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슴속에 등불처럼 맑게 남아있는 이가 있습니다. 제게는 감리교회에 다니던 시절 처음 만났던 한 어르신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깐깐하게 공사 감리 업무를 보시던 전문직 신사였던 그분은, 현직에서 물러난 후 돌연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의 깊은 품으로 귀농을 선택하셨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그분이 구입한 땅은 무려 삼천 평에 달하는 드넓은 밭이었습니다.
그 광활한 대지 위에 콩과 땅콩, 팥, 옥수수, 참깨 등 온갖 작물이 심어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분의 '초록빛 고집'이었습니다. 어르신은 농약을 치고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리면 손쉽게 갈 수 있는 길을 한사코 거부하셨습니다. 화학 약품은 일절 대지에 대지 않겠다는, 땅과 인간에 대한 정직한 약속을 고집스레 지켜내신 것입니다.
그분의 열정은 단순히 흙을 일구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농업기술센터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최신 친환경 농법을 배우셨고,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PC 교육까지 섭렵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다루기 힘들어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독수리 타자로 시작해, 이제는 인터넷 뱅킹은 물론이고 직접 농산물을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 동영상 편집까지 능숙하게 해내십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마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시는 그 열정 앞에서는, 젊다는 이유로 나태했던 제 자신을 매번 돌아보며 부끄러워지곤 했습니다.
흔히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 본전치기나 다행이고 빚더미에 앉기 십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잡초와의 전쟁에서 지고, 수확량도 일반 농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분은 특별했습니다. 스스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직접 생산한 친환경 농산물을 정성껏 가공하고 유통하여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셨습니다.
"친환경 농사로도 충분히 당당하고 풍요롭게 잘 살 수 있다"라는 살아있는 교훈을 몸소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어쩌다 그분의 일손을 도우러 밭에 나갈 때면, 저는 매번 혀를 내두르곤 했습니다. 스물다섯 해나 연하인 제가 먼저 지쳐 허리를 펴고 헐떡이고 있을 때도, 그분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밭을 일구고 계셨습니다. 대지가 주는 정직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흡수하신 덕분일까, 그분의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은 청년의 그것보다 더 푸르렀습니다.
어느덧 그분이 청일면의 흙과 인연을 맺은 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의 무게는 정정하던 거목에게도 찾아와, 이제 어르신의 연세도 여든일곱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아무리 열정이 청춘 같아도 삼천 평 대지를 홀로 감당하기엔 이제 육신의 힘이 많이 부친다고 고백하시는 목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평생을 자식처럼, 목숨처럼 가꾸어 온 이 거룩한 농지를 이제는 다른 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살 사람을 구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르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청일면의 삼천 평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닙니다. 제초제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순수한 대지이자,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과 자연을 향한 경외심이 촘촘히 박힌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분이 뿌린 땀방울과 올곧은 신념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저 푸른 대지 위에서 또 다른 기적을 일구어 갈 따뜻한 주인이 하루빨리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어르신의 아름다운 은퇴와 또 다른 시작을 응원하며, 제 마음속 영원한 청춘인 그분의 건강을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