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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버닝] 심층 감상기 (스포 O)

작성자작은별|작성시간18.05.18|조회수1,418 목록 댓글 0

* 이 감상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이니 재미로 봐주세요. ㅎㅎ


버닝 / 이창동 / 한국 / 2018 / 10.0


<전방위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핵심들>



1. 줄거리


종수는 하루하루 배달 일을 하며 살아가는 청년입니다. 어느 날, 종수는 동네친구인 해미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묘한 관계에 빠져듭니다. 서로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간다고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해미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프리카로 가서 많은 것을 느끼고 싶다 하고 종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묘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서로 섹스도 하고 많은 감정을 나눈 후 그렇게 헤어지는 두 사람.


종수는 해미가 없는 동안, 고향 집에 가 살게 됩니다. 아버지가 우발적으로 동네 사람을 살해했다고 하기에, 집이 비어 있어 그곳에 가 살기로 한 것입니다. 고향에는 텅 빈 집과 송아지 한 마리만 있고, 대북확성기가 하루 몇 시간 정도 울리고 있습니다. 공허감, 우울감에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종수. 그는 아버지의 재판 과정도 지켜보지만 아버지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재판 형량도 쉽게 낮춰지지 않을 것이란 비보를 듣습니다. 이상한 것은 자신의 고향 집에 계속 이상한 전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화가 와서 받으면 상대편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 상황이 반복되자 종수는 짜증을 냅니다.


그런 와중 종수는, 자신이 꿈꾸는 작가라는 것에 계속 환상을 갖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옵니다. 종수는 기쁜 마음에 해미를 찾아 공항으로 가는데 그녀는 벤이라는 낯선 남자를 데리고 옵니다. 종수는 첫 만남에 꺼림칙한 기운을 감지하지만 애써 감추고 함께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십니다. 해미는 아프리카에 가서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토로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함을 직접적으로 표시합니다. 종수는 그런 해미가 안쓰럽고, 벤은 무덤덤하게 그 상황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벤은 자신은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에 놀라는 종수와 해미.


종수는 해미가 벤과 어울리는 것이 탐탁지 않은데, 해미는 벤이 좋은 오빠라고 말하며 친근하게 지냅니다. 벤의 집에 직접 찾아가 밥을 먹기도 하고, 벤이 어울리는 모임에도 찾아가서 함께 구색을 맞추기도 합니다. 종수는 그런 해미가 낯설고, 동시에 동떨어진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미와 벤이 종수네 집에 찾아옵니다. 해미네 집을 찾아오다가 가까이에 종수의 집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종수네 집에서 세 사람은 술을 마시고, 대마초도 피우며 부스러지는 하루-노을-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습니다. 그리고 해미는 그 순간, 대마초에 분위기에 취해 옷을 벗고 노을 속에서 춤을 춥니다. 그 춤은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또 벤의 모임에서도 한 번 시범적으로 추었었던 춤입니다.


그 아름다운 춤을 춘 해미는 결국 곯아떨어지고, 종수와 벤 두 사람만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벤은 종수에게 베이스가 느껴진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번이 비닐하우스를 태울 시간이라고 말하고, 종수는 도대체 어느 비닐하우스를 태울 건지 묻습니다. 그러자 벤은 아주 가까운 비닐하우스라고 말합니다.


그 날 이후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고 (이상하게도 그 꿈에서 자신은 웃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집에서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찾아가 태워졌는지를 확인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비닐하우스는 어느 곳도 태운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그때부터 일어납니다. 하루는 해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해미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린 후 꺼져버립니다. 종수는 두려워서 해미를 찾으러 해미 집에 직접 찾아가 보는데 해미는 없습니다. 심지어 해미 집에 원래 있다고 생각한 고양이도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는 건지, 원래 있었는데 없어진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원래 이 빌라에선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종수는 혼란 속에서 해미를 찾아 해미가 다녔을 모든 길을 따라 나섭니다. 그 동안, 그는 해미가 겪었을 고초, 압박감, 차별 등을 직접적으로 듣고 그런 이야기들을 다 듣는 과정에서 다시 벤을 만나러 갑니다. 정확히는 벤을 미행합니다. 그가 가장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벤의 집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 벤의 집에 가는데, 그곳 화장실에서 해미의 시계를 발견합니다. 그 때 종수는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벤은 살인마라는 것을.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릅니다. 아버지는 우발적 살인으로 결국 형을 선고 받았고, 어머니는 갑자기 전화를 해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데다가, 자신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칼을 들고 가 벤을 찔러 죽입니다. 온 몸에 담긴 분노가 표정과 행동에 고스란히 담긴 상태에서, 종수는 벤을 벤의 차에 태우고, 자신의 옷을 모두 담은 채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렇게, 그는 분노와 공포의 상태를 한 채 어딘가로 떠납니다.



2. 젊은이, 혹은 한 사람의 분노로서의 ‘버닝’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자존심과 소위 ‘꼰대’기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 감옥에서 그들이 표출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적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춤을 추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거나. 심지어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그런 사람들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노를 표현하는 데 두려움을 느껴 그것을 계속 감추다가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분노를 제대로 터뜨리는 사람,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어 그대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 분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응축시켜 만든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트럭의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듯한) 종수를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심지어 종수는 보이지도 않고, 종수가 피우고 있는 담배연기만이 트럭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꽉 막혀 있는 듯한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는 꽉 막힌 공간(답답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물. 그런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의 종반까지 폭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현실에서 완전히 엇나가는, 범죄자인, 잘못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미라는 인물과 벤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그의 감정과 마음은 서서히 전복되기 시작합니다. 해미는 삶의 비참함과 우울함을 몸소 안고 있는 인물이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인물입니다. 벤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해미라는 인물을 살인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입니다. 결국 남아 있었던 작은 삶의 희망이 해미의 실종과 벤의 행동으로 부서집니다. 그 분노라는 감정의 99%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일을 하려고 가보니 자기들 입맛대로 고용하려는 고용주들, 아버지의 살인, 어머니의 삶, 해미의 과거를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는 어른들... 그런 것들에 의해 종수는 아주 천천히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어쨌든 종수는 자기 스스로 벤과 자기의 옷을 모두 태웁니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종수는 어딘가로 떠납니다.


벤은 그 자체로 미스터리입니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만난 존재인 벤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엄청난 부자이며, 무언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는 인물입니다. 종수의 시선에서 벤은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는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고, 부자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가고, 감정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고 괜찮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벤은 어쩌면 살인자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사연으로 여성들을 살해하는 변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벤의 깊은 사정을 영화 내부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종수의 시선에서 볼 때 벤은 종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로 비추어 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벤이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고 고백한 후 종수가 꾼 꿈을 보면, 종수는 웃고 있습니다. 꿈에서 깬 종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흡사 벤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꿈 장면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종수인지 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한 듯도 보입니다. (벤이 아닐 확률도 높습니다. 왜냐하면 벤이 실제로 비닐하우스를 태운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살해한 살인범이라고 해석을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꿈 장면이 모호해집니다.)


둘째, 중후반부에 종수가 벤을 차로 추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결국 종수가 벤을 따라가서 보면, 벤은 어떤 강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고, 종수는 그 뒤에서 은신하며 벤을 쳐다보는 신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화면으로 잡는 장면이 길게 나오는데, 오른쪽에 벤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벤의 차가 서 있고, 그리고 왼쪽에 종수가 벤을 보기 위해 서서히 무릎을 펴며 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유사 거울처럼 보입니다. 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종수가 서는 모습은 벤이 되기 위해 서서히 그의 모습처럼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 이후를 기점으로 종수는 폭발 직전에 놓입니다.


벤은 결국 종수에 의해 죽게 되고 불에 타게 됩니다. 관객들이, 진짜 불에 태워지는 것을 보게 되는 존재는 벤입니다. 그가 대체 누구이고 무엇을 상징하는 지는 다양한 이야기와 해석을 통해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격리자(범죄자, 미스터리 그 자체)의 처단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간신히 살아가려는 삶의 희망(해미)를 사라지게 한 존재에 대한 처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진짜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한 것에 대한 처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벤이 끊임없이 종수에 대해 베이스를 느껴보라고, 마음속의 베이스를 느껴보라고 했는데, 만약 벤이 정말 종수에게 살인에 대한 어떤 에너지를 이야기한 것이라면, 종수는 그 베이스를 느끼고 결국 종수 스스로 느끼는 수많은 분노를 담아 그를 찔러 죽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느낀 진짜 베이스일 수도 있습니다.


종수를 정말 벤처럼 살인마적 성향이 있다거나 사이코패스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단지 현실에 대한 모든 분노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그 분노를 해결할 수단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것으로 결국 (벤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살인을 통해 분노를 터뜨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아프리카로 가서 무언가를 배우고, 한국으로 와서도 벤에 의지하며 그 의지를 몸소 실천합니다. 그녀는 완전히 성스러운 행동과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고 반대로 완전히 속된 행동과 의지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의 파생결과일 것입니다. 해미는 종수와는 달리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인물입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종수에게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하며 질문 아닌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고양이는 종수에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것처럼 해미가 겪은 현실은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 해미는 과거의 모습과 바뀌어 있습니다. 성형을 한 상태입니다. 과거,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구해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동네에 우물이 있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우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과거와 현재는 결국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미는 과거의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현재가 너무나 버겁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갔고, 그곳에서 벤을 만난 겁니다. 벤은 어쩌면 해미에게 있어 구원자였을 지도 모릅니다. 혼란과 두려움과 무력감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현재와는 달리 벤은 무덤덤하고 자기의지로 무언가를 하고 돈도 많고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하게 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는 사라집니다. (벤의 말대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과거와 현실의 엇나감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한 여성의 의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에서 증발해버리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 후에, 종수는 진짜 진실을 찾으려 합니다.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종수 스스로 진실을 애써 찾으며 해미의 과거와 현실을 올바로 잡으려 노력한 것입니다.



3. 예술로서의 ‘버닝’


종수는 미래에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허구이며, 정제된 공간과 시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를 통해 그것을 설득시키고 사건을 진행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계속 종수가 이야기를 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수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진실이며 그것이 종수의 간절한 바람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종수가 쓰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종수가 쓰는 이야기에 누가 나오는지, 무슨 내용인지 등에 대해 일말의 정보라도 주거나 화면으로 띄워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런 것 자체에 관심을 두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종수가 썼을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미 우리는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종수는 처음에 자기 집에서 글을 쓰고, 다음에는 해미 집에서 글을 씁니다. 자기 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적 에너지를 자기에게서 드러내는 것이고, 해미 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적 에너지를 타인에게서 끌어온다는 뜻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해미의 집에만 가면 종수가 무의식적으로 자위를 합니다. 그건 성적 욕망이 샘솟는 것인데, 그런 행동을 통해 예술적 에너지가 그렇게 표출되는 것이라고 달리 해석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집에서 이야기를 쓸 때, 종수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에너지가 없어 보입니다. 카메라도 밑에서 아래로 찍어 종수의 얼굴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해미의 집에서 이야기를 쓸 때 종수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심지어 촬영도 해미의 집에서 시작해 마을 전체를 보여주며 끝이 나는데, 종수의 정신과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혹은 종수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혼란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그런 혼란들이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이겠지요. 이야기라는 게 원래 혼란 그 자체를 다루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러다 종수는 수많은 사건을 겪은 후에 결국 벤을 죽이고 불 질러 버립니다. 해미라는 지적 영감의 대상의 소멸 후에 찾아온 분노 때문에 저지른 행동일 것입니다. 벤은 종수에게 두려움과 불편함의 대상이자 동시에 자기 거울의 대상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메시스입니다. 미메시스는 철학적, 예술적 용어로 ‘모방’이라고 간단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설정한, 이데아란 세계가 있습니다. 이데아는 완벽한 세계입니다. 벤이라고 하는, 인간들에게 있어 완벽한 존재가 있습니다. 돈도 많고, 젊고, 자기 할 말 다 하고, 감정에 무감각해 잘 울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짓거리를 다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위험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예술가들은 그 이데아라는 세계를 모방합니다. 이야기, 음악, 미술 등등 수많은 예술적 형태로서 모방합니다. 종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단하게 노력해도 벗어나기 쉽지 않은 현실, 그리고 에너지가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벤이 자꾸 영감을 줍니다. 베이스를 느껴보라면서. 가슴 속에 있는 진짜 베이스. 베이스라는 것은 결국 예술에 대한 근원적 에너지 일 것입니다. 종수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점차 벤에 대해 공포를 느끼면서 우러러보는 듯한 시선을 둡니다. (후반으로 치달으면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위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벤이 위에 있고 종수가 아래에 위치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국 종수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근원적 대상에게 불을 질러버립니다. 이것은 종수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고 자기의지의 발현입니다.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해미 때문입니다. 해미는 근원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이자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짜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꾸 근원적 대상에게 붙어 있으니 종수는 그 두려움과 질투심, 공포가 극에 달한 것일 겁니다.


예술가는 근원에 가는 것이 최종 꿈일 것입니다. 이데아의 세계로 가서 진정한 세계를 표현 하는 것이 진짜 예술가의 꿈일 것입니다. 하지만 종수는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불살라 버리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예술 세계를 택한 것입니다. 그 행동이 설사 근원이 가르쳐 준 잘못된 관행(살인)일 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버닝(즉 태우는 행위)은 현실적으로 보면 잘못된 행위이지만, 종수(혹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한 진정한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마지막 신이 종수가 쓴 이야기 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종수는 폭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폭발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쓰고 싶어 합니다. 소설가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내세워 그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과정입니다. (중간에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변호사가 종수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써보라며 이야기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야기는 원래 종수 아버지 같은 인물이 해야 딱 이라고.) 종수는 그 말을 무심히, 그러나 주의 깊게 들었을 겁니다. 결국 현실을 투영해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진짜 훌륭하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그릇된 것일지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질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종수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분노를 담아 벤을 불사르고 죽인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없고, 그 상황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철히 밝힐 수 있을 테니까요.


마지막 상황이 이야기인지, 현실인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종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니까요.



4. 사회학적 상황으로서(동시에 여성사회적 의미로서의) ‘버닝’


종수와 해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데 급급한 인물들입니다. 반면 벤은 부자입니다. 종수와 해미는 벤을 부러워합니다. 엄연히 두 사람은 빈부격차를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해미는 벤을 좋아하고 그 삶 속에 들어가지만, 종수는 해미와 달리 그러지 못합니다.


중간에 해미와 종수가 벤을 따라 알 수 없는 모임에 참여합니다. 호화로운 바에 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벤의 지인들은 엄청난 부자로 보입니다. 해미는 그들에게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배운 이야기와 춤을 표현해줍니다. 여기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뜻을 가르쳐주며 스테이지로 나가 춤을 추는데, (리틀 헝거는 굶주린 자들,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은 자들입니다.) 지인들은 그런 해미를 보며 박수를 치고 웃으며 관객처럼 대하고, 벤은 하품을 하며 따분해 하다 종수를 보고 씩 웃습니다. 왠지 모르게 해미는 동물원 속 동물이 된 기분이고 지인들은 그 동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즉 권력자와 비권력자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동시에 벤은 그런 상황에 하품을 하는데, 그런 상황(해미가 하는 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의 설명이나 춤 들이) 재미없고 따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종수는 그런 분위기에 이상하게 압도되고 두려운 표정을 짓습니다.


해미가 헝거 춤을 추는 신이 한 번 더 있습니다. 벤과 함께 종수의 집을 찾아가 노을 지는 풍경 아래에서 웃옷을 벗고 자신 마음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신입니다. 상당히 긴 롱테이크로 찍었고, 또 이 상황에서는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시선도 없고 오로지 해미가 아름답게 춤을 추는 모습만 보여주는데, 그것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면서 비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해미는 그런 춤을 통해서도 쉽게 현실의 비참함, 무력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훌륭한 것은 아름다움과 비극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해미가 느끼는 분노가 잘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추었던 춤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해미는 결국 여성이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중간에 종수가 해미와 같이 일했던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녀는 여성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절절하게 토로하며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해미가 과거,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구해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내용입니다. 종수가 해미가 우물에 빠졌었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나중에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해미의 가족이나 마을 이장은 우물이 없었던 거 같다고 말합니다. 결국 한 여성의 말에 각자의 말이 다르고, 그 이야기는 결국 해미의 말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맙니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지만 한 여성으로서의 차별, 압박감, 그 비극을 다룬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바꾼 것(해미의 얼굴)도 여성이고, 겪었던 사건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바꾼 것도 여성의 일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여성입니다. 그 여성을 바꾸게 한 주체는 사회 전체일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비극 속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초반에 ‘진실을 얘기해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전 대사가 무엇이었냐 하면, 종수가 해미 자신에게 못 생겼다고 놀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성형을 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런데 정작 종수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래서 종수는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한 겁니다. 이후, 종수는 해미의 진짜 이야기를 위해 자신이 몸을 던져 진실의 조각을 직접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현재의 ‘미투 사건’이나 수많은 여성 문제에 이입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종수가 벤을 미행하는 와중, 미술관에 찾아가 거대한 그림을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련된 미술관의 한 켠에 자리 잡은 그림은 용산 참사의 비극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넣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영화 속 인물 중 누군가가 겪었다는 건 아니지만, 영화 외부적으로 사회적 분노를 가장 크게 발휘한 참사 중 하나여서 넣은 장면이라고 보입니다. 용산 참사는 자기 스스로, 제 발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영향에 있어 일어난 비극입니다. 즉 종수의 상황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 종수가 본 것은 용산 참사의 사진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즉 용산 참사의 현장이 아닌 그것을 표현하고 그려낸 예술 작품인 것입니다. 특정 사건의 분노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종수는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수의 고향 집은 북한과 가깝기 때문에 늘 대북방송이 확성기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늘 경계하고 시끄러운 상황이지만, 종수는 무심합니다. 한국에는 어떤 비극이 분명 있었습니다. 약 60년 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지난 지금도 북한과 남한은 확성기를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대북방송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러 해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결국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비극입니다. 어떤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비극은 60년이 흘렀는데 아무런 해결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화되진 않았어도 계속 반복됩니다. 대북방송은 매일 반복되고, 비극은 계속 상기됩니다.


둘째, 종수는 대북방송에 무감합니다. 이것은 결국 시간이 흐른 비극에 대한 인간의 무심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대북방송은 매일 반복되고, 비극은 계속 상기됩니다. 하지만 종수는 그것에 무감합니다.


종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무심함을 뒤엎고 발로 진실을 찾아가는 인간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종교적 이해로서의 ‘버닝’


버닝에서 이해, 진실, 믿음이란 것은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리하고 혼란으로 가득 차 있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내부적, 외부적으로도 그러하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도 그러합니다.


물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것 자체에 대한 것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종수가 무엇을 믿었고, 누구를 믿었고, 그 믿음을 통해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진짜 중요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예수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해미의 죽음이 흡사 예수의 죽음 혹은 사라짐처럼 보이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종수라는 한 인물이 예수의 죽음을 추적하며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 사이에서 믿음과 해석에서 사회적으로 혼란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결국 종수는 무엇을 믿고 이해해야할 지 스스로 선택합니다. 벤은 사실상 절대자처럼 보이고 혹은 운명 그 자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운명은 결국 해미를 무심히 죽였고,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죄와 잘못을 모두 껴안고 죽는 죽음입니다. 해미도 어쩌면 인간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모두 껴안고 죽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종수는 그런 운명에 대항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운명에 대항한 수단은 방화와 살인이며, 그 대가를 우리는 영화 속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종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요? 혹은 영원한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이것은 영화 이후의 문제이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6. 자연-인류학적으로서의 ‘버닝’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 태양빛은 삶을 표현하는 비유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오아시스, 박하사탕, 밀양, 시 등 모든 영화들에 태양 빛이 등장합니다. 버닝 영화 초반에 남산 타워에 반사되어 벽에 비치는 빛 또한 인간 삶을 표현하는 비유입니다. 허름하고 작은 방에 들어 사는 해미의 집에 들이친 빛은 일말의 희망처럼 보이기도 하고, 천천히 사라지는 빛의 낌새로 보아 사라지고 있는 일말의 희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해미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비유, 혹은 복선처럼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중간에 산, 나무, 태양, 새 등 자연 속의 생물들을 끊임없이 비추고 있습니다.


자연은 무심합니다. 인간의 어떤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움직입니다. 혹은 멈춰있습니다. 이것은 벤의 처지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벤이 사실상 자연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자연에 부닥친 인간들의 무력함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벤은 가장 근원적인 것을 묻는 사람인데, 이 근원이 사실상 자연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연은 그 근원을 물어서 무엇을 할까요.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무엇을 할 건지는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무엇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그런 것이고 그렇기에 누구의 눈치 없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정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종수는 혼란스러운 것이고 두려운 것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범주였으니까요. 이후 종수가 등장하는 신 중간 중간에 자연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달리는 신에서 새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비닐하우스가 정말 불탔는지 확인하려고 뛰는데, 그런 행동이 정말 흥분되어서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벤을 다시 만나면서, 벤이 말한 불태운다는 의미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결국 자연의 무심함과 의지를 뒤따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택합니다.


물론 이런 비유적인 해석과 상관없이 거대한 자연 그 자체가 주는 웅장함, 아름다움, 두려움, 공포가 종수와 해미에게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학적인 과정과 흡사합니다. 과거 인간은 자연에 속해있었습니다. 자연에 속해있다는 말은 자연의 상태와 거의 흡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점차 발달해갔고 타인과 타인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본인과 본인 주변의 모든 것들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원시사회에서 고도로 발달된 인간은 그 자체로 발전되었지만 혼란과 무력감은 피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그런 인간을 찾아와 유혹합니다. 그 자체로 자연이 되어보라고. 그런데 종수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결국 벤을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벤이 해미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종수는 해미를 분명 사랑했고 사랑하는 존재를 죽여 버린 존재를 놓아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계속 발전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사로잡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무력감을 받아들이며 살 것입니다. 종수는 그것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7. 신비한 미스터리 스릴러 ‘버닝’


버닝은 엄연히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엄청난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미스터리 스릴러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공이 있는데, 그 안에 엄청난 것들이 들어 있고 그 안을 들여다볼수록 그 공의 가치가 엄청나게 느껴지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초반부터 끝까지 뛰어난 촬영기술과 편집을 보여주고 있고,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슬픈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이야기가 작은 디테일들에 의해 넓게 퍼져 있는 느낌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거시적으로보나 미시적으로보나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고, 그 정도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생각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젊은이들,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분노 그 자체에 대한 내용일 것이고, 그 분노를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대신 표명해주는 선언서와 같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름답고도 숭고하고 진지하면서도 날카롭고 매력적이면서도 섬뜩하고 단순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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