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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家解 金剛經

妙行無住分 第四 (머무른 바 없이 오묘하게 행함)

작성자무소유|작성시간26.06.20|조회수22 목록 댓글 0

第四 妙行無住分
(머무른 바 없이 오묘하게 행함)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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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住分 第四 
(머무른 바 없이 오묘하게 행함)

圭峰:
二는 答修行降心問이라 於中에 又五니 
一은 總標라

규봉:
둘째는 修行과 降心의 물음에 답한 것이니 
그 중에 다섯 가지가 있다.
①은 
모두 표시한 것(總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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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다시 또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것(法)에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니

淸峯:
실은 본체는 
여여부동한 가운데 자비희사심을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고 집착함
(머묾)이 없이 내기 때문이다. 
머무른 바 없이
(상이 없고, 집착한 바 없이) 머물며
(공간인 처소와 정해진 모양이 없이 
두루하여 있는 것이니, 
이때의 보살심은 청정불성 
그대로의 발로(發露)임을 아는 것이 옳다)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

圭峰:
於法者는 統標諸法이요 
應無下는 正明修行이니라
問하되 菩薩萬行에 何唯說一인가 
答하되 萬行이 不出六度이나 
六度를 總名布施니라 
故로 偈에 云하되
檀義가 攝於六하니 資生無畏法이니
此中一二三을 是名修行住라하니라
無着이 云하되 
若無精進이면 疲乏故로 不能說法하고 
若無禪定이면
卽貪信敬利養하여 染心說法하고
若無智慧면 便顚倒說法이라하다 
二는 別釋이라

규봉:
於法이란 일체법을 모두 표한 것이다.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아래는 수행을 바르게 밝힌 것이다. 
묻기를 
“보살의 만행에 어찌 오로지 하나만 설하였는가?”
답하되 
“만 가지 행은 육바라밀을 벗어나지 않으나 
육바라밀의 모든 것을 일러 布施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偈
(무착이 이른 미륵 80송 중)에 이르되 
“단(布施)의 뜻은 여섯 가지(6바라밀)를 포함하니, 
자생시(재물로 하는 보시)와 
무외시(두려움 없고 걸림 없이 
모든 것을 없애줌. 인욕, 지계)와 
법시(진리를 일깨워줌:정진, 선정, 반야)인데 
이 가운데
 1   (보시)
 2.  (인욕)
 3  (지계)를 
수행주라고 하는 것이다”  했다. 

무착이 이르되 
“만약 精進이 없으면 부족하므로 
능히 법을 설하지 못하고, 
만약 선정이 없으면 
곧 믿고, 공경 받고, 이익 되는 일에 
탐착하여  오염된 마음으로 說法하게 되고,
만약 지혜가 없으면 
뒤집힌 잘못된 법을 설하게 되는 것이다” 하셨다.
②는 
달리 이 대목을 자세히 강조해 해석하신 것이다.
---

청봉착어:
법은 일체 법(모든 것)을 모두 표한 것이란 뜻은 
법은 진리이므로 일체 실상의 이치라. 
법이라 하면 곧 나머지 전체를 포함해 
드러낸 것이라는 말이다. 
집착이 없이 보시를 행하므로 부처의 
경계에 이르니 
이것을 바른 수행을 밝힌 것이매 
보시바라밀 가운데
6바라밀이 포함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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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謂不住色 布施 不住聲香味觸法 布施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않고 베풀며 
소리, 냄새, 맛, 촉감, 온갖 것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어야 하느니라.

淸峯:
즉, 오욕 쾌락에 끄달리지 않고 
현상계에 집착(머무름)하지 않고 
바라는 바 없이 하는 보시행을 뜻한다.
---

圭峰:
本論에 但指三事를 爲色等이니 
謂自身과 報恩과 果報니라
故로 偈에 云하되 
自身及報恩과 果報斯不着하며 
護存己不施하고 防求於異事라고했다

규봉:
本論에 다만 세 가지 일
(根, 境, 識:6근, 6경, 6식)을 
색등으로 삼아 가리키신 것이니 
自身과 報恩과 과보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자신 및 보은, 과보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보시하지 말며, 
별다른 수행(異事)을 구함도 막으신 
것이라” 했다.
---

六祖:
言復次者는 連前起後之辭니라 
凡夫布施는 只求身相端嚴과 
五欲快樂故로 報盡하면 
卽墮三塗이기에 
世尊이 大慈로 敎行無相布施하여 
不求身相端嚴五欲快樂하고
但令乃破慳心하고 
外利益一切衆生이니
如是相應을 是名不住色布施니라

육조:
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는 말이다. 
범부의 보시는 
다만 몸의 단정하고 엄숙함과 
오욕의 쾌락을 구하므로 과보가 
다하면 곧 三途(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지기에 세존께서 대자비로 
무상보시를 행할 것을 가르쳐 
단엄한 몸 모양과  오욕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아끼고  간탐하는 마음을 깨뜨리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니, 
이와 같이 서로 응하는 것을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다 하는 것이다.
---

圭峰:
三은 總結이라

규봉:
③은 전체를 맺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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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베풀되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니라.

淸峯:
보시는 과보를 바라는 탐욕을 내지 않아야 
참 복덕을 짓는 것이니 집착함이 없고, 
베풀었다 하는 상을 내지 말아야 
참 보시가 되는 것이다.
---

圭峰:
前에는 但指三事이나 
今則心境空有를 微細盡袪니라 
故로 偈에 云하되 遠離取相心이라하다
論에 云하되 不見施物受者施者라하다
無着은 云하되 
不住相想이라하다 
有人이 將此結文하여 爲別答降伏이라하나 
非也니라 前標次釋此結이 皆云無住가 
都是脩中降伏之義인데 
何忽偏配結文하여 爲別答問이리오

규봉
앞에서는 세 가지(三事)만 가리켰으나 
지금은 마음과, 경계와, 비어 있음의 
미세한 것까지 모두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상을 취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고 하였다.
論에 이르기를
“施物(보시물), 
受者(받는 자), 施者(주는 자)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無着은 이르되
“相을 집착하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글을 맺으면서 
항복을 달리 표현한 답이라 하나, 틀린 것이다. 
앞의 표한 것은 다음에 이 맺음의 글을 
해석함이 모두 “머묾이 없다”하는 것은 
모두가 수행 가운데 마음을 항복한다는 뜻인데, 
어찌 문득 결론적인 글에 치우쳐서 분별해서 
달리 답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

六祖:
應如無相心布施者는 
爲無能施之心이고 
不見有施之物이며 
不分別受施之人이 
是不住相布施也니라

육조:
마땅히 상이 없는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능히 베푼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생각하지 않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라 하는 것이다.
---

圭峰:
四는 顯益이라 

규봉:
④는 이익을 드러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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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淸峯:
보시는 탐욕을 내지 않아야 
참 복을 짓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함이 없고 상을 내지 않아야 
참 보시가 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說誼:
以智起行하면 獲福無邊이로다

설의:
지혜로써 행함을 일으키면 
복 얻음이 가이 없도다.

청봉착어:
베풀되 베풀었다는 집착이 없으면 
이것이 무상주 보시라 
그 복덕이 한량없는 것이다.
---

六祖:
菩薩이 行施에 心無所希이면 
其所獲福이 如十方虛空하여
不可較量이니라 
一說에 布者는 普也요 
施者는 散也이니
能普散盡胸中의 妄念習氣煩惱하여 
四相이 泯絶하여 無所蘊積이 是眞布施라 하며 
又說하되 布者는 普也니 
不住六塵境界하며 又不有漏分別하고 
惟常返歸淸淨하여 了萬法空寂이라 하니 
若不了此意하면 惟增諸業이니 
故須內除貪愛하고 外行布施하여 
內外相應하여야 獲福無量이니라 
見人作惡이라도 不見其過이며 
自性에 不生分別이 是爲離相이니라 
依敎修行하여 心無能所가 卽是善法이라 
修行人이 心有能所이면 不名善法이며 
能所心이 不滅하면 終不得解脫이니 
念念常行般若智하여야 
其福이 無量無邊이니라
依如是修行하면 感得一切人天하여 
恭敬供養하리니 是名爲福德이니라 
常行不住相布施하여 普敬一切含生하면
其功德이 無有邊際하여 不可稱計也니라

육조:
보살이 보시를 행함에 
마음에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一說로 
布란 넓다(普)요 施란 흩는다는 것(散)이니 
가슴속에 있는 모든 망념, 습관, 번뇌를 
능히 널리 흩어버리고 四相이 끊어 없어져서 
오온의 집착으로 쌓임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참 보시라 하며, 
또 말하기는 
布란 普니 육진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며 
또 쌓여 흩어지는 것(有漏)의 分別도 하지 않고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일체가 공적함을 요달하는 것이라 하니,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못하면 
오직 모든 업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함을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내외가 항상 따라야 
복 얻음이 무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려 하지 않으며 
자성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상을 여읜 것이다.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해서 마음에 주객의 차별(能所)이 
없는 것이 바른 법(善法)인 것이다.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바른 법이라 하지 아니하며 
능소심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을 얻지 못하니 
생각생각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 된다.

이 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간과 
천상의 감응함을 얻게 되어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리니
이것을 복덕(복과 지혜인 양족존)이라 하는 것이다.
항상 상에 머물지(執着)않고 보시를 행하여 
널리 모든 생명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傅大士:
檀波羅蜜布施頌에 
曰施門은 通六行하고 
六行은 束三檀하면 資生無畏法으로 
聲色勿相干이니라
二邊純莫立이나 中道도 不須安이니 
欲覓無生處이면 背境向心觀하라하고

尸羅波羅蜜持戒頌에 
曰尸羅得淸淨함은 無量劫來因이니 
妄想은 如怨賊이고 貪愛는 若參辰이나 
在欲而無欲하며
居塵不染塵이니 權依離垢地하면 
當證法王身이라하며

羼提波羅蜜忍辱頌에 
曰忍心은 如幻夢이고
辱境은 若龜毛이니 
常能修此觀하면 逢難轉堅窂니라
無非亦無是며 無下亦無高이니 
欲滅貪嗔賊이면 須行智慧刀라하고

毘離耶波羅蜜精進頌에 
曰進修名焰地라하니
良爲慧光舒니라 
二智는 心中遣하고 
三空은 境上袪에 無名이 念念滅하면 
高下執情除니라
觀心如不間하면 何啻至無餘리오하며

禪波羅蜜禪定頌에 
曰禪河는 隨浪靜하고 
定水는 逐波淸이도다 
澄神生覺性하고 息慮滅迷情이니라
遍計虛分別이니 由來假立名이라 
若了依他起하면 無別有圓成이라하고

般若波羅蜜智慧頌에 
曰慧燈은 如朗日이며
蘊界는 若乾城이라 明來暗便謝이니 
無暇暫時停이로다 
妄心이 猶未滅하면 乃見我人形이나 
妙智圓光照하면 唯得一空名이라하며

萬行齊修頌에 
曰三大僧祇劫에 萬行具齊修하여
旣悟無人我하면 長依聖道流하니 
二空을 方漸證하여 三昧任遨遊하고 
創居歡喜地하며 常樂遂忘憂니라하다

부대사:
단(布施)바라밀송에 이르되 
“보시의 문은 육도 만행에 통하고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세 가지 보시로 묶으면, 
資生(물질)과 無畏와 法으로 聲色이
서로 간섭하지 않으니라.
二邊을 오로지 세우지 않으나
 中道에도 모름지기 머물지 않으니
 無生處를 찾고자 하면, 
경계를 등지고 마음을 향해 觀할지어다” 했고

시라(持戒)바라밀송에 이르기를
 “청량함(尸羅)이 청정을 얻음은 
무량겁이래의 因이니, 
망상은 원수나 도적 같고 
탐애할 것은 별같이 많으나 
탐할 만한 것이 있어도 탐함이 없으며 
더러운 데에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며 
방편으로 번뇌의 때를 여읜 
청정한 보살의 경계(離垢地)를
의지하면 마땅히 법왕의 몸을 
증득하게 되니라” 했으며

찬제(忍辱)바라밀송에 이르되 
“참는 마음은 幻夢과 같고 
辱境(더러운 경계)은 거북이 털과 같으니 
항상 마땅히 이렇게 보고 닦으면 
어려움을 만나도 더욱 견고해지니라. 
그름도 없고 또한 옳은 것도 없으며 
낮음도 없고 또한 높음도 없으니 
탐하고 화내는 도적을 멸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지혜의 칼을 써야 하리라” 하였고

비리야(精進)바라밀송에 이르기를
 “닦아나가는 것을 
焰地(보살 4지위로 밝음이 다하고 깨쳐 지혜가 
밝은 보살지)라 하나니 
진실로 지혜의 빛이 빛나게 되니라.


 二智(근본지혜, 후덕지혜)는  
마음 가운데 보내고
三空(아공, 법공, 구공)은 
경계 위에서 제거해야 함에 
어리석음이 생각생각에 없어지면 
높고 낮다는 집착하는 식정이 없어지니라.
마음을 관하여 이같이 끊이지 않으면 
어찌 남김 없는 열반에 이르리요.” 했으며

선나(禪定)바라밀송에 이르기를
“禪의 물은 물결 따라 고요해지고 
머무는 물(定)은 파도를 쫓아서 맑아 지도다. 
정신을 맑게 하면 깨달은 성품(覺性)이 드러나고 
생각을 쉬면 어리석어 미혹된 생각이 
멸하게 되는 것이니라.
경계에 사로잡히는 것(遍計)은 
허망한 분별이니 본래부터 거짓 세운 이름이라. 
만약 상대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게 됨을 밝게 안다면 
원만한 성취가 달리 없느니라”했고

반야(智慧)바라밀송에 이르기를
“지혜의 등은 밝은 햇빛과 같으며 
蘊界(수, 상, 행, 식:육근, 곧 18계)는 허깨비라. 
밝음이 오면 어둠은 문득 물러나니 
잠시도 머물 겨를이 없도다. 
망념이 아직 멸하지 않으면 나다, 사람이다 
하는 형상을 보게 되나  
묘한 지혜의 원만한 빛이 비치면 
오직 진공(一空)을 얻었다 하니라” 하였으며

만행제수송(萬行齊修頌)에 이르기를
“三大 아승지겁에 만행을 
갖추어 함께 닦아서 
나다, 사람이다 하는 것이  
없음을 이미 깨달으면 
길이 성인의 무리에 의지하니 
二空(아공, 법공)을 점차 깨달아 
삼매에서 마음대로 노닐고 
기쁘고 즐거운 곳에 머물며 
항상 즐거워 근심을 잊게 되니라” 했다.
---

冶父:
若要天下行하면 無過一藝强이니라

說誼:
無才者가 行天下則脚頭到處에 
無與立談者이리니 其窮을 可知요
有才者가 行天下則無所往而不自得하리니 
其樂을 不可言이니라
無慧眼者가 妄加功行則行行 有着하여 
去道轉遠하고 有慧眼者가 
入於行海則心心이 淸淨하여 
徑與本地로 相應하리니
旣與本地로 相應하면 塵沙德用과 
無量妙義가 元自具足함에 不從他得이니라

야부:
만약 天下에 행하고자 하면 
한 가지 재주에 힘쓰는 것
(6바라밀에 의한 수행)보다 나은 것이 없느니라.

설의:
재주 없는 者가 天下를 다녀도 이르는 곳마다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으리니  
그 궁함을 가히 알 것이요, 
재주 있는 자가 천하를 다니면 곧 이르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않음이 없으니 
그 즐거움은 가히 말로 하지 못하니라. 
혜안이 없는 자가 망령되이 공덕을 더하려 하면 
곧 행마다 집착이 있어서 
도에 이르기가 더욱  멀어지고, 
혜안이 있는 자가 행의 바다에 들어가면 
곧 마음마다 청정해서 
바로 본래면목(本地)에 계합하리니 
이미 본지(本地)와 더불어 상응하면 
수 없는(塵沙) 많은 덕과 작용과 
한량없는 묘한 뜻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였음에 
남으로부터 얻지 않을 것이니라.
---

冶父: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노라 
欲知端的意하면 北斗를 面南看이리니
虛空이 不閡絲毫念이라 
(毫는 一作頭라) 所以彰名大覺仙이니라

說誼:
般若智로 以爲質하고 萬行花로 以爲文하니 
智行이 相資하여 文質이 彬彬이라 
伊麽則以智起行智愈明하여 錦上添花色轉鮮이라
又行施가 固已偉然인데 更能無住하니 其施益大로다 
所以로 道하되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로다 
欲知端的意하면 北斗를 面南看하니라
北斗南星이 位不別이거늘 言南言北은 也由情이로다
伊麽則行施하면 卽無住이니 一時無前後하여
逈出有無之境하고 不坐格外之機라 蕭然無寄하여
量同太虛이니 大覺之名이 於是乎彰이며 
無量福聚가 於是乎成이로다

야부:
西川(고구려)의 좋은 비단(十樣錦)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노라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면
북두를 남쪽을 향해 볼지니
허공은 털끝 만한 생각도 가지지 않아
그 까닭으로 신선한 부처님이라 하느니라

설의:
반야 지혜로 바탕을 삼고 
만행의 꽃으로 무늬를 놓으니 
지혜와 만행이 서로 어울려 
무늬와 바탕이 밝고 빛나는 지라. 
이러한즉 지혜로서 행을 일으키니 
지혜가 더욱 밝아져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이 색이 더욱 고우니라, 

또한 베푸는 것이 진실로 이미 거룩한데 
다시 능히 머묾(집착함)이 없으니 
그 베풂의 이익이 크도다. 
이 까닭에 말하되 
“서천의 좋은 비단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도다. 
그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면 
북두칠성을 남쪽을 향해 볼지어다”  하였느니라. 
北斗와 南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거늘 
南이라 하고 北이라 하는 것은 
또한 생각(情)으로 인한 때문이로다. 
이렇게 곧 보시를 (상에 집착함이 없이) 행하면 
곧 머묾(執着)이 없는 것이니 
한때(一時)라 앞뒤가 없어서(일체평등) 
멀리 유무의 경계를 벗어나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틀(격외 기틀)에도 앉지 않으니 
텅 비어 고요하여(蕭然) 의지함이 없어 
그 양이 큰 허공과 같아서, 
大覺(佛)의 이름이 여기에 드러나며 
한량없이 쌓인 복이 여기에서 이루어 지도다.
---

청봉착어:
비단(반야 지혜)이 무늬가 없고 
깨끗한 대로(定) 좋으나
거기에 무늬(무상보시행)를 더하므로
더욱 비단다워
(정혜를 갖추니 체와 용이 묘함)지니
본래 남과 북이 둘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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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淸峯:
사방과 상하를 통틀어 모양이 없고 
끝이 없는 허공을 
어찌 그 크기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한 실상의 허공은 
동서남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방편으로 
동서남북 4, 그 사이 4, 상․하 2를 드신 것은 
시방(十方) 허공일체를 비유로 설하신 것이다.
---

六祖:
緣不住相布施하여 所得功德은 不可稱量이라
佛이 以東方虛空을 爲譬喩하여 
故問須菩提하시되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인가 不也이니라 
世尊者이시여
須菩提가 言東方虛空不可思量이니라

육조:
相에 집착하지 않은 보시로 인하여 얻은 
그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동쪽 허공을 비유로 삼아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한 것은 수보리가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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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야! 
남서북쪽과 그 사이와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역시 이와 같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淸峯:
이 허공에 가득한 것이 상없이 머무는 
법성(일체의 본 성품)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 큰 법성의 공적함에 계합된 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日照萬像不增減  일조만상부증감 이니
佛恩極大亦無量  불은극대역무량 하니
永劫現用不增減  영겁현용부증감 하며
如來不動常如如  여래부동상여여 하니라

태양이 만물을 비추나 늘고 줌이 없으니
부처님 은혜가 크고도 무량하니
무량 겁을 나투어 써도 늘고 줄지 않으며
여래는 움직임도 없이 항상 여여 하니라.

說誼:
菩薩萬行이 無念爲宗이니 
一得其宗하면 無所施而不可라
其所獲福이 寬廣如空이니라

설의:
보살의 만행이 無念으로 종을 삼으니 
한번 그 근본을 얻으면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어서 그 얻은 복이 관대하고 
넓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라.

청봉착어:
무념으로 종을 삼음은 분별심이 없는 
청정자성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이를 증득하면 
그 자성의 성품 또한 청정하니
그 행이 깨끗하므로 
얻은 복덕 또한 한량없는 것이다.
---

圭峰:
初句에 徵者는 論에 云하되 
若離施等相想이면 云何能成施福인가하다 
若菩薩下는 釋이라 於中에 又三이니 
初는 法說이니 爲疑無福이니 
故로 云하되 福不可思量으로 以斷之니라 
東方下는 喩說을 可知로다 
菩薩無住相下는 法合이니라 
虛空者는 無着이 云하되 猶如虛空이 有三因緣하니 
一은 徧一切處하며 謂於住不住相中福生故이며
二는 寬廣하고 高大殊勝故이고
三은 無盡하여 究竟不窮故라하시다

규봉:
처음 구절에 구하는(물음) 것(徵)은 
論에 이르되
“만약 베푼다는 등의 생각을 떠나서 
어떻게 보시의 복을 이루겠는가?” 했다. 
若菩薩... 이하는 해석이다.
 
그 가운데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法說이니 
복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므로 
복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하는 것으로 
그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東方... 이하는 비유로 설한 것(喩說)임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菩薩 無住相... 
이하는 法을 합(比喩)한 것이다.
虛空이란 
무착이 이르되 
“허공 같다 하는 것은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① 
일체처에 두루하여 相에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가운데 복이 나는 까닭이며
② 
관대하고 넓어서 높고 크고 수승한 까닭이고
③ 
다함이 없어서 마침내는 
다하지 않는 까닭이라” 하였다.
---

六祖:
佛言하시되 
虛空은 無有邊際하여 不可思度이니 
菩薩이 無住相布施하여 所得功德도 
亦如虛空하여 不可度量하여
無邊際也하시니라 
世界中大者는 莫過虛空이고
一切性中大者에 莫過佛性이니 
何以故하면 凡有形相者는 
不得名爲大이나 虛空은 無形相故로 得名爲大이니라 
一切諸性은 皆有限量이니 不得名爲大이나
佛性은 無限量이니 故名爲大니라 
此虛空中에 本無東西南北이니
若見東西南北하면 亦是住相이라 
不得解脫하고 佛性은 本無我人衆生壽者이니
若有此四相可見이면 卽是衆生相이니 不名佛性이며 
亦所謂住相布施也니라 
雖於妄心中에 說有東西南北이나
在理則何有리오 所謂東西不眞이라 東北曷異이랴 
自性이 本來空寂하고 混融無分別이니 
故로 如來가 深讚不生分別也니라

육조: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허공은 갓이 없어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여 얻은 공덕도 
역시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다” 하시었다. 

세계 가운데서 큰 것은 
허공만큼 큰 것이 없고
일체 성품 가운데 큰 것은 
불성보다 큰 것은 없으니, 
무슨 까닭인고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크다고 할 수 없으나
허공은 형상이 없으므로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성품은 
다 한량이 있어서 
크다고 하지 못하거니와 
불성은 한량이 없으므로 
크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허공 가운데 
본래 동서남북이 없으니 
만약 동서남북이라 생각한다면 
역시 相에 집착하는 것이 되어서 
해탈을 얻지 못하고 
佛性은 본래 
내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것이 없으니 
만약 소견에 이 四相이 있으면 
곧 이 중생상이니 불성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소위 상에 집착하는 보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가운데 망념으로 
동서남북이 있다고 말하나 
이치에 있어서 무엇이 있으리오? 
이른바 동서가 참이 아니니 
어찌 남북인들 다르겠는가? 
自性이 본래 공적하고 
혼융하여 분별이 없으므로 
如來께서 분별을 내지 않음을 
깊이 찬탄하신 것이다.
---

圭峰:
五는 結勸不住라

규봉:
⑤는
相에 집착하지 않기를 
결론적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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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대로 머물러야 할 것이니라.

淸峯:
보살은 지금까지 설해서 가르쳐 준 바와 같이
마땅히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물고 행하라는 것이다.

상(相-상대적→차별상)
은 모습이 있음을 말하나 
모습이라는 것이 티끌과 같이 
잠시 생겼다 멸하는 6진 경계이니, 
진은 곧 환이며 환은 멸진하여 
진공이 되므로 
일체가 티끌 같아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곧 멸해 공하니 
그 허공과 시방세계의 허공과 
자성의 공함이  둘이 없고 
차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안주할 것이 없는 
빈(空) 것은 
단멸공은 아니므로 
무상주(無相住)라 일러줌으로써 
머무름이 없이 머물러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일러주고자 하신 것이다.
---

六祖:
應者는 順也이니 但順如上所說之敎하여
住無相布施하면 卽菩薩也니라

육조:
應이란 
순종한다는 뜻이니, 
다만 위와 같이 설한 가르침을 따라서 
상이 없는 베풂에 머물면 곧 보살인 것이다.
---

傅大士:
若論無相施라면 功德極難量이니 
行悲濟貧乏하되 果報不須望이니라 
凡夫情行劣이니 初且略稱揚이니 
欲知檀狀貌인가 如空徧十方이로다

부대사:
만약 무상의 보시를 논한다면
功德이 지극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자비를 베풀어서 가난을 구제하되
과보를 모름지기 바라지 말지니라
범부의 생각으로 行하는 것은 얕은 것이라
처음엔 간략히 일컬어 드러냈으니
보시의 참 모양을 알고자 하는가?
허공이 시방에 두루한 것과 같음이로다.
---

冶父:
可知禮也니라

說誼:
無住者는 萬行之大本也요 
萬行者는 無住之大用也라 
慈尊이 敎以無住爲住하시니 
大本은 已明이나 而大用을 
亦不可不知也니라
禮也者는 人間世之大用也라
存亡之所繫며 禍福之所由興也이니 
人이 知禮則進退가 可觀하여 擧措得宜하여 
無施不可거니와 苟不知禮則雖曰無事於心하나 
動輒違規리니 豈有進退升降之可觀乎이랴
由是로 禮也者는 可知而不可不知也니라

야부:
可히 禮를 알지니라.

설의:
無住란 만행의 큰 근본이요, 
만행이란 무주의 큰 작용이라.
자비로운 세존께서 머무름 없이 
머무는 것을 가르쳤으니,
큰 근본은 이미 밝혔으나 
그 큰 작용을 또한 알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라.

禮란 
것은 인간세상의 큰 작용이라서 
삶과 죽음이 매여있고 
화와 복도 이(禮)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사람이 예를 알면 곧 나가고 
물러남을 보게(觀)되어 
들고 놓음(온갖 동작)에 
마땅함을 얻어서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거니와, 
진실로 예를 모른다면
비록 마음이 한가하다고 하나 
그 행동이 문득 예(規則)를 어기리니 
어찌 진퇴와 오르고 내림을 볼 수(可觀) 있으랴.
이로 말미암아 
예란 가히 알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

청봉착어:
예는 곧 바름(예의)이라
바른 행이란 
필경 머묾 없이 베푸는 행함이 되나니
집착 없는 보시행으로 인해
한량없는 공덕을 쌓게 되나니라.
---

冶父:
虛空境界를 豈思量이랴 
大道淸幽理更長이네 
但得五湖風月在하면 
春來依舊百花香이리

說誼:
無住로 爲住는 廓然之空이로다 
雖然如是이나 大道는 不屬有住無住이니 
方之海印이고 越彼太虛로다 
太虛中에는 不妨有五湖風月이며 
無住中에는 亦不妨繁興大用이니라
古人이 道하되 莫把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라시니
無心이 正是無住之義니라 
要向無住中하여 繁興大用하되
圓具萬德하여야 方與大道로 相應去在하리니
到這裏하여는 見聞覺知가 依前受用家風이며
色香味觸이 元是遊戱之場이니라

야부:
허공의 경계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심지(大道)가 맑고 깊어 그 이치 또한 크네
다만 五湖에 風月이 있음을 알면
봄이 오니 옛처럼 百花가 향기로우리

설의:
머묾 없이 머무는 것은 넓은 텅 빈 것이로다. 
비록 이러하나 큰 진리의 바탕(大道:불성)은 
머묾이 있거나 머묾이 없는데 속하지 않으니 
바다에 도장 찍고(자취가 없음) 
저 큰 허공을 넘는 것이로다.

큰 허공 가운데는 
五湖의 風月이 있음도 방해롭지 않으며 
머묾 없는 가운데(집착 없음으로)는 또한 
큰 작용을 어지러이 일으킴도 방해롭지 않으니라.
古人이 말하길 
“無心을 가지고 道라고 이르지 말라
무심에도 오히려 한 관문이 막혀있다”하시니 
無心이라 하는 것이 
바로 머묾(應無所住)이 없다는 뜻이니라. 
무주 가운데를 향하여 더불어 어지러이  
큰 작용을 일으키되 원만한 만가지 덕을 
갖추어야 바야흐로 大道와 더불어 계합하여 가리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이로부터 수용하는 家風이며 
육진 경계(色香味觸)가 
본래 즐겁게 놀아온(遊戱) 장소이였음 이니라.
---

청봉착어:
무심에도 관문이 격해 있다 하니
자, 일러라! 
어째서 무심에도 관문이 있나? 
진정 없음에는 없다 하는 놈도 없느니라.
---

宗鏡:
住相布施는 猶日月之有窮이고 
不着六塵은 若虛空之無際로다
自他俱利하는 福德難量이니 
豁然運用靈通하고 廓爾縱橫自在로다
且道하라 還有住着處麽인가 
妙體本來無處所이니 通身何更有蹤由리오

說誼:
住相布施는 徒眩人之耳目이니 
違於無住大道니라
但感有漏之報나 失於無邊大利이니 
猶彼日月이 但能代明而不能通乎晝夜라 
無住行施는 身心이 澹寂하고
內外一如하여 契乎無住大道하여 
終獲無邊大利함이如彼太虛 廓然無際하노라 
以之處己함이 推以及人이니
其爲福德은 實爲難量이니라 
福德難量은 且置하고
怎生이 是無住底道理인가 
豁然運用靈通하고 廓爾縱橫自在니라 
且道하라 還有住着處麽인가 
妙體無處所하니 通身沒蹤由로다

종경:
상에 집착하여 베푸는 것은 
해와 달이 끝이 있는 것과 같고, 
육진에 집착하지 않음은 
허공이 갓이 없는 것과 같다.
自他를 함께 이롭게 하는 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활연히 움직이고 씀이 
신령스럽게 통하고 확 트여 
종횡으로 자재하는 것이다. 
자, 일러 보아라! 
또한 어디에 머무는 곳이 있는가? 
묘한 체는 원래 처소가 없으니 
온몸이 어찌 다시 자취가 있으리오.

설의:
相에 집착해서 베푸는 것은 
한갓 부질없이 
사람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것이니 
머묾 없는 큰 도를 어기는 것이니라. 
다만 쌓였다 흩어지는 것
(有漏)의 과보는 얻으나
가없는 큰 이익(공덕)을 잃어버리니, 
마치 저 해와 달이 능히 교대로 밝으나
능히 주야를 통할 수 없는 것과 같으리라,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행하는 것은 
심신이 맑아  고요하여 안과 밖이 한결같아서 
머묾 없는 큰 도에 계합하여 마침내 끝없는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저 허공이 넓고 탁 트여 끝이 없는 것과 같노라. 
 
그것은 자기에게 있음이 남에게도 미치게 되니 
그 복덕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복덕이 헤아리기 어려움은 그만두고 
무엇이 머뭄 없는 도리인가?

활연히 움직이고 씀이 온통 신령스럽고 확트여 
가로 세로로 자재하니라. 
자, 일러 보라! 
도리어 집착하여 머무는 곳이 있는가? 
묘한 체는 처소가 없으니 
온몸이 자취가 없도다
---

청봉착어:
상에 집착해서 베풀면 복은 짓되 
그 짓는 행에 상응하는 과보를 얻어  
인과로 인하여 윤회를 받게 되나, 
일체 경계에 욕심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보시 행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으므로 
부족함도 없거니와 
과보도 끝이 없는 것이다.
어디에 머무는 곳이 있을까? 
머물 곳이 없음이 
곧 두루 머묾인 것이다.
---

宗鏡:
運力檀度契眞常하니 
福等虛空不可量이라
無影樹頭에 花爛慢하니 
從他採獻法中王하리

說誼:
無住行施는 施契性空하고 性空이 無邊이니
福亦無際로다 因無住而萬行이 俱沈하면
果闕圓常則無住之於行果하여 固有妨矣이나
因無住而萬行이 爰起하면 
得福無邊則無住之於行果는 
大有益焉하여 而固無妨矣로다 
旣無妨矣則行行이 無着하여 
福亦不受는 固其宜矣로다 
爲甚如此인가 
有樹元無影한 生長劫外春이니 
靈根이 蜜蜜蟠沙界하니 
寒枝無影鳥不棲로다 
莫謂栽培何有鄕하라
劫外春風에 花爛熳이로다 
花爛熳이여 從他採獻法中王이리

종경:
보시에 힘써서 진실로 항상함에 계합하니
복이 허공과 같이 헤아리기 어려워라
그림자 없는 나무 끝에 꽃이 활짝 피었으니
마음대로 꺾어 일체 가운데의 왕에게 바치리.

설의: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은 
그 보시의 성품이 공한 성품에 계합하고, 
공한 성품은 갓이 없고 복도 또한 끝이 없도다. 
집착이 없으므로 인하여 
만행이 모두 숨으면(행하지 않으면) 
그 과보가 항상 원만함을 빠뜨리게 되어
머무름 없이 행하는 과보에 진실로 방해가 되나, 
집착함이 없으므로 인한 만행이 일어나면(행하면) 
가없는 복을 얻게 되니 곧 집착 없이 행한 과보는
큰 이익이 있어서 진실로 방해됨이 없도다.
이미 
방해가 없으므로 행과 행이 집착이 없어 
복 또한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진실로 당연 하도다.
어찌하여 이 같은가? 
나무가 있으나 
원래 그림자가 없는 겁 밖의 봄에 생장하니 
신령스런 뿌리가 모래 같은 세계에 꽉 차게 서렸으니
찬 가지에 그림자가 없어 새가 깃들지 못하도다. 
어느 곳에서 키운다 하지 말라. 
겁 밖의 봄바람에 꽃이 만발 하도다.
꽃이 만발함이여! 
꽃을 꺾어 일체 가운데의 왕께 바치리.
---

청봉착어:
그림자 없는 나무(佛)는 갓이 없이 커
활짝 핀 꽃(무상주 보시 복) 또한 한량없어
걸림 없는 행이 임의자재하여
주어도 준바없는 열매 받음 또한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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