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功臣)의 처신 ― 엄자릉(嚴子陵)>(617)
친구가 황제되자 자릉은 은거했네
공신이 앞다투어 벼슬을 찾이하면
부춘산 산신령님이 외로워서 어쩌나!
어느날 친구가 황제가 되었다면 벼슬을 해야하나? 아니면 산속에 꼭꼭숨어 은사(隱士)로 일생을 보내야 하나? 정답은 없다. 엄광(嚴光)의 자는 자릉(子陵)이다. 엄자릉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동한(東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 BC. 6∼AD. 57)와 동문수학한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BC. 202∼AD. 8)나라는 211년만에 왕망(王莽)에 의해 멸망했고, 왕망의 신(新, 8∼27)나라는 19년만에 유수에 의해 망했다. 천하가 혼란하자 유수는 일개 포의(布衣)로서 기병하여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동한을 개국했다. 친구 유수가 황제가 되자 엄자릉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황제가 된 유수는 부춘산에 숨어사는 친구 엄자릉을 불렀다. 엄자릉은 황제를 보자마자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만인가?”하고 친구로 대했다. 신하들은 이를 보고 어쩔줄 몰랐다. 광무제 유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엄자릉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잤다.
천문(天文)을 보던 관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하는 천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태백은 곧 임금을 상징하니 황제에게 위해(危害)가 가해지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천문관은 어전에 엎드려 이 사실을 고하고 알아보니, 엄자릉이 광무제의 배 위에다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엄자릉의 은거와 거침없는 행동, 그리고 이를 수용한 광무제의 큰 도량과 우정의 세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남송의 강호파 시인 대복고(戴復古, 1167∼?)는 그의 「조대」(釣臺)에서 엄자릉을 이렇게 노래했다.
만사에 마음 없고 다만 낚시대 하나뿐(萬事無心一釣竿)
삼공벼슬을 이 강산과 바꿀소냐(三公不換此江山)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 때문에(平生誤識劉文叔)
쓸데없는 이름만 만세에 퍼졌구나(惹起虛名萬世間)
시인은 엄자릉의 고결한 인품을 높이 기렸다. 황제가 된 친구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은거한 절의(節義)와, 황제를 친구로 대한 드높은 선비의 기백(氣魄)을 가졌던 엄자릉과, 친구의 무례한 행위를 수용한 광무제의 포용과 도량(度量)의 미학은 만세에 회자되고 있다. 광무제는 예(禮)로 자신을 낮추었고 엄자릉은 절의로써 자신을 높였다.
후세의 송나라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엄선생사당기」에서 두 사람을 이렇게 평했다.
엄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의 위로 솟아나오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밖을 포용하니, 선생이 아니었으면, 광무제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요, 광무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선생의 높은 절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탐욕스런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를 서게 했으니 이는 명교(名敎, 유교)에 크게 공이 있는 것이다.(蓋先生之心, 出乎日月之上, 光武之量, 包乎天地之外, 微先生, 不能成光武之大, 微光武, 豈能遂先生之高哉. 而使貪夫廉, 懦夫立, 是大有功於名敎也.)
이어서 “구름낀 산은 창창하고(雲山蒼蒼) 강물은 깊고 넓도다(江水怏泱). 선생의 유풍은(先生之風) 저 산처럼 높고 저 강물처럼 장구하리로다(山高水長)”라고 노래했다.
친구가 황제가 되자 은거하여 낚시질로 일생을 보낸 절의와, 황제가 부르자 친구로 대하고, 황제의 배위에다 발을 올려놓고 잠을 잤던 엄자릉과, 이를 포용한 광무제의 도량이 새삼 그립기만 세상이다.(출처 : 김상홍, 『선비의 보물상자』의 「황제의 친구」(2014. 조율, 100∼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