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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상식

경희궁의 역사와 소개

작성자남인도_윤|작성시간26.06.11|조회수16 목록 댓글 0

서울에 있는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慶熙宮)은

파란만장한 한국사의 굴곡을 가장 온몸으로 맞선 비운의 궁궐입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린 것에 대칭해,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경희궁이 걸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시기별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창건기: 왕기가 서린 곳에 지어진 '경덕궁'

 

경희궁은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습니다.

 

시작 (1617년):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곳을 불길하게 여겼습니다.

마침 인왕산 자락인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집터에 '왕기(王氣, 왕이 될 기운)'가 서려 있다는 풍수설을 듣고,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그 땅을 몰수하여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완공 (1623년):

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궁궐이 완성된 직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정작 이 궁궐에 입주해 보지도 못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2. 전성기: 조선 후기 정치의 중심지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 이후, 조선 후기의 많은 왕이 이곳을 사랑하고 머물렀습니다.

 

이름의 변경 (1760년):

영조는 '경덕(慶德)'이라는 글자가 자신의 원종(인조의 아버지)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정치의 무대:

숙종, 영조, 정조, 철종 등 많은 왕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거나 즉위했습니다.

특히 숙종과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영조는 인생의 후반기 약 25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승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조가 왕세손 시절 창덕궁의 자객 위협을 피해 도망쳐와 숨어 지내며 즉위식을 올린 곳도 바로 경희궁의 숭정문 앞이었습니다.

 

3. 수난기: 일제강점기의 철저한 파괴

 

조선 전기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무너졌다면,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말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철저한 파괴를 당했습니다.

 

궁궐의 전각 철거 시작

1910년

일제는 경희궁 터에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광복 후 서울고등학교)를 세우며 궁궐 건물을 본격적으로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전각의 강제 매각 및 이전

1920년대

궁궐의 중심 건물들이 사찰이나 다른 기관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정전인 숭정전은 조계사(이후 동국대학교 안 정각원으로 이전)로,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의 문으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방공호 건설로 지형 훼손

1944년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비행기 공습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경희궁 바위 기단 밑에 거대한 콘크리트 방공호를 파놓아 자연 지형까지 크게 훼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00여 채가 넘던 경희궁의 전각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 현대: 잃어버린 궁궐을 찾기 위한 노력

 

광복 이후에도 경희궁 터는 한동안 서울고등학교 교정으로 쓰이다가,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인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원의 한계:

일제가 이미 궁궐 땅을 쪼개어 민간에 팔아넘겼고,

주변에 고층 빌딩과 도로가 들어선 탓에 원래 규모의 겨우 30% 남짓한 영역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모습: 현재는 정문인 흥화문,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등이 복원되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옛 궁궐터 일부에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희궁 관람 팁:

다른 거대한 궁궐들에 비해 규모는 작고 아담하지만,

뒤편의 울창한 숲(서암 바위 부근)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산책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궁궐입니다.

빌딩 숲 한복판에서 조선의 아픈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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