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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家解 金剛經

法會因由分 第一 (법회가 시작된 연유)

작성자무소유|작성시간26.06.18|조회수39 목록 댓글 0

法會因由分 第一  (법회가 시작된 연유)
[序 分](證信序)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 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發起序)
爾時 世尊  食時에 著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敷펼부  邊가변

圭峰:
後釋經文에 准常三分하리니
一은 序分이요
二는 正宗分이요
三은 流通分이니라 初文에 又二니
一은 證信序요 二는 發起序니라
 今初라.

규봉:
다음은 경문을 해석하는데
상례에 따라서 셋으로 나누니
서분이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 실마리를 푸는 부분)
정종분이요
(경전의 본론을 설명한 부분)
유통분이다
(바른 것을 말하였음을 널리 유통하도록 권하는 부분)
1.
처음 문장에 또 둘이 있으니
(1)은 증신서와
(틀림없음을 들어 믿음을 일으키는 부분)
(2)는 발기서다
(정종분의 동기와 인연을 설명한 부분)
---

如是我聞하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  祇樹  給孤獨園에서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과 俱하셨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 고독원에서
큰 비구들 1250인과 함께 계셨다.

淸峯:
세존의 시봉을 25년간하며
많은 법문을 빠짐없이 듣고 기억한
다문 제일의
아난존자가 들은 바대로 말한 것이다,  하여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하는 것이다.
一時
시간은
본래 없는 것을 지어 만든 가변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이고 함축된 뜻으로 때를 기술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께서 성도 하신 후, 교진여등 5인과
다음 가섭존자 3형제와 1천인을 제도하시고
다음 사리불, 목건련의 무리 각 1백인을 제도하시고
다음에 야사 장자의 아들 50인을 제도하시니
그 수가 대체로 대 비구등 1250인이다.
기수는
기타 태자가 심은 나무(樹),
급고독원은
당시 자선가인 재상이 고독한 사람을 많이 구해준
것을 기려 그의 별명을 따서 지은 나라(사위국)의
절 이름이다.
----

圭峰:
文前에 分三하리니

一 은
明建立之因이니
則佛臨滅度시에 阿難이 請問四事함에
佛이 一一答하시되
我滅度後에 一은 依四念處住요
二 는  以戒爲師요
三 은
黙擯惡性比丘요
四는 一切經首에 皆云如是我聞하니
一時에 佛이 在某處하시어
與衆若干等이라하시다
二는 明建立之意이니
意有三焉이니
一은 斷疑故니 謂結集時에
阿難이 昇座하여 欲宣佛法에
感得自身의 相好如佛하여 衆起三疑함이니
一은 疑佛重起說法이요
二는 疑他方佛來요
三은 疑阿難成佛이라 故說此言에
三疑頓斷이니라
二는  息諍故이니 若不推從佛聞하고
言自製作하여 則諍論이 起이니라
三은 異邪故이니 不同外道經初에
云阿憂等이로다
三은 正釋文義에 具六成就이니
謂信聞時主處衆이니
六緣이 不具면 敎則不興이리니
必須具六이니 故云成就라하니라
六成就者는 一은 信이니
若兼我聞合釋則指法之辭也이니라
如是之法을 我從佛聞이요
單釋如是者하면
智度論에 云하되
信成就也라 佛法大海에 信爲能入이요
智爲能度니
信者는 言是事如是하고
不信者는 言是事不如是라하다
又聖人說法이 但爲顯如니
唯如爲是이니 故稱如是니라
又有無不二가 爲如요 如非有無가 爲是니라


는 聞이니
我는 卽阿難의 五蘊假者요 聞은 謂耳根發識이니
廢別從摠이니 故云我聞이니라
阿難의 所不聞二十年前之經은
有云하되 如來重說이라하며 有云하되
得深三昧하여 總領在心니라하나
若推本而言라면 阿難은 是大權菩薩이니
何法不通이리오


은 時이니
師資合會하여 說聽究竟이니
故言一時니라 諸方時分이 延促不同이니
故但言一이라하고 又說法領法之時에
心境이 泯하고 理智가 融하며 凡聖이 如하고
本始가 會니 此諸二法이 皆一之時니라


는 主니
具云佛陀이며 此云覺者니라 起信에 云하되
所言覺義者는
則以無念을 名之爲佛이니라 然이나 覺有三義이니
一은 自覺이니
覺知自心이 本無生滅이요
二는 覺他니 覺一切法이 無不是如오
三은 覺滿이니 二覺理圓을 稱之爲滿이라
故知有念이면 則不名覺이니
起信에 云하되 一切衆生이 不名爲覺은
以無始來로 念念相續하여
未曾離念이라하며 又云하되
若有衆生이 能觀無念者하면
卽爲向佛智故라하시니라


는 處니
舍衛는 此云聞物이니
謂具足欲塵財寶多聞解脫等하여
遠聞諸國이라 故로 義淨이 譯云하되
名稱大城이라하다 祇樹等者는
卽祇陀太子가 所施之樹요
給孤獨園者는 須達長者가 所買之園이라
祇陀는 此云戰勝이니
波斯匿王의 太子也라
生時에 王이 與外國戰勝으로 因以爲名이라
梵語로 須達은 此云善施이니
給孤獨은 卽是善施이며
又亦常行施故니라
西國에 呼寺爲僧伽藍이라하며 此云衆園이니라


은 衆이니
與者는 幷也며 及也라 大者는 名高德著라
比丘者는 梵語로 此含三義故로 存梵不譯이나
一은 怖魔요
二는 乞士요
三은 淨戒라
衆者는 理和事和니라
千二百五十人者는
佛이 初成道에 度憍陳如等五人하시고
次度迦葉三兄弟와 兼徒摠一千하시고
次度舍利弗目乾連과 各兼徒一百하시고
次度耶舍長者子等五十人하시니
經擧大數이니 故減五人이요 是常隨衆이니
故偏列數이나 非無餘衆이니
文에 隱顯耳라
俱者는 一時一處니라

규봉:
경 문 앞에 셋으로 나누니
1
建立의 동기(因)를 밝힌 것이니
부처님이 멸도에 드실 무렵에
아난이 네 가지 일을 물으신데 대하여
부처님이 낱낱이 답하시되 ‘내가 멸도한 후에
첫째
四念處
신념처(관신부정),
수념처(관수시고),
심념처(관심무상),
법념처(관법무아)]에 의지하여 머물 것이요,
둘째
계로써 스승을 삼을 것이요,
셋째
나쁜 비구는 침묵으로 물리칠 것이요,
넷째
일체 경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이 모처에 대중 약간 명 등과
더불어 함께 계셨다”할 것이다’
2
建立한
뜻을 밝힘에 뜻이 세 가지가 있으니,
의심을 끊기 위한 것이니
結集할 때 아난이 법좌에 올라
불법을 펴고자 할 때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 같음으로 느끼고
대중이 세 가지 의심을 일으킬까 위한 것이니
첫째,
부처님이 다시 오셔서 설법하시는가 의심하고
둘째,
다른 곳에서 부처님이 오셨는가 의심하고
셋째,
아난이 성불했는가? 의심함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을 설하매
세 가지 의심이
단번에 끊어질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다툼을 쉬게 한 것이니
만약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 않고 말하면
스스로 지은 것이라 하여
곧 쟁론이 일어날 것이다.

삿된 道와 다른 까닭이니
外道의 경의 머리에
阿憂(범어)등이라고  한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3
글 뜻을 바르게 해석함
에 여섯 가지 성취를 갖추어야 하니
信, 聞, 時, 主, 處, 衆이다.
여섯 가지 인연이 갖춰지지 않으면
가르침이 곧 일어나지 않으리니
반드시 六가지를 갖춰야 하므로 성취라 하는 것이다.


육성취라는 것은
 
一은
信(믿음 성취)이니
‘我聞’을 합하여 해석하면 곧 법을 가리킨 말이다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음이요,
‘如是’만을 해석하면
지도론에 이르기를 “믿음이 성취된 것이라 했다.
불법의 큰 바다에는 믿음이 있어야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써 능히 건널 수 있으니
믿는 이는 이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하고,
믿지 않는 이는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한다”고 했다.
또 성인의 설법이 다만 如(같음)를 드러내기 위함이니
오직 如가 是(옳음)가 되므로 如是라 한다.

有와 無가 둘이 아님이 如가 되고
如는 유무가 아님이 是가 되는 것이다.

二는
聞(들음 성취)이니
我(나)는 곧 아난의 거짓 오온이요
聞은 耳根이 識(알음알이)을 낸 것을 말하는 것이니
낱낱이 들은 것을 폐하고(자기 소견을 없애고)
총체적인 것
(진실함)을 따르므로 “내가 들었다”한다.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못들은 처음 二十년간의 경은
여래께서 거듭 설해주셨다 하며,
깊은 삼매를 얻어서
모두 깨달아 마음에 갖추어 있다고 하나
만약 근본을 추구해 말한다면
아난은 큰 능력의 보살이니
무슨 법인들 통하지 못하였겠는가.

三은
時(때 성취)이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설함과 듣는 일이
완성됨으로써 일시(한 때)라고 한다.
지역마다 시각이 같지 않으므로
다만 한때라 하고,
또 법을 설하고 법을 알아듣는
그때에 마음과 경계가 없어지고
理와 智가 융통하고
범부와 성인이 같고
근본과 처음이 함께 계합하니
이 모든
두 법이(我空, 法空) 모두 한때라 하는 것이다.

四는
主(누구에게 성취)이니
갖추어 이르면 佛陀이며  이를 覺者라고 한다.
기신론에 이르되
“覺이란 뜻은 心과 體가 생각을 여읜 것이니
생각을 여읜 것이란 허공계와 같아 곧 여래의
평등 법신이라” 하셨으니
곧 무념을 이름하여 불이라 한다.
그러나
覺도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는
自覺이니 자기 마음이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요,
㉯는
覺他이니 일체 것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요,
㉰는
覺滿이니 자각과 각타의 이치가 원만함을 稱하여
滿이라 하는 것으로 알 생각이 있음으로
아는 것은 覺이라 하지 못하니,
기신론에 이르되
“일체중생이 깨달았다 할 수 없는 것은
무시 이래로 생각 생각이 끊이지 않아서
(번뇌망상) 아직까지 생각을 여의지를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또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능히 無念으로 觀하면
이는 곧 부처의 지혜로 향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라”하셨다.

五는
處(장소 성취)이니
舍衛國은 聞物國(만물을 갖춘 나라)이라 하니
욕진(유흥) 재보(경제) 다문(학문) 해탈(종교)등이
모두 갖추어져서 멀리 여러 나라에 알려졌음이니
그러므로 義淨스님이 번역하기를 큰 성이라 했다.
祇樹等은
곧 기타 태자가 보시한 나무이고
급고독원은
수달 장자가 산 동산이다.
기타는 여기서는 전승(戰勝)이라 하니
파사익왕의 태자이다.
태어날 때  왕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음으로 인하여 이 이름을 지었다.
범어로
수달은 善施(착한 생각으로 베풂)라 하는데
급고독은
고독(孤獨)한 이에게 항상 보시를 행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국(印度)에서는 절을 승가람이라 하며
이것을 衆園이라 한다.

六은
衆(무리 성취)이니
與(더불어 참여함)는 幷(같이)이며  더불어(及)이다.
大는 이름이 높고 덕이 드러난 것이다.
比丘란
범어로 세 가지 뜻을 지닌 것이므로
범어로 그대로 두고 번역하지 않으나
㉮. 마구니를 두렵게 함이요
㉯. 乞士(음식과 법을 구걸해 사는 선비)요
㉰. 淨戒 (계를 지켜 깨끗함)이다.
衆이란
이치로도 일에도 화합함이다.

천이백오십인이란
부처님이 처음 성도했을 때
교진여 등 五인을 제도하시고
다음엔 가섭 三형제와
그의 제자 일 천명 모두를 제도하시고
다음엔 사리불, 목건련과
각각 신도 일 백 명을 제도하시고
다음으로 야사 장자의 아들 등
五十인을 제도하시니
이 경엔 큰 수만  들었으므로 五인을 뺀 것이다.
항상 대중이 따르나 치우쳐 수를 열거했으나
다른 대중이 없는 것은 아니니
글에 들어냄을 감췄을 뿐이다.
俱(함께)란
같은 때 같은 곳이다.
---

六祖:
如者는 指義요 是者는 定詞니라
阿難이 自稱如是之法을
我從佛聞은 明不自說也라 故로 言如是我聞이니라
又我者는 性也이니 性卽我也이니 內外動作이
皆由於性하여
一切을 盡聞이니 故稱我聞也니라
言一時者는
師資會遇齊集之時이고
佛者는 是說法之主요
在者는
欲明處所니
舍衛國者는 波斯匿王의 所居之國이니라
祇者는 太子名也이고 樹是祇陀太子가 所施이니
故言祇樹니라
給孤獨者는
須達長者之異名이며 園이 本屬須達이니
故言給孤獨園이니라
佛者는 梵語이고 唐言은 覺也니라 覺義有二이니
 一者는 外覺으로 觀諸法空이요 二者는 內覺으로
知心空寂하여
不被六塵所染하고 外不見人之過惡하여
內不被邪迷所惑이니故로 名曰覺이니
覺卽佛也니라
與者는 佛이 與比丘로 同住金剛般若無相道場한
故言與也니라 大比丘者는 是大阿羅漢故니
比丘者는 是梵語이고 唐言으로는 能破六賊이니
故名比丘니라
衆은 多也이니 千二百五十人者는
其數也니라 俱者는 同處平等法會니라

육조
如는
가리킨다는 뜻이고
是는
결정된 것이라는 말이다.
아난이 자기가 일컬어 “이와 같은 법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이것은 자기의 말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여시아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我는
자성이고 자성은 곧 나이니 내외동작이
모두 자기 성품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모두 들으므로, 내가 들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한 때라고 말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인 때이고
佛은
설법하는 주이며
在는
처소를 밝히고자 함이고
사위국이란 파사익왕이 사는 나라이다.
祇는
태자의 이름이고
樹는 기타 태자가 보시한 것이므로
기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고독이란
수달장자의 다른 이름이며
園(동산)이 본래 수달 장자의 것이었으므로
급고독원이라 말하는 것이다.
佛(붓다)은
범어이고 唐言(중국어)으로 覺이라 한다.
각의 뜻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외각으로 모든 法(일체)이 공함을 觀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각으로 마음이 공적함을 알아서
육진의 물듦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며 (끄달리지 않음) 안으로는 삿되고
미혹되지 않으므로 깨달음이라 이름하니
각은 곧 佛인 것이다.
더불어(與)란
부처님이 비구와 더불어 금강반야의
상이 없는 도량에 함께 계셨으므로
與라고 말하는 것이다.
큰 비구란
대아라한인 때문이니 비구란 범어이고
당언으로
능히 여섯 가지(眼, 耳, 鼻, 舌, 身, 意) 도
적을 깨뜨렸으므로 비구라 이름하는 것이다.
衆(복수인 무리)은 많다는 것이니
천이백오십인은 그 숫자이다.
俱(함께)란 평등한 법회에 함께 계셨음이다.
---

說誼:
如是之言을 古人들이 說有多途하니
今川老(도천야부)는
蓋取有無不二爲如와 如非有無爲是니라

야부:
이 같음이여.
설의:
여시란 말을 고인들이 여러 갈래로 설하셨으니,
지금 川老(도천야부)는 유와 무가 둘 아님이
如가 되는데,
如는 유, 무가 아닌 것이
是(이것 그대로 옳음)가 됨을 취한 것이니라.
---

청봉착어:
如는
유(用:慧)
무(體:定)가 본성이 공하므로
둘 아님이요.
그러므로 이것 즉 있는 그대로 이름 붙이기
이전의 것이 是가 되는 것이다.
佛은 각(깨달을 것:本覺)이니
일체가 공하고(法空) 내가 공(我空)한 것을
관하여 깨달아 계합(始覺)하면 자성이 佛임을
요달하고 그로써 일체종지를 증득하는 것이다.
---

冶父:
古人이 道하되 喚作如如라면 早是變了也라하니
且道하라 變向甚麽處去인가
咄 不得亂走니라 畢竟作麽生인가
 道火不曾燒却口로다

說誼:
南泉이 問講師하되 講甚麽經인가 云講涅槃經하니
云하되 經中에 以何爲極則인가하니
云하되 以如如로 爲極則이라하니
云하되 喚作如如라면 早是變了也이니
須向異類中行하여 道取異中事하여야
始得이다하시니 法眞一이 頌云하되
涅槃寂滅이 本無名이니
喚作如如早變生이라
若問經中何極則하면 石人이 夜聽木鷄聲이라하리라
謂涅槃寂滅이 本無名字이니 若立名字하면
未免變異去在이니
須向異類中行하여 道取異中事하여야
圓轉不觸하여서 始得이리라
且道하라 變向甚麽處去인가 咄 不得亂走하라
若以變不變으로
商量하면 又却不是也니라
畢竟作麽生인가 涅槃寂滅이 雖本無名이나
亦不妨因名現體이니 爲甚如此인가
說名之時에 早已風吹不入이요
水洒不著이니라 只有一段通身寒光이니
喚作如如인들 有甚變去이랴

喚부를환 只다만지

야부:
고인이 이르기를 “여여라 말하면
이것은 이미 변한 것이라”하시니,
자 일러라! 변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는가?
 咄(돌)!, 어지럽게 쫓아다니지 말지니라.
필경에 어떠한가?
불(火)이라 해도 일찍이 입을 태운 적이 없도다.

설의:
남전이 강사에게 물으시되
“무슨 경을 강의하는가?”
“열반경을 강의합니다”하니
“열반경중에서 무엇으로 極則
(가장 중요함)을 삼는가?”하니
“여여로 극칙을 삼습니다”하니
이르시기를 “여여라 말하면
이미 변해버렸으니
모름지기 異類中
(다른 입장, 또는 축생류)을 향해
행해서 異中事를 취하여 말해야
비로소 옳지 않은가
(證得)” 하였으니,     (證증거증)
법진일이 게송으로 이르되
열반적멸이 본래 이름이 없으니
여여라 하면 이미 변해버림이라.
만약 경 중에서 무엇이 극칙인가 묻는다면
돌 사람이 밤에 木鷄(나무 닭)소리를 듣는다 하리라.
열반적멸이 본래 이름이 없으니
만약 이름을 세우면 변해버림을 면치 못하니
모름지기 異類中을 향해
행해서 이류 가운데의 일을 취해 말해야
원만히 굴려 부딪치지 않으므로 비로소 증득하리라.
자, 일러라!
변해서 어느 곳을 향해 갔는가?
咄! 어지럽게 쫓아다니지 말라.
만약
변함과 불변함으로써 헤아리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리라.
필경에는 어떠한가?
열반적멸이 비록 본래 이름은 없으나
또한 이름으로 인하여 체를 나툼에 방해되지 않으니
어찌하여 그런가?
이름을 말할 때
이미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을 뿌려도 붙지 않으니라.
사무친 찬 빛(일대사를 증오한)이 다만 있으니
여여라 말한들 혹은 무슨 변화가 있으랴.
---

청봉착어:
여여는
여여라 하기 이전 그대로이다.
따라서 불은 불이 아니요
불은 이름일 따름이다.
변해서 어디로 갔는가?
말끝에 쫓으면 어리석은 개꼴이 되고
영리한 사자는 돌을 보지 않고
근본을 쫓아 무나니
여여는 곧 여여니라. 쉿!
---

冶父:
如如여 靜夜長天에 一月孤로다

說誼:
水與波가 無二이요
波與水가 不別이니 淸寥寥時에
元的的이요 白的的處가 亦寥寥로다

야부:
같고 같음이여.
고요한 밤 먼 하늘에 하나의 달이 외롭도다.

설의:
물과 파도가 둘 아니고
파도와 물이 다르지 않으니,
맑고 고요한 때가 원래 적적하고
밝고 분명한 곳이 역시 고요하도다.
----

청봉착어:
정과 혜가 둘 아니요
체와 용이 둘 아니련만,
혜는 정이 아니요
용은 체가 아니라 하네.
일러라,
무엇이 정과 혜인가?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

冶父:
是是여
水不離波波是水로다 鏡水塵風不到時에
應現無瑕照天地로다 看看하라

說誼:
指水全是波요 指波全是水라 毘盧華藏이 物物頭頭요
萬像森羅 全機無垢로다 機無垢는 本淸淨하여
鏡淨水澄하여 風塵不到라 湛湛地에 明歷歷하여
輝天鑑地가 曜古騰今이로다
要會麽인가 要會이면 高着眼하라.

야부:
옳고 옳도다.
물은 파도를 여의지 않으니,
파도가 곧 이 물이로다.
거울 같은 물에 塵風(번뇌)이 이르지 않을 때
티 없이 나투어 천지를 비추도다.
보고 보아라.

설의:
물을 가리키나 모두가 파도요
파도를 가리키나 모두가 물이라.
비로자나의 화장세계가
사물 하나 하나에 모두 갖추어져 있고
삼라만상 전부가 때(垢)가 없도다.
기틀에 때가 없음이란
본래 청정하여 거울처럼 맑고 물처럼
맑아서  풍진이 이르지 않음이라.
맑고 맑은 곳에 밝고 역력해서
하늘을 빛내고 땅을 비춤이
옛날에도 빛나고 지금도 빛나도다.
알고자 하는가?
알고자 하면 눈을 높이 뜰지어다.
---

청봉착어:
본래 청정한 그것이 이름도 형상도 없으나
있음이 없이 있어 일체를 나투니
두두물물이 이로부터 나투었고
온갖 것의 근원이요
청정하나 모두를 갖추었네
---

冶父:
我여

說誼:
指天指地獨立底人이로다

야부:
나여!

설의: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며
홀로 서 있는 사람이로다.
---

청봉착어:
我여!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흔들도다
---

冶父:
赤裸裸淨洒洒하여 沒可把로다

說誼:
古人이 道하되
阿呵呵是甚麽인가
南北東西에 唯是我라시니
雖云南北東西에 唯是我하나
爭乃一切處에 摸索不着인가
是可謂境上施爲渾大有나
內外中間覓摠無로다

야부:
숨김없이 드러나고(적나라)
맑고 깨끗(정쇄쇄)하여
가히 잡을 수 없도다.

설의:
고인이 이르시기를 하하하!
이 무엇인고?
남북동서에 오직 이 ‘나’라 하시니,
비록 사방에 오직 이 나라 일러주어도
어찌 일체처에서 찾지 못하는가.
이것은 가히 경계와 함께 크게 있으나
내외 중간을 찾아봐도
모두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청봉착어:
찾아도 찾을 수 없어도
일체를 보고 일체를 나투니
온몸이 눈이요 온몸이 손이로다.
---

冶父:
我我여 認得分明成兩箇도다
不動纖毫合本然하니
知音이 自有松風和로다

說誼:
若道我有라면
眼中着屑이요
若道我無라면 肉上剜瘡이니
所以로 道하되
有我直應還未達이요
若言無我更愚癡라하니
一體上에 兩般見이여
析虛空作兩片이로다 兩頭俱不涉하여야
方得契如如이니 踏得家田地하여
唱出無生曲이리라
無生曲子를 孰能和인가 蕭蕭松籟送淸音이로다

야부:
我와, 我여!
깨달아 얻으면 분명히
두 개(定,體:慧,用)를 이루도다.
털끝마치도 움직이지 않고 본연에 합하니
음률을 알아 저절로 솔바람으로 화답하도다.

설의:
만약 내(我)가 있다 하면 눈에 티가 있음이요,
만약 내가 없다 하면
피부를 긁어서 부스럼을 만듦이니,
그런 까닭으로 말하길 내가 있다 하면
바로 마땅히 도리어 이르지 못하고
만약 내가 없다하면 다시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한다 하니라.
한 몸에 두 가지 견해가 있음이여,
허공을 쪼개서 두 조각을 만든 것이로다.
두 가지에 모두 들지 않아야 바야흐로
여여한데 계합하여 제집의 땅(家田地)을 밟고
생멸 없는 노래(無生曲)를 부르리라.
무생곡에 누가 능히 화답하겠는가.
소슬한 솔바람이 맑은 소리 보내도다.
---

청봉착어:
거울은 대가 없으나
그 성품은 일체를 비추니
이와 같이
자성은 묘하게도 없이 있고
묘하게도 작용이 무진하여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

冶父:
聞이여

說誼: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合處에 如瞥地하면
見處가 是眞聞이니라

야부:
들음이여.

설의:
본래 하나의 맑고 깨끗한 공적한 마음(精明)이
나뉘어져 육화합(육근+육경+육식=18계)이 되었으니
합한 곳에서 깨달으면 보는 곳이 참으로 듣는 것이니라.
---

冶父:
切忌隨他去니라

說誼:
滿耳非音이니
聞箇甚麽며 廓然無我거늘 聞底는 是甚麽인가
了得如是하면 鶯歌與燕語를 從敎鬧浩浩이나
若未如然하면 宮商幷角徵에 化我常抽牽되리니
所以로 道하되 切忌隨他去하니라

야부:
간절히 경계하노니
경계에 끄달리지 말지니라.

설의:
귀에 가득한 것이 소리가 아니거늘
듣는 것이 무엇이며,
확연히 내가 없거늘 듣는 자는 이 누구인가?
이같이 깨달으면
앵무새 노래와 제비의 지저귐을
상관하지 않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면
궁상각치우(세상의 모든 소리)에
내가 항상 끄달리게 되리라.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간절히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하느니라.
---

청봉착어:
들어도 들음이 없으니
듣는 놈도 공하고
들리는 것도 공함을 요달하라.
---

冶父:
聞聞이여
猿啼嶺上이요 鶴唳林間이니
斷雲風捲하고 水激長湍이로다
最好晩秋霜午夜에 一聲新雁이 覺天寒이도다

說誼:
(好는 一作愛) 鶴唳猿啼聲入耳하니
誰信圓通門大啓리오
反聞聞處에 心路斷하면
八音이 盈耳不爲塵하리라
不聞이 曾不礙於聞하니
頭頭爲我話無生이도다
夜靜秋空征鴈響이
一聲聲送報天寒이니다
且道하라 是聞인가 不是聞인가
淡薄豈拘聲色外이며
虛閑寧墮有無中이리오

야부:
듣고, 들음이여.
원숭이는 고개 위에서 울고
학은 숲 속에서 우는데
조각 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물은 길게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 내린 한 밤중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에 하늘이 차가움을 깨닫도다.

설의:
(好字는 어느 곳에서는 愛字로 되어 있음)
학의 울음소리와 원숭이 우는소리가 귀에 들어오니
누가 원통의 문이 크게 열림을 믿으리오?
들음을 돌이켜서 듣는 곳의 마음길이 끊어지면,
八音(8가지 소리:쇠, 실, 통, 풀, 흙, 나무, 바람, 물소리)이
귀에 가득 하더라도 번뇌(塵)가 되지 않으리라.
듣지 않는 것이 일찍이 듣는데 장애 되지 않으니
낱낱 사물이 나를 위해서 무생을 말하도다.

고요한 밤 가을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 메아리
한 소리 울려 하늘이 차가움을 알리노라
자 일러라!
이것이 듣는 것인가, 듣지 않는 것인가?
담박한 것이 어찌 聲色 밖에 꺼리낄 것이며
비어 고요함이 어찌 유무 중에 떨어지리요.
---

청봉착어:
나라는 건 내가 아니다
어찌할꼬 내가 아니면
내라고 하지 않고 나임을 누가 알까?
공도 공이라 함으로써 공을 알리라
---

冶父:
一이여

說誼:
天地之根이며
萬化之源이라
千途가 共向於彼하고
萬像이 皆宗於此하도다

야부:
하나여!

설의:
천지의 근본이며
모든 변화의 근원이라.
천 가지 길이 다 저것(一)을 향하고
삼라만상이
모두 이것을 근본으로 하도다.
---

청봉착어:
하나라 하나 하나는 본래 공한데
그하나는 어디로 갈고?
---

冶父:
相隨來也로다

說誼:
三界萬法이 皆從斯起하니
兵隨印轉이고
影逐形生이로다

야부:
서로 따라 오도다.

설의:
삼계의 만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일어나니
병졸들을 印(장군의 령)을 따라 움직이고
그림자는 형상을 따라 나타나도다.
---

청봉착어:
하나라 해도 맞지 않으리니
움직임도 없으나 만법의 왕이로다.
---

冶父:
一一이여
破二成三이 從此出이라 乾坤混沌未分前이니
 以是一生參學畢이로다

說誼:
破二도 以一也며 成三도
亦以一也니 成之破之가 皆從斯得이로다
興來先天地요 無形本寂寥하나
能爲萬像主요 亦爲諸佛母니라
若人이 了得此하면 無事不圓通하리라

야부:
하나여! 하나여!
둘을 파(我空․法空 = 二空)하고
셋을 이루는 것이(6근, 6진, 6식)
이것으로 쫓아 나왔도다.
천지가 나뉘기 이전이니
이것으로 일생의 공부를 마쳤음이로다.

설의:
둘을 파함도 하나로써 하며
셋을 이룸도 역시 하나로써 하니
이루고 파하는 것이 다
이것으로써 이루어 지도다.
온 것은 천지보다 먼저이고,
형상 없이 본래 고요하나
능히 만상의 주인이 되고
또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느니라.
만약 사람이 이것을 깨달아 얻으면
일마다 원만히 통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

청봉착어:
석가도 아미타불도 이의 종이요
이 하나의 아들이로다.
---

冶父:
時여

說誼:
遠劫一念이 無碍하고 古今始終이 該通이로다
爲甚如此인가 動靜이 常在靑山中이니라

야부:
때여!

설의:
오랜 세월과 일념(한 생각, 일순간)이 걸림이 없고,
옛과 지금과 시작과 끝이 모두 하나로 통하도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움직이고(動) 고요함(靜)이 항상 靑山中
(동하지 않는 마음 가운데:
심체)에 있음이니라.
---

청봉착어:
한 때라 하나
본래 만법이 평등해 고금이 없으니
순간도 지어  만듦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찰라가 겁이요 겁이 곧 찰라이니라.
---

冶父:
如魚 飮水하여 冷暖自知로다

說誼:
怎生이 是冷暖底滋味인가
明月堂前은 時時九夏요
太陽門下는 日日三秋로다
此味를 無人識이니
親嘗하여야 始自知니라

야부:
물고기가 물을 마시매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도다.

설의:
무엇이 이 차고 더운 맛인가?
달 밝은 집 앞에는 항상 여름이고
햇빛 비친 문 앞에는 나날이 가을이로다.
이런 맛을 아는 이가 없으니
친히 맛보아야 비로소 스스로 아느니라.
---

청봉착어: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으니
그럼 무엇인가?
알 수 없어라.
불은 불에 들면 뜨거운 줄 모르고
물은 물에 들어도 젖지 않느니라.
---

冶父:
時時여 淸風明月은 鎭相隨라
桃紅李白薔薇紫를 問着東君自不知로다

說誼:
淸風明月을 不得別會이니
淸風拂時에 明月照하고
明月照時에 淸風拂이로다
桃李薔薇는 東君造化底物事인데
東君이 不知하고 淸風明月은
人人受用底家事로되 人人이 不會하니
不會不知여
人人이 盡有一雙眉요 箇箇面前에 更無人이로다
着語云하되
自知라하고 頌云하되 不知라하니
不知與自知 相去多少인가
但知不知이면 是眞自知니라

야부:
때여! 때여!
청풍명월은 항상 서로 따르고
복숭아꽃은 붉고
배꽃은 희며
장미꽃이 붉음을
동군(봄바람)에게 물으니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

설의:
청풍과 명월을 따로 알려하지 말지니
청풍이 불 때 명월이 비치고
명월이 비출 때 청풍이 불도다
복숭아꽃, 배꽃, 장미꽃은
봄바람(東君)의 조화 속의 산물인데
봄바람이 알지 못하고,
청풍과 명월은 사람들이 거둬 쓰는
집안일(내 안의 일)이지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함이여!
사람들이 모두 한 쌍의 눈썹을 가졌음이요,
개개의 면전에 다시 사람이 없도다.

착어에 이르되
‘스스로 안다’고 했고
頌으로 이르기는
‘알지 못한다’하시니
알지 못함과 스스로 안다는 것이
서로의 거리가 얼마가 되는가?
다만 아는 것을 알지 못할 줄 안다면
이것이 참으로 스스로 아는 것이니라.
---

청봉착어:
산이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러나 땅이 산을 바치고 있어도
산의 높이를 모르고
얼음이 냉동고에 들어가도
차가운 줄 모르니라.
---

冶父:
佛이여

說誼:
本源天眞이 是인가 相好嚴身이 是인가
一身이 分作兩鄕心이로다

야부:
부처여!

설의:
본래 천진한 근원이 이것인가?
장엄한 상호가 이것인가?
한 몸이 나뉘어 두 마음(본체심, 작용심)을 지었도다.
---

청봉착어: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설사 일러 가져와도 옳지 못하리라.
한 때라는 것은 가변적인 것,
본래 시간은 매듭이 없는 것이니
그 한 때는 어느 때인가?
단지 말하는 그때이니라.
---

冶父:
無面目說是非漢이로다

說誼:
無形還有像이니 逢人說是非로다

야부:
면목도 없는데 옳고
그름을 논하는 놈이로다.

설의:
형상이 없으나 도리어 모습이 있어
사람을 만나 옳고 그름을 말하도다.
---

청봉착어:
일체가 공적하여 있음이 없는데
묘한 작용은 만상을 짓도다.
---

冶父:
小名은 悉達이고 長號는 釋迦이니
度人無數하사 攝伏群邪로다
若言他是佛이라면 自己는 却成魔라니
只把一枝無孔笛하여 爲君吹起太平歌로다

說誼:
世與出世가 是俱化儀니 雖然如是나
妙相은 無形이요
眞名은 非字이니 形之與名을 甚處得來인가
不因江招月이면 爭知應萬般이리오
應萬般이여 多少人天이 言下에 知歸하고
多少魔群이 廻邪返正이니
此是拔亂返正하여 致得太平이니
須知有本太平하여야 始得이니라
若將報化云是佛이라면
自己天眞은 竟何物인가
君看四十九年迹하라 太虛空裏에서
生閃電이니라
君看四十九年說하라

權將黃葉止兒啼로다
唯有一處가 也大難忘이니
黃葉葉底無孔笛으로
吹起吾家劫外歌로다
劫外歌여 歌何事인가
歌詠人人本太平이로다
怎生是本太平인가
人人脚下에 淸風拂이요
箇箇面前에 明月白이노라

야부:
어릴 때 이름은 싯달타이고
커서 이름은 석가이니
무수한 사람을 제도하시고
삿된 무리를 거두어 항복 받으셨도다.
만약 그를 부처라 하면
자기는 도리어 마구니가 되리니
다만 한 가닥 無孔笛(구멍 없는 피리)을 잡아서
그대를 위해서 太平歌를 부르노라.

설의:
세간과 출세간이 모두 교화하는 방편이니
비록 이러하나 妙한 相은 형상이 없고
참된 이름은 글자가 아니니,
형상과 이름을 어느 곳에서 얻어 올 것인가?
강물로 인해서 달을 부르지 않으면
어찌 온갖 것에 응함을 알 것인가?
온갖 것에 응함이여!
얼마쯤은 사람과 하늘이 言下에 돌아갈 줄 알고,
얼마쯤의 마군이 삿됨을 돌이켜 바름(正)에 돌아가니
이것은 어지러움을 뽑아버리고 바른 것에 돌아가서
태평을 이루어 얻는 것이니,
모름지기 본래 태평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얻는 것이니라.
만약
보신 화신을 가리켜 부처라 하면
自己의 天眞(佛性)은 무슨 물건인가?
그대는 49년의 자취를 보아라.
큰 허공 속에서 번개 불이 번쩍 하는 소식이니라.
그대는
49년의 설하심을 보아라.
방편으로 누런 잎사귀(經)을 가지고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함이로다.
오직 한 곳이 크게 잊기 어려우니
황엽 잎과 구멍 없는 피리(法音:
설해도 설함이 없는)로 내 집의
劫外歌(겁 밖의 소식:말 밖의 소식)를
불어 일으키도다. 겁 밖의 노래여!

무엇을 노래하는가?
사람 사람이 본래 있는
태평함을 노래 부름이로다.
무엇이 본래의 태평한 것인가?
사람 사람의 발 아래에 淸風이 불며
낱낱의 면전에 밝은 달이 희도다.
---

청봉착어:
부처님이 일생을 설하셨으나
설함이 없으니
불법(眞理)은 만든 것이 아니니라.
---

冶父:
在여

說誼:
主中主여
長年을 不出戶로다 又 寂然不動이요
又 獨坐庵中寂無事로다

야부:
있음이여!

설의:
주인 가운데 주인이여!
오랜 세월동안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또한 일없이 고요(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또 홀로 암자에 앉아
고요하여 일이 없음이로다.
---

청봉착어:
석가모니는 부처인가, 아닌가?
부처라면 있음에 떨어지고
아니라면 없음에 떨어지나니
석가는 그의 아들이니라.
---

冶父:
客來須看이니
也不得放過하고 隨後便打니라

說誼:
若一向坐在家舍則途中事가 闕이요
一向行在途中則家裏事疎이니
要須在家舍而不虧途中事하고
在途中而不昧家裏事하여야
始得이로다 所以로 道하되
妙喜가 豈容無着問이나
漚和로야 爭負絶流機하니라
又客來云云은 感而遂通이요
不得云云은 隨緣無着이니라
又客來云云은 若遇客來하면
須善待요 不得云云은
是客이 稍有賊氣在니
知有賊氣하면
須打殺니라

야부:
손(客)이 오면 자세히 살필지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뒤따라가서
문득 쳐야(쓸어 없앰) 하느니라.

설의:
만약 한결같이 집에 앉아만 있으면
길 가운데의 일(혜, 용)이 잘못되고
한결 같이 길에만 있으면 집안일(家裏事:체, 정)이
소홀히 해짐이니,
반드시 집안에 머물면서
길 가운데 일을 잊지 말고,
길 가운데 있으면서
집안 일에 어둡지 않아야 비로소 옳으니라(成就)

그런 까닭에 이르되
“妙喜(문수보살)가
어찌 無着 선사의 질문을 용납 하리요만은
방편(漚和)으로야 대근기를 저버리겠는가”하였다.
또 ‘손이 오면 운운’이라 한 것은
느껴서 마침내 통한다는 것이요
그냥 지나치지 말라 운운’은
인연을 따르되 집착함이 없음인 것이니라.
 또 ‘손이 오면 운운’은
만약 客(경계)이 오면 모름지기
잘 대접(응함)할 것이요, ‘
그냥 지나치지 말라 운운’은
이 손이 조금이라도
도적기(번뇌, 분별심)가 있으면
도적기가 있음을 알아서
모름지기 쳐죽여야 한다 하는 것이니라.
---

청봉착어:
정, 혜를 쌍수(雙修)하라 누가 일렀던가?
닦을 것도 얻을 것도 없음을 알면
곧 그것이 정, 혜 증득(雙收)이니
법으로는 바늘 끝도 통할 수 없으나
사사로이는 거마(車馬)도 통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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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可憐車馬客이 門外任他忙이로다

說誼:
家裏事와 途中事를 一道俱行이나 常在途中하여
而昧於家裏事가 是可憐也로다
又獨坐云云은 寂照不二하여
體用如如요 可憐云云은
未了底人이 坐在聲色裏하여 三德彼岸이
相去大遠하니 是可憐也로다
又翛然獨坐眼惺惺하면
任他客賊門外忙이로다

야부
홀로 한 향로 옆에 앉아서
경전(金文) 두어 줄을 외우니
가련한 車馬客이
문밖에서 분망함이로다.

설의:
집안일과 도중 일을
한 길로 함께 행해야 하는데
(理:정․事:혜),
항상 도중 일에 있어서
집안일에 어두운 것이 가련하다 하는 것이니라.

홀로 운운’라는 것은
寂(체,정)과 照(용,혜)가 둘이 아니어서
體와 用이 같은 것이요,
‘가련하다 운운’함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바깥 경계(聲色)에
머물러(執着) 있어서
三德
법신․智德,
반야․斷德,
해탈․恩德 의
저 언덕이 상대적으로
멀고 먼 것이 가련하다 하는 것이로다.

아무 거리낌없이 홀로 머물러
성성한 눈을 갖추면
저 客賊(번뇌, 망상)이 문밖에서 분망할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둘(끄달리지 않음) 뿐이로다.
---

청봉착어:
사람마다 보물을 창고에 쌓아두고
가난하다고 애통하누나.
남의 일일랑 관계 하지말고
홀로 앉아 일만금을 마음대로 쓰라.
---

冶父: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과 俱여

說誼:
主伴이 交參하여 說聽同會로다

야부:
큰 比丘들 천 이백 오십인과 함께 함이여.

설의:
부처님(主)과 대중(伴)이 함께 참석하여 설하고
듣는 자가 함께 모였도다.
---

청봉착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듣는 자가 있어야 하나
말하고 듣는 자 둘 아니로다.
---

冶父:
獨掌으로 不浪鳴이니라

說誼:
師資合會하여서 方成唱和로다

야부:
한 손바닥으로는
홀로 소리를 내지 못하니라

설의:
스승을 도와 함께 모여서 바야흐로
노래하고 화답함을 이루도다.
---

청봉착어:
주인이 있으면 또한 객이 있느니라.
---

冶父:
巍巍堂堂하여 萬法中王이며
三十二相에 百千種光이니
聖凡이 瞻仰하고 外道歸降이로다
莫謂慈容을 離得見하라
不離祇園大道場이니라

說誼:
依眞起化로 化道方成이요
感畢遂隱하면 而眞常住로다
世云하되 佛生迦毘羅하시고
成道摩竭陀하시어 說法波羅奈하시고
入滅拘尸羅라하니
蓋釋迦老子는 於淨飯王宮에서 示現出生하시어
十九에 出家하고 三十에 成道하시어
住世四十九年하시며
說法三百餘會하시고 壽登八十에 而示入滅하시니
其示滅以來로 于今二千餘載이니 迹此觀之하면
世云佛有去來가 可矣이나 據實而觀하면 來無所來로다
月印千江이니 去無所去라 空分諸刹이로다
伊麽則雖云出世나 未曾出世요
雖云入滅이나 未曾入滅이니 所以로 道하되
莫謂慈容을 難得見하라 不離祇園大道場이라하시니
要識慈容麽인가 擬議思量千萬里니라
要識道場麽인가
觸目無非古道場이도다

야부:
높고 높아 당당하여, 만 법 가운데 왕이며
삼십이상에 백 천 가지 빛의 근본이니
성현, 범부가 우러러 보고
외도가 귀의하여 항복하도다
자비로운 모습 뵙기 어렵다 하지 말라
기원(우주) 대도량을 떠나지 않았느니라.

설의:
眞(법신)에 의해서 化(화신:응신)를 일으켜
가르침이 바야흐로 이루어지고,
감응하여 마치고 드디어 숨으면 마침내
참으로 항상 머무름이로다.
세상에서 말하길
“부처님은
가비라에서 탄생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시어
바라나에서 설법하시고
구시라에서 입멸하셨다”하나니,
대개 석가모니께서는 정반왕궁에서
출생하심을 나타내 보이(生)시어
19세에 出家하시고
0세에 도를 이루시어
49년간을 세상에 머물면서
三百여 회를 설법하시고
80세가 되시어 입멸을 보이시니,
그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지금까지 2천여년이니
그 자취를 보면
부처님은 오고 감이 있다고
세간에서 이르는 것이 옳기도 하나
실다움을 들어 관해 보면
와도 온 바가 없는 것이로다.

달이
千江(온천지)에 비침과 같이
가도 감이 없는 것이라
허공을 모든 세계로 나눔과 같도다.
이러한즉 비록 세상에 나오셨다 이르나
일찍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아니고
비록 입멸했다고 하나
일찍이 입멸함이 아니니,
이런 까닭으로 말하기를
자비스러운 모습을 뵙기 어렵다 말하지 말라,
기원정사의 대 도량을 떠나지 않으셨다 하느니라.
그러면
자비로운 모습을 알고자 하는가?
의심하고 사량하면 천만리나 멀어지니라.

기원정사의
대 도량을 알고자 하는가?
눈 닿는 곳마다(일체처가)
옛 도량 아님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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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화신 응신이여 평지풍파이니
풍류 없는 곳에서 풍류를 즐김이로다
가도 감이 없고 와도 옴이 없으니
자! 참 부처는 어디 있나?
잠깰라,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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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二는
發起序者는 謂乞食威儀가 離於邪命이니라
是爲持戒이니 戒能資定하고 定能發慧이니
故以戒定으로 發起般若正宗이니라
於中에 有二이니
一은 戒요
二는 定이니 今初라

규봉:
(2) 다음
發起序
(법문의 동기와 인연을 말하게 된 서문)는
걸식하는 거룩한 모습(威儀)이 삿되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
(거지의 구걸)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율에 맞는 것(持戒)이 되나니,
계는 능히 定을 돕고  定은 능히 慧를 발하므로
계정(戒定)으로써 반야(智慧)의 바른 종지를 발기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①은
戒(아래 본문)이고
②는
定이니 지금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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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時에 世尊이 食時가 되시어 着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시어 乞食하되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시어
그때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시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시어 밥을 빌으시되
그 성중 가운데에서 차례로 밥을 빌으시고
다시 본처로 돌아오시어

淸峯:
세존께서 내라는 상을 여의시고
사시에 하루 한 끼 드시는 밥을 비셨다.
차별하지 않고 일곱 집을
차례로 복 지을 기회를 주는
자비행으로 밥을 빌으셨던 것이다.
부자도 항상 부한 것이 아니므로
복을 지어야 하고 가난한자는 가난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고르게 복을 지어주신 것이다.
이때의 밥을 받는 자가 福田이 되는 것이다.
---

圭峰:
分七節釋하리니

一은
化主이니 成實論에 說하되
具上九號하여 爲物欽重이니
故曰世尊이라하니
天上人間이 共所尊故라니라
二는
化時니 食時辰이니
當日初分으로 求乞易得하여 不惱自他요
乞已歸園이 正當巳時하니
如常齋法이니라
三은
化儀니 着僧伽梨衣하고 持四天王의 所獻鉢이니라
四는
化處이니 園이 在城東南五六里이니
自外之內가 爲入이요 處廣人多曰大니라
五는
化事이니 佛이 爲欲顯頭陀功德하시어
令放逸者로 慚愧하여 以同事攝이니
故自乞食이니라
瓔珞女經에 說하되 化身은 如全段金剛하여
無生熟藏이라하다
今所乞者는 利益他故니라 故로 淨名이 云하되
爲不食故로 應受彼食이라하다
六은
化等이니 於中에 有五이니
一은 由內證平等理하여 外不見貧富相이요
 二는 心離貪慢하여 慈無偏利요
三은 表威德이 不懼惡象沽酒婬女等家요
四는 息凡夫의 猜嫌이요
五는 破二乘의 分別이니라
七은
 化終이라 然이나
已字는 義屬下句이나 文連上句요
飯食字는 義屬上句이나
文連下句이니 若廣其文하여
令當句中備者하면 應云次第乞하시고
乞已에 還至本處하시어 飯食하시고
飯食訖에 收衣鉢하리니
佛若不食이면 他福이 不滿이니라
寶雲經에 說하되 隨所乞得하여
分爲四分하여 一은 擬與同梵行하시고
二는 擬施貧病乞人하시고
三은 水陸衆生이요
四는 自食하시다하다
十二頭陀經에는 唯說三分하고 除梵行하니라
二는 定이라

규봉:
일곱
마디(節)로 나누어 (戒에 대해) 해석하리니,
一.
化主 (교화의 주인)이니 成實論에 말씀하되
 “부처님은 아홉 가지 [세존이 제十구족에
해당(완전한)되므로 具上九號라 하며
그 아홉은 如來, 應供, 正徧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이며,
十은 불세존]를 갖추었으므로 공경하고
존중함을 받을 수 있게 되므로 世尊이라 하나니
天上과 人間이 함께 존중하기 때문이라”하였다.
二.
化時이니 식사 할 辰시이니
당일 아침으로 구걸함에 얻기 쉬워서
자타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밥을 얻고 나서 돌아오면
巳時에 해당하니 항상 여법한 공양이 되는 것이다.
三.
化儀로 가사(僧伽梨)를 수하시고 四天王이
헌공한 발우를 가지심이다.
四.
化處이니 기원정사는 성의 동남쪽 五~六리에 있으니
밖에 있다가 안으로 가는 것을 入이라 하고, 장소가 넓고
사람이 많으므로 大라 한다.
五.
化事이니 부처님이 두타공덕을 나타내고자
게으른 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해서 함께
거두게 하기 위하시어 스스로 걸식하시었다.
영락여경(瓔珞女經)에서 말씀하시기를
“화신(부처님)은 한 덩어리의 금강과 같아서
소화기관(生熟藏)이 없다
(잡수시는 것에 탐착함이 없다는 뜻)” 하셨다.
지금 밥을 비시는 것은
남에게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시라,
그러므로 유마힐(淨名)이 이르되
“먹지 않음이 되므로(탐식이 아님)
마땅히 음식을 받는다” 하였다.
六.
化等으로 그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안으로 평등한 이치를 증득하여서
밖으로 빈부의 모습을 보지 않고
둘째,
마음에 교만과 탐하는 것(貪慢)을 여의었기에
자비가 치우침이 없으며
셋째,
부처님의 위덕을 나타내어 惡象(성난 코끼리:무서운 것),
沽酒(술 파는 집:파계), 婬女(음탕한 여자:유혹)등의
집을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넷째,
범부의 시기하여 싫어하는 것을 그치게 함이요
다섯째,
소승(二乘)의 분별심(我에 집착)을 깨뜨림이다.
七.
化終이니 그러나 그칠 이(已)자는 뜻은 下句(가벼운)에
속했으나 글은 앞 글귀(上句)에 이어 해당(連)하고
공양하는 飯食자는 뜻은 앞 글귀 (上句:깊은 뜻)에
속했으나 글은 下句에 이어지니
만약 그 글을 넓혀 마땅히 글귀 가운데에 갖추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땅히 “차례로 비시고
빌고 나서 본처에 돌아오시어 공양을 드시고
공양이 끝나시매 의발을 거두셨다”할 것이다.
부처님이 만일 잡숫지 않으시면 시주한 사람의
복이 만족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寶雲經에 이르되
“얻은 것을 따라 따로 넷으로 나누어
하나는
같이 수행하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고,
두 번째는
가난하고 병든 걸인에게 베푸시고,
세 번째는
 물과 뭍의 중생에게 주시고,
나머지는
자신이 잡수셨다”고 했다.

(十二頭陀經엔
오직 세 가지만 설하고 梵行은 제외하였다)
② 둘째는 定이다(발기서 가운데 두 번째)
---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고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어 마치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淸峯:
공양을 드시고, 발우를 씻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시고, 가만히 앉아(양구) 계심이,
참으로 희유하고, 참으로 희유하시도다.

說誼:
入城乞食은 法身不癡이니 以般若로 開示也요
收衣洗足은 般若無着이니 以解脫로 開示也요
敷座而坐는 解脫寂滅한 以法身으로 開示也니라
方談般若를 以此開示者는 般若之所以爲般若也를
指其本體則名爲法身이요 指其大用則名爲解脫하며
指其當體則名爲般若니라 何則하면 直般若는
非般若이고 般若는
具法身解脫이며 直解脫은 非解脫이니
解脫은 具法身般若이니
直法身은 非法身이라 法身이 具解脫般若니
擧一면 卽具三이요
言三은 體卽一이니라
方談般若에 以此開示者가 不其然乎인가

설의:
성에 들어가 밥을 비는 것은
法身이 어리석지 않은 것이니
반야로써 열어 보임이요,
옷을 거두고 발을 씻으심은
반야가 집착함이 없음이니
해탈로써 열어 보임이로다.
자리를 펴고 앉으심은
해탈로 적멸한 법신을 열어 보이시는 것이니라.
바야흐로 반야를 이르시려 할 때 이것으로써
열어 보이신 것은 반야가 반야된 까닭으로
그 본체를 가리키니 이름이 법신이요,
큰 작용을 가리켜 해탈이라 하며,
당체를 가리켜 반야라 이름하느니라.
왜냐하면
바로 지혜만의 반야는 般若(참)가 아니고
반야는 법신과 해탈을 갖춰야 하며,
바로 해탈만은 解脫(참)이 아니니
해탈은 법신과 반야를 갖춰야 하고,
바로 법신만은 법신이 아니라
해탈과 반야를 갖춰야 하는 것이니,
하나를 들면 곧 셋을 갖춤이고
셋을 말하나 體는 곧 하나이니라.
바야흐로 반야를 말씀하시려 할 때
이것으로써 열어 보이신 것이니
그것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청봉착어:
체는 정이요 혜는 용이라,
정혜를 갖춤을 요달하면 곧 해탈이니
정과 혜와 해탈은 곧 둘 아님이요,
체와 용이 곧 열반을 이루니라.
그러하므로
공양을 드시고,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심(良久)이 희유 하심이니라.
---

圭峰:
分三節釋하면

一은
屛資緣이니 將欲入定이면 須息攀緣이니라
衣鉢을 不收하면 心有勞慮이니 故佛示現하시어
爲後軌也이니 卽收大衣하시고着七條니라
二는
淨身業이니 阿含經에 說하되
佛行에 離地四指하여 蓮花承足이라하나
今示現洗者는順世表法하여 爲後軌也니라
三은
正入定이니 敷座坐禪者는
由身端故로 心離沈掉故니라 魏譯에 云하되
如常敷座하여 結跏趺坐하고 端身而住하여
正念不動이라하며
唐譯에는 云하되 端身正願하여 住對面念이라하다
無着이 云하되
顯示唯寂靜者어야 於法은 能覺能說故라하시나
然이나 大聖現迹은 必有所表시니
表本覺之佛이 在五蘊之都하여
覺魔軍本空을 名爲戰勝이요
照心識具德이 卽是給孤요
求法養神을 名乞士衆이니라
覺心을 旣發이니 寧棄塵勞하랴
將欲徧觀하되 遂入識藏하여
心心數法을 次第思惟하면
卽妄而眞이니 皆得法喜라니
法喜無體하여 融合覺心이로다
思惟는 假緣이니 忘緣하여야
可符眞性하고 觀照는 是迹를
拂迹하여야 返本還源이니라
返本還源하면 法空心寂이니
空寂眞體에 般若朗然이라
欲談般若正宗하시어 如是示現發起시니라
資聖䟽에 云하되
夫身有二하니
一은 僞요
二는 眞이라 五陰僞軀는 假衣食以生育이나
法身은 無相하여 因般若以照成하니 群生은
保僞遺眞이며 諸佛은 養眞棄僞라하다
群生은 旣迷眞而取僞하면
佛乃假僞迹而引眞이로다
故託乞食之緣하여 將施法喜之化니라
故로 涅槃經에 云하되
汝諸比丘는 雖行乞食이나
初未曾乞大乘法食이라하시니라
上釋序分은 竟하다
二는 正宗分을
二門分別하니
初에 且約無着의 七種義句하여
以懸判이요
後는 正用天親이 答問斷疑하여 以科釋이니라
初中에 七義句者는
一은
種姓不斷이니 謂護念付囑이고
 二는
發起行相이니 謂申請讚許이며
三은
行所住處니
謂十八住이니라
從佛正說로 直至經終히 是無相行의 所住處矣며
四는
對治니 謂一一住處에 皆具邪行과
共見正行의 二種對治이고
五는
不失中道니 謂由對治로 離增減二邊하여
不失中道이며
六은
地位니 謂由不失中道로
成賢聖位의 信行地와
淨心地의 如來地며
七은
立名이니 謂由前六에 智慧堅利하고
位地闊狹이니 故名金剛이니라
後四는 但約第三句中十八住說고 無別經文이니라

十八住處者는
1 은 發心住이니 經에 云하되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等이고
2 는 波羅蜜相應行住니 不住色布施等이고
3 은 欲得色身住이니 可以身相見等며
4 는 欲得法身住로

法身은  有二하니
 一은
言說法身이니 頗有衆生等이니 因言顯理故요
二는
證得法身이니 復有二種이니
    一은 智相이니 如來 得阿耨耶等이요
    二는 福相이니 若人이 滿三千等이니라

5 는 於修道得勝中無慢住인 須陀洹等이니
從此로 至十六住에
如次對治十二種障이니 意明欲求色身法身이면
須離是障이니라
障盡故로 入十七證道이니 今當對治第一慢障하고
6 은 不離佛出時住니 昔在然燈等이며 離第二少聞障이니
不離佛世하면 則具多聞이며
7 은 願淨佛土住이니
菩薩이 莊嚴佛土不等이니 離小攀緣作念脩道障이니
 緣形相土則小요 無緣則大이니 契法界故이며
8 은 成熟衆生住이니 人身이 如須彌等이니
離捨衆生障이니 若見大小하면 不能濟物이며
9 는 遠離隨順外論散亂住이니
 如恒河中所有沙等으로 離樂隨順外論散亂障이니
恒沙寶施도 不及持經이거늘 如何外學하여
不脩正法인가 이요
10 은 色及衆生身搏取中에 觀破相應行住이니
 三千世界所有微塵等이라 離破影像相中無巧便障이니
 旣離散亂하여 與定相應하면 以細末不念二種方便으로
 破麤至細하고 泯細至空則除影像之相想이라
11 은 供養給侍如來住이니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等으로
離福資粮不具障이니 不以相見하고
常見法身을 名爲給侍이니 福無邊矣이며
12 는 遠離利養과 及疲乏熱惱故로
 不起精進과 及退失住이니 恒沙身命布施等이니
 離樂味懈怠利養障이니 恒沙命施도 猶劣受持거늘
豈爲一身하는 耽着利養하여 身疲心惱而懈怠耶이고
13  은 忍苦住이니 忍波羅蜜의 割截身等으로
離不能忍苦障이니 無我等相이면 累苦能忍이고
14 는 離寂靜味住이니
當來之世에 若有能於此經을 受持讀誦等으로
離智資粮不具障이니 日三時捨身을 一一沙數라도
不及信經이거늘 如何唯專禪定하여 耽寂靜味하고
 闕於智慧하여 而不持說이며
15  는 於證道時에 遠離喜動住니 云何住降伏等이라
離十一不自攝障이니 我能住降하면 心生喜動이니
動則不能自攝이고
16  은 求佛敎授住이니 於然燈佛所에서
有法得菩提等이라 離十二無敎授障이니 欲入初地면
須佛敎授이니 故約遇佛하여 得無所得而證道矣이고
17  은 證道住이니
人身長大等이라 攝種性智로 證徧行如하며
成法報身이니 故로 長大矣라하며
18  은 上求佛地住이니
於中에 復有六種具足하니 一은 國土淨具足이니
我當莊嚴佛土等이라

此는
敎二地已上諸大菩薩이라
二는
無上見智淨具足이니
有肉眼不等이라
此下는 皆唯佛果이니 故云無上이니 無上之言이
貫通下四이며
三은 福自在具足이니
若人이 滿三千界七寶等이며
四는 身具足이니 佛을 可以具足色身等이고
五는 語具足이니
汝勿謂如來說法等이요
六은 心具足이니 佛得阿耨菩提인가
爲無所得耶에서 乃至應作如是觀이니라

又十八住를 略爲八種하여도
亦得滿足하리니
 
一은 攝住處요
二는 波羅蜜淨住處이니 一 二는 次配하고
三은 欲住處로 攝三及四요
四는 離障礙住處이니 卽前十二障也이며 從五乃至十六이고
五는 淨心住處요
六은 究竟住處이니 上二는 次配十七十八이고
七은 廣大住處요
八은 甚深住處이니 上二는 各皆攝十八住處이니
       一一住中에 皆深皆廣이니라

十八住文을 配位地者하면

第一은 十住요
第二는 十行中前六이요
三은 第七行이요
四는 後三行이요 五至十四는
  如此配十廻向하고 十五는 煖頂이요
 十六은 忍世第一이요 十七은 初地요
 十八은 從二地에서 乃至佛地니라 上來懸判을 竟하다

규봉:
세 마디(三節)로 나누어 해석하면
一.
돕는(② 定을) 인연을 막음(屛資緣)이니
장차 정에 들고자 하면
모름지기 반연을 쉬어야 한다.
의발을 거두지 않으면
마음에 번거로움이 있으므로
부처님이 나타내 보이셔서
후세에 규칙을 삼게 하시고자
곧 큰 옷을 거두시고
七조가사(평상복)를 수하신 것이다.
二.
몸으로 짓는 온갖 죄업(身業)을 깨끗이 함이니,
아함경에 이르시되 “부처님이 행하시면
네 곳을 여의지 않고 (항상 주위 모두)
연꽃이 발을 받든다”하였으나
이제 발을 씻으심은
세간의 모든 모습을 따라서 후세의 규칙을
삼게 하신 것이다.
三.
바른 정에 들어감이니
자리를 펴고 좌선하는 것은 몸이 단정함으로써
마음이 혼침과 산란함을 여의는 까닭이다
魏나라 번역에는
평소와 같이 자리를 펴고 가부좌하여
몸을 단정히 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였으며
唐譯에는
몸을 단정히 하고 원(願)을 바르게 하여
생각을 한 곳으로 머물게 했다고 하였다.
無着이 이르되
“오직 적정을 드러내어야만 법을 능히 깨닫고
능히 설할 수 있는 때문이라” 하시나,
그러나 大聖人(부처님)의 자취를 나타내어
보이신 바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本覺을 보이시니
오온의 마을에 있어서 마군이
본래 없음을 깨닫는 것을 戰勝이라 하고,
의식을 비추어 덕(慧)을 갖추는 것이
곧 외로운 이(定)를 돕는 것이요,
法을 求해서 정신을 기르는 것을
걸사중(乞士衆)이라 이름한다.
覺心(깨달은 마음)을 이미 드러내게 되니
어찌 수고로움(修行)을 버리랴.
장차 두루 觀하고자 하되
번뇌로 가린 眞如(여래공)에 들어서
마음과 마음의 여러 가지 것(心數法)을
차례로 사유하면 妄이 곧 眞이니
모두가 법의 기쁨(法喜)을 얻게되는 것이다.
法喜는 體가 없어서
깨달은 마음에 융합(契合)하게 되는 것이다.
思惟는 인연을 빌림이니 인연을 잊어야
가히 참 성품에 부합(契合)하고
 [思惟로 인연을 빌린다는 것은
가사를 수 하시고 발우를 드신 것에 대한 것이요(用),
인연을 잊고 참에 부합한다는 것은 의발을 거두신
것에 대한 것이니, 걸식하는데 이미 의발을 써서
구하였고 사유하는 데는 인연을 빌려서
정에 들어가나, 이미 인연의 도움을 물리쳐 없애고
理(眞)에 계합하여 모름지기 일체의 생각을 잊게 된 것이다]

觀照는
자취를 떨어버려야
근원에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관조아래 두 구절은 발을 씻음에 대한 것이니
만일 편안히 앉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발의 때를 씻어 없애야 할 것이고
만일, 본원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마음에 생각을
털어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근본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오면
法이 空하고 마음도 고요하니,
[근본을 돌이켜 아래 두 구절은 자리를
펴고 앉음에 대한 것이니
법이 공 함은 곧 자리를 편 것이요,
마음이 고요함은 곧 자리에 앉음인 것이다.
자리를 펴야 바야흐로 사람이 앉을 수 있고
법이 공 하여야 마음이 비로써 고요함을 얻는 것이다.

心寂 아래 두 구절은
정종법에 대한 것이다.
편히 앉아야 비로소 능히 경을 설하고,
마음이 고요하여야 바야흐로
묘한 지혜가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空寂한
참된 체에 반야가 밝게 되는 것이다.
반야의 바른 종지를 말씀하시고자
이와 같이 일으켜 드러내신 것이다.

資聖疏에 이르되
“무릇 몸은 두 가지가 있으니
,
하나는
거짓(僞)이요,
둘은
참(眞)이라.
오온의 거짓 몸은 衣食으로써 生育되거니와
法身은 相이 없어서 반야로써 비춤(나툼)을 이루니
모든 중생은 거짓에만 집착하고 참을 잃어버리며
모든 부처님은 참을 기르고 거짓을 버리는 것이다”했다.
중생은 이미 참에 어두워 졌고 거짓을 취하며
부처님은 거짓의 자취를 빌려서
참을 이끌어 오는 것이니,
그러므로 걸식의 인연에 의하여
法喜의 교화를 베풀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되
“너희 비구들은 비록 걸식을 행하나
일찍이 大乘의 法食은 구걸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이상 해석으로 序分(법회 연유분)은 마친 것이다.

둘은
正宗分을 二門으로 분별하니
 (1)
처음에 무착의 七種義句를 잡아서 미리
科判(종목을 나눠 판단)해 봄이고
 (2)
나중은 참으로 天親이 물음에 답하여
의심을 끊는 것으로써 과목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七義句는
①은 성품의 씨(種性)가 끊어지지 않음(種性不斷)이니
 호념하고 부촉함을 말한 것이고
②는 처음 들어 심식의 성능을 살펴(發起行相)
수보리의 물음에 기꺼이 답하신 것이고
③은 行이 住한 곳(行所住處)이니
十八住를 말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정종분으로부터 경을 마칠 때까지
이 無相行이 住한 곳이며
④는 對治니 낱낱이 주 하는 곳마다
모든 삿된 행과 바른 행(正行)을
함께 보는 두 종류의 대치
(상대적으로 견주어 다스림)를 갖춘 것이고

[삿된 행은
곧 바르지 않는 행이니 불도에 어긋나는 것은
삿된 행이라 하며
共이라는
것은 하나가 아님을 뜻하며
見(소견)이란
것은 분별하는 생각이니 이러한것을
정행이라 하는 것은 곧 잡된 소견이니
순수한 바른 행이 아니다.
2종대치란 것은
정행으로써 사행을 다스리는 것이
1대치요
무분별 智로써 분별소견을 다스림이
2대치이다.
그러나
邪는 곧 모두 다스리거니와
함께 하는 가운데에는 곧 다만
見만 다스리고 정행을 다스리지 않으니
마치 모래를 헤쳐 금을 가리는데
모래만 버리고 금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⑤는
中道를 잃지 않음이니 對治함으로 말미암아
 增滅의 二邊을 여의고 中道를 잃지 않는 것이며
⑥은
地位이니 中道를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賢聖位의 信行地와 淨心地의 如來地를 성취한 것이며
⑦은
立名이니 전육식에 지혜가 견고하고 날카로우며
지위가 넓고 좁기 때문에
금강이라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謂由아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니 三種法上
 ①
편계소집성으로 나와
일체법이 실체가 있다는 망념에 집착함
 ②
의타기성으로 타의 인연으로 갖가지가 생긴다는 것
 ③
원만실성으로 법성진여등의 일체유위법의 체성을
금강의 이름으로 세운 것을 거두어 이르니
      ①은 반야의 체와 용을 들어 금강이라 일렀으니
         이것은 금강의 예리함을 이른 것이고
      ②는 지위의 넓고 좁은 것을 들어 금강이라 일렀으니,
이것은 금강봉의 형상과 같은 신행(불법 아닌 외도를 믿는 것)은 일아승지겁(一僧祗)이고 깨끗한 마음은
다만 한순간이나, 불지는 무량지겁(二僧祗)이 거듭되니
금강저가 처음과 끝은 넓고 중간은 좁은 것과 같음이다.
      ③은 문자를 들어 금강이라 하니 이것은 그림의
영상(畵像)과 같다.
信行地를 말하는 것은 七紙餘經이요
불지(佛地)는 3지여문이요,
깨끗한 마음 땅(淨心地)은 五行經인 것이 저 화상과 같으니,
또한 처음과 뒤는 넓고 중간은 좁은 까닭인 것이다]

나중의 ④는
다만 三句 가운데 十八住로 분별해서 설한 것이고
별다른 경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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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爾時者는 當此之時요
食時者는 是今辰時이니
齋時欲至也이고
着衣持鉢者는 爲顯敎示迹故也니라
入者는 自城外而入也요
舍衛大城者는 名舍衛國豊德城也이니
卽波斯匿王의 所居之城이니 故言舍衛大城也니라
言乞食者는 表如來가 能下心於一切衆生也니라
次第者는 不擇貧富하고 平等以化也니라
乞已者는 如多乞에 不過七家하고 七家數滿하면
更不至餘家也니라
還至本處者는 佛意는 制諸比丘하시어 除請召外에는
不得輒向白衣舍故로 云爾니라
洗足者는 如來示現으로
順同凡夫이니 故言洗足이니라
又大乘法은 不獨以洗手足爲淨이니
蓋言洗手足으로 不若淨心이니
一念心淨하면 卽罪垢悉除矣니라
如來가 欲說法時에 常儀敷施檀座하니
故言敷座而坐也니라

육조:
爾時는 그때를 말함이며
食時는 지금의 辰時(오전7시~9시)이니
         齋時(사시 9시~11시 공양 때)에
          이르고자 한 것이고
着衣持鉢은
가르침을 나타내어
자취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니라.
入이란
성밖으로부터 들어간 것이요
舍衛大城이란
사위국의 크게 풍성한 성(城)임을 이름한 것이니
곧 파사익왕이 사는 성으로
그러므로 사위대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께서 능히
일체중생에게 下心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次第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교화하신 것이니
乞已는
언제나 밥을 빌으실 때 일곱 집을 넘지 않고
일곱 집의 수가 차면 다시 다른 집에 이르지 않으셨다.
還至本處란
부처님의 뜻은 모든 비구를 제어하시어
속인들이 초청하지 않을 때에는
수시로 속인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시고자 하므로 이른 것이다.
洗足이란
여래가 보이심으로써 범부들이
이같이 따라서 하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므로 세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大乘法으로는
손발을 씻는 것만으로
깨끗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대개 손발을 씻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함과 같지 못하니
한 생각 마음이 깨끗하면
곧 죄와 허물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여래가 설법하고자 하실 때에는
항상 위의를 갖춰 자리를 펴고
檀에 앉으시므로
敷座而坐라 말하는 것이다.
---

傅大士:
法身은 本非食이요
應化도 亦如然이나
爲長人天益하여
慈悲作福田이로다
收衣는 息勞慮요
洗足은 離塵緣이니
欲說三空理하여서
跏趺示入禪이로다

부대사:
法身은 본래 먹지 아니하며
응신, 화신도 또한 그러하나
길이 人天의 이익을 위해서
자비로써 복전을 지어 자비를 베푸셨도다.
가사를 거두심은 번거로운 생각을 쉼이며
洗足은 번뇌의 인연을 여읜 것이니
三空의 이치를 설하시고자
가부좌하시고 禪에 드심을 보이셨도다.
---

冶父:
惺惺著라

說誼:
惺之一字를 或以爲了慧이며 或以爲寂靜이라하니
則惺惺者는 定慧圓明하여 寂照不二之謂也니라
 只如定慧圓明하여 寂照不二를 作麽生道인가
 眼掛長空하고 手握靈鋒이로다

야부:
성성이라

설의:
惺이란 한자는 了慧(밝게 깨달음)라 하며
혹은 寂靜이라 하니
곧 惺惺이란
定과 慧가 뚜렷하게 밝아
寂(체)과 照(용)가 둘 아닌 것이니라.
다만 定慧가 뚜렷이 밝아서
적과 조가 둘이 아님을 어떻게 이를 것인가?
눈은 끝없는 허공에 걸어두고(定)
손에는 신령스런 칼을 잡았음(慧)이로다.
---

청봉착어:
법신불은 먹지 않으며
응신, 화신도 근본으로 쫓아 살피면
먹어도 먹음이 없다.
세존이 고루 밥을 빌으심은
부한 자는 부를 잃지 않고 가난한 자는
가난을 면하게 복 밭이 되어 주신 것이다.
발우를 씻음은
번뇌를 제거함이고,
가사를 거두심은 일체를 쉬는 뜻이고
발을 씻으신 것은 망상의 때를 닦으신 것이고,
자리를 폄은 모든 것을 정(定)함으로 수습하고,
일체가 공함을 보이시고자 양구하시어 정에 드셨도다.
아상이 있다면 밥을 빌지 않으셨을 것이다.
---

冶父:
飯食訖兮洗足已하시고 敷座坐來誰共委인가
向下文長을 知不知인가 看看平地波濤起니라

說誼:
入城乞食과 收衣洗足과 敷座宴坐는
 一一皆是徹困爲人底時節이니라
入城乞食과 收衣洗足은
且置하고 只如敷座宴坐를 作麽生道인가 高提祖令
未免一場忄麽忄羅니 根機莫等으로
要以多方으로 接得이니라
獲鳥者는 羅之一目이나 不可以一目으로 爲羅요
治國者가 功在一人이나 不可以一人으로 爲國이니라
所以로 黃面老子가 曲爲中下하시어 乃下一步하며
向言說海하시어 橫身而入하여 東說西說하시고
橫說竪說하시니라 所以로 道하되 高提祖令當機用하니
利物應知語帶悲라하니라 向下文長이 正以此也니라
然이나 慈尊의 伊麽施說이 要之利害가 不細하니
還知得利害也未인가 入城乞食收衣宴坐로
以至東說西說橫說竪說에 善權方便은 卽不無이나
據實而觀하면 人人分上이 如靑天白日相似하여
本來無爲無事하여 盡大地가 都盧是淸平世界거늘
黃面老子가 向淸平世界上하여 施設戈甲하시니
可謂無事中起事니라 所以로 道하되
看看平地波濤起라하니라
又古人이 道하되 澄澄性海하여 湛湛智源이여
文字言詞가 從玆流出이라하니 則黃面老子가
向大寂滅海하여 繁興言說波灡하시니
要之言說波灡이
初非外來라 終不離於大寂滅海니
敷座處에서 如未薦得하면
向言說海하여 薦取하여야 始得이니라 所以로
道하되 看看平地波濤起라하니라

야부:
공양하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 펴고 앉으시어 누구와 함께 하시려나.
아래의 긴 문장을 아는가? 모르는가?
보고 보아라.
평지에서 파도를 일으켰음이니라.

설의:
入城乞食과 收衣洗足과 敷座宴坐 하심은
낱낱 모든[증득하지 못한(가난한)]
사람을 위한 소식이니라.
입성걸식과 수의세족은 그만두고
저 부좌연좌를 어떻게 이를 것인가.
시조(석가세존)의 가르침(법령)을
높이 들어 차거운 빛을 들어내니
바로 비야리 성에서 입을 벽에 건 것과 같도다
.[유마 거사가 비야리성에서 黙言으로써
불이 법문을 설함과 같은 뜻]

이 안에서 상상근기를 제외하고는
한바탕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근기가 같지 않으므로 반드시 여러 가지
방편으로써 제접한 것이니라.

새를 잡는 것은 그물의 한 눈금으로 족하나
그물의 한 눈금으로는 그물이 되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그 功은 한 사람에게 있으나
한 사람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黃面老子(석가모니불)가 간절히 중하근기를
위해서, 한 걸음 내려(차원 낮추어) 언설의
바다에 몸을 던지시어 동설서설하시고
횡설수설하시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씀하기를
시조의 바른 법을 높이 들어
근기에 따라 쓰심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말씀이 자비임을 마땅히 알라 하니라.
아래의 문장이 바로 이것이니라.
그러나
자비로운 부처님의 이러한 설하심이
요컨대 이득과 해가 적지 않으니
도리어 利가 되고 害가 됨을 알겠는가?
성에 들어가 걸식하고 옷을 거두고 자리에 앉으심
(좌선:定)으로부터 동설 서설과 횡설수설에
이르기까지 좋은 방편은 곧 없지 않으나
그 실상을 살펴 보건대,
사람사람이 그대로 靑天白日과 같아서
본래 함이 없고 일도 없어서
바탕이 모두 그대로 맑고 평등한 세계(佛國土)거늘
황면노자가 청평세계를 向하여
괜히 창과 갑옷을 만들어 놨으니
가히 일없는 가운데 일을 만들었다 할 만 하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하기를 ‘보고 보아라.
평지에서 파도를 일으켰음이라’하니라.
 또 古人이 말하되 ‘맑고 맑은 성품의 바다는
깊고 깊은 지혜의 근원이여!
문자와 언사가 다 여기로부터 흘러 나왔다’하나니
곧 황면노자가 大寂滅의 바다를 향해서 언설의 작고
큰 파도를 일으켰으니 要는 언설의 파도가 처음부터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마침내 대적멸의 바다를
여의지 않았으니 자리를 펴고 앉은 그곳에서
만약 깨달아 얻지 못하면, 언설의 바다를
향하여서 건져 올려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쳐
얻을 것이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씀하시기를
평지에서 파도가 일어났음을
보고 보아라’한 것이니라.
---

청봉착어:
공양하고, 발우를 닦고, 발을 씻고, 자리 펴고 앉음은
번뇌망상의 때를 씻고 일체 경계를 떠나 성성한
경계에 드셨음이니,
앉음과 움직임이 서로 여의지 않았음도
밝게 알아야 한다.
---

宗鏡:
調御師가 親臨舍衛하시니
威動乾坤이고 阿羅漢이 雲集祇園하니
輝騰日月이로다 入城持鉢은 良由悲愍貧窮이요
洗足收衣는 正是宴安時節이니라
若向世尊의 未擧已前을
薦得이라도 由且不堪이니 開口已後에 承當하면
自救도 不了하리라
宗鏡이 急爲提撕하여도 早遲八刻이니라
何故하면 良馬는 已隨鞭影去거늘 阿難이
依舊世尊前이로다
乞食歸來會給孤하여 收衣敷座正安居는
眞慈弘範으로超三界하여 調御人天得自如하니라.

종경:
조어사(부처님 10대 명호 가운데 하나)께서
친히 사위국에 나시니
그 위의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고,
아라한들이 기원정사에 구름처럼 모이니
그 빛이 해와 달처럼 빛나도다.
발우를 가지시고 성에 들어가심은
진실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이요,
발씻고 옷을 거두심은 바로 편안함(定) 때문이니다.
만약 세존의 꽃을 들기(拈華微笑) 이전을 향해서
알아들었다 해도 또한 감당하지 못할진대
입을 연 뒤에 알아차린다면 자기도
구해 마치지 못할 것이다.
종경이 급하게 들어 일깨워준다 해도
벌써 八刻(二시간)이 늦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말은 이미 채찍 그림자를 봐도 달리거니와
아난이 옛날 세존 앞에
있음(양구하신 도리를 몰랐을 때)이다.
걸식하고 돌아와 급고독원에 모여서 옷을 거두고
자리를 펴고 편안히 앉으신 것은 참다운 자비와
큰 모범으로 삼계를 뛰어넘어 人天을 길들여
스스로 如如함을 성취하게 하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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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임제의 할도 2구요 덕산방도 2구라
양구라면 또한 2구가 아니련가?
외도가 세존의 양구 하심을 보고 깨우쳤어도
다문 제일 아난은 채찍을 맞고도 뛰어나지 못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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