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35)
2019년 05월 23일
第十二 尊重正敎分
<금강경>
復次須菩提야 隨說是經호대 乃至四句偈等하면 當知此處는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부차수보리 수설시경 내지사구게등 당지차처 일체세간천인아수라
皆應供養을 如佛塔廟어든
개응공양 여불탑묘
<해설> - 무각
수보리야, 이 경을 따라서 설하거나 사구게만이라도 하면 마땅히 알아라.
이 곳은 일체의 세간인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들이 다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의 탑묘(塔廟)와 같이 한 것이요.
이 경을 따라 설하거나 사구게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위타인설하면 이곳은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들, 즉 이 삼선도(三善道)에서 공양하기를 부처의 탑묘와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삼선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먹는 것과 종족을 이어가는데 온통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게 축생계라든가 아귀, 아수라, 그리고 지옥은 고통을 초초로 받으니까 거기서 벗어나기에 급급하겠지요,
우리가 지옥의 비유를 들면, 칼산지옥에는 칼산이 있는데 중생을 위에서 아래로 굴려 내려보낸다고 합니다. 풀이나 나무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스치기만 해도 베어지고 없어지니 그 고통이 아래까지 내려가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없어지고, 그러면 또다시 살려서 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보내면서 그 고통을 다시 맛보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수많은 중생을 먹어서 지금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생선, 돼지, 닭 등 온갖 것을 먹고 이루어졌는데, 이 한 몸이 이렇게 하나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이 몸과 마음속에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또 흩어집니다.
그러니 자기도 알고 보면 소, 돼지, 말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 업식 그대로니까.
이 말을 어떻게 해야 실감나게 받아들여지냐면, 체험하고 깨달아야 실감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 아니게 저절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연기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연기법이 뭐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으로, 그러니 저것이 곧 나입니다. 이것이 곧 나라면! 이것과 저것은 인연으로써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것 따로 저것 따로 분별해 버리니까 연결점을 못 잡는 겁니다.
서로 간에 연결점을 잡아야 하는데 연결점이 없습니다.
즉 이것이 따로 있고 저것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할 때. 밖으로 모든 존재가 곧 나 아님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나’ 아님이 없다는 것이 도인들의 말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는 건데, 이걸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치로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체험해서 알면, 아! 그렇구나. 참으로 그렇구나! 진짜 실감 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법문을 들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서 아는 것과, 실감나게 손바닥에서 구슬 보듯이 아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실감나게 아는 것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이라는 육도구류중생이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같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경계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지없이 둘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계를 대적할 때 무엇으로 대적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법문에 의지해서 그 경계를 대적하는 겁니다.
여태까지는 자기가 아는 알음알이(業識)로 대적했습니다. 나와 너를 따로 보아 여지없이 분별해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게 오래된 두터운 업식 때문인데, 우리는 부처님 법문과 성인들의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지만 실감은 안납니다.
그렇지만 맞는 것 같다고 믿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경계를 대적할 때 그 법문에 의지해서 경계를 대적해야 공부하는 사람이고 수행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하러 여기서 공부하겠습니까?
그래야만 생사를 뛰어넘고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할 수 있고,
그분들(성인들)은 그렇게 해결을 했습니다.
내가 이번에 조계사에서 대불련(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100명에게 수계를 내리는데 전개사로서 갔습니다. 젊은이들이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나도 신심이 났는데, 사실 젊은이들이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고맙다고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거기서 법문을 잠깐 해야 되니까 법문할 내용을 써서 줬지요. 우리 입문반 “선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라는 내용 중에 일체 중생이 자유와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으로, 자유가 불교에서는 해탈(解脫) 즉 완전한 자유이고 또 완전한 행복(涅槃:니르바나)으로 불교는 이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른게 아닙니다. 이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해 내고 이것을 이루어 낸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실현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루어 냈으며 검증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가치는 우리 사람들만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육도 구류 중생이 모두 바라는 가치입니다.
자유(해탈)과 행복(열반), 완전한 관계, 완전한 사랑, 완전한 삶을 여러분은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만을 위한 가치는 아니고 일체중생들이 바라는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보편타당한 진리인 것입니다.
즉 일체 모든 존재가 바라는 가치를 실현해내는 공부가 불교라는 것,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관문이 뭐냐? 불교에 귀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귀의 하는 것>를 하고,
다음에 오계(五戒)를 지키면 그 길에 빠르게 들어갈 수 있다고 그 젊은이들에게 말 해 주고 싶은 겁니다.
이 불교가 특별한 면에 국한된 종교가 아니고 이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는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배척할래야 배척할 수도 없는 겁니다.
왜냐! 불교는 누구나(일체 중생) 바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그런 가르침을 불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종교라는 겁니다. 불교를 배우려면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해야 하고 다음에 기본적인 오계를 받게 되면 그것으로써 이미 불교 공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얻을 것이냐? 열반과 해탈을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영광이나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불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법을 당당하게 전해줘야 합니다.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얻지 못하고 완전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완전한 관계, 완전한 삶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불교를 공부하라고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다른 종교와 맞서거나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알면 당당하게 법을 전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하는게 아니잖아요, 일체중생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늘 사람보다 더 당당하지요. 착하기는 하늘 사람이 더 착하겠지만, 하늘 사람보다 더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기에 하늘 사람들이 이 땅에 법을 배우려고 오는 겁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법문을 설하는 곳에 천상, 아수라들이 공양하기 위해서 모여든다는 겁니다.
그 밑의 삼악도 중생들도 좋아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그럴 틈이 없고 그럴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선도 이곳(이 경을 설하는 곳)은 일체의 세간, 인간, 아수라들이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것이요 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규봉 스님이 말씀하셨는데, 대반야경에 제석천왕(도리천왕)이 부재시에, 만약 다른 천왕들이 와서 다만 빈 의자만 볼지라도 모두 다 거기에 예를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가슴속에 불성은 있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부재시라는 겁니다.
즉, 제석천왕이 안 계셔도 그 의자에 예를 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이 경을 설하고 사구게 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위타인설하면 위에서 말한 제석천왕이 부재시에도 다른 천왕이 그 빈 의자에 예를 올리고 공양을 하듯이 부처의 탑묘와 같이 한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六祖】
所在之處에 如見人하면 卽說是經호대 應念念常行無念心과 無所得心하야
소재지처 여견인 즉설시경 응념념상행무념심 무소득심
不作能所心說이니 若能遠離諸心하야 常依無所得心하면 卽此身中에
부작능소심설 약능원리제심 상의무소득심 즉차신중
有如來全身舍利일새 故言如佛塔廟니라 以無所得心으로 說此經者는 感得天龍八部가
유여래전신사리 고언여불탑묘 이무소득심 설차경자 감득천룡팔부
悉來聽受어니와 心若不淸淨하고 但爲名聞利養하야 而說是經者는 死墮三途하리니
실래청수 심약불청정 단위명문이양 이설시경자 사타삼도
有何利益이리오 心若淸淨하야 而說是經者는 令諸聽者로 除迷妄心하고
유하이익 심약청정 이설시경자 영제청자 제미망심
悟得本來佛性하야 常行眞實일새 感得天人阿修羅人非人等이
오득본래불성 상행진실 감득천인아수라인비인등
皆來供養 하리라
개래공양
<번역>
소재(所在)의 곳에 만일 사람을 만나면 즉시 이 경을 설하대 응당 생각생각이 항상 무념(無念)의 마음과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을 행하여서 설하는 자와 설함을 맡는 대상을 없애고 설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 마음을 멀리 여의고 항상 무소득의 마음을 의지하면 곧 이 몸 가운데 여래의 전신 사리(全身舍利)가 있게 되기에 <부처의 탑묘>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무소득의 마음으로써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천룡 팔부(天龍八部)가 다 와서 듣고 받아 가짐을 감득(感得)할 것이지만, 마음이 만일 청정하지 못하여서 명문(名聞)과 이양(利養)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죽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마음이 만일 청정하여 이 경을 설하는 자는 듣는 이로 하여금 미망한 마음을 제거하여 본래의 불성을 얻어서 항상 진실을 행하여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와 인비인(人非人) 등이 와서 공양함을 감득할 것이다.
<해설> - 무각
육조 스님은, 법 아닌게 없지만, 조금 더 이해하기 좋게 법으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가 육법 공양을 할 때 여섯 가지 물건으로 공양을 하는데 향, 등, 꽃, 과일, 차, 쌀 등 각각의 물건에 의미를 붙여서 육법공양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볼 때 법으로써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으로 비춰서 설명을 합니다.
어느 것을 보거나 느끼든지 그것을 법으로써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내는 것이 공부입니다.
일체 물건 속에서 법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일체법이 불법이다.” 라고 하는 의미가 이것입니다.
일체법이란 모든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법이 진리의 나툼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목을 기르는 것이 정견(正見 바른안목)입니다.
임제 스님도 진정견해(眞正見解 참다운 바른 안목)라 하여,
정견이 서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고 말합니다.
선은 정견을 세우는 것으로 이것이 견성입니다.
견성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모든 공덕이 저절로 주어지고, 모든 어려움이 저절로 풀어진다는 겁니다.
육조 스님은 이런 것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법을 해석합니다.
應念念常行無念心과 無所得心하야
응념념상행무념심 무소득심
소재(所在 경이 있는 곳)의 곳에 만일 사람을 만나면 즉시 이 경을 설하되, 이 말은 이 경을 지니고 있으면 사람 이라는 경계가 닥쳤을 때, 그 사람을 이 경으로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업식으로 대적을 한다면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면(경계가 닥치면) 즉시 이 경을 설하되 응당 생각생각이 항상 무념(無念)의 마음과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을 행하면 어떻게 되느냐?
설하는 자와 설함을 맡는 대상은 없어지므로 설하는 자와 설함을 맡는 대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즉 능소(能所)가 스러지는 것입니다.
즉 주관과 객관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가 나 아님이 없다는 말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연기의 도리를 알고, 연기법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무념이라는 것을 돈오입도요문론에서는 일체처무념(一切處無念)이라 하여 일체의 모든 곳에서 무념하는 것이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념(無念)! ‘없을 무’ 자에 ‘생각 념’ 자로 생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무슨 생각이 없느냐면 면 바른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삿된 생각(사념 邪念)이란 모든 것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너와 나, 옳고 그름, 좋다 나쁘다, 선과 악, 부처와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것을 무념이라고 하지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있는 것이 무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념이란 일체처에 무심함이니 일체 경계가 없어서 나머지 생각으로 구함이 없습니다.
즉 다른 생각으로 구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모든 경계와 사물에 대하여 영원히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무념이라 하였습니다.
또 무념이란 참된 생각이라 하였습니다.
참된 생각은 정념(正念 바른 생각)이라고도 하며, 정념이 곧 무념이고 진념(眞念)입니다.
우리가 무념하면 멍청하게 아무 생각없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으로, 무념이란 참된 생각을 이름함이니 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다면 이는 곧 삿된 생각이요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에 물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분별이 일어나면 분별을 놓으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더 얻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분별을 놓았으면 거기서 뭔가 얻으려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이때 어긋나는 것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행(常行 항상 행하라), 즉 생각 생각 무념심으로 무소득심으로 행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객이 없어지니 불이법을 체험하게 되므로 그러면 견성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록을 보면 뭔가 구름잡는 이야기를 하고 알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하거든요,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느껴지는 것입니다.
항상 양변에 치우친 사람들이 중도법을 이야기하면 두리뭉실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양변에 치우친 그 마음을 놓으면 청명해지는데 그 마음을 놓지 않고 미리 생각으로 구름잡는 말만 한다고 하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 스스로 어리석은 것을 모르니까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분별을 놓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행자의 방에 하심(下心)이라는 글이 붙어있습니다.
이 하심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심 하려면 다 놓아야 하심이 됩니다.
꾹 참는 것이 하심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계(戒)받을 때까지만 참겠다.
계만 받으면 나도 중이고 너도 중이니까 그때는 참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자때는 말 안들으면 안되니까 무조건 네! 네! 했는데, 이렇게 형식만 쫓아가면 안된다는 겁니다. 참으로 하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심이란 자기 마음속 깊은 곳 그 자리를 믿고 놓는 것입니다.
그게 저 아래입니다. 사실 아래라는 것도 없지요, 왜냐하면 그 자리는 공한 자리니까요, 공한 자리이기 때문에 아래보다 더 아래이고, 아래라는 말도 붙을 수 없습니다.
이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광명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상대성을 초월하여 텅 비어 공한 자리이므로 공적(空寂)이라고 합니다. 이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공부의 핵심입니다. 이걸 알면 공부가 다 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에 물들지 않는 까닭에 자연히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나니, 이렇게 돈오입도요문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견해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니 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뭔지 모르겠으니 단계를 밟아서 체계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겁니다.
병이 있으면 병에 따라서 약을 주어 병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즉 본래부처란 겁니다. 부처의 지견으로 곧장 들어가는데, 병이 한 가지만 있는데 온갖 약을 다 먹인다면 그게 좋은 건가요?
그러니 여기서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참으로 하심하고 놓아가는 공부, 분별을 쉬는 공부를 하게 되면 저절로 육근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이게 증명입니다.
그 증명(證明)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경계속에서 물드는지 안 드는지 한 번 해보십시오, 안들거든요!
일반적으로 경계에 부딪치면 거기에 물드는데 내가 거기에 무념으로 반응하는지, 정념(바른 생각)으로 반응하는지, 사념(삿된 생각)으로 반응하는지는 자기가 분별 판단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항상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공부가 절대 어려울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쉽습니다. 어떤 경계 속에서도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것은 진리의 본체거든요. 그 자리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 자기를 돌아서 비춰본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반조법(返照法)으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지견에 들어가나니 이러한 법을 얻은 사람은 부처님의 곳집(부처님의 창고, 법의 창고)인 것입니다.
이러면 일체가 법이고 일체가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념인 까닭이니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오신다고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금강경에 나온 말을 돈오입도요문론에서 비유로 들었습니다.
어록도 사실은 경을 의지해서 말을 합니다.
여기서 보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첫 구절에 다 나왔습니다.
이 경이 있는곳(소재지처 所在之處)에서 만일 사람(경계)을 만나면 즉시 이 경을 설해라. 설하되 어떻게 설하느냐? 응당 생각생각이 항상 무념의 마음과 무소득의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무념이 정념이라고 했습니다. 정념이라는 것을, 명추회요에서는 당지유심 무외경계(當知唯心 無外境界) 오직 마음이요, 마음 바깥에 경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모든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고, 바깥의 모든 경계가 자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이고, 바른 생각이 올라오면 삿된 생각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무념과 무소득심을 행하므로 설하는 자와 설함을 받는 대상(主客)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설하는 놈이 법문을 듣는 놈이고 법문을 듣는 놈이 설하는 놈이 되는 것입니다.
설하는 놈도 성품자리에서 설하고 듣는 놈도 성품자리에서 듣습니다.
그 말하고 듣는 성품은 하나의 성품이므로, 두 가지 작용에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성품으로부터 두 가지 작용에 떨어져 나왔으므로 둘이 아닌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설명을 열 번 넘게 말하고 있는데 이래도 조금 지나면 모르지요, 그러니까 내가 반복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는 건데,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완전히 받아들이면 그대로 실천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쉬워요.
그런데 매일 반복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 말고 더 있습니까? 여기서 이미 완벽하게 시설해 놨습니다.
다음으로 설하는 자와 설하는 대상을 없애고 설해야 한다.
말하는 자도 말하는 바가 없어야 하고, 듣는 자도 듣는 바가 없이 들어야 한다.
이것이 설법의 완성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마음(분별)을 멀리 여의고 무소득의 마음(얻을바 없는 마음)을 의지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얻을바 없는 마음이 진짜 얻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다 줘도 비교할 수 없는 수승한 법문으로써 이걸 얻게 되면, 이 세상 어떤 유위법과도 비교될 수 없는 진짜 보배로써 이것을 얻어야 여러분이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냥 뭐가 조금 이루어지고 조금 안 되는 것에 목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 중생들이 그것을 요구하니까요.
그런데 사실 나중에 보면 그것을 다 얻게 됩니다.
얻을바 없는 것을 얻게 되면 유위법도 저절로 풍성하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튼실해지면 열매가 풍성해지듯이 저절로 얻어집니다. 이것은 뿌리와 열매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한다고 해서 가난하게 살고, 무소유를 외치니까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본래 무소유입니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고, 나중에 갈 때도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본래 무소유입니다.
억만금을 가졌어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억만금을 나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풍요롭게 잘 쓰는 것이 관리자입니다.
우리는 이 억만금이라는 물질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것 이라는 생각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리를 잘 하면 관리자로서 계속 살게 되니 그런 사람은 항상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부자로 살지 않는게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다고 욕심부려서 사는 것이 불법이냐?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므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해탈인 입니다.
자기 삶이 완전하니까 열반이고, 이것이 일체 중생이 바라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무소득의 마음을 의지하면, 이것이 큰 보배중의 보배(無盡寶)라는 것입니다.
곧 이 몸이 그대로 여래의 전신사리 입니다.
전에 우리 스님이 돌아가셔서 다비하고 다음날 아침에 사리를 찾으려고 밤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면서 어슴푸레하게 밝아 왔습니다.
그 때 개 소리, 새 소리, 차 소리, 사람 소리도 나고, 주변에 나무와 바람 등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저것이 사리구나 하고 문득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리 아닌게 없이 전체가 사리인 것입니다.
실제로 사리를 찾아봤지만 사리는 하나도 없고 뼈만 찾았지요. 결국 사리를 찾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온통 사리 아닌게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사리입니다.
즉 말도 사리와 같이 하는 것이고, 법이 사리지요. 그러니 법답게 말하고 행하는 것, 이게 사리입니다.
부처님의 사리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 사리가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 도리를 알아야 여러분이 골수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뼈다귀 몇 조각 뒤져서 그 속의 반짝이는 구슬을 찾아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너무 모르니까 방편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몸 가운데 여래의 전신 사리(全身舍利)가 있게 되기에 부처의 탑묘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무소득의 마음으로써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다 와서 듣고 온다고 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성중들이 그 도량을 옹호하고, 와서 듣고, 받아 가짐을 느끼지만 마음이 항상 청정하지 못하여 명문(名聞 명예)과 이양(利養)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죽어도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마음이 만일 청정하여 이 경을 설하는 자는 듣는 이로 하여금 미망(미혹되고 망령된 마음)을 제거하여 본래의 불성을 얻어서 항상 진실을 행하여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와 인비인(人非人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이 아닌 사람,귀신)등이 와서 공양함을 감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금강경>
何況有人이 盡能受持讀誦가 須菩提야 當知是人은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이니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송 수보리 당지시인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해설> - 무각
어찌 하물며 다 수지하고 독송하는 사람들이겠느냐.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희유(希有)한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 사람들이란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고 위타인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說誼】
四句偈者는 對全經하야 而言其小分也라 雖是小分이나 隨所說處하야
사구게자 대전경 이언기소분야 수시소분 수소설처
皆應供養如塔이니 小分도 尙爾어든 況盡能持說全經者乎아 此則不啻如塔廟尊崇이니
개응공양여탑 소분 상이 황진능지설전경자호 차즉불시여탑묘존숭
當知是人은 決定成就最上無上第一無比한 希有難得之法也니라
당지시인 결정성취최상무상제일무비 희유난득지법야
<번역>
<사구게>라 함은 이 경전부에 대하여 소분(小分)을 말함이니 이것이 비록 소분이지만 이를 설하는 곳마다 다 공양하기를 탑과 같이 한다.
소분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전 경을 수지하고 강설함이겠는가.
이러한 자는 탑묘와 같이 높여 받들 뿐 아니라, 이 사람은 결정코 가장 높아 더 위가 없고 제일 가서 비길 데 없는 희유하여 얻기 어려운 법을 성취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해설> - 무각
<사구게>라 함은 이 경전부(전체 경전)에 대하여 소분(小分 작은 부분)을 말합니다.
사구게가 전체 경전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지만 이를 설하는 곳마다 공양하기를 탑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부분이지만 천인, 아수라등이 와서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인사(天人師 하늘과 인간의 스승)로서 모두가 공경하므로 여러분이 이 사구게를 가지고만 있어도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와 같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행자 때는 많은 게송을 염불하면서 다녔는데 행자니까 뜻도 제대로 몰랐고, 완전히 외우지도 못했고,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했는데 그렇게 좋더라고요. 종성을 하다가 자기 감정에 마음이 울컥해서 저절로 눈물이 나고 울면서 엎드려 있기도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가 처음 체험을 시작할 때이고 초발심하는 때이므로 이때 마음 공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 이거든요. 그래서 중 노릇도 오래되면 공부가 잘 안됩니다.
초발심 할 때 열심히 해서 한고비를 빨리 넘어가야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하잖아요, 여러분들도 나이가 어리지는 않지요.
그래도 지금이 제일 빠른 시기이고 어릴 때입니다.
내일과 모래로 가면 더 늙어지니까 지금 부지런히 해야합니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어영부영 하다보면 한 세월 휙 가버립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겁니까? 하소연할 사람도 없어요. 자기가 안 한 거니까.
더군다나 정법을 설하는 이곳에서 공부를 안한다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인, 아수라, 천룡팔부들이 공양을 하고 예를 올립니다.
그러니 혼자라도 아주 으슥한 곳에 가도 나를 못 건드리더라고요.
내가 뉴욕에 있을 때 한인이 많이 사는 곳인데 스님들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한인 제일은행이 있는데, 돈을 인출해서 곧바로 차 타고 왔는데도 이미 바퀴에 구멍을 뚫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타이어에 공기가 다 빠져서 차가 정지해서 내리면 돈을 뺏기 위해서지요. 스님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여러 스님이 당했다고 합니다.
타이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절까지 겨우 와서 차고에 차를 넣고 안심했는데 거기까지 쫓아온 경우도 있어서 가방들고 나오니까 뒤에서 곧장 와서 돈을 빼앗긴 경우도 있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듣고나서 밤 12시 쯤 역 주변에 나가 봤습니다. 노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부딪쳐 보자고 해보는데, 밤에 조그만 중 하나가 왔다갔다 하니까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면서 이 밤중에 왜 돌아다니나 하면서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20달러 정도는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녀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총맞아 죽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목숨걸고 돈을 훔치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돈이 없으니까 총을 쏴버리는 거지요.
그러니 총든 강도를 만나면 뒷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가져가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또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에 정지하면 벌써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차까지 안 뺏으면 다행이고요.
아주 위험하지요. 그런데 나는 일부러 목숨을 걸고 한 번 해봤습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자기 자성의 부처에게 나 오늘 나간다. 그리고는 한 바퀴 돌아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일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객기일까요? 약간 객기는 있지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굳이 그런 위험을 자초했잖아요! 그때는 젊으니까 공부삼아 내지른 겁니다.
죽느냐 사느냐! 죽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자기를 한 번 내 던지는 겁니다.
지금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일은 안하지요, 그런데 그때는 젊었으니까요.
내가 여기서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천룡팔부들이 항상 공양을 하고 받들어 가짐을 감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믿어야 합니다. 이게 믿어지면 여러분의 공부가 조금씩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치부해 버리고 천룡팔부를 무시하지요.
그래서 여기서 이러한 자는 탑묘과 같이 높여 받들 뿐 아니라, 이 사람은 결정코 가장 높아 더 위가 없고 제일가서 비길 데 없이 희유하여 얻기 어려운 법을 성취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금강경>
若是經典所在之處는 則爲有佛과 若尊重弟子니라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 약존중제자
<번역>
이렇게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 및 존중한 제자들이 있는 곳과 같으니라.
<해설> - 무각
이러한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과 존중한 제자들이 있는 곳과 같으니라.
경전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항상 법에 의지하고 법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이라면 부처님과 존중하는 제자들이 항상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