛者,始成實說,三乘小見但念長時,智性本無,空嗟忻仰,無繩自縛,何有休期?前略說三種十地。又以經義較量有六種十地者,如三乘教中,有三種十地,實教中有三種十地,如仁王經解深密經大品經,此三部經中,所說十地,多立假眞如門,以成十地行相,此是權教中三種十地。第四如涅槃經中,十住菩薩少分見性,十地菩薩見性未能了了,卽明以佛性爲所乘門,分修分證十地。第五又涅槃經如牛食雪山肥膩草純得醍醐等,卽初發心上同佛正覺故。第六一乘十地,如華嚴經,以說法界門重玄無量無盡法以成十地,是爲六種十地,涅槃法華屠兒龍女剎那成佛,皆是引權向實教故,但三乘十地菩薩所忻佛果境界,但忻三千大千世界爲報佛之果故,此卽實教中第三化身,非爲實報身故,三種化身。一化身者,化作種種衆生身,二化身者,化作一四天下及二十八天所化之佛,三化身者,化作三千大千世界佛也。實報身者,十身毘盧遮那,互融相徹重玄境界,量齊法界及徹纖塵,塵塵之內,皆齊法界,具如華嚴經說,三乘之教,旣權所說法門,及佛報境界摠未實說。是故大品經中名共三乘教三乘共行十地。第二解深密經所說十地,直爲解深密,廣意菩薩廣慧菩薩淸淨慧菩薩等,共爲問荅主伴說十地門,不共聲聞爲問荅主伴,爲深密經迴彼般若樂空增勝者故,此大品深密等經,但說十地之名,無地前十信三賢四資糧位,第三如仁王經中具足五位行相法門,如是權教中所說三賢十聖,多分㧾是說假眞如,次第漸細方明佛性,方可說乘如來乘直至道場,將知權教非眞,所說地位次第未實。第四如來乘中,如涅槃經中,說十住少分,見性十地菩薩未全了了者,如起信論中十住菩薩少分見性以誓願力能八相成佛者,是其流也。雖未圓滿,爲見少分性力故,勢力如是,猶如儲君爲有因緣父王令其該召君政,爲是王眞子故,力堪如是故,爲少見性故,爲如來眞子生佛家故,不同餘教假眞如假智等待於初地方云生佛家故,明見性力眞勝餘宗故,少分如是,何況全得?第五明圓教十地者,一念體道智全佛故,以會無明體全智故,經云:一成一切成,一壞一切壞,後當廣明,是名五種十地,此四種十地位次第行相,以化下中根接生門中大同小異,至於本法教門,而權教之中三種,假立眞如爲觀智,與從法身佛性體上安立漸頓二門全別,如權教中,雖復還從初地之中,對治惡趣煩惱業生雜染障,乃至第七地中,對治細相現行,猶成障障無相智,未全自在,至於八地無相無作功用及於有相功用亦未自在,如是地地中不自在,皆有障故,前依解深密經中,地位斷惑次第法門說,如三乘中十地畢定如是,階降斷惑經三僧祇,百劫修相好業,如涅槃經等佛性門中安立諸地次第,如前已明,如本業瓔珞經云:十住菩薩銅寶瓔珞銅輪王百福子爲眷屬,生一佛土,受佛學行,教二天下,十行菩薩銀寶瓔珞銀輪王五百福子爲眷屬,生三佛國中,受佛教行化三天下,十迴向菩薩金剛寶瓔珞金輪王千福子爲眷屬,入十方佛國中,化一切衆生,處四天下,初地已上百寶瓔珞二地千寶三地萬寶四地菩薩不可稱數寶爲瓔珞,乃至十地寶瓔珞漸漸增廣,及十地十一地通佛法王,及三賢菩薩摠有十五種輪王位,廣如瓔珞經說。又言三賢菩薩伏三界煩惱麤業道麤相續果,亦不起麤見道,喜忍伏三業道,離垢忍伏地獄、餓鬼、畜生、人中業道,明忍伏六天業道,炎忍伏諸業道,勝忍伏疑見業道,現忍伏因緣業道,無生忍伏果業道,不動忍伏色因業道,光忍伏心因業道,寂滅忍伏心色二習業道,無垢忍伏習果業道,習前已除而果不敗亡。是故佛子,三賢名爲伏斷,喜忍已上亦伏亦斷一切煩,惱覺忍現時法界中一切無明,頓斷無餘,如是以上說十一種忍,三賢菩薩用除三界麤煩惱故,亦伏斷故。解云:三賢者,卽菩薩也。十住、十行、十迴向地前三位也。又瓔珞經云:佛子初地一念無相法身智,成就百萬阿僧祇功德,雙照二諦心心寂滅,法流水中不可以凡夫心識量二種法身。解云:二種身者,一法性身,二報化身,法流水者,言初地菩薩,卽法性智流中任運至佛位故,無所修造,何況二地三地?故又經云:地前三賢菩薩入聖人位,但法性流中心心寂滅,自然流入妙覺大海。佛子乃至三賢十地之名亦名無相,但以應化故,古佛道法有十地之名,此經卽是說華嚴經以後教化三乘人於別時中重於初始成佛菩提樹下略敍華嚴法門此瓔珞經中皆言:我曾於普光明堂說淨土法門,乃至忉利天說十住,今更略說,廣如經說,准此經次第說十地以後,於第三禪中說十一地法門,經在西方不來。經云:佛子,吾先於第三禪中集八禪家,說一生補處菩薩,入佛華三昧說百萬億偈,今以略說一偈之義開衆生心,汝等受持。又依瓔珞經安立十地斷惑法相門。經云:佛子,前三賢伏三界無明而用除麤業,何故當受生時善爲緣子?解云:三賢菩薩初受法性智慧生佛家時,悲心增勝,爲觀一切三界衆生㧾爲子故,誓願無捨,爲慈悲故,潤生三界業故,三界受生。又經云:爲潤業故,受未來果故名息用。解云:於三界無造新業故爲息用。叉經云:而不斷愛用。解云:然三界業亡慈業受生不亡。經云:有十一人亦伏法界中三界業果故。解云:十一人者,十地幷等覺位爲十一人。又經云:初地乃至七地三界業果,俱伏盡無餘八地乃盡故。解云:七地已前伏盡,八地稱法盡故,從此以上示現作佛王宮受生出家得道轉法輪滅度,示現一切化佛境界故,無子三界之報,唯有無明習在。解云:此八地現前任無功用智,雖度衆生無衆生想,七地已前,悲勝,八地以後,無相智現前智勝,雖無受生任運度人,非無愛法習故,佛地始盡以本願力故,變化生,是以我昔天中說生不生義業生變生。佛子,聖位中二種業,一慧業無想生智心心緣法而生無照,是名慧業,二功德業,實智出有諦中有爲無漏,集百萬阿僧祇功德故,名爲功德業,從初聖已上而現受生,以變易故,不造新,以願力故,住受百劫千劫變化生,已上竝依本業瓔珞經說,此卽是圓教中,亦頓亦漸二門,亦頓者,此經云:三賢菩薩卽入聖位,入法性流中,任運至佛海,更無造作,亦漸者,斷惑階降一一進修,此瓔珞經三賢十住,卽入法性之流,不同權教初地見道道前伏惑。若望華嚴經十地品初地令凡夫修行,不云要聖人方學,彼經自有明文。又明退者,如瓔珞經云:佛子,若退若進者,十住以前一切凡夫法中,發菩提心,有恒河沙衆生學行佛法,信想心中行者是退分善根。諸善男子,一劫二劫,乃至修行十信入十住,是人爾時從初住至第六住中,若修第六般若波羅蜜,正觀現前,復爲諸佛菩薩善知識所護念故,出到第七住,常住不退自在,七住以前名爲退分。佛子,若不退者,入第六般若修行於空,無我無人無主者,畢竟不生,畢竟入定位。佛子,若不値善知識者,若一劫若二劫退菩提心,如我初會衆中有八萬人退,如淨目天子,法身王子舍利弗等,欲入第七住,其中値惡因緣故退入凡夫不善中,不名習種性人,退入外道,若一劫若十劫乃至千劫,作大邪見及五逆,無惡不造也。問:如涅槃經、聞常住二字,尚七劫不墮地獄,如華嚴經云:設聞如來名及所說法不生信解,亦能成種,必得解脫至成佛故。何故今言第六住心及從凡夫信位,猶言有退?此意若爲和會。解云:十信之中勝解未成,未得謂得,便生憍慢,不近善友,不敬賢良,爲慢怠故,夂處人天,惡業便起,能熟大地獄業。若一信不慢,常求勝友,卽無此失。若權教中,第六住心可有退位,實教中爲稽滯者責令進修,如舍利弗是示現聲聞,非實聲聞,所作方便,皆度衆生,使令進策,如權教中第六住心可說實退。何以故?爲權教中地前三賢摠未見道,所修作業,皆是有爲,所有無明,皆是折伏,功不强者,便生退還。若折伏有力,亦不退失,如蛇有毒,爲呪力故毒不能起,但於佛法中,種於信心,謙下無慢,敬順賢良,於諸惡人心常慈忍,於諸勝己者,諮受未聞,所聞勝法奉行無忘,所有虛妄依教蠲除,於三#菩提道常勤不息,夫爲人生之法,法合如然,但不長惡而生,何須慮退,以上五種十地權教中三種十地,如大品般若,但有十地名,第八名八人地,第九名乾慧地,地名少殊,解深密經中,十地名雖與華嚴經中十地名同,從初地至十一地,有十一種麤重二十二種愚癡,此二部經中,但有十地,摠無地前四種資糧。仁王經中,雖說地前十信、十住、十行、十迴向四種資糧,十信卽說,爲內凡卽不同實教中十住初心便登聖性體齊諸佛,十信之中,若不信自身與佛身因果無二者,不成信解。是故如來出現品云:菩薩摩訶薩應知自心之內一念中有十方諸佛成等正覺轉正法輪。何以故?佛心與自心無二故,如是信心方名信故,何況十住之位不證此心?若不證此心云何名住?以是義故,住於佛住名之爲住。是故初發心住便成正覺。又權教中說十地時,竝無他方佛與說法者同名故。又無同名佛來證成表因果同故,以是義故,地位及教門,竝是接小根衆生,權施設故,諸有智者,勿滯其中,應忻昇進。是故說華嚴經中五位十地法門時,十住中法慧菩薩入定欲說十住法門時,過十方千佛世界外有千佛世界微塵數,同名法慧佛,來手摩法慧菩薩頂,及語業讚歎,及與法慧智力十三種加持,說十行位時,功德林菩薩入定,十方過萬佛世界外有萬佛世界微塵數佛來,俱名功德林,及十三種加持功德林菩薩等,說十迴向時,十方過百萬佛世界外有百萬佛世界微塵數佛來,同名金剛幢,亦十三種加金剛幢菩薩,十地亦然,佛與菩薩同名者,明因果同故,後當廣明,如十地論。是天親菩薩造,解十地經,是華嚴經中十地品也。於解義處,文義通三乘及一乘義解者,多解三乘義,於一乘義,人多不解,爲一乘道理情解不及。設有以情解者,疑網不除,且信佛語故自疑不斷,會夂在無思,不厭苦者,不滯寂者,悟常樂我淨者之所能知故。是故五種十地三種是權,餘二種十地,是實教故。是故瓔珞經云:古佛道法爲化衆生,有此十地,當知三乘權教十地名雖同,所設方便引衆生行解全別,以此當處具說,未有同名佛共成印信因果契證。第六明頓證佛性理智萬行圓融門者,如華嚴經第一會如來現相品中,如來齒間放光。又放眉間中道果德光明,又令普賢菩薩,入三昧說世界成就品、華藏世界品、毘盧遮那品,說諸佛果法令生愛樂,旣生愛樂已,於第二會中,令文殊師利說如來名號品、四聖諦品,於兩足輪下放光明,其光明過十佛剎微塵數世界外,各有十佛剎微塵數菩薩,皆來集會。又說光明覺品菩薩問明品、淨行品、賢首品,成就十信之門,兩足輪下光者,爲其最下,明入信之首以信爲因,信爲最下故,此是如來眉間果光放入故,前如來現相品中如來眉間放光已,入兩足輪中,爲欲明擧佛,果德用成信位諸有學者,還信果法用成初證入於十信之門故,以是義故,十方各有十佛剎微塵數十首菩薩,皆從十色世界,十智如來所來,以十信爲入道之初故。是故所來菩薩,皆名爲首,十色世界者,爲十信菩薩未成實證明,是凡夫雖信果德佛境未離色塵,以色爲國,十住菩薩理事圓明,以華爲國,爲創從凡位理事開敷故,十行菩薩善達簡擇覺慧圓明,以慧爲國,十向十地以妙用自在,以妙爲國,國從當位法門所來,以法爲國,非爲四大地水火風故,入聖智者,以離此障故,十信位中菩薩,皆是十智佛所來者。所謂不動智佛、無礙智佛、解脫智佛。如是十智佛者,智爲果德,爲十信位中以果爲信故,爲明信從果來以果爲因故,若不以果爲信,卽無所信故,信無所依,何故文殊師利爲上首者?爲文殊師利爲啓蒙之主故,十方諸佛,皆以文殊師利妙德爲發信心之首故,以彰顯法身根本智故,常以文殊師利爲果前之信,普賢明是差別智爲果後之行故。是故善財童子初見文殊爲信門,後見慈氏爲佛位,後自見其身,入普賢身,是佛果後行,文殊爲小男,普賢爲長子,二聖合體,名之爲佛,文殊爲法身妙慧,普賢爲萬行威德故,體用自在名之爲佛,文殊小男者,爲信證法身根本智慧,爲初生故,因初證本智法身能生佛家故,普賢爲長子者,爲依根本智起行行差別智治佛家法諸波羅蜜事自在故,常以行門建佛家法治佛家事,但諸經之內,以文殊爲問荅主者,多明法身佛性之門,普賢爲問荅主者,多論其行,以此表之。又文殊乘師子者,爲明創證法身佛性根本智斷惑之駿故,普賢乘香象王者,表行庠序爲威德故。又文殊常居東方金色世界不動智佛所者爲明金爲白色能離垢故金色者,表法身也。不動智者,依法性身根本智起智用卽無動故,普賢菩薩常居東方寶威德上王佛所者,明萬行爲寶以此行故成其威德,若具行者,以法寶身自在也。威德無畏自在爲王,若不具行者,皆有所畏,設居高位不得爲王,爲有所畏故,與文殊師利同在東方者,爲法身智身理事體用本自一故本無二故。又文殊居東北方淸涼山者,像艮卦主東北方故,艮爲小男,爲童蒙,爲文殊常化凡夫啓蒙見性及本智之初首故。又與普賢俱在東方者,東方卯位卯爲震卦,震爲長男。又像日出東方春陽發明無物不生,無物不照,表理智雙徹體一無二,以根本智差別智無別體用生萬行故。是故子爲佛位,丑爲十信,寅爲十住,卯爲十行,辰爲十向,巳爲十地,午爲等覺,未爲晦明入俗同俗化迷,申酉戌亥爲所化故。如是安立法則,法合如是故,易卦坎爲君,离爲臣,震爲上相,酉爲上將,東爲靑龍,西爲白虎,前爲朱雀,後爲玄武,靑龍爲吉慶,白虎爲凶害,朱雀爲其明,玄武爲其黑。是故如來治次而發明,普賢爲相主萬行,觀音爲大悲之首,治凶危爲上將,文殊爲覺蒙之首,常爲接信之師,互融交參,以持佛家之法,皆令衆生住於中道處恬和之性,智慈益物,以是身皆金色,目髮紺靑,體白而相黃,爲應眞和氣也。皆爲無形之形無色之色也。若以其體用也,一一菩薩摠具智德無邊,以其法則常以文殊爲創信之首,今以南北,且立東西之一門,若論互融重玄一方摠俱有十。經云:一切處普賢菩薩,一切處金色世界,一切處文殊師利,一切處不動智佛。經云:佛身充滿諸法界,普現一切衆生前,應受化器悉充滿,佛故處此菩提樹,一切佛剎微塵等,爾所佛坐一毛孔,皆有無量菩薩衆,各爲具說普賢行,如是一方卽十方無盡,一塵卽剎海無窮,今爲化儀各示分方摠別,今言十信者,信何等位?決定成於十信、之門,如經十信位中光明覺品云。十方一切處文殊師利,於十方一切處,說十方一切處法門,歎佛十種果德,以成信位,如光明覺品說。又令起信根者轉更明淨,文殊師利又問十首菩薩等,業不知心心不知業等十問,令起信者,自身觀照轉令深固經云:諸法無作用,亦無有體性,是故彼一切各各不相知。又作水流火焰風起大地所生不相知喩,又下頌云:分別觀內身,此中誰是我?若能如是解,彼達我有無,文殊師利問十首菩薩,所成十信觀行之門,具如問明品說。又賢首品中,從凡夫位以信爲首決定取佛大菩提果,故從凡夫地,信十方諸佛心不動智與自心無異故,只爲無明所迷故,無明與十方諸佛心,本來無二故,從凡夫地信十方諸佛身根本智與自身不異故。何以故?皆是一法性身一根本智,猶如樹枝一根生多枝葉等,以因緣故,一樹枝上成壞不同故,從凡夫地信如來十住、十行、十迴向、十地,我悉盡能行之。何以故?自憶無始時來波流苦海,無益之事,尚以行之,何況如今有益之事?菩薩萬行濟衆生事,豈不能爲?從凡夫地,信十方諸佛,皆從三昧生我亦當得。何以故?諸佛三昧,皆從如來自性方便生,我亦具有如來自體淸淨之性與佛平等,從凡夫地信十方諸佛一切神通我亦當得。何以故?諸佛神通依眞智而得,我但依眞性智中無有煩惱無明成智,一切業亡,唯有智慈,通化自在,從凡夫地信佛智慧,我亦當得。何以故?一切諸佛悉從凡夫來故,從凡夫地信佛大悲普覆一切,我亦當得。何以故?諸佛大悲從大願起,我亦如諸佛發大願故,從凡夫地信佛自在,我亦當得。何以故?諸佛自在於性起法門,智身法身入衆生界,不染色塵諸根自在,我亦不離性起如來智故。從凡夫地信自發心經無盡劫修功行滿位齊諸佛,不移一念。何以故?爲三世無時故,如是從凡夫信解始終徹佛果位,如上所發十種信者,必能決定成就十信之門,住於堅固之種,永不退轉。又十信文殊師利及覺首等十首菩薩,皆從十色世界來,所謂金色世界者,表本白淨法中來故,爲明信心依本信故,妙色世界者,爲信依理事自在妙用而生信故,蓮華色世界者表行信故,爲蓮華表萬行故,瞻蔔花色世界者,表從福慶之色以理智大慈中和性而生信心故,五色之中黃色爲最,此爲應眞色,亦中宮色也。表中道色故,爲此華爲黃色華故,此信心菩薩爲智慈中和之色應眞世界來故,優鉢羅華色世界者,其華赤黃色兼有紫焰色氣,表一行一切行能純能雜而生信故,寶色世界者,表智慈法行成信而可貴故,金剛色世界者,表以佛果德而生信心故,必能決斷諸煩惱故,頗梨色世界者,似水精表信心本淸淨故,平等色世界者,表信法界平等無二故,如是十色世界皆是十信菩薩所信之法門,皆從自信法門中來故曰:從如是世界中來,已下本所事佛。所謂不動智佛、無礙智佛、解脫智佛。如是十箇智佛,卽是佛果中佛,明信自智從佛智果爲因故,來表不因佛果不成信故,其十住位中昇須彌山頂,於兩足指端放百千妙色光明,明前十信位,於普光明殿,兩足下千輻輪中放光,表信位在凡未離凡地,光出足下,爲表以信爲初因其位最下,今說十住,上昇須彌之頂者,明十住初心證法頂故,從地昇上至相盡處故,陟山王頂至法王位處故,明其止爲山也。以入眞實證,非止不會,於兩足指端放百千妙色光者,爲明足指,以艮爲手足之指,初取聖道非指不明履踐之始,表創從十信凡夫之位極,始在十住初首履踐如來法王聖蹤,以其定門,普觀凡聖一切境界,性相無礙色無不妙,故稱爲光,如本業瓔珞經云:修三賢法入聖人位法流水中,心心寂滅自然流入妙覺之位,然此華嚴經意卽不然,識滅時亡,情塵頓絕,唯眞智境一念則五位齊明,爲全將佛果以爲因故。設同凡夫住世百年及以多劫,而不見須臾可遷,不見當成佛,不見已成佛,不見現成佛,十住之位法旣如是,更有何生不成佛耶?更有何生而成正覺?此華嚴經是本法界門,一切諸佛本住火宅,一切佛子究竟所歸,化身權乘摠居其外,若有入者一入全眞,此位中初發心住菩薩見道,住佛知見入佛知見,直與如來同身心性智相故,頓印五位行相,摠在其中,如持明鏡普臨衆色,此經法門法合如是,所有歎說,應如是知,應如是信解,爲法界法門圓無終始,於一念中歲月晦明重重無盡,一毫之內佛境衆生境色相無邊,一成一切成,一壞一切壞,此十住位中,有十箇菩薩,下名悉同,名之爲慧,本從來土,皆號爲華,從十箇華國土來本所事佛下名悉同名之爲月。釋云:此位自己證眞善簡邪正,名之爲慧,理事齊發開敷若華,以開敷法門爲國所居,得法惱除淸涼如月,名爲本所事佛,此之名目摠是十住位中所證法門,非虛名也。經云:爾時法慧菩薩以佛神力,入菩薩無量方便三昧,以三昧力故,十方各千佛剎微塵數世界之外,有千佛剎微塵數諸佛,皆同一號,名曰法慧,普現其前,以十三種法加法慧菩薩,十三加者,語業加者,以言稱歎善哉善哉,身業加者,以手摩法慧菩薩頂,智業加者,經云:卽與法慧菩薩十種無礙智,及此土如來光照其身,是爲十三。新華嚴經論卷第四
1)교의(敎義)의 차별을 10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한 것 중 네 번째이다.
2)현재 활동하고 있는 번뇌를 말한다.
3)수다원(須陀洹)은 예류과(預流果)로 한역하며 무루의 길에 처음 들어간 것을 말한다. 사다함(斯陀含)은 일래과(一來果)로 한역하며 천상계와 인간계를 한 번 왕래하고 나면 열반을 얻는 지위이다. 아나함(阿那含)은 불환과(不還果)로 한역하며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서 다시는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지위이다. 아라한(阿羅漢)은 응공(應供)이라 한역하며 소승 최고의 경지이다.
4)교의(敎義)의 차별을 10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한 것 중 다섯 번째이다.
5)완전하지 못한 교설.
6)완전하지 못한 지혜.
7)분(分)은 부분적인 것을 가리킨다.
8)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이 교화하는 국토를 말한다.
9)10신의 지위에서 이미 모든 부처님의 과덕이 자신의 무명(無明)과 털끝만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기 때문에 뛰어나게 이해하는 마음, 즉 승해심이라고 한다.
10)일정한 극(極)이 없이 전체적으로 원만할 뿐만 아니라 거듭거듭 오묘하고 유현한 경계를 말한다.
11)어떤 모습도 없고 작위도 없는 것을 뜻한다.
12)지(止)ㆍ적정(寂靜)이라고 한역하며, 마음의 온갖 망념을 쉬는 선정의 상태를 말한다.
13)관(觀)ㆍ정견(正見)이라고 한역하며, 법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14)부처님의 경지.
15)번뇌장은 번뇌가 스스로의 성품을 가로막는 조잡한 분별심이고, 소지장은 아는 것이 스스로의 성품을 가로막는 미세한 흐름이다.
16)교의의 차별을 설명하는 10법(法) 의리(義理) 가운데 다섯 번째인 각 지위에서 행하는 행상의 다름을 밝힌 것에서 여섯 가지 수레를 설명하는 것 중 다섯 번째이다.
17)겨겹이 겹쳐서 다함이 없는 현묘함을 말한다.
18)욕계의 6천과 색계의 18천과 무색계의 4천을 합해서 28천이 된다.
19)동(銅)의 보배로 만든 영락을 장식한 것을 말한다.
20)10지 중 첫 번째인 환희지(歡喜地).
21)두 번째인 이구지(離垢地).
22)세 번째인 발광지(發光地).
23)네 번째 염혜지(焰慧地).
24)다섯 번째 난승지(難勝地).
25)여섯 번째 현전지(現前地).
26)일곱 번째 원행지(遠行地).
27)여덟 번째인 부동지(不動地).
28)아홉 번째인 선혜지(善慧智).
29)열 번째인 법운지(法雲智).
30)11지인 등각위(等覺位).
31)화장세계는 비로자나의 보토(報土)이기 때문에 정토이다. 이는 예토와 정토를 구별하는 정토가 아니다.
32)색계의 4선천과 무색계의 4천의 대중들을 말한다.
33)일생만 지내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르는 등각위의보살. 예컨대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이 세상에 나와서 성불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34)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죄라서 5무간(無間)이라고도 한다. 첫째, 부모를 해치거나 살해산 죄, 둘째, 화합하는 승려의 교단을 깨뜨리는 죄, 셋째,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죄, 넷째, 아라한을 죽이는 죄, 다섯째, 갈마승을 깨뜨리는 죄이다.
35)교의(敎義)의 차별을 설명하는 10법 의리(義理) 가운데 다섯 번째인 각 지위에서 행하는 행상의 다름을 밝힌 것에서 여섯 가지 수레를 설명하는 것 중에 여섯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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