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 조용해졌다.
귀를 울리던 잔잔한 아내의 질문이 사라진 거실은 낯설 만큼 평온했고, 그 평온함의 틈새로 기묘한 쓸쓸함이 스며들었다.
내 아내는 본래 호기심이 많고 매사에 묻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보, 이건 어떻게 해야 해?",라든가
"여보, 오늘 날씨에 이 옷은 너무 추울까?"
평범한 일상의 문장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실을 채우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을 때가 더 많았다.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로 업무를 볼 때 문을 열고 들어와
던지는 사소한 질문들은 내 집중력의 흐름을 뚝뚝 끊어놓기 일쑤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얼마 전 아내가 들어야 했던 안전교육 사이버 강의였다.
모니터 앞에 앉아 쩔쩔매던 아내는 결국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며
시험보는데 답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왔다.
한두 번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가벼운 봉사라 생각하며
답을 찾아 주엇지만, 반복되는 질문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이 바로 인공지능(AI)이었다.
"여보, 이제 나한테 묻지 말고 여기 이 창에다가 물어봐. AI가 나보다 훨씬 똑똑해서 뭐든지 다 알려줄 거야."
마치 미뤄둔 숙제를 해치운 것처럼 개운한 마음이었다.
폰을 만지작거리는서툰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나만의 온전한 자유와 고요를 찾았다고 쾌재를 불렀다.
인간의 예감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 예상은 적중했고, 또 완벽하게 빗나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내의 "여보" 소리가 뚝 끊겼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나를 향하던 그 수많은 질문들이 마법처럼 사라진 것이다.
집안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완벽한 침묵으로 채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거실을 지나다 슬쩍 아내의 곁을 훔쳐보았다.
아내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언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알려준 AI 창이 띄워져 있었다.
"이 고기로 불고기를 하려는데, 질기지 않게 재우는 방법이 뭐야?"
"오늘 동창 모임이 있는데, 화사해 보이면서도 격식 있는 옷차림을 추천해 줘."
아내는 음식 만드는 법, 옷 입는 스타일, 그리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일상의 사소하고도 수많은 고민들을 조곤조곤 AI와 상담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아내의 서툰 문장 속에서도 찰떡같이 의도를 파악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을 실시간으로 쏟아냈다.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바쁘다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
완벽하게 다정한 존재가 아내의 손안에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묘한 감정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다.
질투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옹졸한 질투!
내가 귀찮아하며 건넸던 그 수많은 질문들이
사실은 아내가 나에게 건네던 대화의 징검다리였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내가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불고기 양념 레시피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오늘 맛있는 요리를 해줄게"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고,
옷차림을 물었던 것은 "당신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거나
"내 삶의 작은 외출을 공유하고 싶다"는 은밀한 시그널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보처럼 그 대화의 끈을 내 손으로 잘라 인공지능에게 쥐여주었다.
AI는 지치지 않는 친절함으로 아내의 모든 응석과 호기심을 받아주었고,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의 눈치를 보며 질문을 고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기계에게 내 아내를, 아니 아내와의 시간을 통째로 빼앗겨버린 기분이 들었다.
기계의 완벽함 앞에 남편이라는 존재의 허술함이 낱낱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왜 그 사소한 대화들을 그토록 귀찮아했을까.
열 번 물으면 세 번쯤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두 번쯤은 나중에 얘기하자며 받아치던 나의 무심함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왔다. 기계보다 못한 남편이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이었다.
주방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온다. 아내는 아마 지금도 AI가 알려준 정확한 계량에 맞춰 요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실패 없는 완벽한 식탁이 차려지겠지만, 나는 예전의 그 서툴고 간이 조금 안 맞던, 그래서 "여보, 오늘 간이 어때?"라고 수줍게 묻던 아내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오늘 저녁에는 슬그머니 아내의 곁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네보아야겠다.
"여보, 오늘 메뉴는 뭐야? 당신이 해주는 불고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인공지능이 채워줄 수 없는, 조금은 투박하고 서툴지만 온기가 있는 남편의 대화를 아내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 기계에게 빼앗긴 내 아내를, 그리고 우리의 다정했던 거실을 이제는 내가 먼저 다가가 되찾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