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을 쌓아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에서 구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복을 끼쳐주는 이름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 12:1-2)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 위대하신 아버지‘입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새 이름, 즉 아브라함으로 지어주십니다. 이는 ’뭇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자기 민족을 넘어서 수많은 민족들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야훼 하느님의 분부대로 길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 세였다고 하니 믿기지 않습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칩니다. 그 여정을 보면 우르에서 하란까지 600마일,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400마일로 총 1000마일을 야훼의 분부대로 여행을 떠납니다. 4천리 길로, 1천리는 약 400km이니 1,600km의 여행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른 것입니다. 75세에서도 주님의 길을 가는 아브라함의 길을 보며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가나안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야훼께서 나타나신 그곳에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제단은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우리는 성소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감사성찬례를 드리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성소입니다.
말씀 한 마디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한 마디 명령으로 모두 제 자리를 잡았다.(시편 33: 9)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이 진리의 말씀에서 모든 것이 생겨납니다. 이름도 그냥 부르는 이름이 있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례명’ 즉 ‘신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짓는 말에도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그 거룩함을 새기는 이름이 ‘신명’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속명에 따라 보는 세상이 있고 또 신명에 따라 세상을 보면 세상을 또 달리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이 주신 신명에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새로운 세상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명도 그러합니다. 세상 만물의 이치와 인간 행위의 규범과 옳고 그름에 대해 설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보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 주십니다.
오늘 2독서(로마 4:13-25)의 말씀도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세상을 물려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올바른 사람을 인정하고 그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이기에 아브라함에게 세상을 물려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으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올바른 관계에 서서 믿음을 보게 하셨고, 우리가 하느님에게 올바른 관계에 놓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게 해 주셨습니다.
죄사함
각자 주어진 많은 재능들이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의 탁월함, 음악 등 예체능도 다양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함에도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습니다. 그러한 재능은 순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오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관 마태오는 사회로부터 선망과 지탄을 동시에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지위와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였고, 이를 알아본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자신을 따라올 자격이 있음을 알아보신 것이지요.
타인과의 비교에 따르면 우리는 늘 열등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심지어 노는 일조차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이럴 경우 자존감이 높다고 말합니다.
2022년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타 허준이 교수(프린스턴대 교수)의 소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서는 참고할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온전히 학창생활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뭔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어서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 집중하고 그렇게 해서 연구하게 되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게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그가 수학에는 오히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학창시절을 보냈음에도 늦깎이 학생에서 저렇게 큰 상을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죄사함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단을 쌓아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죄사함을 얻은 우리의 첫 번째 소명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보았듯이 세상의 기준에서 낙인을 받은 자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과 도움을 주는 일이 죄사함에 대한 우리의 소명임을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 ‘근거 있는 자신감’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제단 쌓듯이 기도를 쌓아 놓으면, 그리고 이웃에게 베푸는 삶으로 살아가면, 더 큰 기쁨과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