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예술(음악과 미술)

베토벤의 생애와 업적

작성자바람의아들|작성시간10.03.16|조회수716 목록 댓글 0

베토벤의 생애와 업적

 

[베토벤](L. van Beethoven : 1770~1827)은 독일 본에서 궁정가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는 한변 오르가니스트, 하프시코드 주자로서 약간의 수입으로 어려운 가계를 돕고 있었다.

17세 때 빈으로 건너가 모차르트에게 한 때 사사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792년 22세 때에 다시 빈에 건너가 [하이든]에게서 작곡을 연구하는 한편 피아니스트로서도 활약하였다.

 

그는 공직에 있던 일이 없었고 친구들의 도움과 작품의 수입으로 생활하여 독립된 음악가로서 모두를 음악에만 바쳤다. 또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조카의 양육까지 부담하는 등 여러가지 일에 정신적으로 시달려, 마침내 청각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운명에 쫓기면서 1827년 57세의 생애를 마쳤다.

 

베토벤은 음악을 체험고백적인 예술로 나타내어 개성이 뚜렷하고 강렬한 표현을 감행함으로써 낭만파 음악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의 음악은 이미 귀족들의 것도 아니고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닌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 인생관과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그의 사상과 이상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고전 형식을 존중하면서 최대한으로 자기 표현을 시도한 그는 실로 [고전파 음악] 최대의 완성자임과 동시에 낭만파의 위대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작곡상의 구체적인 업적은 주제의 제시와 발전이 비할 데 없이 견고한 조형을 갖게 하였고 후년에는 도입부, 그리고 종결부의 의의와 규모를 뚜렷하게 확대시켰다.

또한 [미뉴에트] 대신에 [스케르초]를 썼고 [교향곡]의 끝악장에 [성악]을, [소나타]에 [푸가]를 각각 썼다.

 

이 밖에 [변주곡]의 수법을 발전시키고 연주회용의 종교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 불멸의 금자탑이라고 일컫는 9개의 교향곡, 피아노의 구약 성서라는 별명을 갖는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과 쌍벽을 이루고 피아노의 신약 성서라고 일컫는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그 밖에 현악 4중주곡, 기악 소나타, 오페라 "피델리오", 종교곡으로 "장엄 미사곡" 등과 그 밖에 수많은 가곡이 있다.

4. 베토벤의 마지막

소위 말하는 '3월 혁명 이전의 시대(Vormaerz : 1815 - 1848)'의 시작, 메테르니히(Metternich)의 오랜 통치의 개막, 그리고 속물적인 비인 중산층(또한 슈베르트의 비인 중산층)의 탄생과 더불어 베에토벤의 창작 생활은 그 세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은둔자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작곡 또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815년부터 1827년 사이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1792년 이후에 작곡된 그의 전 작품들 가운데 단지 한 단편만을 차지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은 그가 이전에 작곡한 어떤 작품도 훨씬 능가하는 음악적 사상의 밀도를 보여준다. 비록 그가 사회에 나서는 빈도는 훨씬 줄었으나, 그는 점점 더 사업적인 일에 관계하게 되고, 이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가 런던의 Philharmonic Society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 무렵이다. 영국과의 접촉은 그 십년 전인 1807년에 시작되었다. 그 때 에딘버그의 출판업자 조지 톰슨(George Thomson)이, 베에토벤 이전에 이그나츠 플라이옐(Ignaz Pleyel)과 레오폴드 코쩰루치(Leopold Kozeluch)가 그랬던 것처럼 스코틀란드의 민속 음악에 기초한 소나타를 작곡해 달라는 제안과 함께 접근해왔다. 이로부터 성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나중에 톰슨은 민속 무곡들을 각각 서주와 코다를 붙여, 바이올린과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해 편곡하는 계약을 이끌어 내는 데 어떻게 성공했다. 이는 베에토벤에게 여러 해 동안 쉽고도 솔찮은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영국 음악 애호가들이 베에토벤에게 작품을 위촉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베에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가 런던에 정착하여 필하모니 협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1815년이 되어서였다. 또 다른 협회원인 챨스 니트(Charles Neate)가 비인의 베에토벤을 방문하였으며, 나중에 협회가 연주를 맡고 Birchall 출판사가 출판을 맡을 세곡의 새로운 서곡을 위촉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서곡 슈테판 왕(Koenig Stephan), 본명 축일(Namensfeier), 그리고 아테네의 폐허(Die Ruinen von Athen)는 늦게 도착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심한 불쾌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한동안 그 관계가 양측 모두에게 부자연스러웠다. 리스는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일찌기 1813년부터 계획된 런던 방문은 베에토벤이 이루어지길 계속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필하모니 협회는 베에토벤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9번 교향곡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어떤 면에서는 9번 교향곡은 필하모니 협회가 위

 

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협회의 장서고에는 작곡자 자신이 헌사를 쓴 1악장의 자필 원고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초연은 런던이 아니라 비인에서 이루어졌으며, 출판본에는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 윌리엄 3(Frederick William III)세에게 헌정된다고 인쇄되었다. 베에토벤은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 협회로부터 100 파운드를 증여받았으며, 이는 그를 깊이 감동시켰다.

 

1816년에는 베에토벤의 모든 해외 여행의 계획이 그의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알(Caspar Anton Karl)의 죽음으로 인해 가로막혔으며, 카알은 미망인 요한나(Johanna)와 아홉살 난 아들 카알(Karl)을 남겼다. 베에토벤과 미망인을 합동 후견인으로 지명한 그 유언장은 미망인이 부도덕적이라고 판단한 베에토벤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3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베에토벤이 소송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린 카알에게 아낌 없이 퍼 부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베에토벤은 이상적인 후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삼촌과 조카와의 싸움은 잦고 또한 심했으며, 1826년 대학 입학 시험을 목전에 둔 카알이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그 극에 달하였다. 그는 병원에서 회복하였으며, 베에토벤은 조카에게 군대 경력을 쌓게 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조언에 마지 못해 동의하였다. 삼촌의 곁을 한 번 떠나자, 카알은 성공적이고 준법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826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베에토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거의 확실히 베에토벤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시기의 중요한 작품들은 작품 102의 두 곡의 첼로 소나타, 작품 101의 피아노 소나타와 작품 106의 피아노 소나타로부터 시작되는데, 작품 106의 피아노 소나타는 "햄머클라비어(HammerKlavier)"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 나서 베에토벤은 이미 착수했던 9번 교향곡의 스케치로 복귀하였다. 이 작업은 루돌프(Rudolf) 대공이 올뮈츠(Olmuetz)의 대주교로 임명될 것이라는 소식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베에토벤은 그 즉위식을 위하여 대규모의 장엄미사를 작곡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요제프 2세를 위한 초기의 칸타타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목표로 하던 행사에 맞추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즉위식이 거행된 지 3년 뒤인 1823년에야 베에토벤은 새로운 대주교에게 완성된 원고를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1820년에 베에토벤은 세 곡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하였으며, 교향곡의 스케치에 대해서는 산발적으로 작업하였다. 미사에 이어서는 그의 마지막으로 중요한 피아노곡이 이어졌는데, 이는 베에토벤을 위시한 여러 작곡자들에게 디아벨리(Diabelli)가 보낸 하나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슈베르트와 루돌프 대공을 비롯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베에토벤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며,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어 완전한 33곡의 변주곡집을 쓰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다.

 

9번 교향곡이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해에 완성되어, 라 장조 미사(장엄 미사)의 일부 악장들과 작품 124의 서곡 헌당식과 함께 캐른트네르토어(Kaerntnertor) 극장에서 연주됨으로써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악보를 쫓고 있던 베에토벤은 청중의 환호를 모르고 있다가 독창자 가운데 한 명(알토를 맡은 웅거[Caroline Unger] 여사 : 역주)이 그를 청중을 향해 돌아보게 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채었다. 9번 교향곡은 대규모의 연주가들을 위한 것으로는 베에토벤이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다. 그에 대한 마지막 위촉은 1823년 니꼴라스 갈리찐(Nikolas Galitzin) 공작으로부터 왔는데, 그는 세 곡의 현악 사중주에 대해 각각 50 듀카트씩을 지불하겠다고 제의했다. 베에토벤은 이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1825년이 되어서야 세 곡 가운데 첫째 곡인 작품 127의 내림 마 장조 사중주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정된 두 곡이 아니라 네 곡이 그 뒤를 이어 작곡되었고, 거기에 작품 130의 내림 나 장조 사중주 원래의 푸가 종악장(Gross Fugue) 대신 들어간 여분의 악장 또한 뒤따라 작곡되었다. 마지막 사중주는 1826년에 작곡되었는데, 이는 카알이 자살을 기도한 시기 언저리이다. 베에토벤은 그 해 여름을 크렘스(Krems) 근방 그나익센도르프(Gneixendorf)에 있는, 생존한 동생 니콜라우스 요한의 집에서 보냈다. 비인에 돌아오자 마자 그는 폐렴에 걸렸으며, 이로부터 그의 건강은 한 번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병상에 누워 있었으며, 1827년 3월 26일 비인에서 간 경변으로 영면하였다. 삼일 뒤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이만명이 참석했다. 운구를 맡은 사람 가운데는 훔멜이 있었으며, 슈베르트는 횃불을 담당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인 프란쯔 그릴파르쩌(Franz Grillparzer)가 그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베토벤의 생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라인 강 연안의 작은 도시 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네덜란드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루이스)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은 훌륭한 베니스 음성을 가진 훈련된 음악가로서, 1733년에 본 선제후의 궁정 가수로 발탁되어 1761년에는 카펠아이스터의 직위에 오른다. 그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위대한 작곡가의 아버지인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은 자신의 아버지의 역량에 못 미치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보이 소프라노로서 1752년에 궁정 악단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계속하여 테너 가수로서 활동한다. 그는 1767년 11월에 요한 레임(Johann Leym)의 미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1746~1787)와 결혼하여 두번째 아이로 루트비히를 낳는다. 그들의 첫 아이이자 루트비히의 누님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다만 엿새 동안을 살았을 뿐이다. 모두 일곱 자매 중 두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는 1770년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 이후 다섯 아이 중 오직 둘만 살아 남았는데, 카스파르 안톤 카를(Caspar Anton Carl, 1774년 4월 8일 세례)과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1776년 8월 2일 세례)인 바, 그들은 루트비히의 생애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루트비히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천재를 드러냈다. 그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볼프강 모짜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매우 혹독한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어린 루트비히는 다락방에 갇혀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면서 건반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에 피아노를 도끼로 부숴버리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자주 하소연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1778년 3월 26일 자신의 아버지가 가르치던 제자들과 함께 조그만 연주회에서이다. 그 연주회의 광고문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서 '다양한 건반 고체르토와 트리오들'을 연주했다. 그 얼마 후에 그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판덴 에덴(van den Eeden)에게 보내져서 음악 이론의 기초와 피아노를 배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최초로 받게 되는 것은 1779년 선제후의 극장 음악감독으로 빈에 오게 된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로부터였는데, 그가 언제부터 베토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베토벤은1782년 이후 스승의 조수소로서 스승이 출타 중일 경우 그를 대신하는 연주가로서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1787년에는 스승 네페의 권유에 의해 빈에 가서 모짜르트를 방문했으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가정은 상당히 불우해졌으나, 베토벤은 많은 작품의 위촉을 받는 등,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닥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발트슈타인(Waldstein)백작의 소개로 교양있는 가문인 폰 브로이닝(von Breuing)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젊은 미망인인 브로이닝 부인은 베토벤에게 제 2의 어머니 역할을 했으며, 베토벤의 성격을 특히 잘 꿰뚫어 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는 베토벤의 교우관계까지도 어느 정도 조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2년 11월에 베토벤은 빈에 와서 정착한다. 그로부터 그는 하이든에게서 작곡을 배운다. 그러나 하이든으로부터 배우는 기간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자신의 실수들을 하이든이 간과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베토벤은 몇 달 동안 작곡가인 요한 셍크(Johann Schenk)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으나 하이든에게는 이 사실을 숨겼다. 또한 살리에리(Salieri)에게서 성악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발트슈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파아니스트로서 빈의 사교계에서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으며, 독일 각지와 프라하 등지를 방문하여 공개 연주를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1800년 4월 2일에는 빈의 궁정극장에서 그의 교향곡 제1번이 대중적 공개 연주회로 초연된다. 그의 아홉 곡의 교향곡은 모두가 귀족으로만 제한된 청중을 윈한 것이 아닌 일반 시민 모두를 우니한 공개 연주회에서 초연된다. 베토벤이 진정으로 음악을 시민 사회로 끌어들인 최초의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브룬슈빅(Brunswick)가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것도 이무렵의 일로서, 1799년 5월에 베토벤에게서 교습을 받고자 테레제(Therese)와 요제피네(Josephine)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왔다. 베노벤은 들들에게 무척 마음이 끌렸으며, 그들을 통해 동생 프란츠(Franz)와 막내 샤를로테(Charlotte), 그리고 사촌이자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었던 율리에(줄리에타) 구이치아르디(Julie [Giulietta] Guicciardi)와 사귀게 된다.

 

정확히 언제부터 베토벤의 귓병이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토벤이 자신의 귓병을 호소한 것은 빈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에게가 아니라, 고향 본에 있는 베겔러(Wegeler)에게 보낸 1801년 6월 269일자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음악로서 치명적인 귓병을 빈의 동료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으나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짐에 따라 본에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1802년 무렵에는 귀머거리를 면할 수 없을 만큼귓병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자, 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그리하여 당시의 시대 정신에 입각한 강인한 '영웅의 시대'를 시작한다. 1803년에는 <<영웅>>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하여 초연한다. 베토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위해 작곡했으나,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헌사를 찢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이 교향곡과 연관되어 전해져 온다. 이어 제 4번 교향곡이 18065년에, 제 5번 <<운명>>이 1807년에, 그리고 제 6번 <<전원>>이 1808년에 작곡된다.

 

1813년에는 교향곡 제 7번을 완성하여 초연하고, 1814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재연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등 음악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지만, 그의 경제적 생활은 항상 궁핍을 면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귓병은 더욱 악화되어 메트로놈 제작자인 멜첼(M. Maezel)이 제작해 준 보청기마저도 도움이 되지 못해서, 1818년 이후 모든 대화를 필담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곡을 계속하여 1824년에는 제 9번 <<합창>>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 열광하는 청중들의 환호를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이 계속하여 오케스트라를 향해 서있자, 알토 솔리스트가 베토벤을 청중을 향해 돌려 세웠다. 그리하여 더욱 큰 갈채가 쏟아질 때 베토벤은 말없이 고개만 숙였고, 이 모습에 많은 부인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연주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이후 베토벤의 병세는 현저하게 악화되어 폐렴까지 겹쳐지게 되자 1827년에는 유언장을 쓴다. 베토벤이 죽기 몇 주 전, 이 대작곡가를 흠모해 왔던 슈베르트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베토벤을 방문한다. 마침내 1827년 3월 26일 천둥이 요한하게 치던 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취고 번갯불에 비쳐 환해진 방안을 노려보고는 이 거인은 숨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영구 행렬 뒤에는 슈베르트의 모습도 보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