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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家解 金剛經

正信希有分 第六 (二. 斷因果俱深無信疑)

작성자무소유|작성시간26.06.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第六 正信希有分 (二. 斷因果俱深無信疑)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 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 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正信希有分 第六
(바르게 믿는 마음이 희유함)

圭峰:
第二는 斷因果俱深無信疑라
論에 云하되 無住行施는 因深也요
無相見佛은 果深也하여
未來惡世에 必不生信하리니
空說何益인가는 斷之니라하다
文이 四이니 一은 約無信以呈疑요
 二는 呵疑詞以顯信이요
三은 明能信之所以요
四는 示中道之玄門이니 今初라

규봉:
2.(疑斷)
因果가 함께 깊어서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을 끊은 것이다.
論에 이르되
“집착함이 없이 행하는 보시는 因이 깊음이요,
상(相)이 없는 부처를 보는 것은 果가 깊어서
미래의 惡世에 반드시 믿음을 내지 않으리니
공연히 설한들 무엇이 이익 되겠는가하는 것
(의심)을 끊은 것이다"했다.
 
글에 네 가지가 있으니
(1)믿음 없음에 의해서 의심을 들어 바침이고
(2)의심되는 말을 꾸짖어 믿음을 나타낸 것이며
(3)능히 믿는 까닭을 밝힌 것이고
(4)中道의 玄門(불법)을 보인 것이다.
지금은 처음
 (1)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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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가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生實信不이니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얻어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겠나이까?”

淸峯:
지금까지 설하심이 너무도 심오하고
그 공덕이 수승함에, 말세 중생들이
밝게 알고 믿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겠기에 여쭤서 풀고자 한 것이다.
---

圭峰:
魏에 云하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云云한 今略此句者하여
影在後五五百歲也라하다 句詮差別이뇨
章者는 解句니라
實信者는 大品에 云하되 於一切法에 不信이
是信般若라하다

규봉:
魏譯에 이르되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운운”한 
지금의 이 문구에 생략하여  후 5* 5백세
(二千五百년후, 말법세)를 나타낸 것이다” 했다.
句는 차별을 말하는 것이고 
章은 句를 해석한 것이다.
實身이란 大品에 이르되
“모든 것(형상 있는)들을 믿지 않는
것이 반야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다.
---

청봉착어:
일체의 모든 상은 허환과 같으니
든 상이 실다움이 아닌 것을 증오하여 볼 줄 알면
볼 줄 아는 그것이 곧 부처니라
너무도 깊고도 커서 미혹중생이 의심할까
의심을 풀어주어 신심을 키우도다
---

六祖
須菩提가 問此法을 甚深하여 難信難解하여
末世凡夫가 智慧微劣하면 云何信入하리이까
佛答은 在下하다

육조:
수보리가 묻기를
“이 法은 심히 깊어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서
말세의 범부가 지혜가 적고 하열하여
어떻게 믿어 들어가겠습니까?”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것은 아래에 있다.
---

圭峰:
二는 呵疑詞以顯信이라
규봉:
(2)는 의심되는 말을 꾸짖어
믿음을 나타내게 하신 것이다.
-----------------------------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입멸한 뒤 후 오백세(2500년 후)에도
계를 지키며 복덕을 닦는 자(수행)들이 있어서
이 글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어 
이것으로써 진실하게 여길 것이니라.

淸峯:
여기서 여래(법신불)라고 하는 것은
석존(화신)을 칭하는 것이며,
석존의 설하심이 여래의 설법인 것이다.
여기서
계(戒)라는 것에 대하여 일러두고자 한다.
계라는 것은 지킬 것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계, 정, 혜)  삼학을 세우는데 먼저 계를 앞에 둠은
계로써 정혜를 성취하는 기초(手段)를 
다지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그 기초 위에 정‧혜(目的)가 성취되는 것이요,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정각을 이루려 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하여
정‧혜를 이루면(證得) 닦은 기초는 기억할 바 
아니기 때문에 생각을 내지 않음으로
하여 지킬 것도 없는 것이 계가 되므로
필경 곧 정‧혜 쌍수(雙修→ 雙收)하면
정각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후5백세는 500년의 다섯 번째 500년을 말하는 것으로,
제일 500년 해탈 견고시대~
수행하여 해탈하는 
이가 많은 시대
제이 500년 선정 견고시대~
수행인이 많아 선정에 든 이가 많은 시대
제삼 500년 다문 견고시대~
교학문이 발전하여 논쟁이 많은 시대
제사 500년 탑사 견고시대~
탑과 절을 많이 세우는 (장엄)시대
제오 500년 투쟁 견고시대~
자기주장과 이익을 탐하고 대립이 반복되는 시대로
500년×5=2500년으로 지금 이 시대이니,
야호들(삿된 외도의 무리)이 들끓는 시대로
말법시대라고 함.

그러나 이러한 특징적으로 시대구분을 말하나,
위없는 미묘법인 정법을 만나 바르게
도를 구하는 수행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시대에 쫓아 따로 이러한 것을 헤아릴 바
아닌 것이므로, 이 또한 윤회의 이치이며
자신의 근기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說誼:
上來問答은 只明得無住無相之義니라
若是無住無相之義라면 甚深難解하여
不近人情하여 去聖愈遠하면 容有不信일까
故로 問也니라 然이나 此固不外乎衆生日用으로
亦乃該通過現未來로다
由是로 雖是末世이라도 如有勝機이면
必當生信하여 以此無住無相之義로 以爲實然也니라
無相은 是虛玄妙道이고
無住는 是無着眞宗이니
若是眞宗妙道이면 直是法身向上이라
非干向下이리니 恁麽則以此爲實者는
法身向上으로 以爲實也이니 法身向上으로
爲實則三身이 皆屬向下하니
是權非實이 明矣로다 爲甚如此인가
三身이 皆是對機示現이니 畢竟非眞故也니라
趙州가 道하되 金佛은 不度爐하고 木佛은
不度火하고 泥佛은 不度水하나
眞佛은 內裏坐라하나 眞佛이
豈不是向上人也며 三佛이 豈不是三身也리오
臨濟ㅊ道하되 入淨妙國土中하여 着淨妙衣하고
說法身佛하며 入無差別國土中하여 着無差別衣하고
說報身佛하며 入解脫國土中하여 着解脫衣하고
說化身佛이라하니
大慧 拈云하되 要識臨濟老漢麽인가
法身報身化身이여 咄哉라 魍魎妖精이로다
三眼國中에서 逢着하여 笑殺無位眞人했으니
則向上은 是實이요 三身은 是權이 灼然灼然하며
又經顯法身이라 以此爲實者는 法身이 以爲實也이니
法身이 是實則報化는 是權이니 非實이 明矣로다

설의:
위의 문답은 
다만 無住 無相의 뜻을 밝힌 것이니라.
만약 무주 무상의 뜻이라면 
심히 깊고 알기 어려워서
사람의 식정(알음알이)으로는 가깝지 못해,
성인이 가심이 더욱 멀어지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심)
쉽게 믿지 못함이 있을까 하여 물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닌 중생의 매일 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또한 과거, 미래를 전부 갖추어 
통하고 있는 것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말세라 할지라도
만약 수승한 근기가 있으면 반드시 
마땅히 신심을 내어서 
이 無住, 無相의 뜻으로써
실다움을 삼게 되리라.

無相은 
비고 현묘한 道이고
無住는 
집착이 없는 참된 근본(眞宗)이니
만약 이 참된 종지이고 묘한 도라면 바로
이 법신불(法身向上)인 것이라 
向下에 막히지 않으리니,
이러한즉 이로써 실다움을 삼는다 하는 것은
法身向上(법신부처)으로써 실다움을 삼음인 것이니
법신 향상으로 실다움을 삼으면 삼신이
모두 향하에 속하니
이는 방편이고 진실이 아님이 분명하도다.

무엇 때문에 이 같은가?
三身이 모두 근기에 따라서 나타내 보이나
(向下) 필경엔 眞(向上)이 아닌 까닭이니라.

趙州스님이 말하기를
“金佛은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木佛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흙불(泥佛)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나
진불은 그 속 안에 앉아 있다” 했으나
진불이 어찌 이 향상인(참 부처)이 아니며
삼불이 어찌 이 삼신이 아니리오?

임제가 말하기를
“깨끗하고 묘한 국토가운데 들어가서
정묘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설하며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서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설하며,
해탈 국토 중에 들어가서 해탈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설한다” 하거늘

대혜(종고스님)가 들어(이것) 이르기를
“임제 노인(스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법신, 화신, 보신이여!
돌재(咄哉)라!
도깨비 요정이로다.
삼안국 가운데(정사, 무차별, 해탈국토인
(三項)에서 만나 차별심이 없는 참 사람
(無位眞人)을 웃긴다”고 했으니
곧 향상은 실다움이요 
삼신은 방편이 명백하며
또 경은 법신을 밝힌 것이니라.
이것을 실다움을 삼는 것은
법신이 실상인 것이니,
법신이 실이라면
보신, 화신은 실상이 아닌 방편임이 분명하도다.

청봉착어:
비록 말세라 하나 믿음이 지극하고
바르게 닦는 이 이에 해당되지 않느니라
법신이 실다웁고
보신, 화신은 방편이라 하나
법신은
보신, 화신 두 부처님을 여의지 않았노라.
---

圭峰:
後五百歲者는 大集에 云하되
初五百歲는 解脫이 牢固하며
二는 禪定이 牢固하고
三은 多聞이 牢固하고
四는 塔寺가 牢固하며
五는 鬪諍이 牢固라하다
本疑惡世無信하는 故擧惡世以斷疑니라
持戒修福者는 戒定也요
以此爲實者는 正解無倒故니라
無着이 云하되 增上戒等三學으로
顯示修行少欲等功德하니
戒出三塗하고
定出六欲하고
慧出三界라하다
三은 明能信之所以라 於中에 文二니
 一은 明 歷事善友하여 積集信因이라

규봉:
後五百歲란 것은 대방경등집(大集)에 이르되
“처음 오백년은 해탈이 튼튼하고 굳세며(牢固)
두 번째는 선정이 튼튼하고 굳세며
세 번째는 多聞이 튼튼하고 굳세며
네 번째는 塔寺 불사가 튼튼하고 굳세며
다섯 번째는 鬪諍이 튼튼하고 굳세다” 했다.


본래 오탁악세
(후래 다섯 번째 5백의 5탁 말법시대)에
믿음이 없을 것을 의심하는 까닭으로
악세를 들어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것”은
戒는 定이요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는다는 것은 바른 이해로 뒤집혀서
잘못됨이 없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착이 이르되
 “보다 높은 계 등 삼학(戒, 定, 慧)으로
수행하여 욕심을 적게 하는 등의 공덕을
들어내 보임이니
 
戒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定은 六欲에서 벗어나고
慧는 삼계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3)은
능히 믿는 까닭을 밝힌 것이다.
그 중에 두 가지니
①은 오랫동안 선지식을 두루 섬겨서
믿음에 대한 씨앗(因:善根)을 쌓는
것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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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己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며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시는 곳에서
일체의 뛰어난 수행의 바른 바탕을
다져왔으므로
이 글귀를 들으면 이에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을 내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니라.

淸峯:
즉, 모든 부처님과 함께 있는
과거세 다생을 통틀어
즉, 전생인 많은 생
오랫동안 부처님들로부터
수행한 선근으로 신심을 내는 것이니,
여기서의 믿는 마음(信心)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능히
일체 번뇌를 끊으며,
일체 출세간의 공덕을 성취하며,
능히 일체 제불을 낳는,
자신의 성품이 불성이며
본래 청정하여 부처와 다르지 않
육도 중생이 능히 모두 성불하는 줄
믿는 마음이니 이것이 청정심인 것이다.

조주 스님이 말씀하기를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나
진불(眞佛)은 그 속(內裏)에 앉았다” 하였으니
그 진불 앉은 곳을 보았는가?
“불은 불에 들어도 뜨겁지 않다”
---

圭峰:
於多佛所는 明久事善友이니라 則緣勝也요
種諸善根은 明久伏三毒이니라 則因勝也니라

규봉:
많은 부처님 처소라는 것은
밝은 선지식을 오랫동안 섬김을 밝힌 것이다.
곧 인연이 수승한 것이요,
모든 선근을 심는다는 것은
삼독을 오랫동안 조복함을 밝힌 것이다.
곧 인(불과를 이룰 因)이 뛰어 난 것이다.
---

청봉착어:
戒를 지키면 천상에 나고
定을 증오하면 경계에 물들지 않고
慧를 증득하면 일체에 밝으니
이 가운데 하나가 빠져도 솥은 바로 서지 못하니라.
---

六祖:
於佛滅後後五百歲에 若復有人이
能持大乘無相戒하여 不妄取諸相하며
不造生死業하여 一切時中에 心常空寂하여
不被諸相所縛하면 卽是無所住心이라
於如來深法에 心能信入하리니
此人의 所有言說은 眞實可信이니라
何以故하면
此人은 不於一劫二劫三四五劫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億劫에 種諸善根이니
是故로 如來가 說하되 我滅後後五百歲에
有能離相修行者면 當知是人은
不於一二三四五佛에 種諸善根이라하니라
何名種諸善根인가 略說次下하니
所謂於諸佛所에 一心供養하여 隨順敎法하고
於諸菩薩과 善知識과 師僧과 父母와
耆年宿德尊長之處에 常行恭敬供養하고
承順敎命하여 不違其意를 是名種諸善根이라면
於六道衆生을 不加殺害하며 不欺不賤하며
不毁不辱하며 不騎不箠하며 不食其肉하고
常行饒益을 是名種諸善根이라니라
於一切貧苦衆生에게 起慈愍心하여
不生輕厭하고 有所須求이면
隨力惠施를 是名種諸善根이니라
於一切惡類를 自行和柔忍辱하여
歡喜逢迎하여 不逆其意하고
令彼發歡喜心하여
息剛戾心을 是名種諸善根이니라
信心者는 信 般若波羅蜜이 能除一切煩惱하며
信 般若波羅蜜이 能成就一切出世功德하며
信 般若波羅蜜이 能出生一切諸佛하며
信 自身中佛性이本來淸淨하여
無有染汚하여 與諸佛性으로
平等無二하고
信 六道衆生이 本來無相하며
信 一切衆生이 盡能成佛을 是名淨信心也니라

육조:
부처님 멸도하신 뒤 후 오백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대승의 상없음을
지켜(無相戒)서 망령된 
모든 상을 취하지 않으며,
생사의 업을 짓지 않고
일체의 시간 가운데 마음이 항상 비고 고요하여
모든 상에 얽힌 바가 되지 않으면(집착하지 않음)
이것이 곧 머무름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여래의 깊은 법에 마음으로 마땅히 믿고 들어가리니
이런 사람의 말은 진실해서 믿을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한 겁이나 두 겁, 삼, 사, 오겁에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무량천만억겁에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니,
이러하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입멸한 뒤 후 오백세에
능히 相을 여읜 수행자가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니라...”하신 것이다
.
무엇을
이름하여 모든 선근을 심었다 하는가?
아래에 간략히 설하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 처소에
일심으로 공양하여 가르친 법에 따르고,
모든 보살과 선지식과 스승인 스님과
부모님과 연세 많고 덕이 많은 존경하는
분들의 처소에 항상 공경 공양하고,
높은 가르침을 받들어서 그 뜻을 어기지
않음을 이름하여 모든 선근을 심는 것이라고 하며,

육도의 모든 중생을 살해하지 않으며
속이거나 천대하지 않으며 헐뜯지 않고
욕하지도 않으며 올라타지(억누름)도 않고
때리지도 않으며
그 고기를 먹지 않고, 항상 이익되게 행함을
이름하여 모든 선근을 심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중생에게
자비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가벼이 여기거나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구하려 하면
힘을 따라서 베풀어 줌을 이름하여
모든 선근을 심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악한 무리를 스스로 온화하고
부드럽게 행하여 욕됨을 참고, 즐거이
맞이하여 그 뜻을 거스리지 않고
그로하여금  환희심을 내게 해서
굳세고 사나운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을
모든 선근을 심는다고 하는 것이다.

信心이란 것은
반야바라밀이 능히 일체번뇌를 없애는 것을 믿으며,
반야바라밀이 능히 모든 출세 공덕을 성취함을 믿으며,
반야바라밀이 능히 모든 부처님이 태어나게 함을 믿으며,
반야바라밀이 자기 몸 가운데 佛性이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듦이 없어서 모든 佛性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믿으며,
육도 중생이 본래 상이 없음을 믿으며,
일체 중생이 모두 능히 성불함을 믿는 것을
이름하여 깨끗한 믿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

傅大士:
因深果亦深하니 理密奧難尋이라
當來末法世에 唯慮法將沈여
 空生이 情未達하여 聞義恐難任하나
如能信此法하면 定是覺人心하리라

부대사:
원인도 깊고 결과도 깊으니
도리가 은밀하고 깊어
찾기가 어려워라.
다가오는 末法世에
오로지 법이 침체할까 염려하여
수보리가, 중생들이
식정으로 통하지 못하여
듣고도 이 뜻을 감당키 어려워
할 것을 염려하나
이같이 이 법을 능히 믿으면
결정코 사람의 마음을 깨달으리라
---

冶父:
金佛은 不度爐하고
木佛은 不度火하며
泥佛은 不度水로다

說誼:
三佛이 從來로 未免有壞하고
三身도 亦然하여 畢竟非眞이니라
以三佛로 配於三身하신 意旨如何인가
法身은 堅固不動하고
報身은 上冥下應하고
化身은 曲順機宜하니
金은 剛而不柔하고
木은 能柔能剛하고
泥는 柔而不剛하니
以三佛로 配於三身이 其意以此니라
又 金之氣는 爲秋之涼이라
其質이 在地則確然其堅이니
是는 體句也요
木之氣는 爲春之暖이라
其質이 在地則 蒼然其靑이니
是는 用句也요 土則旺於四季하여
爲金木等之所依하니
是는 中間句也니라
又 金佛은 一鑄便成이니
是는 中間句也요
木佛은 減減而成이니
是는 無句也요
泥佛은 加加而就니
是는 有句也니라
金佛은 不可以度爐이니 度爐則鎔却去하고
木佛은 不可以度火이니 度火則燒却去하고
泥佛은 不可以度水이니 度水則爛却去이라
此則三句가 一一非實이니
伊麽則以此爲實者는
三句外一句로 以爲實也니라
又 金佛은 不須度爐며
木佛은 不須度火하고
泥佛은 不須度水이니
此則三句가 一一總不動着이로다
伊麽則有句也端端的的하며
無句也端端的的하여 中間句也端端的的이니
體用等도 亦然이니라 又 法身은 以畢竟空寂으로
爲栖止이니 何聲之可聞이며 何相之可覩리오
非 金木等으로 所能模邈也이며
唯有報化는 妙相이 端嚴하여
令人樂見하며 音聲淸雅하여
令人樂聞하다가 及其示滅也함에
人之像之하는데 或鑄以金하며
或彫以木하며 或塑以泥하니
伊麽則現前金佛木佛泥佛이
皆從報化中來也하니
不度爐不度火不度水는 明報化非實也니라

야부:
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가지 못하며
흙부처는 물을 건너가지 못하도다.

설의:
三佛이 종래로 부서짐을 면하지 못하고
三身도 또한 그러해서 필경 참이 아닌 것이니라.

三佛로써
三身을 짝을 지으신 뜻은 무엇인가?
法身은 견고해서 움직이지 않으나
報身은 위로 그윽함에 계합하고,
아래로 (化身에) 응하고
화신은 근기에 따라 구부려 자세히 따르니
쇠(金)는 굳으니 부드럽지 않고
나무(木)는 능히 부드러우나 능히 강하며
흙(泥)은 부드럽지만 강하지 못하니
三佛로써
三身을 짝한 뜻이 이러한 것이로다.

또는 金의 기운은
가을의 서늘함이라 그 바탕이 땅에 있으므로
확연히 견고하니, 이것이 바탕(體)의 부분이요,
木의
기운은 봄의 따뜻함이라 그 바탕이 땅에 있으면
곧 푸름이 蒼然하니 이것이 작용의 부분(句)이요,
土는
곧 사계절에 왕성해서 금, 목 등이 의지하는 바이니
이것은 中間의 부분(句:차별상)이 되느니라.

또는
금불은
 한번 녹여 부으면 금방 만들어지니 이는 중간구요,
목불은
깎고 깎아서 만들어지니 이는 無句요,
泥佛은
더하고 더해서 만들어지니 이것은 有句로다.

금불은
가히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니
용광로를 지나가면 녹아버리고
목불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니 불을 건너가면 타버리고
흙불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니 물을 건너면
풀어져 버리느니라.
이것은
 三句가 하나 하나가 실다움이 아니니,
이러하므로 “이로써 실다움을 삼는다”는 것은
三句 밖의 一句로써 실다움을 삼아야 할 것이니라.
또는 금불은 모름지기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며,
목불은 모름지기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흙불은 모름지기 물을 건너가지 못하니,
이것은 三句가 낱낱이 모두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有句는 분명하고 명백하고(端端的的)
無句도 분명하고 명백하며 중간구도
분명하고 명백해서
體와 用등도 또한 그러한 것이니라.
또는 法身은
필경 空寂으로써 깃들어 있는 것이니,
무슨 소리를 가히 들을 것이며
무슨 모양을 가히 볼 수 있으리오?
金이나 木등으로 능히 아득하여 본뜰 바
(법신의 모습)가 아니며,
오로지 보신, 화신은 妙한 相이 단엄함이
있어 사람들이 즐겨보며,
청아한 음성을 사람들이 즐겨 듣게 하다가
그 사라짐을 보이심에 사람이 그것을
형상으로 만드는데,
혹 금으로 주조하기도 하고
혹은 나무로 조각하며
혹은 흙으로 빚으니,
이러한즉 앞에서 나타낸 금불, 목불, 흙불이
모두 보신, 화신(用)으로 가운데(體:법신)로부터
쫓아 나온 것이니,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불을 건너지 못하며 물을 건너지 못함은
보신, 화신이 실답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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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색, 성, 향, 미, 촉, 생각은 생하여 멸하는 것
보신, 화신인들 어찌 항상하랴
삼신 가운데 보, 화는 법신을 쫓아 나툼이라
덧없는 것,
항상 함은 상이 없는 곧 이 법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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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三佛形儀總不眞이고
眼中瞳子面前人이라
若能信得家中寶하면
啼鳥山花一樣春이로다

說誼:
三身이 只是那人影이니
悟來影影不是他로다
又 三句但從一句來하니
一句悟來三則一이로다
又 報化非眞全是影이나
眞若悟來影非他니라

야부:
三佛의 형상과 거동은 모두 참이 아니고
눈 가운데의 瞳子가 얼굴 앞의 사람이라
만약 능히 집 속의 보배를 믿으면
새 울고 꽃 피는 것이 한가지로 봄소식이라.

설의:
三身이 다만 그 사람의 그림자이니
깨닫고 보면 그림자
그림자가 다른 것이 아니로다.
또는 三句가 다만 一句로 쫓아 나왔으니
一句를 깨달으면
三이 곧 하나로다.
또는 보신, 화신은 참이 아니고
온통 그림자이나
참을 만약 깨달으면
그림자가 다른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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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고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니
파도가 물이요 물이 곧 파도로다.
법신도 법신이 아니요
보신, 화신 또한 그러하니
보, 화신이 그로부터 나툼이라
그것이 진신이니라.
이 경을 받아 읽고 믿고 독송하는 이는
삼종(계, 복, 지혜)선근을 심은 자이므로
그 공덕이 크니
그 선근은 한 세대에 지은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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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二는 明善友所攝으로 成就信德이라
於中에 亦二니
 一은 明攝受得福하여 顯福德門이라

규봉:
②는 밝은 선지식의 거둠으로써
믿음과 덕을 성취하게 됨을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는
거두어 복 얻음을 밝혀서
복덕의 문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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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니라.

淸峯:
자성여래가
범부의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지혜안으로 보기 때문에
다 알고 보니
한량없는 복과 덕을
지음 없이 짓는 것이 된다.

說誼:
諸佛所證이 只證此法이시며
是人所信도 亦信此法이니
信由宿熏이라 不是無因이요
信必有證하여 當成兩足이리라

설의:
모든 부처님의 증득한 것이
다만 이 법을 증오하심이며
이 사람의 믿는 것도 역시
이 법을 믿음이니,
믿음은 전생부터
익혀온(宿熏)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라서
원인(因)이 없지 않고, 믿으면 반드시
증득함이 있어서 마땅히
兩足尊(복과 지혜)을 이루리라.

청봉착어:
다 알고 다 보는 것은 육안이 아니요,
일체평등의 공적영지한 지혜안으로
둘 아니게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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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謂於一切行住所作中에
知其心四蘊하고 見其依止色身라
故로 此等이 顯示善友所攝이라니라
論에 云하되 若不說見이면
或謂如來가 以比智知이며
若不說知면 或謂如來가
以肉眼見하여 故須二語니라
得福德者는 魏에 云하되
生如是福德하며 取如是福德이라하고
無着이 云하되 生者는 福正起時이고
取者는 卽彼滅時에 攝持種子로
此云得者는 生取二義가 不離於得이니
得之一字에 生取俱攝이라하다

규봉:
무착이 이르되,
“모든 가고, 머무르는
(앉고, 눕고) 생활가운데
그 마음에 마음이라는
四蘊(수상행식)을 알고
그 의지하는 것이
色身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것 등이
선지식의 거둔 바(證得)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라” 했다.
論에 이르되
“만약 보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혹 여래가 견주어
아는 지혜(比智)로써
안다고 할 것이며,
만약 아는 것을 설하지 않으면
혹 여래가 육안으로써
본다고 할까하여
모름지기 두 가지(다 알고, 다 본다)를
말하신 것이다”했다.
 
복덕을 얻는 것이란
魏譯에 이르되
“이 같은 복덕을 내(生)며
이 같은 복덕을 取한다”고 했고,
무착이 이르되
“生이란 복이 바르게 일어난 때이고
取는 곧 저가 멸할 때
種子를 거두어 가지게 되는 것으로,
여기에서 得이란
生과 取의 두 가지 뜻이
得(얻음)을 여의지 않으니
得이란 한 글자에
生과 取가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

傅大士:
信根生一念을 諸佛이 盡能知하나니
修因於此日하여 證果未來時로다
三大經多劫에 六度久安施하여
熏成無漏種하면 方號不思議니라

부대사:
믿음의 바탕으로 한 생각 냄을
모든 부처가 능히 모두 아나니
오늘에 닦음이 因이 되어
미래에는 과보로 깨우침을 얻을 것
(證得)이로다
三大 아승지 겁을 지나도록
6바라밀로써 오랫동안 잘 베풀어
새지 않는 種子를 익혀 이루면
바야흐로 不思議 (부처님)라 이르니라.
---

冶父:
種瓜得瓜요 種果得果로다

說誼:
昔年所學이 卽今日所信이요
因地所習이 卽果上所證이로다

야부: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을 얻도다.

설의:
옛날에 배운 것이 곧 오늘의 믿게 된 것이고,
因地(초발심시)에서 익힌 것이 곧
과위(변정각)를 증득함인 것이로다.
---

청봉착어: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남 같이
신심의 바탕으로 닦아옴이 因이 되어
반드시 果報를 이루리니
6바라밀행으로 무루공덕을 성취함을
초발심시 변정각 이라 하느니라.
---

冶父:
一佛二佛千萬佛이 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昔年에 親種善根來로 今日에 依前得渠力이니
須菩提須菩提여
着衣喫飯이 尋常事인데 何須特地却生疑인가

說誼:
諸佛이 同證眼橫鼻直이시니
承事諸佛을 只要學得眼橫鼻直이로다
眼橫鼻直身은 非但千萬佛이라
張三李四가 皆同有하니
昔已學得이어서 今能生信이로다
須菩提 須菩提여
卽日用이 便是이니 有甚難會리오

야부:
일불, 이불, 천만불 각각 눈은 가로요
코는 세로로다.
옛날에 친히 선근을 심어옴에 오늘은
옛에 의해 큰 힘을 얻게되니
수보리여 수보리여!
옷 입고 밥 먹음이 일상의 일인데
어찌하여 특별히 의심을 내는가

설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같은 도리(眼橫鼻直)를
증득 하셨으니
모든 부처님의 일을 잇(받아 가지)고자(承) 함도
다만 이 같은 도리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로다.
안횡비직의 몸은 비단 천만 불(佛) 뿐 아니라
누구나(張三李四)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으며
옛적에 이미 배워 얻은 것(善根)이어서
지금 능히 믿음을 내는 것이니라.
수보리여 수보리여!
곧 날마다 쓰는 것이 문득 이것이니
무슨 알기 어려움이 있으랴?
---

청봉착어:
가고 옴이 자유롭고
앉고 섬이 그대로다.
항상 하는 이 일이 그의 부림이니
이 도리 아는 것 예사 일 아니라
전생에 오래 믿고 닦은
선근이 분명하도다.
---

圭峰:
二는 明攝受所以하여 顯智慧門이니
由無二執이니
故得攝受니라 於中에 亦二니
一은 正明己斷麁執이라

규봉:
㉯는 거두어 받는 이유를 밝혀서
지혜의 문을 드러낸 것이니
두 가지 집착(我執, 法執)이 없음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니
그러므로 거두어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또한 두 가지니
㉠은
이미 거친 집착을 끊는 것을
바르게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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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다시 내라는 상,
사람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상이 없고,
법상(일체의 모습)이라는 것도 없으며
또한 법상이 아니라는 것도 없는 것이니

淸峯:
무아상이란 내가 있음에 끄달려서
나라는 고집이 있었으나
나의 실상이 참으로 비어 없어
실체가 공하므로
색‧수‧상‧행‧식(五蘊)이
본래 실상이 없는 것이건만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미혹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임을 요달함이요.

무인상이란 것은
사대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생긴 일시적인 허상일 뿐
끝내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무지로 인해 집착해온 것임을 요달함이요

무중생상이란 중생이라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음을 요달함이요.
무수자상이란 내 몸(색신)이 본래
공(本來面目)하거늘
수명이 있다고 생각하여
길고 짧음을 연장하여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고 집착할 것이 없음을 요달함이다.
 
이로써 사상(四相)이 공하고
일체 모든 것이 공함(無法相)을
요달하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야
없는(無非法相)것을
당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달하면 지혜가 밝아져
유무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세망념을 영원히 제거하게 되어
자성불을 체인(體認) 체달(體達)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하게 되는 것이다.

說誼:
麤細垢盡하면 圓明體露로다

설의:
거칠고(麤) 미세한(細) 때(垢)가
다하면 원만한 밝음의
體가 드러나도다.

청봉착어:
내라고 하는 나는 참이 아닌 헛것이요
사람도 중생도 법도 헛것이로다
나도 헛것이요 헛것도 헛것이며
헛것이라는 것 마저 헛것이로다. 악!
---

圭峰:
初徵에 信者는 以何義故로
得如來悉知悉見인가
後釋에 有二하니
一은 無我執이니 執取自體 爲我이고
計我展轉하여 趣於餘趣가 爲人이며
計我盛衰苦樂이 種種變異相續이
爲衆生이고 計我一報命根이
不斷而住가 爲壽者니라
二는 無法執이니 論에 云하되
無法相者는 能取所取인
一切法無요 亦無非法相者는
無我가 卽顯眞空實有라 然이나
離二執이 正是得佛知見하고
成就正信之本으로 善根福德이
却是相兼이니라 故로 論에 云하되
有智慧便足이거늘 何故로 復說持戒功德인가
爲示現生實相差別義故로 亦有持戒功德하고
依信心恭敬하여 能生實相故로 不但說般若라하다

규봉:
처음 물음에,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므로
여래가 다 알고 다 보는 것을 얻는다 하는가?
뒤에 설명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我執이 없음이니
자기 몸을 집착함이 我가 되고,
我를 계교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것을 취향하게 되어
人이 되며, 나의 성하고 쇠함과
괴롭고 즐거움이 계교하되 갖가지
별스럽게(이류인 축생이 아니라고)
이어간다고 하는 것이 衆生이 되고,
내가 한번 받은 생명을 계교하되
끊어지지 않고 머문다고 함이 壽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法執이 없음이니 論에 이르되
“무법상이란 것은
능히 취하고 취할 것인
모든 것이 없음이요,
또한 무비법상이란 것은
무아가 眞空의 실다운 있음(妙有)을
곧 나타낸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두 가지(我執, 法執) 집착을 여읜 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견을 증득하고
바른 믿음을 성취한 근본으로
선근과 복덕이 오히려
이렇게 서로 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論에 이르기를
“지혜가 있으면 편하여 족하거늘
무슨 연고로
다시 지계와 공덕을 설하셨는가?

실상을
차별로써 드러내 보이신 뜻이 되므로
또한 지계공덕이 있고 믿는 마음으로
공경하여 능히 실상을 내는 연고이므로
단지 반야만을 설하지 않았다” 하였다.
---

六祖:
若有人이 於如來滅後에
發般若波羅蜜心하고
行般若波羅蜜行하여서
脩習解悟하여서 得佛深意者는
諸佛이 無不知之시니라
若有人이 聞上乘法하고 一心受持하면
卽能行般若波羅蜜無相無着之行하여
了無我人衆生壽者四相하니라
無我者하면 無受想行識也이고
無人者는 了四大不實終歸地水火風也니라
無衆生者는 無生滅心也이고
無壽者者는 我身이 本無이니
寧有壽者이리오 四相이 旣無이니
卽法眼이 明徹하여 不着有無하여
遠離二邊하고 自心如來를 自悟自覺하여
永離塵勞妄念하면 自然得福無邊하리라
無法相者는 離名絶相하여
不拘文字也이고 亦無非法相者라하여
不得言無般若波羅蜜法이니
若言無般若波羅蜜法이라하면
卽是謗法이니라

육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입멸하신 후에
반야바라밀의 마음을 내고
반야바라밀을 행해서 닦고 익히고
알고 깨달아서 부처님의 깊은 뜻을
얻을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그를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높은 가르침을
듣고 일심으로 받아 가지면
곧 능히 반야바라밀의 무상무착행을
행하게 되어서 我, 人, 衆生, 壽者의
 四相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無我라는 것은 수상행식이 없음이고
사람(인상)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四大가 實이 아니므로 마침내
지수화풍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됨이다.
 衆生이 없게 되면 생멸심이 없게 되고,
無壽者란 것은 내 몸이 본래 없으니
어찌 오래 삶이 있겠는가?

四相이 이미 없으니
곧 法眼이 분명하고 투철해서,
有無에 집착하지 않아
二邊을 멀리 여의게 되고,
자기 마음인 여래를 스스로 깨달아
자각해서 煩惱妄念을 영원히 여의게 되면,
자연히 가없는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無法相이란 이름을 여의고 相을 여의어
文字에 얽매이지 않음이고,
또 無非法相이라하여 반야바라밀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만약 반야바라밀법이 없다고 한다면
곧 이 법을 비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

冶父:
圓同太虛하여 無欠無餘로다

說誼:
人有身하여 圓滿空寂者가
是人有心이니 廣大靈通者가
是라 此身此心이 阿誰獨無리오마는
但以無明不了하여 妄認四大하여
爲自身相하고 六塵緣影으로
爲自心相하니 由是로 身以圓滿之體로서
 隱於形殼之中하고 心以靈通之用이
匿於緣慮之內하며 脫或知非라도
亦成斷見由滯二邊하여 圓滿之體와
靈通之用이 不能顯現이다가
如今에 我法雙忘하고 其忘亦忘하면
 圓滿之體와 靈通之用이
豁爾現前하며 初無欠剩이니라

야부:
원만함이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도다.

설의:
사람이 몸이 있어, 원만하고
비고 고요한(空寂)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마음이니,
광대하고 신령스럽게
통하는 것이 이것이로다.

이 몸과 마음이 누구인들
홀로 없으(獨無)리오 마는,
다만 무명으로 밝게 깨닫지 못하여
망령되이 四大를 오인해서
자기의 참 몸으로 여기고,
육진 경계의 그림자를
자기 마음으로 相을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원만한 體가 육신으로써
형체(틀)가운데 숨게 되며,
마음의 신령스럽게
통하는 쓰임(用:慧)이
(중생의) 마음으로써
사량하는(緣慮) 속으로
숨게도 되며,
설혹 그릇됨을 알아서
벗어나겠다고 하더라도
또한 단견을 이루는 연유로
二邊에 막혀서
원만한 體와 영통한 쓰임이
능히 드러나지 못하다가
이와 같이 지금 我와 法을 함께 잊고,
그 잊는다는 것 까지도 또한 잊으면,
원만한 體와 영통한 用이
확연히 앞에 드러나
처음부터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게 되는 것이다.
---

청봉착어:
나라는 것이 공 하여 실다움이 없으니
오온이 공하고 사대는 지수화풍이니
사람이라는 것이 또한 공하며
생하고 멸함이 없으니
범부 중생이 또한 공하며
본래 내 몸이 공 하여
목숨이 없어 생사 또한 공 하니라.
사상을 떠나 유무의 집착을 여의니
번뇌 망상이 어디에 머물 건가?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이니라
---

冶父:
法相非法相이여 開拳復成掌이라
浮雲이 散碧空하니
萬里天一樣이로다

說誼:
是法非法이여
一常一斷이니 斷常은 雖異이나
爲病은 是同이라 爲病是同이니
開拳成掌이니라
開拳成掌은 何必不必이랴
斷常이 俱亡하여야 一味方現하리라

야부:
法相과 非法相이여!
주먹을 폄이 다시 손바닥을 이룸이라
푸른 하늘에 뜬구름이 흩어지니
만리 하늘이 한가지로 푸르도다.

설의:
옳은 법과 그른 법이여!
하나는 항상하고
하나는 끊어져 없음이니,
斷과 常은 비록 다르나
병이 되는 것은 같으니라.
병이 됨이 이 같으니
주먹을 폄이 손바닥이 됨이니라.
주먹을 펴면 손바닥이 되는 것이
어찌 반드시 그러하고
반드시 그렇지 않으랴,
끊어져 없음과 항상 한 것이 모두 없어야
한 맛(실상)이 바야흐로 드러나리라.
---

청봉착어:
손바닥을 폄이 곧 손등이 아니나
또한 손등이 곧 손바닥과 둘 아니니라
모든 것 항상 함과 모든 것 없음이
이 모두 실이아니니
양변(兩邊)을 여의어야만 곧 실이니라.
---

圭峰:
二는 因顯未除細執이라

규봉:
㉡은 (그로) 因하여 미세한
집착을 없애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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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내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것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니,
만약 법이라는 상을 가져도
곧 내라는, 사람이라는, 중생이라는,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모든 상이 아니라는 것을 취하여도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니라.

淸峯:
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져도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니
만약 그릇된 진리(삿됨)에 집착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으로
곧 아‧인‧중생‧수자상(四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상을 취함은 곧 나를 고집함이요,
나를 세우는 것은 곧 상대를 세움이 되니
차별상에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온, 육진 경계의 상에 집착하고
일체 경계를 취하는 것은
곧 4상에 집착함인 것이다.
또한 비법상이라는 생각도 상견이 됨을 알아야 한다.
---

圭峰:
分兩節釋하리니
初는 總明二相이니 總解取法非法이
盡名相也며 亦是建立取相則我等相이
便生之義宗也니라 後의 若取法下는
別明二相이니 論에 云하되
但有無明使하고 無現行麤煩惱면
示無我見이라하며 無着이 云하되
但取法及非法想轉하면 非我等想이니
以我想及依止로 不轉이라하다
中有徵者하되 取法은 但爲法相이거늘
何故로 便着我等인가 釋云하되
取非法도 亦着我等이거든
何況取法인가하니라
以後釋前也니라

규봉:
두 마디로 나눠서 해석하리니,
처음은 二相을 모두 밝히는 것으로써
法과 非法을 취하는 것이 모두 相이 되는 것이며,
또한 相을 세워 집착하면 곧 我, 人等의 相(四相)이
생긴다는 뜻을 세운 것이다
.
나중의 若取法相 아래로는
二相을 달리 밝힌 것이니
, 論에 이르기를
“다만 무명사(근본 무명)는 있으나
지금 드러나는 거친 번뇌가 없으면
아견이 없음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

[무명사라는 것은 법집이 있어 생기는 것으로
이는 근본 무명이 머무는 곳(제8함장식)에 있는
것이므로 使라 한 것이다.
현행등이란 곧 아집등 분별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에 이미 의심을 끊어준 바다]

무착이 이르되
“다만 법과 법 아닌(非法) 것이라는 생각을
취함을 굴려 버리(轉)면  我等(四相)의 생각이
아니니 나라는 생각과 의지함을 멈춤(依止)으로
굴리지 않는 것이다”고 했다.

[굴린다(轉)는 것은
곧 일으킴(起)이니 (상견을) 뒤집는 것이다.
我想이란 것은 아집을 분별해 드러내는 것이요
依止라는 것은 분별종자(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이 나오는)가
지금 작용(현행)함을 의지(멈춤)함이 되는 까닭이다.

또 가히 모든 것(法)에 집착해서
분별하는 것을 이름하는 것으로
아집으로 더불어 依止(굴려버림으로써)하는
까닭으로 이것이
모두 일어나지 않음(不起)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묻는 자가 있어
“법을 취한다는 것은
단지 法相이 되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我等(4상)의
相에 집착하는 것이라 하는 것인가?”
해석(答)하여 이르되
“비법을 취함도 또한 我等(4상)에
집착함이 되는데
하물며 法을 취함이겠는가?” 하였다.
後(細)로써 前(麤)을 해석한 것이다.
---

청봉착어:
법이라 법 아니라 어느 것도 집착 말라
법도 법 아니요, 비법 또한 법 아니니
법, 비법을 모두 여의면
법도 법이요 비법도 또한 법임을 알리라.
---

六祖:
取此三相하면 並着邪見이니
盡是迷人이 不悟經意니라
故로 修行人은
不得愛着如來三十二相하며
不得言我解般若波羅蜜法하며
亦不得言不行般若波羅蜜行하여야
而得成佛이니라

육조:
이 三相(四相, 法相, 非法相)을 취하면
아울러 집착하는 사견이니
모두 미혹한 사람이 經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은 여래의 三十二相에 애착하여
얻으려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반야바라밀법을 얻었
(안다)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반야바라밀행을 행하지 않아도 증득한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부처를 이룸을 얻게 되는 것이다.
---

傅大士:
人空法亦空하니 二相이 本來同이라
遍計는 虛分別이요 依他는 礙不通이니라
圓成은 沈識海하면 流轉若飄蓬하니
欲識無生性이면 心外斷行蹤이니라

부대사:
사람이 空하고 法 또한 空하니
두 가지 相이 본래 같으니라
두루 집착함은 허망한 분별이요
다른 것에 의지하면 막혀 통하지 않느니라.
원만한 성취는 정식(情識)의 바다에 잠기면
상속해 있게 됨이 흩날리는 쑥과 같으니
생함없는 자성을 알고자 하면
마음 밖의 행적을 끊어야 하느니라.
---

圭峰
四는 示中道之玄門이라

규봉
(4)는 中道의 현묘한 문(法門)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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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이러하므로 법(眞理)이라는 것도
마땅히 취하지 말며
법 아닌 것도 마땅히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淸峯:
법상을 취하면 있음에 빠지고
비법상을 취하면 단멸하여 없음에 떨어지니
이 모두가 집착에서 생긴 소견인 것이다.

泥牛潛泳入龍宮  니우잠영입용궁 이요
金獅隱藏虛空中  금사은장허공중 이니
已離分別離禪定  이리분별리선정 하여
似是虛空無思量  사시허공무사량 이니라

진흙소는 용궁에 헤엄쳐 들어갔고
황금사자는 허공 속에 숨었으니
이미 분별 떠났고 선의 고요함도 떠나
허공 같아도 허공이라는 헤아림도 없나니라

說誼:
取法은 只由不知法卽非法이고
取非法도 只由不知非法卽法이니
一眞法界는 無是無非이며 此無도
亦無니라 所以로 道하되
何於一法中에 有法有不法이리오하니
脫或分別是法非法하면
拈一放一이니 有甚了期리오

설의:
법에 집착함은
다만 법이 곧 법이 아님을 알지 못한 때문이고,
비법을 취함도
다만 비법이 곧 법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니,
하나의 참 法界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이 없다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이니라.

이런 까닭에 말하되
“어찌 한 법 가운데 법이 있고
법 아님이 있으리오”하니
혹 이 법과 법 아님을 분별한다면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는 것이니
어찌 마칠(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오?

청봉착어:
법이 곧 비법이요
비법이 곧 법이어서
진공 법계는 시비가 없으니
법도 비법도 집착하지 말지니라.
---

傅大士:
有因은 名假號요 (假號는
一本에 作無號라) 無相은
有馳名이라 有無無別體하여
無有有無形이로다
有無無自性이거늘 妄起有無情이니
有無가 如谷響거니 勿着有無聲이니라

부대사:
원인 있다는 것(有因)은 거짓으로 부르는 것이요
상이 없다는 것(無相)은 이름을 전함은 있음이라
있다 없다는 것(有無)은 달리 실체가 없으니
있다 없다(有無)하는 것은 형체가 없음이니라.
없고 있음이 自性이 없거늘
있다 없다는 알음아리를 망령되이 일으키니
있다 없다(有 無)는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 같거니
있다 없다는 소리에 집착하지 말지니라.
---

冶父:
金不博金이며 水不洗水로다

說誼:
只是一般金이거늘 豈分能博所傅이며
只是一般水인데 豈分能洗所洗리오
恁麽則法則一味거늘 見有二取하니
二取相亡하여야 一味方現하리라

야부:
金으로 금을 바꾸지 못하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하도다.

설의:
다만 같은 하나의 금인데
어찌 바꿔줄 것과
바꿔 가질 것으로 나누며
다만 같은 한 가지 물인데
어찌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로 나누리오.
이러한즉
法은 곧 한 가지(一味)이거늘
두 가지 소견을 취하니,
두 가지(아, 법상) 집착하는 相을 없애야
한 가지(一味)가 바야흐로 드러나니라.
---

청봉착어:
상이 없다는 것은
그대로 상이 없다는 이름은 있다 함이고
있다 없다는 것은 상으로 쫓는 명사이니
참 있다면 그 무엇이고?
참 없다면 없다는 건 무엇인가?
있다 없다는 건 실상을 모르는 집착이니라.
---

冶父:
得樹攀枝는 未足奇이니
(攀枝는 一本에 作攀高라)
懸崖撒手하여야 丈夫兒로다
水寒夜冷魚難覓하니
留得空船載月歸로다

說誼:
得一心存이 未是奇이라 一處亦亡하여야
是丈夫니라 到這裏여서는 凡情이 脫盡하고 聖解도
亦亡하니 但將無私照하여도 却來是非場이로다

야부:
나무에서 가지를 잡음은 족히 기이함이 아니니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깊어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배에 달을 싣고 돌아 오도다.

설의
존귀한 한 마음을 얻는(깨달아) 것이
기이한 게 아니라
한 곳(心處)이라는 것마저 없어야 장부이니라.
이에 이르러서는 범부의 식정이 모두 다하고
성인의 안다는 것도 또한 없애야 하니,
다만 사사로운 비춤을 없앨지라도
도리어 是非의 場에 옴이로다.
---

청봉착어:
정(定)을 얻었다 하면 정이 아니니
얻었다는 그마저 얻음이 없어야
참정(定)에 듦이요
없고 없음마저 없음이 참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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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此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런 뜻이므로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과 같은 것에 비유하라’
한 것을 알아야 하나니,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릴 것이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淸峯: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듯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잡고
있지 말라는 것으로
8만4천 법문은
실다운 것이 아닌 방편설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이 없음에
약은 자연 필요치 않음과 같은 것이다.

미(迷)하면 상에 끄달리고
개오(開悟)한 자는 양변을 여의게 되는 것이니
사람이 공하고 법이 공하여
유무(有無)를 따로 세울 것이 없어,
본래 실상이 없건만
허망한 분별심으로 애착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무의 자성이 없고,
유무를 초월한 자성을 요달하면
상에 집착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법상(眞理)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은
일체 모든 것이 있어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또한 망념된 생각이므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니,
하물며 진리 아닌(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랴?
한뜻을 바로 알면,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은 눈을 보지 못하며,
대통지승불이 십겁을 좌선해도
불법을 보지 못했다”한 이 뜻을 알리라.
법이라고 하는 법상은 병을 치료하는 약이며
비법상은 치료해야 하는 병과 같은 것이다.

병을 치료하고 나면 약도 없이 해야 하거늘
병(非法)이야 하물며 말해 무엇하랴?

“불로써 어찌 불을 끌 수 있으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면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갈 곳에 이르르면
지팡이를 버려야 할 것이니라”

渡江不顧船  도강불고선 하고
到家杖便休  도가장편휴 하니
得魚更忘筌  득어경망전 이오
得意忽忘言  득의홀망언 하라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갈 곳에 이르면 지팡이를 버리리니
고기를 잡은 후엔 그물을 버릴 것이요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 버려라

說誼
佛所說法은 只是入道方便이니
依方便而入道則可이나
守方便而不捨則不可하니라
方便도 尙應捨離이니
此離를 亦何所存하리오

설의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것은
다만 道에 들어가는 방편이니,
이 방편에 의해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거니와
방편을 지키(묶임)고 버리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라.
方便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니
이 버려야 할 것을 어찌 보존하리오?

청봉착어:
교법은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므로
이 말에만 쫓으면 구경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방편설에 집착하지 말라 하신 것이며,
따라서 법 아닌(이치에 맞지 않는 삿된 소견)
것이랴 하신 것이다.
---

圭峰:
曲分爲二하면 初는 正結歸中이요
後는 引說以證이니라
筏喩는 假言顯義이니 不應如言執義니라
不執은 卽爲不取이니
非全棄也니라 偈에 云하되 彼不住隨順은
於法中證智라하고 論에 釋云하되
不住者는 得證智捨敎이니 如到彼岸이고
隨順者는 隨順彼證智之敎法이니
 如未到彼岸이라 하다 無着이 云하되
法尙應捨者는 實想生故이고
 何況非法者는 理不應故라 하다

규봉:
상세하게 둘로 나누어 보면
처음은 바로 中道에 돌아가게 결론을 짓는 것이고
나중은 말씀을 베풀어 증명하신 것이다.

[結歸中이라는 것은
不應取法은 있음(有)을 여읜 것이고
不應取非法은 없음(無)을 여읜 것이니
이미 유, 무를 여의었으면
곧 中道에 돌아간 것이다]

뗏목에 비유한다는 것은
거짓인 말(방편)을 빌려서
뜻을 드러낸 것이니
마땅히 말과 뜻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집착하지 않음은
곧 취하지 않음이 되는 것이니,
모두를 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不執等이란
만약 모두를 버린다는 말로 잘못 안다면
모든 법의 공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병만 제거하고
그 법은 제거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偈에 이르되
“저 머무르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것은
일체 가운데 지혜를 증득했다” 했고,
論에서 해석해 말하되
“不住란 깨달아 지혜(證智)를 얻으면
가르침(교법인 방편설)을 버린다는 것이니
피안에 이르름과 같고,
隨順이란
저 깨달아 알아야 할 지혜(證智)를
깨닫게 일러주신 敎法(말)만을 따름이니
피안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無着이 이르되
“法尙應捨란
實相이 나는 까닭
(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실다운 상이 드러남)이고,
何況非法이란
이치가 맞지 않은 까닭이라고” 했다.

[應捨란 것은
실상의 지혜를 얻음은
상도 없고 얻음도 없으므로
마땅히 버린다(應捨)라 하는 것이다.
理不應(이치에 맞지 않다)이라 하는 것은
모든 법의 실상(말로나 뜻으로나 생각으로
이르를 수 없는 실다운 본성)을 뺀
그 밖의 것은
모두 마의 일(삿된 것)인 때문이다]
---

청봉착어:
물은 물이 아니니
바다 물을 말해도 입술도 적시지 못하니라
입술을 적시지 못하는 것이라도 물은 물이니
물과 물 아님 모두를 떠나야 참다운 물을 아니라.
---

六祖:
法者는 是般若波羅蜜法이요
非法者는 生天等法이라
般若波羅蜜法은 能令一切衆生으로
過生死大海케하니
旣得過已하여서 尙不應住일진대
況生天等法을 而得樂着인가

육조:
法이란 반야바라밀법이요,
非法이란 천상에 태어나는 것
(執着)등의 법인 것이다.

반야바라밀법은
능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큰바다(苦海)를 건너가게 하는 것이니,
이미 건너감을 증득 했을진대
오히려 마땅히 머물(執着)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天上에 나는 등의 법의 즐거움에 집착하겠는가.
---

傅大士:
渡河에 須用筏이되 到岸에 不須船이니라
人法知無我하여 悟理詎勞筌이리오 中流도
仍被溺이거늘 誰論在二邊인가
有無에 如取一하면
卽被汚心田되리라

부대사
강을 건너는 데는 모름지기 뗏목을 쓰되
언덕에 이르러서는 뗏목을 쓰지 않는지라
人과 法에 있어서 我가 없음을 알아
도리를 깨달았으매 어찌 방편(筌)을 빌리리오?
가운데(中道) 흐름에도 이에 빠지는 것이거늘
누가 二邊이 있음을 말하는가?
있고 없음에 만약 하나를 취하면
곧 마음 밭(본성)을 더럽히게 되리라.
---

冶父:
水到渠成이노라

說誼:
(一作成渠라) 佛所說法은 卽眞卽俗이니
卽俗故로 解脫이 卽文字로다
四十九年을 東說西說이 卽眞故로
文字가 卽解脫이니라 三百餘會를
未曾說一字라니 若着文字하면
見派迷源이요 若捨文字하면 望源迷派니
源派를 俱不迷하여야 方入法性海니라
旣入法性海하면 無念智가 現前이니
無念智現前하면 所向無碍하여 觸處皆通하리라

야부:
물이 이르면(모이면) 개울이 생기노라

설의:
(다른 책에는 成渠이라 되어 있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곧 理(眞)요 곧 俗(事)이니 곧 속(事)이므로
해탈이 곧 文字로다.
四十九년을 이곳저곳에서 설
(東說西說)하신 것이
곧 理(眞)이므로 文字가 곧 해탈이니라.

三百여회를 설하였어도
일찍 한 자도 설하지 않았다 하시니
만약 문자에 집착하면 줄기(派)만 보고
근원(源)에 미혹할 것이요,
만약 문자를 버리면
근원(진제)만 보게 되어 줄기(속제)에 미혹하게 되니,
근원과 줄기에 함께 미혹하지 않아야 바야흐로
일체 성품의 바다(法性海)에 들어가게 되니라.

이미 法性海에 들어가면 無念의 지혜가 드러나게 되니
무념지(無念智)가 현전하면, 향하는 데에 걸림이 없어
부딪치는 곳마다 모두 通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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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참을 방편을 통해 일러주니
방편이 곧 참으로 통하고
참은 곧 방편으로 아나니
손가락을 통해 가리키는 달을 보라.
진제를 가리킴은 속제의 일이니
속은 진을 벗어나지 않고
진은 속을 여의지 않았음이니라

말의 방편을 통하여 실상을 깨우치게 되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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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冶父:
終日忙忙에 那事無妨이노라
不求解脫하고 不樂天堂이니
但能一念歸無念하면
高步毘盧頂上行하리라

說誼:
無念智現은 這邊那邊을 打成一片이니라
縛脫이 無二요 升沈이 一際로다 旣得正因하여
但不認着하면 高步毘盧頂하여 自成眞快活하리라

야부:
終日토록 분주해도 무슨 일에도 방해되지 않노라.
해탈도 구하지 않고 천당도 즐기지 않으니
다만 능히 한 생각 무념으로 돌아가면
높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머리 위(毘盧頂上)를
활보하리라

설의:
無念智가 드러남은 이쪽과 저쪽을 쳐서
한 덩어리를 이룸이니라.
속박과 해탈이 둘 아니요,
떠오름과 잠김이 한 때로다.
이미 正因을 얻어
다만 잘못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높이 毘盧頂上을 활보해 참으로 시원하고
활발함을 스스로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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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진불(眞佛)은 부동(不動)해도 쓰임에 자유롭고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본래 천당 해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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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鏡:
因勝果勝이니 信心이 明了無疑하면
人空法空하여 眞性이 本來平等이로다
直饒名相이 雙泯하고 取捨兩忘이라도
要且猶筏在니라 咦 彈指에 已超生死海거늘
何須更覓度人舟리오 善根成熟信無疑하니
取相求玄轉背馳하여 一念頓超空劫外하니
元來不許老胡知니라

종경:
원인이 뛰어나게 훌륭하면 과보도 뛰어나니,
믿는 마음으로 밝게 깨달아서 의심이 없으면
人도 空하고 法도 空하여 참 성품이 본래 평등함이다.

바로 이름(文字)과 相이 쌍으로 멸하고 취하고
버림이 둘 다 잊혀졌다 해도
오히려 뗏목(멸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다. 咦!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이미 생사 바다를 뛰어넘었거늘
어찌 다시 사람 건널 배를 찾으리오?

선근이 성숙하여 믿어 의심이 없으니
相을 取하고 玄妙함을 구함을 더욱 등져서
한 생각 몰록 空劫밖을 뛰어나니
원래 달마(老胡)의 앎을 허락하지 않느니라.
---

청봉착어:
사람도 일체도 모두 공
일체의 참 성품이 모두 공함을
의심 없이 믿어(깨달아) 가지되
공 하다는 그마저 없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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