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영웅들〉 시리즈의 열두 번째 주인공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복음의 열정으로 의료 선교사이자 개척 선교사로서 아프리카를 품은 영적 거인의 삶을 살았다. 방적공장에서 열네 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서 의료 선교사가 되었으며, ‘백인의 무덤’이라고 불렸던 아프리카에 자원하여 나아갔다.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장애물이나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나아갔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이 시대 복음의 불모지를 개척하며 지혜롭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원하는 주의 군사들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 준다.한국어판 편집자 서문
데이비드 리빙스턴
이 때 리빙스턴은 이미 60세로 병들어 쇠약하였다.
그는 만 30년 동안 문명을 등지고
그런데 그는 아프리카에 머물렀고 같은 해에 별세하였다.

그의 마지막 일기는 1873년 3월 19일,
나의 예수여, 나의 왕이여,
오늘을 기하여 다시 나를 바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나를 받아 주소서.
독생자를 나에게 주셨는데
이 못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몽땅 바치오니
그의 시체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발견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 사람에게는 조사가 필요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 |
|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년,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스코틀랜드의 가난하지만 경건한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10대 때 회심하고,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가고자 하여 방직공장에서 14시간의 중노동을 하면서 학업을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27세에 신학과 의학 공부를 마치고 선교사로 갈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아편 전쟁으로 발전된 중국과 영국간의 분쟁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를 통해 중국대신 서인도제도로 파송될 계획이었다. 그러는 와중 베테랑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팻을 만나 1840년 12월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곧 아프리카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선교사역을 하면서 보니, 원주민들에게 지도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선교사들의 집중 거주 현상이나 심각한 선교사들간의 불화로 큰 실망을 하였다. 리빙스턴은 견습 선교사로 쿠르만 지역에 2년 반을 머무르면서 1년 이상은 탐험을 위해 선교 기지를 떠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개척자적인 생활”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1845년 쿠루만에서 결혼 한 리빙스턴 부부는 7년 정도 반 유목민 생활을 했다. 아내 메리와 아이들은 때때로 집에 머물기도 했고, 리빙스턴과 함께 여러 지역을 헤매는 방랑 생활도 했다. 리빙스턴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프리카 탐험을 계속 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852년 케이프타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냈다. 2차례의 영국방문 외에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탐험에서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가족들이 떠난 후 리빙스턴은 전에 없던 성공의 시간들을 가졌다. 그의 최초이자 최대의 탐험은 잠베지 강을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것이었다. 두 번째 탐험은 잠베지 강이 항해하기에 부적합함을 밝히는 정도였고 이에 실망한 그는 셔 강과 니아자 호수를 탐험했다. 1865년 나일 강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험이 시작되었다. 비록 나일 강의 근원은 밝혀 내지 못했지만, 그는 주위 환경 및 아프리카인들과 한층 더 친밀해 질 수 있었고, 그가 개척한 길들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에게 유용한 이동 통로로 사용될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리빙스턴은 그의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숨져 그의 하인에게 발견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 므푼두 나무 밑에 묻고 그의 시체는 미이라로 만들어 2,400 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였다. 그리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로서 한 위대한 선교사의 생애가 마감된 것이다. 출처:missionkorea.org |

데이비드 리빙스턴에게 배우는 열정적인 신앙생활에 필요한 4가지 태도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생애와 연혁
참고 문헌
‘다들 도대체 왜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걸까?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수십, 수만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저 선교회 건물에 편하게 앉아 있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데이비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다른 선교사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선교사들이 ‘정착자’였다면, 그는 ‘개척자’이며 ‘탐험가’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미개척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정이 타올랐다. 그런 열정이 자신을 어디까지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열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기에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95쪽
“저는 선교사의 신분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아프리카의 일부분을 개척하는 사명을 이행했을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막 방패를 들고 선한 싸움을 싸우러 나선 병사에 불과합니다. 아프리카인이 단 한 사람도 노예가 되지 않고, 기독교의 빛 가운데 공정한 무역이 이루어지기까지 저는 결코 제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215-21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