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duck.net/plaza/124797646
조선 시대
지금의 소방청 전신격인 금화도감이라는 관청 설치해서 화재 예방과 화재 진압에 힘 썼음
여기에 소속된 군인들을 금화군(나중에 멸화군으로 명칭 변경됨)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소방관이라 보면 됨
심지어 소방법도 만들어짐 ㅇㅇ
시스템의 나라답게 소방 관련해서도 채계적이었음
https://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1/2019111100364.html
◇세종 "불은 인재(人災)… 전담 기관 만들라"
세종 8년인 1426년,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큰 고민에 빠졌어요. 도성에 큰 화재가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하늘에서 내리는 재난이 있고, 인간이 저지르는 재난이 있다." '천재(天災)'와 '인재(人災)'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했던 세종은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인재는 사람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선왕조 들어서 새 수도가 된 한양(서울)에는 새로 지은 집이 많았는데, 옹기종기 붙어 있는 데다 짚과 나무가 흔해 한번 불이 나면 집 여러 채가 타는 경우가 잦았던가 봐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1417년 '금화령'을 내려 무척 엄한 화재 방지법을 세웠어요,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낸 사람은 곤장 40대, 이웃집까지 불태우면 곤장 50대, 종묘나 궁궐까지 불태운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도 세종 초기에는 다시 화재가 빈발해 큰 걱정거리로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신하들은 "무뢰배들이 농업에 힘쓰지 않고 일부러 남의 집에 불을 질러 도둑질을 하려는 술책"이라고 보고했어요. 세종은 한성부(지금의 서울시)에 금화도감을 설치해 화재를 막고 방화범을 색출하게 했습니다.
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o8LB47vtJoSdgqooluv694JK6mO9YDpplQvGHJna1SMTB4m0zxQl1jBp8KgK2vPN.cha-was01_servlet_engine1?nttId=87182&bbsId=BBSMSTR_1008&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searchUseYn=&searchCn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세종은 화재에 대비해 소방서인 금화도감을 종루 옆에 세웠다. 금화도감에서는 관원이 교대로 종루 위에 올라가 밤낮없이 성안을 살펴보도록 했다. 그래서 불이 나면 종루의 종을 쳐서 그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금화도감 안에는 소방관인 ‘멸화군’이 있었다. 멸화군은 진화 작업을 맡은 소방대원과 물을 길어오는 노비인 급수비자로 이뤄졌다. 소방대원들은 한양으로 올라와 복무하는 군인들이었다. 처음에는 정원이 50명이었다가 1619년(광해군 11)에는 30명으로 줄어들었다. 멸화군은 도끼 20개, 쇠갈고리 15개, 삼끈으로 엮은 동아줄 5개가 지급됐다. 이들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나면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 재빨리 불을 끄는 일을 했다. 멸화군은 불을 끄러 왔다는 표식인 신패를 차고, 모든 소방대원이 함께 화재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러고는 급수비자가 떠오는 물로 불을 껐다.
또한 불이 다른 건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긴급 조치를 취했다. 동아줄과 긴 사다리로 지붕으로 올라간 뒤 쇠갈고리로 지붕의 기와나 짚을 걷어내고, 도끼로 기둥을 찍어 불이 난 집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 깃발을 높이 세워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게 했으며, 화재 진압 중에는 계속 종소리를 울렸다. 멸화군은 불을 끄는 일뿐만 아니라 화재에 대비하는 일도 했다. 평상시에는 종루에서 화재를 감시하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방울을 흔들며 야간 순찰을 하고 방화벽 설치, 화재 진압 도구 준비 등 화재 예방 활동을 했다.
아쉽게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서에는 멸화군의 구체적인 활약상과 그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멸화군은 ‘불을 없애는 군인’이란 이름 그대로 직무에 충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 때 창설된 금화도감은 한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481년(성종 12) 수성금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멸화군의 화재 예방 활동으로 화재가 줄어들어서인지, 1637년(인조 15) 쓸데없는 조직이라 하여 없애면서 멸화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멸화군은 크고 작은 화재가 잦았던 조선시대에 화재의 예방과 진압에 힘씀으로써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활동했던 ‘조선의 소방관’이었다.
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17
그리고 1431년(세종 13년) 5월 13일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대인 금화군을 창설했다. 금화군은 높은 종루에 올라가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 발생 시 출동해서 불을 끄는 활동을 했으며, 방화범을 잡는 업무까지 했다.
금화군은 삼베를 길게 잘라 막대기에 이어 물을 적셔 사용하는 ‘불채’와 쇠갈고리, 화재 현장에 진입하기 위한 도끼 등을 소지했다. 화재예방을 위해 돌담을 쌓고, 다섯 집 당 하나의 작은 우물을 파게 했다.
아울러 건조하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방울을 울리고 다녔다. 이는 마을사람들에게 화재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금화군의 방울소리가 울리면 백성들은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집집마다 물을 길러 담아두는 등 화재에 대비했다고 한다. 금화군 창설 이후 한양에서는 이전과 같은 대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화군은 세조 때인 1467년 멸화군으로 확대된다. 50명의 군인들로 편성된 멸화군은 도끼와 쇠갈고리, 밧줄 등의 장비를 착용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성종 때 ‘수성금화사’라는 상급관청으로 격상했고, 경국대전에 소방업무에 대한 법제화가 이뤄졌다.
다만 화재가 나면 사람들이 일일이 물을 길어다가 불이 난 곳에 뿌리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경종 때 청나라에서 수총기가 수입되면서 근대식 소방기구의 틀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채계없이 불 끄는 나라는 아니었다는거
진짜 조선 시대보다 후퇴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