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와 서경덕, 지족선사의 사랑 이야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노래 뿐만아니라 학문에도 정통했고 詩에도 능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사내들은 그저 황진이의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 보려고 보채기 일수였다.
그녀는 최고의 스타였던 것이다.
“자네, 황진이 하고 하룻밤 지내보았는가 ?”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의 풋사랑을 대단한 감투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녀와 살을 맞대었던 사내들은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사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첫 남자”만은 저명인사가 아니였다.
황진이의 첫남자는 평범한 동네 총각이었습니다. 그는 황진이를 짝사랑하다 그만 상사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마지막 이성을 떠나가는 길목, 황진이 집 앞을 지나 가는 데
상여가 꿈적도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고 있는 데, 황진이가 술잔을 들고 앞으로 다가가서 관에 절을 하고
자신의 속옷을 올려 놓자 그제서야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진이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애인이 되기로 마음 먹고 기녀세계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로부터 자유분방한 삶은 시작되었고 뭇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입니다.
황진이의 남자는 많지만 그 중 유명한 게 바로 지족선사와 서화담(경덕)입니다.
10년동안 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는 그만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승으로
전락하는 창피를 당합니다.
반면 당대의 대 학자 화담 서경덕은 끝끝내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유혹에 실패한 황진이는 서화담의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사이로 남아 만남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화담 서경덕은 조선 중종 때의 유명한 도학자입니다. 1489년에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대학>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
혹은 자기 마음을 바로 잡고 선천적인 좋은 기량을 갈고 닦음)‘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원리에 의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과거시험에는 뜻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규모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뿐, 벼슬생활은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고는 오직 도학연구에만 전념하였죠.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동안을 굶주려도 泰然自若하였으며,
제자들의 학문이 진취되는 것을 볼 때는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서경덕의 제자 중 유명한 분이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입니다.
얼핏 보면 평생을 산림 속에 은거하여 산 것을 볼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는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치의 잘 못을 들을 때에는 개탄함을 금하지 못해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잘 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합니다.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聖居山 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었겠지요.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햇습니다.
그녀는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습니다.
일부러 비를 험뻑 맞고 그를 찾아 갔습니다.
하이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서경덕이 혼자 있는 집이었지요.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입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 직접 몸의 물기를 닦아 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습니다.
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마른 이부자리를 펴고 그 위에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하고는 다시 글 읽기를 계속 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졌고 더디어 밤이 깊었습니다.
삼경쯤 되자 더디어 서경덕은 황진이 옆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조용히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태연하게 아침밥까지 차린 뒤였습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 갔습니다.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 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 달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빙그레 웃는 서경덕, 이 후의 일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과 황진이가 놀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둘의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또는 존경이라는 단어 뿐입니다.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서경덕은 황진이를 처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이며, 둘째가 선생님입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어며, 다음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 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서경덕이도 동감이나 하는 듯, 소리없는 미소만 지었다고 합니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뒤어난 사상가라고 하지만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하고 첩까지 두었지요.
그러니 여자를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요 ?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 이였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 했던 모양이다.
이른 사실을 뒷받침 하는 그가 남긴 시조가 있다.
“마음이 어린 後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요 마는, 지나는 님 부는 바람에 행여 올까 하노라.“
이 시를 대충 해석해 보자면,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 쌓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 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나 그녀가 왔나 하고 방문을 열어 본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임이 아니다.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죠.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 (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 일 수도 있다)
듣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그대로 황진이 에게 전해졌다.
황진이는 어떠했을까요. 그녀 역시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마는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입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 바로 화답을 합니다.
“내 언제 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달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임을 속였겠는가 / 절대 그런 일이 없다.
그런데 달 밝은 깊은 밤에 무기력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즉, 허전하다.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겠는가.“
분명 서경덕의 시조 종장에 대한 답입니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 까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가.
뭐 그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서화담이 황진이를 받아드리지 못한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많은 나이 차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31살 정도 많아요)
다시 말해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대쪽 같은 선비로서 요즈음 원조교제 같은 것을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 와도 詩놀이 이상 분위기가 되면 홀연히 자리를 뜨고 해서 명월이 애간장을
타게 했는 데.... 결국 황진이는 그러한 화담선생의 야속한 마음과 그리움을 시조를 읊게 된 것입니다.
靑山裏 碧溪水야 / 水易感을 자랑마라 /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여기서 “靑山裏碧溪水“는 황진이가 선생을 격조 있게 부른 별칭입니다.
기개있는 청렴한 선비 서화담을 “푸른 산속에 흐르는 맑은 계곡수로” 비유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水易感”은 물이 잘 흐르는 것을 말하므로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의
의미는 “화담선생님 ! 선비의 기개는 높으시지만 그것이 자랑만은 아닙니다.” 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一到滄海는 단숨에 넓은 바다에 도달한다”는 뜻이라, 계곡물이 바다에 도달하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늙어지면 청춘을 찾을 수 없어요.”하는 깊고 애달픈 비유가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 明月이 滿空山 할 때, 즉 밝은 달빛이 온 산에 가득한 이 때에
사랑을 나누면 어떻겠어요“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요.
화담선생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대자연에 비유할 정도로 컷던 것이 황진이의 마음이었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황진이는 화담의 제자였지만 서경덕의 문집에는 황진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양반 사대부의 문집에 기생과의 교류를 기록한 예가 없어 그럴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죠.
그 때문에 둘이 사랑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둘 사이에는 아무 일이 없었을
까요 ? 이 대목에서 황진이의 시 한편을 살펴보면 그 뜻이 얼추 나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허리를 버혀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님 오신 밤이여거든 구뷔구뷔 펴리라 “
이 시는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하지만 은근하게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야한 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육체적인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시이기도 하지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이불”을 통해 성관계로 바뀝니다. 그리고 한번 임과 함께 이불속으로
들어가면 영영 안 나올 것 같은 보통 이상의 성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순히 초절정의 그리움에 대한 노래일 수도 있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반항의
한 단면 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황진이는 한번 문 고기는 놓지지 않으려는 듯 엄청난 남성 편력을 보입니다.
당대 선전관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이사종 과는 6년 계약으로 동거를 하기도 했고 재상의
아들 이생과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랑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생과 깊은 산골 안가본 데 없이 두루 돌아다니던 황진이는 먹을 게 다 떨어지자 중에게
몸을 팔아 식량을 구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현대인 사이에서도 찬성보다 반대가 더 큰 “계약결혼”을 황진이는 이미 400년 전에 몸소
행동으로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노예”가 되어 무엇이든 희생하는 면모를 보여 줍니다.
이런 황진이가 서화담을 남자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서 모셨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실입니다.
고금을 통해 보면 사제지간에서 연인 사이로 승화되는 경우는 종종 보이지만
연인 사이가 사제지간으로 바뀌는 경우는 무척 드물기 때문이죠.
어쩌면 황진이는 매일 제자라는 신분으로 스승의 방을 자주 들락거렸을 터인 데 그때마다
불쑥불쑥 솟구치는 서화담을 향한 애정을 어떻게 가누었는 지 자못 궁금합니다.
황진이의 유혹을 받은 서화담은 어떠 했을까요 ? 그의 유연을 보면 그의 깊은 뜻이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에 내쳐 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
먹게 하라” 그것은 황진이 자신 때문에 천하의 남자가 자신들을 自愛하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화담선생은 말했습니다.
그 “천하의 남자”들 속에 서화담도 포함 됐을 까요 ? 그것은 영원한 물음표입니다.
황진이는 원래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기에 화담의 학문과 도를 잘 계승한 듯 합니다.
화담의 제자 중 허윤 (惺翁識小錄 성옹지소록의 저자인 허균의 아버지)이 그가 화담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나는 황진이와 관련 된 화담에 관한 내용은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에게서 인간의 참모습, 우주의 진리 등을 깨달았다. 화담을 모시고 도학을 배운 후
그녀는 저항의 방향을 달리했다. 황진이도 도학자가 된 것이다. 화담의 도학은 “기일원론”으로
모든 사물이 기의 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다. 황진이가 이를 터득할 무렵 화담이
세상을 떠났다> (황진이 27세 때 57년을 살다가 1546년에 감)
그녀는 마지막 스승이자 情人을 잃은 것이다. 화담은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녀는 화담의 발이 닿았던 곳, 곧 지리산, 금강산, 속리산을 찾아 다녔습니다.
화담이 내 디딘 발자취를 따라 운수행각을 한 것이죠.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 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유랑 중 서화담의 화신을 만나게 됩니다.
토정 이지함이 남긴 기록에도 이지함은 화담을 따라 전국을 순회하며 학문을 쌓았다고
나오는 데, 이때가 화담이 죽은 후 1년인 1547년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지함은 산에서 도를 공부하고 있었기에 선생이 죽었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지함과 다니던 화담은 몸이 엄청 빠르고 건장했다고 합니다.
순회가 끝나던 날 화담은 이것으로 나의 인연 중 대의적 인연을 정리했으니, 인의적 인연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지자 이지함은 스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의적 인연은 황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황진이는 서화담이 죽어서야 그와의 인연을 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황진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도와 명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화담의 곁으로 간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