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개
김 채 원
파리의 안개, 무겁게 길 밑으로 내려드린 하늘과 지하철에서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 세느강, 어머니가 잠시 파리에 오셨을 때 밤에 어머니와 둘이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느낀 그 초라함,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바로 그 시간으로 집약되는 것 같다.
지금 돌아다보니 세 개의 노래가 떠오른다. 동경 하숙방에서 듣던 노래, “시레또 마을에 하나마수꽃이 필 때면 우리들의 일이 생각난다, 마시고 떠들며 언덕을 오르니 먼 곳에서 백야가 밝아오던 것을…”이라는 노래다.
네 장 반의 다다미방, 다다미에서 풍기던 냄새, 조그만 포터블이 돌아가며 그 속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던 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레코드 표지에 여정을 느끼게 하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동경대학에 다니며 애인은 정치적인 일로 감옥에 있다고 들었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다.
하숙방에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밖은 두꺼운 함석의 덧문이 있어 낮에도 그 문만 닫아 놓으면 깜깜했다. 아침에 그 문을 열 때마다 너무 밝은 빛이 한꺼번에 들이밀려 그 눈부심이 굉장했다. 창밖은 앞집 벽이 막혀 있었다.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면 그곳으로 나리다 양복점 앞길이 조금 보였다. 내가 세 들어 있던 집 아래층이 나리다 양복점이었다. 교포 어느 분은 내가 보낸 편지 주소를 보고 나리다 양복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누가 이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을까 싶은데 그러나 주인아저씨는 늘 혼자서 옷감을 들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숙방에 엎드려서 단편 「먼바다」와 「밤 인사」를 썼다. 분명 그랬을 것이나 하숙방에서 글을 쓰던 기억은 없고 아르바이트하러 다닐 때 연필과 노트를 꼭 가지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어느새 무엇인가 적으려고 연필과 노트를 몸의 일부처럼 가지고 있구나, 어느 날 문득 느끼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이 없다면 나를 지탱하기 힘들다고 여기며 오로지 연필에 매달렸던 것 같다.
뉴욕 어느 밤 카페에서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어떤 노래가 들려왔다. 음악이 크게 흐르지 않고 어딘가에서 그저 소음의 일부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멜로디가 가슴에 와서 쿵, 하고 부딪쳤다. 맥주를 날라 온 웨이터에게 이것이 무슨 노래인가 물었고 그 사람은 힘들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가서 그것이 쥬디 콜린스가 부르는 〈삐에로를 보내다오〉라고 알아다 주었다. 그 노래를 듣던 밤 카페의 불빛과 소음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그것이 진실이지 않니?”라고 시작되는 노래다.
또한 뉴욕의 거리를 걸으면서 어느 쇼윈도에서 토슈즈를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뉴욕을 이기는 길은 세계를 이기는 길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러나 그 중얼거림 자체가 나하고는 전혀 무관한, 너무도 엉뚱한 발상임을 또한 알아야만 했다. 나를 제물처럼 바친다 한들 ‘뉴욕을 이기는 길은 세계를 이기는 길’이라는 그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전혀 내가 아닌 아마 다른 나가 아니었을까.
파리에서 어느 연극을 갔을 때 연극 속에 나온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아코디언 반주가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놓았다. 극장 복도에서 도너츠 판을 팔고 있어서 나오다가 샀다. 그 노래를 죽으리만큼 많이 들었는데 인생의 빛깔을 바꾸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라고 했다. 후렴 부분에 가서 아코디언 반주가 나올 때, 그때마다 어김없이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 없는 숨가쁨을 느꼈다. 무엇으로인가 절정에 가 닿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안개, 안개 때문에 나무들이 공중에서 가지만 펼쳐 보이던 풍경, 무겁게 길 밑으로 내려드린 하늘과 지하철에서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 사람들의 옷자락, 미술관의 창들, 호수의 백조, 마로니에 낙엽, 세느강, 어머니가 잠시 파리에 오셨을 때 밤에 어머니와 둘이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느낀 그 초라함, 산을 무너뜨려도 상쇄될 것 같지 않던 그 초라함을 잊을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짐을 주소를 물어서 힘들게 찾아간 우체국에서 배로 부치고 오는 길에 어느 카페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바로 그 시간으로 집약되는 것 같다. 그곳에 앉아서 한참 동안 바깥 거리를 바라보았다. 수첩을 꺼내 바라다보이는 가로수를 흐린 연필로 스케치한 후 지금 이 순간의 아픔을 잊지 말자고 적었다. 그리고 꼭 다시 파리에 오자고 적었다. 외유 생활 7년이라는 세월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 순간 오직 그 모습만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책꽂이를 옮기다가 그 수첩을 발견했다. 그때의 기록이 그대로 있었다. 꼭 다시 파리에 오자고 했던 자기와의 약속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때의 ‘나’가 아직도 그곳에 앉아서 창밖을 보며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