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형태를 얻으면 선물이 된다
도 창 교
선물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 지문이다.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를 넘어 누군가를 떠올리는 찰나에 피어난 온기가 상대에게 가닿는 일이다. 그 마음이 건너가 다시 돌아오며 사람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것, 그것이 선물이 지닌 본래의 얼굴이다.
나는 매년 가을이면 청도 반시를 준비해 인연이 닿은 이들에게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고향 형님의 농사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었지만, 어느듯 스물다섯 해가 흐르며 이 일은 내 삶의 소중한 의식이 되었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의 정성을 고르고, 스스로의 욕심을 덜어내며 오직 상대만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선발대로 온 선물 상자의 반시감을 보면서 “올해는 작년보다 크기도 굵고 빛깔이 고우니 받는 분들이 더 좋아하시겠지”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명단을 적어 내려갈 때면, 보내는 손안에서조차 이미 주는 이의 충만함이 차오른다.
선물은 내가 보낸 다정함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른 이름의 환대로 되돌아오는 신비로운 생명력을 지녔다. 며칠 전, 한 작가와 마주 앉았던 커피 향 속에 그 진리가 담겨 있었는데. 행사가 끝난 후 굳이 일행을 이끌고 찻값을 계산하던 그의 수줍은 고백이 이어졌다.
“선생님, 몇 달 전에 제게 사 주셨던 커피 한 잔이 제겐 큰 응원이었어요. 사실 그때 제가 참 힘들 때였거든요. 그런데 나를 보며 환하게 인사하며 건넨 그 한잔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몰라요."
내게는 흔한 호의였으나 누군가에겐 삶의 온도를 높여준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날 건 넸던 온기 한 잔이 몇 달의 시간을 돌아 다시 내게로 흐르며, 우리는 단순한 지인을 넘어 조금 더 깊은 신뢰의 관계로 엮였다. 작은 마음들이 서로의 빈곳을 메우며 둥글게 원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체온이 밴 선물’도 있다.
초겨울이면 어김없이 영덕에서 배달되는 묵직한 김장 상자. 부모님을 일찍 여윈 내 사정을 알고는 일곱 해째 아들 대하듯 김치를 보내주시는 어르신이다. 전화를 드리면 ”젓갈이 짜서 입에 맞을지“ 노심초사하시며, 한참이나 당신의 삶을 두서없이 들려주신다.
“아이고, 내가 허리가 아파서 올해는 조금밖에 못 했어, 그래도 우리 아들 먹일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버무렸으니 맛나게 먹어야 한다.”
굽은 허리의 통증조차 잊은 채 자식들을 위해 속을 채우셨을 그 정성, 상자를 열면 배추 향보다 먼저 어머니의 품 같은 그리움이 훅 끼쳐온다. 삼 년전 할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으신 외로움을 알기에, 작년 허리 수술의 고통을 함께 견뎠기에, 그럼에도 기어이 내 몫까지 챙겨주시는 그 마음은 우리 집 식탁 위의 가장 귀한 보배가 된다.
얼마 전 고향길에서 마주한 친척 큰형수님의 손길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신문지에 몇 겹이나 귀하게 싸둔 검은콩과 팥을 차 뒷좌석에 툭 던져넣어 주시며 말없이 돌아서던 모습.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기에 그 투박함은 오히려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미안한 마음에 작은 용돈을 손에 쥐여 드리니 한사코 거절하시다 마지못해 주머니에 넣으시며 한숨 섞인 말씀을 건네신다.
“ 대롬요, 이런 거 안 줘도 된다. 내 나이가 아흔인데, 어쩌거나 건강하게 잘 사소. 또 언제 보겠노....”
멀어지는 차창 너머로 작아지는 형수님의 실루엣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그것은 고향이라는 거대한 품이 내게 건네는 마지막 안부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계절의 작별 인사처럼.
결국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상자를 뜯는 순간 쏟아져 나오는 것은 과일이나 곡식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며 보냈을 그들의 시간과 간절한 기도다. 자연이 주는 선물도 감사할 따름인데, 하물며 사람의 정성이 깃든 이 온기들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사람 냄새 나는 이 따뜻한 연결이야말로 내가 생에서 받는 가장 큰 선물이며, 그 덕분에 나의 계절은 언제나 시리지 않고, 저물어가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훈훈한 봄날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