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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풍물과 역사

부산 재발견(조선방직주식회사)

작성자안태옥|작성시간16.04.08|조회수834 목록 댓글 0

조선방직주식회사

 

조선방직주식회사(朝鮮紡織株式會社)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나라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지금의 자유시장에서 시민회관까지 일대 전부) 일대에 조선방직공장을 세웠다.

 

대지 8만평 위에 세워진 이 공장은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공장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면화를 싼값에 사다가 거대한 방직공장을 세워 면사로 가공하여 다시 우리나라 공장에 비싼 값으로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기는 등 2중의 착취를 자행하였다.

 

조선방직(주) 공장은 부산최대의 공장답게 직공수가 많았고 따라서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노동쟁의도 자주 발생하였다. 1930년 1월 9일 불경기에 생활이 어려워진 직공들은 임금 30錢을 80錢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③ 작업중 부상자 치료비 부담할 것 등 요구조건으로 제시하면서 3천여명이 벌인 파업은 일제의 노동수탈에 항거한 한국인들의 노동쟁의로 유명하였다.

 

당시의 노동쟁이는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반제운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여, 다른 공장에도 영향을 주어 영도의 조선노조를 비롯하여 각 정미공장, 범일동의 태화고무공장을 비롯하여 삼화고무공장 등 각 고무공장에도 파급되었다. 또한 1933년, 1936년에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잇따라 일어나 일제의 노동수탈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후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정은 대규모 귀속업체가 많던 면방직 공업에 대해 군정 상무부 산하에 방직공장 운영부를 설치하고 귀속방직 공장을 직접관리 하였다. 조선방직은 부산 최대의 적산으로 광복 후 정방기 40,720추(錘), 연산기 6,760추, 면직기 1,232대, 인견직기 319대, 모포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모면공장, 2차 가공공장으로 대구의 메리야스 공장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남아 있었다.

 

조방의 경영권이 미군정의 직접 통제하에 있었지만 조방은 활발한 가동과 생산증대를 보였다. 한국전쟁기에는 전시체제가 되면서 조방에서 생산된 제품은 정부관리하에 두어 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지정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1954년 국무회의에서 조방 불하 결정과 1955년 2월 대구공장을 분리하는 동시에 부산공장을 강일매에게 임대하였다가 8월에 불하되었다.

1954년경의 조선방직주식회사 전경(뒤쪽 산이 문현동)

 

이후 영업주가 잦은 교체와 시설(1920~30년대 설치)의노후화, 정부의 부흥계획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고, 또한 소극적 경영과 경쟁업체의 급속한 생산력 신장에 따라 몰락을 가속하였다. 결국 조방은 1968년 4월 11일 부산시로 넘어가 동 5월 1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 기공되면서 5월 14일 주변무허가 건물철거를 시작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옛 조선방직(주)이 있었던 터에는 부산시민의 문화요람이었던 시민회관, 한양과 삼익아파트를 비롯하여 공공건물과 자유 및 평화시장, 각종 호텔, 예식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 지금도 부산시민이면 누구나 조방 또는 조방앞이라 하면 그 유래는 알지 못하지만, 조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조선방직의 정문은 부산은행 범일동 본점에서 서면쪽으로 한 불럭 위가 공장 정문이다. 후문은 지금의 부산시민회관 쪽이다. 정확한 의미의 조방앞은 조선방직 정문 자리인 동구 범일2동 833번지 일대(보생빌딩 뒤쪽 공구상가 입구)이다.

 

1917. 11            범일동 일대 조선방직 공장 건립(대지 8만평)

1919년 초         생산개시 ▷ 54개동 건물에 종업원이 3,200여명

1930.  1. 10      임금인상 등 8개항 요구 노동쟁의(부산 최초) -남녀직공 2,200명

1931.  1            임금인사 파업

1933, 1936       노동쟁의 발생

1939.  1            직공 200여명 임금인상요구

1945.  8            군정 상무부 산하 방직부에서 관활

1950년             정부에서 관리

1955.  2.           개인(강일매)에게 임대(8월 불하)

1968.  4. 11      부산시에서 인수

          4. 27       부산시, 부산시청 1971년까지 조방터에 이전계획 발표

1968.  5.  1       범일지구 재개발사업 기공

          5. 14       주변 무허가 건물 및 조선방직 공장 철거

          6. 04       조방지구 철거 이주단지 반송동에 택지조성 착공

        12. 27       부산시청사 8층으로 조정

1969.  1.  4       범일동 구조방터에 부산신청사 기공식 거행

1969.  9            자유시장 개장

1969.                평화철물시장(현 평화시장) 개장

1970.  5            부산교육위원회 건물 준공

1970. 11           범일전화국 개국

1970. 10. 16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이전 개장(충무동→ 범일동)

                 ▷    1985. 2. 16 사상구 괘법동으로 이전 개장(착공 1983.10.10)

1972. 11.  2      부산고속버스터미널 이전 개장(초량동→ 범일동)

                 ▷    1983. 9. 15 동래구 온천동으로 이전 개장(착공 1982.7.30)

1973. 10          부산시민회관 준공(1970. 9 착공)

1970년대         삼익, 한양아파트 건설

 

조방낙지

 

추운겨울에 생각나는 매콤한 맛, 이렇게 추울 때면 따끈한 어묵국물이나 얼큰한 것들 생각이 절로 나는 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바뀐다고 하는데 저도 예전에는 매운 것을 상당히 잘 먹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는 덜매운 것을 찾게 됩니다. 그래도 때때로 매운 것이 입맛이 당길 때면 문득 생각난 것이 '조방낙지'입니다.

 

가슴저린 사연이 깃든 매콤한 맛 조방낙지! 조방낙지 하면 조선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으로 조방낙지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조방'이라함은 부산시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 일대에 있던 '조선방직주식회사'의 약자인데 당시 조선방직에 다니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교활한 학대와 일본인들 보다 더 악질적으로 같은 민족을 학대한 동족들의 만행이 심했다고 합니다.

 

식민지 노동자의 값싼 임금에 기초를 둔 이 방직공장은 가혹한 노동환경과 폭압적인 노조관리와 함께 14시간의 노동과 죽음을 부르는 협주곡과도 같은 방직기의 소음속에서 힘겨웠던 하루를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공장 문을 쉽게 나서지 못합니다. 몸수색을 받아야 합니다. 자투리 광목 원단을 몰래 훔쳐 나갈까봐 몸수색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본인 아래서 일하는 조선인 간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키면 무자비한 몽둥이 세례를 받아야 했답니다.

 

이렇게 고단한 삶속에 이들을 위로한 것이 있었으니 정문 앞에 있는 낙지볶음집 이었습니다. 퇴근 후 들러 낙지볶음과 함께 술 한 잔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었는데 이것이 후일 '조방낙지'의 원조가 되었답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낙지가 아닌가 합니다. 본격적으로 조방낙지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50년 전후가 안닌가 한다.

지금은 부산진구 범천동 평화시장과 자유시장 주변에 조방낙지 거리가 형성돼 있습니다.

 

정약전의『자산어보』에도 맛이 달콤해 회나 국, 포를 만들기 좋다고 했다. 갈낙(갈비살과 낙지), 낙새(낙지와 새우), 낙곱(낙지와 곱창) 등 낙지는 다른 재료들과도 두루 어우러져 맛갈스런 궁합을 연출해낸다.

또 조방낙지, 무교동낙지, 목포 세발낙지 따위처럼 지역별로 별미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한다.

 

그러면 낙지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자산어보』에는 낙지를 한자어로 낙제어(絡蹄魚)로 쓰고 있다.

얽힌(絡) 발(蹄)을 지닌 물고기(魚)라는 뜻이다. 8개나 되는 발이 어지럽게 얽힌 낙지의 특성을 적절하게 포착한 작명이다. 낙지는 강장 작용에 좋은 타우린과 히스티딘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농가에서 농사일로 탈진한 소의 원기 회복을 위해 먹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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