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忘憂堂의 護國精神
-忘憂堂이 後世에 남긴 敎訓을 中心으로-
洪 瑀 欽(嶺南大學校敎授)
Ⅰ. 緖 言
「溫故知新」이란 옛말과 같이 우리가 지난날의 歷史를 回顧하고 硏究함은 複雜하고 險難한 現實을 올바르게 살아감과 동시에 未來의 世界를 正確하게 豫測할 수 있는 智慧를 터득하는데 그 根本 目的이 있다. 오늘날 우리 배달겨레가 400년 전 壬辰倭亂을 克服하는데 不朽의 大功을 樹立한 紅衣將軍 忘憂堂 郭再祐先生의 護國精神을 追慕하고 硏究하는 目的도 그 例外는 아니다. 그러므로 忘憂堂을 尊敬하고 追慕하는 事業이나 活動은 단순히 忘憂堂의 行蹟을 讚揚하거나 그 人格을 景仰하는 데서 그쳐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忘憂堂에 관한 大小行事를 통해 忘憂堂의 生涯를 理解하고 그 思想과 精神을 배움으로써 混亂한 國家의 現實을 直視하고 거기에 對處하는 眼目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배달겨레가 나아가야 할 未來의 座標를 討論하고 豫測하는 準據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금번 慶尙南道 宜寧郡廳과 忠翊祠가 共同으로 忘憂堂에 관한 國際學術發表會를 開催하게 된 것은 매우 뜻 깊고 時宜適切한 措處라 할 수 있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忘憂堂 郭再祐(1552-1617)는 朝鮮朝의 名門巨族 苞山郭氏의 血統을 타고나 孔子의 春秋大義 思想으로 精神的인 터전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國家民族을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直言極諫을 回避하지 아니하였으며, 倭敵이 侵入하였을 때는 일개 平民儒生의 身分으로 義兵을 일으켜 奸惡한 敵軍의 총칼 앞에서도 抵抗의 喊聲을 왜치고 正義의 깃발을 휘둘렀던 民族英雄이었다.
이번 위의 두 기관이 中國哲學界의 巨擘 張立文敎授와 忘憂堂의 生涯와 業績에 관해 깊이 硏究해온 日本의 貫井正之敎授 그리고 한국 民俗學界의 出衆한 學者 林在海敎授를 招請하여 開催하게 된 이 國際學術大會는 忘憂堂의 思想과 功績을 客觀的인 立場에서 正確히 理解하고, 忘憂堂의 精神을 오늘에 되살리며, 忘憂堂의 思想을 世界史的인 觀點에서 照明하는 契機가 될 것이다.
필자는 今番 이 學術大會를 즈음하여 16世紀 忘憂堂의 護國精神이 21世紀를 살아가는 우리 배달겨레에게 남긴 敎訓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다음 몇 조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指導者는 먼저 大義를 實踐할 人格을 陶冶하라.
儒家의 觀點에 의하면 民族과 國家는 多數의 大衆과 小數의 指導者로 構成된 하나의 集團的인 共同體를 意味한다. 朱熹 《大學》〈序文〉:「蓋自天降生民-作之君作之師云云.」의 民衆이며, 「君」과 「師」는 指導者를 의미한다.
원래 國家의 構成員인 一般大衆은 자신이 소속된 民族의 問題와 國家의 將來를 몇 사람의 指導者에게 委任한 체 각자 賦課된 生業에 골몰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民族과 國家의 指導者는 묵묵히 血稅를 바치면서 生業에 從事하는 大衆의 希望과 欲求가 무엇인지를 正確히 看破하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指導者가 大衆을 인도하는데 必要한 德目은 無數히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德目은 大義를 實踐할 수 있는 學識과 人格을 陶冶함이다.
孟子가 梁나라의 惠王을 찾아가 만났을 때 王이 말하되 “先生께서는 千里를 멀다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찾아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利롭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물음에 대해 孟子는 對答하되 “王께서는 하필 利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로지 仁과 義가 있을 뿐입니다. 國王이 어찌하여 내 나라를 利롭게 하겠는가라고 하면, 大夫는 어찌하여 내 집을 利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할 것이고, 士庶人은 어찌하여 내 자신을 利롭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니, 이와 같이 上下가 利로써 다투게 되면 그런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孟子》〈梁惠王편〉:「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에서 孟子가 說破한 「仁」은 《大學》에서 말 한 바 自身의 明德을 밝힌 사람이 남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 즉 忠恕의 境地를 意味하며, 「義」는 是非와 善惡을 區分하여 항상 正道로 나아가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이같이 「仁」을 바탕으로 한「義」는 私利를 超越한 大義다. 民衆을 인도하는 指導者가 大義를 버리고 私利에 執着하게 되면 그런 민족이나 나라는 반드시 自滅의 危險에 逢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國王이 大義를 實踐하면 士大夫와 士庶人이 모두 大義를 實踐하여 國家와 民族은 安全을 確保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위의 책〈離婁章〉第四:「君仁, 莫不仁, 君義, 莫不義.」
忘憂堂 역시 일찍부터 民族의 指導者가 되기 위해 學問을 통한 人格陶冶에 邁進했다. 그런데 忘憂堂은 當時에 크게 流行한 理氣哲學 즉 形而上學的이요 思辨的인 性理學에 몰두하지 아니고, 仁義思想을 現實에 應用할 수 있는 學問 즉 《春秋》를 통해 人生觀의 骨格을 세우고 世界觀의 領域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先生은 드디어 마음을 가다듬고《春秋傳》을 깊이 연구했으니 先生의 學問은 대개 이 《春秋傳》을 根本으로 한 것이다.《忘憂先生年譜》14歲條
는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春秋》는 孔子가 저술한 魯國의 歷史書이며, 《春秋傳》은 《春秋》에 대한 左氏, 公羊氏、穀梁氏 등 三家의 解釋書 즉 《春秋》三傳을 의미한다. 통설에 의하면, 孔子는 자신이 태어난 魯國의 歷史를 記述하되 옳은 일을 襃揚하고 그른 일을 貶斥함으로써 後人들로 하여금 항상 正義로운 생각과 正義로운 行動을 하도록 敎化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春秋大義다.「大一統」, 「褒貶是非」, 「亂臣賊子懼」, 「誅意之法」등은 모두 그러한 孔子의 史觀을 推測함에서 導出된 語彙들이다. 拙稿〈郭忘憂堂 學問의 特性과 그 發現〉 《壬亂義兵硏究》, pp. 14-143, 사단법인제전위원회, 충익사관리사무소, 2004, 4
忘憂堂은 이 《春秋傳》을 學問의 根本으로 삼았기 때문에 스스로 《春秋》가 가르쳐 준 大義를 實踐함과 同時에 거기에 違背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을 다해 그것을 바로잡아 주었다. 壬辰倭亂 때 晉州城을 버리고 逃亡을 친 慶尙監司 金睟에게 檄文을 보낸 일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 제1권〈檄巡察使金睟〉
, 光海君의 兄 臨海君을 處刑해야 한다고 上疏함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 제2권〈斥全恩疏〉참조
, 逆賊의 陋名에 휩싸인 光海君의 아우 永昌大君을 살려야 한다고 主張함 위의 책〈救永昌大君疏〉참조
등은 다 그러한「褒貶是非」의 大義를 實踐함에서 이루어진 言論이었다. 그것은 실로 私利私慾을 超越한 直言極諫이었다.
이같이 《春秋》大義를 學問의 根本으로 삼고, 人格 陶冶의 標準으로 受容했던 忘憂堂이 21世紀 韓國의 指導者들에게 전하고 있는 歷史的인 敎訓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대들은 남을 다스리는 指導者가 되기 전에 그대들 자신이 먼저 私利를 버리고 大義를 實踐할 수 있는 人格을 陶冶하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大衆 앞에 서서 自身이 民族과 國家를 이끌어 갈 指導者가 되겠다고 豪言壯談하는 저 自稱 指導者들은 진정 가슴에 손을 얹고 自身이 이 忘憂堂의 嚴重한 啓示를 實踐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私利私慾에 耽溺하여 大義를 實踐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忘憂堂이 생각하는 指導者가 될 수 없다. 그런 자는 民族을 올바르게 引導할 수 있는 指導者가 아니라 도리어 民衆을 欺瞞하고 나라를 混亂하게 하는 公敵에 불과하다.
Ⅲ. 經濟가 아무리 重要해도 반드시 道德의
基盤 위에 建設하라.
오늘날 우리나라는 利潤의 極大化를 목표로 한 市場經濟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자유로운 經濟活動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個人所有의 大企業과 中小企業이 雨後竹筍처럼 생겨나고 庶民들은 生業을 위한 私有財産 蓄積에 總力을 傾注하고 있다. 이러한 無限競爭의 經濟制度로 인해 國民들의 衣食住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改善되었다. “漢江의 奇蹟을 이루었다.”라고 自畵自讚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裏面을 들여다보면 위로는 最高指導者에서부터 아래로는 庶民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經濟的인 利益追求에만 傾倒되어 있을 뿐 人倫紀綱의 確立을 위한 禮儀凡節이나 國家社會의 秩序維持를 위한 道德規範을 再建하는 데는 아무도 關心이 없는 것 같다. 國家와 民族을 領導해오던 몇몇 最高 指導者가 自身이나 直系家族의 산더미 같은 不正蓄財로 監獄生活을 면치 못하고 있음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들이 囚衣를 입고 裁判廷에 서며 監獄을 향하는 TV 畵面을 바라보고 있던 國民들의 心情은 과연 어떠했을까? 또 그들을 따라 무엇을 배우고 행해 왔을까?
그들의 그늘에서 자라온 多數의 高官大爵들 역시 公金橫領과 賂物授受罪로 줄줄이 監獄으로 향하고 있으며, 일부 庶民 중에는 몇 푼의 保險金을 喝取하기 위해 아내와 자식이 공모하여 남편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돈을 얻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며, 젊은 여자들이 사창가에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겠다고 白晝大路에서 政府를 향해 시위를 벌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음이 그것이다. 이같이 道德을 基盤으로 하지 아니한 經濟建設은 人面獸心의 國家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先人들이 자랑해오던 “東方禮義之國”이란 말은 이미 먼 옛날의 傳說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참으로 이래서야 되겠는가.
富와 貴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道理에 어긋나게 그것을 얻는다면 받아드리지 아니하겠다. 貧과 賤은 사람이면 누구나 싫어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의롭지 아니하게 그것을 벗어난다면 차라리 그것을 벗어나지 아니하겠다. 《論語》 卷四〈里仁〉
는 儒家의 聖人 孔子의 말씀이다. 孔子도 富貴를 좋아하고 貧賤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道理에 어긋나게 富貴를 얻거나 도리에 어긋나게 貧賤을 벗어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럼 忘憂堂은 이 問題에 대해 어떤 見解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忘憂堂은 父親 定庵公이 많은 妻家財産을 相續함으로 인해서 어릴 때부터 상당히 富裕한 環境에서 자랐으며 또한 적지 아니한 財産을 所有하게 되었다. 이른바 地主階級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財産이 없으면 饑餓를 면치 못할 儒生이었으므로 財産에 대한 重要性과 價値를 누구보다 切實하게 생각할 수 있는 忘憂堂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忘憂堂이 自身의 個人財産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處分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92 4월 22일에는 “倭賊을 討伐함으로써 나라에 報答하겠다.”는 盟誓를 家廟에 아뢰고 全 財産을 기울여 壯士들을 모집하였다.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망우선생년보〉 41歲條
는 忘憂堂이 所有하고 있던 全體의 財産을 處分하던 場面의 記錄이다. 1592년 즉 倭敵이 쳐들어온 壬辰年은 忘憂堂이 41세 되던 해였다. 이 때 망우당은 朝廷으로부터 不當하게 科擧合格을 取消 당하고 故鄕 世干里에 내려와 일개 平民儒生으로 지내던 순간이었다. 때문에 戰爭이 일어나면 財産을 남겨둔 채 家族을 데리고 避難을 떠나면 그 뿐이었다.
그러나 忘憂堂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 自身과 家族의 生命을 維持해줄 그 所重한 財産을 말끔히 處分하여 倭敵을 討伐할 義兵을 募集하는데 사용했다. 自身의 財産보다 國家와 民族에 대한 道義的 責任을 더 切實하게 여긴 忘憂堂이었기 때문이다.
근간의 안부는 어떠하냐? 늘 염려가 되는구나. 나는 항시 별 탈이 없고 이곳의 일가도 다 평안하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지만 그리 흡족하지 못하니 너희들 집에는 모심는 일을 다 끝내어 오래 방치해 둠에 이르지는 아니했는지 모르겠구나. 다른 道와 邑의 사람들이 보리 사는 일로 인해 道路에 짐바리가 연이어 있으니 凶年이 들었음을 알겠구나. 百姓들의 事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걱정이로다. 보리를 수확하는 일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해 조치해야 할 것이니라.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 卷一〈두 아들(형、활)에게 부친 편지〉(寄二子瀅活書)
는 忘憂堂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자신의 두 아들이 모를 심는 일을 督勵함과 아울러 飢餓에 허덕이는 일반 百姓들의 事情을 더욱 걱정한 忘憂堂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新郞의 體格과 얼굴의 아름다움, 노래하고 춤출 줄 아는 程度에 따라 奴婢와 논밭을 나누어준다고 하나, 나의 경우에는 亂離 뒤에 奴婢가 다 굶어 죽었으며 한두 명 남아 있던 것마저 아들과 딸에게 다 나눠줬기 때문에 자네에게는 한 명도 나눠 줄 것이 없네.
논밭은 좋은 것이 곳곳에 묵어 있는지라 耕作하고자 하면 금할 생각은 없으니 특별히 나누어 줄 필요도 없네. 다만 한 마디 말을 주어 평생 쓸 바의 물건으로 삼게 하고자 하네. 그것은 비록 世俗에서 주는 바는 아니나 실로 옛날 사람들도 늘 보배로 삼아온 바이네.
부지런히 글을 읽고, 삼가 몸을 가지며, 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충성으로 임금님을 섬김이 그것일세.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奴婢 천명을 갖는 것보다 만 배는 나을 것일세.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주는 바는 참으로 크지 아니한가. 부탁하건대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여 스스로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것을 奪取해 갈 사람이 없을 걸세. 위의 책〈사위 성이도에게〉(與女壻成以道)
는 忘憂堂이 사위 성이도에게 보낸 편지다. 사위에게 奴婢나 논과 밭을 나누어 주는 대신「부지런히 글을 읽고, 삼가 몸을 가지며, 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忠誠으로 임금님을 섬김」의 倫理道德的인 敎訓을 내려준 것이다. 그것이 만 이랑의 논밭이나 천명의 奴婢를 나누어 주는 것보다 만 배나 값진 일로 여긴다고 하였다.
唐나라의 堯임금과 虞나라의 舜임금은 천하를 어진 사람에게 주었고, 中國 上古時代의 唐나라 임금 堯는 자기 아들에게 帝位를 물려주지 않고 歷山의 耕作하던 舜에게 帝位를 禪讓하였고, 虞나라 임금 舜 역시 자기 아들에게 帝位를 물려주지 않고 夏나라의 禹에게 帝位를 禪讓했던 사실을 뜻함
나도 江舍를 어진 사람에게 주노니, 주는바 물건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비록 하늘과 땅 같지만 그 주는 까닭의 뜻은 堯舜과 나의 뜻이 같도다. 내가 보건대 강가에 亭子를 지은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오래 지키는 사람이 드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그것을 어진 사람에게 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지금 내가 하나의 정자를 나의 私物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그대가 山水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나의 정자를 지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능히 내 마음을 그대의 마음으로 삼아 어진 사람을 얻어 그에게 주면, 그 어진 사람 역시 그대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능히 지킬 수 있는 어진 사람에게 전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정자는 영원히 허물어지지 아니할 것이로다.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 卷一, 〈이도순에게 강사를 맡기는 편지〉(與李道純江舍書)
는 忘憂堂이 老境에 이르러 江舍란 亭子를 직계 아들에게 贈與하지 아니하고 弟子 李道純에게 傳授하는 이유를 밝혀둔 글이다. 江舍는 분명히 값진 財産이었다. 그 값진 자신의 財産을 아들에게 주지 아니하고 弟子에게 준 것은 저 中國 古代의 堯가 나라를 아들에게 傳授하지 아니하고 舜에게 讓位함과 같은 意味를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볼 때 비록 地主階級이었던 忘憂堂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道德的인 基盤 위에서 財産을 相續했고 道德的 基準 위에서 財産을 處分하고 贈與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忘憂堂이 오늘날의 經濟主體들에게 忠告할 敎訓은 무엇이겠는가? “그대들은 경제적인 재산이 아무리 重要해도 반드시 道德的인 基盤 위에서 建設하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自身을 亡하게 하고 國家를 禽獸의 巢窟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Ⅳ. 自國이 自國을 친 다음에 敵國이 自國을 侵略한다.
近間 中國이 高句麗史를 歪曲하여 韓國人의 自尊心을 상하게 한 데 이어, 日本이 또다시 韓、日間의 史實을 歪曲한 歷史敎科書를 刊行하고, 獨島의 領有權을 提起함으로 인해서 韓國은 反中日感情이 대두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골치 아픈 韓、中、日間의 問題가 왜 繼續해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깊이 따져보는 동시에 어떤 方法으로 對處해야만 다시는 그런 일이 再發하지 않도록 豫防할 수 있는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400년 전의 忘憂堂은 壬辰倭亂의 뼈아픈 經驗을 통해 국제분쟁의 원인에 대해 分明한 解答을 남겨 주고 있다.
臣은 듣건대, ‘나라는 반드시 自國이 自國을 친 다음에 他國이 自國을 치는 法’이라 하옵니다. 豊臣秀吉이 비록 强力하고 暴惡하다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 틈을 탈 겨를을 주지 아니했다면 저 자가 어찌 능히 이와 같이 凶惡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겠사옵니까. 臣은 혹시라도 殿下께서 殿下를 討伐함의 실마리를 만드시고 豊臣秀吉이 그 틈을 탄 것이 아닐까 두렵사옵니다. 殿下께서는 지난날의 허물을 痛烈히 고치심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수습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국민들의 마음이 鞏固하게 되면 하늘의 뜻은 恢復될 수 있을 것이며, 中興의 大業은 날짜를 헤아려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拙譯 《국역망우선생문집》 卷二 (상중(喪中)의 출사(出仕)를 사양한 제1의 소(辭起復第一疏)― 정유 9월(丁酉 九月) ―)
와 같이 忘憂堂은 壬辰倭亂이 일어나게 된 根本 原因을 저 侵略의 魁首 豊臣秀吉에게 돌리지 않았다. 「朝鮮(殿下)이 먼저 朝鮮(殿下)을 침」으로써 豊臣秀吉이 侵略해올 수 있는 빌미를 提供한 朝鮮朝廷에 그 根本的인 責任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國難의 再發을 豫防하는 對策도 高聲으로 日本을 聲討하거나 豊臣秀吉의 목을 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朝鮮이 朝鮮을 친 지난날의 過誤를 痛烈히 反省하고 고침으로써 國民들의 마음을 收拾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上疏文에서 「自國(朝鮮)이 自國(朝鮮)을 침」의 具體的인 內容은 무엇일까?
지금의 大小群臣들은 무리를 나누고 黨을 만들어 자기 당에 들어오면 稱讚하고 자기 黨에서 나가면 排斥하여 각각의 黨派끼리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날마다 헐뜯고 攻擊함을 일삼고 있사옵니다. 저들은 國家形勢의 危急함과 百姓들의 利害와 社稷의 存亡은 홀연히 그 마음에 두고 있지 아니하니 장차 이 나라를 반드시 亡하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옵니다. 아! 참으로 慟哭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한숨 쉬어 말지 아니할 일들이옵니다. 위의 책〈관직을 포기하는 소(棄官疏)〉―경자 2월, 좌병사를 맡고 있을 때(庚子二月左兵使時) ―
를 보면 「朝鮮이 朝鮮을 쳐서 亡하게 한 일」은 國政을 責任지고 있는 大臣들이 國家의 存亡을 뒤로 한 채 오로지 私利私慾을 채우기 위해 피비린내 나게 벌린 黨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임금이 지난날의 過誤를 痛烈히 고치고 國民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方策은 무엇이었겠는가?
臣은 듣건대 ‘집이 가난하면 어진 妻를 생각하고, 나라가 混亂하면 훌륭한 宰相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집이 비록 가난하나 처가 진실로 어질면 가난을 떨쳐버리고 부자가 될 수 있으며, 나라가 비록 混亂하나 宰相이 진실로 어질면 混亂함을 되돌려 平安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 온 바, 집에 있어서 어진 처와 나라에 있어서 훌륭한 재상은 그 관계된 바가 어찌 크지 않겠사옵니까? 위의 글
와 같이 그것은 바로 私利私慾을 충족시키기 위한 黨爭을 打破하고 國政을 圓滿히 다스림으로써 分散된 國民들의 마음을 하루속히 收拾할 수 있는 人才를 登用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400년 전에 쓴 이 忘憂堂의 上疏文을 읽으면서 눈앞에 展開되고 있는 韓、日間의 問題를 생각해보면 日本이 何必 이 時點에 왜 史實을 歪曲한 歷史敎材를 刊行하고, 獨島를 넘보는 野慾을 露骨化하고 있는지를 理解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妄動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못하도록 豫防할 수 있는 最善의 方策이 무엇인지도 斟酌할만하다.
그럼 오늘날 日本이 韓國에 대해 非理性的인 行動을 恣行하는 原因은 도대체 무엇인가? 日本人이 본래 侵略根性이 강해서 그러한가? 아니면 忘憂堂이 지적한바 韓國이 韓國을 쳐서 韓國國民의 마음을 分裂시킴으로써 國力을 消耗시켰기 때문에 그러한가?
우리는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냉정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 日本은 原來 地理的으로 四面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였기 때문에 後進性을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韓半島로 건너와 노략질해가는 이른바 海賊의 根性을 길러 왔다. 그로 인해 三國時代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倭賊에게 당한 苦痛은 骨髓에 꽂힌 바늘처럼 어느 하루도 잊을 날이 없었다. 오늘날 歷史를 歪曲하고 獨島를 넘보는 原因도 물론 그러한 地理的 歷史的인 原因과 無關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根本的인 原因은 韓國이 韓國을 攻擊함으로써 日本으로 하여금 侵略의 野慾을 불러일으키게 하지 않았는지를 反省해봐야 한다. 이웃집에 무서운 猛犬이 있으면 도둑이 함부로 그 집을 엿보거나 들어갈 수가 없다. 항차 그 主人이 主人답고 그 家族이 和睦하고 團合되어 있으면 어느 누가 그 집을 함부로 謀略하거나 侵入할 생각을 하겠는가.
그럼에도 韓國은 50년 동안 南北이 分斷되어 서로가 서로를 攻擊하고 있으며, 湖南과 嶺南이 갈리어 和合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젠 與黨과 野黨이 國益을 뒤로 한 채 오로지 政權을 잡는데 血眼이 되어 無所不爲의 政爭을 恣行하고 있다. 五十步百步로 남을 罵倒하거나 批判할 자격도 없는 자들이 때 지나간 過去事를 들추어 國民을 分裂시킴으로써 가뜩이나 흐트러져 있는 國民의 情緖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옆에 있는 韓國이 이와 같은 自滅의 政爭을 벌리면서 國力을 낭비하고 있으니 豊臣秀吉의 後孫들이 어찌 그냥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당장 먹지는 못할지언정 傷處라도 내놓자는 심보로 그들은 우리의 骨髓인 獨島를 刺戟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나라를 이끌어가는 우리 與野 政治人들 중에 진정 民族과 國家가 나아가야 할 大道가 무엇인가를 우려하는 護國精神의 所有者가 있다면, 저 民族英雄 郭忘憂堂의 靈前에 나와「日本이 왜 韓、日間의 歷史를 歪曲하고 獨島를 넘보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忘憂堂은 “大韓民國을 이끌어가는 그대들이 大韓民國을 이처럼 참혹하게 攻擊하고 있는데 어찌 豊臣秀吉의 後孫들이 大韓民國을 侵略할 野心을 품지 않겠느냐.”라고 對答해 줄 것이다.
孔子도「反求諸身」하라고 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自身을 反省해보라는 뜻이다. 反省할 때 反省하지 아니하고, 고칠 때 고치지 아니하는 個人이나 集團은 반드시 自滅하거나 敵에게 敗亡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Ⅴ. 國家를 위해 功을 세운 자는 깨끗이 물러나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자는 분에 넘친 論功行賞에 기웃거리지 말고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옛날 중국의 漢나라를 세우는데 絶對的인 功勞가 있었던 張良은 漢太祖 劉邦이 帝位에 오르자 모든 富貴功名을 다 뿌리치고 赤松子란 神仙을 따라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때문에 그의 高潔한 名聲은 영원히 뒷날 사람들의 가슴속을 爽快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張良과 함께 漢나라를 세우는데 大功을 세웠던 韓信은 功勞에 비해 褒賞이 적다고 不平을 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함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눈시울을 찡그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歷史的인 事實을 염두에 두면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우리의 現實을 바라볼 때, 저간 나라일을 담당하고 있던 우리의 指導者들이 公職을 그만두고 물러나던 樣相은 張良 쪽이었던가? 韓信 쪽이었던가? 勿論 張良과 같은 사람도 있었고, 韓信과 같은 部類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張良과 같은 사람은 조용히 물러남으로 남의 耳目을 어지럽히지 아니하지만, 韓信의 部類에 속하는 자들은 世上을 시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自身도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위 最古指導者로 自處해온 사람들이 물러날 때, 깨끗이 물러나지 아니하고 公金으로 무슨 財團을 만들어 거기에 계속 눌러앉고자 하던지, 아니면 바리바리 구린내 나는 돈 보따리를 숨겨 나오다가 監獄으로 들어가는 모습들은 실로 애처롭다 못해 痛嘆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 예들이었다. 평생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던 사람들이 이런 꼴을 보이게 되면 그것을 보고 자라는 後世들은 무엇을 배울 것이며, 또 뒷날의 歷史家들은 그들의 行蹟을 어떻게 記錄할 것인가.
그럼 壬辰倭亂 克服에 大功을 세운 忘憂堂은 戰爭이 끝난 뒤 어떻게 處身을 했던 것일까? 다음 몇 단락의 年譜를 통해 그 實狀을 確認해보기로 하자.
宣祖大王 25년 西紀 1592: 先生 41세. 4월에 倭賊이 侵入, 모든 고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7월에 임금님께서 慶尙道 士民들에게 「듣건대 郭再祐는 用兵術이 特異하여 倭敵을 죽임이 그렇게 많은데도 自身의 功勞를 報告하지 않았다고 하니 내 더욱 그를 기특하게 여기며 또 그의 이름 알게 됨이 너무 늦었음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는 壬辰倭亂이 일어난 그해의 記錄이다. 忘憂堂은 戰爭初期에 이미 많은 倭敵을 무찌름으로써 임금님으로부터 公式的인 戰功을 認定받았다.
先祖大王 28년, 서기 1595: 先生 44세. 봄에 晉州牧使에 除授되다. 여름 5월에 先生이 官職을 버리고 故鄕으로 돌아가려는 뜻이 있었으므로 觀察使 徐渻이 머물러 있어 주기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近刊 오가는 사람과 傳令을 통해 듣건대, 公께서는 倭敵들이 撤收하여 돌아가고 國家가 中興의 大業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理由로 장차 綿山에 隱居하여 神仙生活을 하기로 하셨다고요. 과연 이 말과 같다면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며 진실로 공의 잘못된 생각임 이 분명합니다......또 듣건대 옛날의 家業이 荒廢沒落하여 한 치 땅도 없으시다니, 오늘 辭表를 내고 故鄕으로 돌아가시면 내일 반드시 大夫人의 식사꺼리를 친구들에게 求乞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令公께서 功勞를 辭讓한다는 美名을 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버이를 주리게 한 결과 나라가 功臣을 薄待하는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令公께서 반드시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해 가을에 晉州牧使 職責을 버리고 故鄕으로 돌아가다.
는 壬辰倭亂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戰功에 의해 내려진 牧使의 자리를 辭讓하고 故鄕 綿山으로 돌아간 내용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위의 편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觀察使의 懇曲한 挽留에도 불구하고 大夫人의 食事꺼리마저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故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은 바로 戰爭에서 세운 自身의 功勞를 辭讓하기 위해서였다.
宣祖大王 30년, 서기 1597: 선생 46세. 8월 29일 繼母 許氏가 성안에서 別世함에 선생은 屍身을 모시고 성밖으로 나와 臨時로 嘉泰里에 있는 琵瑟山에 葬禮를 치르고 드디어 敵軍을 피해 강원도 蔚珍縣으로 갔다. 선생 47세. 蔚珍에 있었다. 선생은 벽촌에서 출입을 금했다. 상중에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子侄들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울진 사람들은 선생이 살던 집을 防禦使店이라고 불렀다.
는 赫赫한 戰功을 세운 忘憂堂이 繼母의 三年喪을 치르기 위해 蔚珍縣으로 가서 생활하던 모습이다. 子姪들과 함께 패랭이(方笠)를 만들어 팔아 生活費를 充當하면서도 절대로 이웃 사람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았다.
宣祖大王 33년, 西紀 1600: 先生 49세. 봄에 병으로 인해 관직을 그만 두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2월에 批答을 보내어 조리하고 간호하면서 직책을 수행하라고 했다.......그러나 선생은 疏를 올려 세 가지 물러나야 할 理由를 開陳한 뒤 職責을 버리고 故鄕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臺諫의 彈劾을 입어 靈巖郡에 付處되었다.
는 繼母喪이 끝난 뒤에도 官職에 復職하라는 임금님의 命令을 拒絶하고 故鄕으로 돌아가 버린 關係로 臺諫의 彈劾을 받아 流配를 가게 된 내용이다.
先祖大王 35년, 西紀 1602: 先生 51세. 이 해에 석방되어 琵瑟山에 들어가 솔잎을 복용하며 곡식으로 지은 음식을 금했다. 滄巖江 가에 정자를 짓다. 창암강은 靈山縣 남쪽에 있는데 선생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즐겨하여 강가에 정자를 짓고 忘憂란 懸板을 걸어 晩年에 居處할 곳으로 삼았다. 고기잡이 배 한 척과 거문고 하나로 逍遙自樂하면서 영원히 火食을 사절, 구차스러운 생각으로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때의 심회를 다음 두 수의 시로 읊었다.
辭榮棄祿臥雲山, 영화도 사양하고 작록도 버린 채 구름 산에 누워,
謝事忘憂身自閑. 세상사 뿌리치고 근심을 잊으니 몸이 절로 한가롭네.
莫言今古無仙子, 예나 지금이나 신선 없다 말하지 마라,
只在吾心一悟間. 다만 한번 내 마음 깨달음에 있느니라.
下有長江上有山, 아래는 긴 강이요 위에는 산이온대,
忘憂一舍在其間. 망우(忘憂)란 한 정자 그 사이에 지어 두고.
忘憂仙子忘憂臥, 근심 잊은 신선이 근심 잊고 누웠으니,
明月淸風相對閑. 밝은 달 맑은 바람 서로 대해 한가롭네.
先生은 臨終 때 遺書로써 이 忘憂亭을 제자 李道純에게 위촉했다.
는 戰爭이 끝난 다음 나라에서 除授한 모든 公職을 다 버리고 靈山縣 滄巖江 가에 忘憂亭을 지은 다음 辟穀을 하고 詩를 읊으며 逍遙自適하던 忘憂堂의 心懷를 描寫해 놓고 있다. 國家와 民族을 위해 不朽의 大功을 세운 다음 榮華도 辭讓하고 爵祿도 내버린 채 밝은 달 맑은 바람과 함께 근심을 잊고 산 저 忘憂堂의 高潔한 處世, 그것은 永遠히 배달겨레의 精神世界를 밝혀주는 등불이요, 맑혀주는 靈丹이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時空을 超越하여 忘憂堂을 民族英雄으로 尊敬하고 배우며 讚揚하는 것이다.
오늘날 國家와 民族을 위해 奉仕하다가 물러나는 모근 公職者들은 이 忘憂堂의 處世觀을 통해 “나라를 위해 功을 세운 자는 깨끗이 물러나라.”는 敎訓을 얻음과 동시에 그것을 實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忘憂堂의 護國精神을 繼承하여 國家와 民族의 現在를 安定시키고 希望찬 未來를 열어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Ⅵ. 結 言
以上에서 우리는 忘憂堂 郭再祐先生이 남겨놓은 憂國精神의 歷史的인 敎訓을 통해 21世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現在를 올바르게 살아갈 것이며 또 未來의 後孫들에게 부끄럽지 아니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要旨를 간추려 結論에 대하면 다음과 같다.
1. 忘憂堂은 어릴 때부터 觀念的이요 思辨的인 性理學을 探求하지 아니하고, 現實에 바로 實踐할 수 있는 《春秋》大義를 學問의 根本으로 삼음과 同時에 人格 陶冶의 基礎로 다져나갔던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일생 동안 空虛한 理論에 執着하거나 私利를 追求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公益을 위한 大義를 實踐해 나갔던 것이다. 오늘 날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있는 우리의 指導者들은 반드시 이 忘憂堂의 歷史的인 敎訓을 통해 “大義實踐으로 人格을 陶冶”하는데 最善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忘憂堂은 地主階級의 아들로서 상당한 財産을 소유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大義를 根本으로 한 道德的 基盤 위에서 財産을 相續했으며, 자신이 所有한 全財産은 國家와 民族을 위해 아낌없이 快擲했던 것이다. 老境에는 자신이 所有하고 있던 亭子마저 親子에게 贈與하지 아니하고 弟子에게 傳授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忘憂堂의 財物에 대한 理念을 거울삼아 “道德을 基盤으로 하지 아니한 經濟建設은 人面獸心의 國家를 만들어버리게 됨”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3. 忘憂堂은 《春秋》大義와 兵家의 理論을 통해 “나라는 반드시 自國이 自國을 친 다음에 他國이 自國을 치는 法”이란 國際紛爭의 冷徹한 原理를 確信하고 壬辰倭亂의 根本的인 責任을 임금님에게 돌리기까지 하였다. 이 망우당의 敎訓은 現在 韓國이 直面하고 있는 韓、中間의 歷史에 관한 紛爭, 韓、日間의 歷史 및 獨島 領有權에 관한 紛爭 등의 原因을 糾明하고 그에 대한 根本的인 對策을 樹立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重要한 關鍵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韓國이 中國이나 日本에게 物心兩面의 侵略을 당하지 아니하려면 韓國이 먼저 韓國을 攻略하지 아니함 즉 韓國이 地域的, 理念的, 黨略的으로 分離되어 私利私慾을 充足하기 위한 消耗的인 葛藤과 對立을 피해야 한다. 韓國의 國土가 分斷되고, 國論이 分裂되고, 民心이 和合하지 못하면 中國과 日本은 언제나 韓國을 侵略하거나 倂呑할 野心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滅國賊과 賣國奴가 過去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現在 우리의 눈앞에도 있을 수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4. 忘憂堂은 國家와 民族을 救濟하는 大業을 成就하였다. 그러고서도 朝廷에서 論功行賞의 一環으로 官爵을 除授했을 때는 그것을 단호히 辭讓하고 故鄕으로 돌아가 絶粒養生, 一竿釣魚로 餘生을 마쳤다. 배달겨레에게 영원히 淸爽한 精氣를 불어넣는 이 有功而辭賞의 行蹟이야말로 倭敵을 擊退시킨 戰功만큼이나 값진 敎訓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나라와 민족을 위해 奉職하는 大小 公職者들은 이러한 忘憂당의 精神을 繼承하여 물러날 때 참으로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물러날 때 깨끗이 물러나지 못하는 사람은 國家의 民族을 背反한 公敵임과 아울러 靑史에 그 汚名이 남아 전하게 됨을 銘心해야 할 것이다.
(2005. 3. 20 軍威郡 缶溪面 南山里 採山書齋에서)
--- 본문 내용 요약 ---
Ⅰ. 서언: 망우당 연구의 목적
과거를 통한 미래의 지혜 체득: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으로 활약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 선생의 호국정신을 배우는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행적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혼란한 현대 국가 현실을 직시하고 대처하는 안목과 미래의 좌표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학문적 배경: 망우당은 명문가 출신으로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 사상을 정신적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평민 유생의 신분임에도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민족의 영웅입니다.
Ⅱ. 지도자의 자질: 대의(大義)를 실천할 인격 도야
학문의 근본인 《춘추전(春秋傳)》: 망우당은 당시에 유행하던 관념적·사변적인 성리학에 몰두하지 않고, 시비와 선악을 준엄하게 구분하는 《춘추전》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아 인생관을 세웠습니다.
직언극간(直言極諫)의 실천: 춘추대의의 '포폄시비(褒貶是非, 옳은 것은 기리고 그른 것은 벌함)' 정신에 따라, 임진왜란 때 도망친 경상감사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고, 광해군 시절 임해군 처형 반대 및 영창대군 구원 상소를 올리는 등 사리사욕이 없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대에 주는 교훈: 남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기 전에, 스스로 사리를 버리고 대의를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을 먼저 도야해야 함을 엄중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Ⅲ. 경제관: 도덕적 기반 위의 경제 건설
물질 만능주의 비판: 도덕과 인륜 기강이 무너진 채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현대 사회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고위 공직자의 부정축재, 패륜 범죄 등)을 경고합니다.
사유재산의 도덕적 처분: 망우당은 부유한 지주 계급이었으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묘에 맹세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데 아낌없이 쾌척했습니다.
윤리도덕의 상속: 사위(성이도)에게 노비나 전답 대신 학문과 효충(孝忠)의 훈계를 전해주었고, 만년에 지은 강사(江舍, 정자)를 친자식이 아닌 어진 제자(이도순)에게 전수하며 요순(堯舜)의 선양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현대에 주는 교훈: 재산과 경제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반드시 도덕적 기반 위에 건설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금수의 소굴로 변하게 됨을 경고합니다.
Ⅳ. 국방·외교관: 자국이 자국을 친 다음에 적국이 침략한다
국난의 근본 원인 성찰: 망우당은 임진왜란의 근본 원인을 침략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만 돌리지 않고, '조선 조정이 먼저 조선을 쳤기 때문(당파 싸움으로 인한 국론 분열)'이라고 냉철하게 분석하며 선조 임금에게 지난 허물을 통렬히 고칠 것을 상소했습니다.
내부 분열 타파와 인재 등용: 국난을 예방하는 대책은 외부를 성토하는 것보다 내부의 당쟁을 타파하고, 어진 재상과 인재를 등용하여 흩어진 민심을 공고하게 수습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에 주는 교훈: 오늘날 한·중·일 간의 역사 왜곡 및 독도 영유권 분쟁 등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지역·이념·당략적 갈등으로 국력을 소모(자국이 자국을 공격)한다면 주변국은 언제든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며, 내부의 화합과 반구저신(反求諸身,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음)의 자세를 촉구합니다.
Ⅴ. 처세관: 공을 세운 자는 깨끗이 물러나라 (유공이사상, 有功而辭賞)
권력과 영예에 대한 초연함: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극복에 결정적인 전공을 세워 선조 임금에게 큰 인정을 받았으나,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내린 진주목사 등의 관직을 단호히 사양하고 고향으로 물러났습니다.
청빈하고 고결한 삶: 계모의 상중에는 가난한 와중에도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자식들과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생활했습니다. 이후 배소(유배지)에서 풀려난 뒤에는 비슬산과 창암강 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곡식을 끊는 벽곡(辟穀)을 하며 솔잎을 먹고 거문고와 시를 읊으며 안빈낙도했습니다.
현대에 주는 교훈: 퇴임 후에도 사익을 취하거나 추한 모습을 보이는 현대의 지도자들과 달리,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자는 과도한 논공행상에 기웃거리지 말고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는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Ⅵ. 결론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호국정신은 단순히 칼을 들고 싸운 전공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의실천의 인격 도야
도덕적 기반 위의 재물관
내부 단결을 통한 국난 극복
공을 세운 뒤 깨끗이 물러나는 고결한 처세
이 네 가지 가치는 21세기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반드시 계승하고 실천해야 할 영원한 등불이자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