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미국, 단편소설집) : 미국 뉴멕시코의 풍경, 사람들, 이야기.
루시아 벌린의 이 작품은 특정한 공간 속에 담긴 시간과 공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짧게는 2쪽, 길게는 20쪽 내외의 단편들 속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에인절 빨래방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시 4가에 있다. 초라한 가게와 고물상, 군용 야전침대를 파는 중고품 가게가 있는 거리. 짝없는 양말들을 모아둔 통, 1940년대에 발행된 <<보건 위생>> 소책자. 곡물 가게, 연인들을 위한 모텔, 술꾼, 에인절 빨래방에서 빨래를 해 가는 적갈색 머리의 늙은 여자들. 10대 나이의 멕시코인 새색시들도 에인절 빨래방을 이용한다.’
어떤 강력한 기교나 기술 없이 담담하게 상황을 묘사하고 인물이 움직이고 말을 하는 등, 그런 상황이 그려집니다. 마치 뉴멕시코에 사는 43명(그 이상)의 인물들이 그 공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술과 마약,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 평범한 장사꾼들... 그곳을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는 듯합니다.
그 당시의 문화 예술, 사회적 이야기 등도 자연스럽게 담겨 있고,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씁쓸한) 유머, 애환, 활기 등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듯한 감성이 곳곳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왜 멕시코인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엄마의 편견은 텍사스의 친척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가끔 주말이면 외삼촌이 후아레스의 개 경주장이나 시내 도박장에 나를 데려갔다. 나는 개 경주를 좋아했다. 우승견을 찍는 것도 잘했다. 카드놀이는 철도 승무원과 주차장에 있는 화물차의 승무원 칸에서 할 때만 좋았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열차 지붕 위로 올라가 기차들이 들락날락하며 선을 바꾸거나 차량을 연결하는 활동들을 구경했다.’
그들의 일상을 보는 것이 이토록 담담한 것이라면, 이토록 흥미로운 것이라면, 어떤 부분에선 이토록 짜릿한 것이라면, 그들의 삶도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담담하지만 매력적이고, 지역적이면서도 그만큼 생생하고, 과하지 않게 특정한 순간을 잡아내어 묘사한 이야기들이 다 좋았습니다.
또 올게요, 오래 가게 (서진영, 한국, 수필) : 각 지역마다 이제 곧 사라질, 사라져가는, 그럼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이 있습니다.
경남 진주, 경북 경주, 전북 익산, 서울 중구, 인천 중구, 제주 서귀포 등, 작가는 전국의 아주 작은 가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해줍니다.
비빔밥 가게, 제과점, 분식집 등 음식점도 있지만 열쇠가게, 지물상사, 온천, 대장간 등 일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하는 가게 등 다양합니다.
가게를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장사를 하면서 겪은 우여곡절, 가족 이야기, 그리고 음식을 만들거나 물건을 만드는 과정, 손님과 어울리면서 겪는 다양한 이야기들.
‘사골 국물에 토렴해 밥이 살짝 질퍽할 법도 한데 손님상에 내기 전 그릇째 불에 올려 살짝 덥히니 사골 국물을 머금어 윤기가 흐르면서도 그릇 바닥에 밥이 살짝 눌어 구수한 풍미를 더한다.’
‘고 김향란 여사가 온천장에 만수탕을 개업한 것은 1966년이다.’
책은, 글뿐만 아니라, 가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매장 정면의 그림이 정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친 듯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그림을 보면서 글을 읽으면 작가의 마음과 가게 주인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마음에 새겨집니다.
세월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도, 가게의 모습도, 그들의 이야기도 모두 아련하게 추억합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적어 내려갑니다.
‘조금 손을 보긴 했지만 구조와 기본 틀은 1941년 건축 당시 그대로인 삼화목공소를 최근 지역 문화재로 연구를 한다고 군에서 나와 이것저것 조사를 해갔다. 그것이 잘 정리가 되어 보존 결정이 나면 왕 목수가 더이상 일할 수 없게 되더라도 목공소는 오래도록 이 자리에 남게 될지 모르겠다.’
담백하고 쉬운 이야기였지만, 전국 각 지역의 숨겨진 작은 가게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재미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의 진화 (리처드 프럼, 미국, 인문/자연/조류학) : 자연 속의 수많은 생물들은 어떻게 진화해 온 것일까요. 그들은 어떻게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성적 관계를 맺고, 어떻게 번식하고, 유지해나가는 걸까요.
조류학과 교수이자 전문가인 리처드 프럼은 이런 이야기와 궁금증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해결하기 위해 긴 시간을 애써왔습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야심과 고민이 담겨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새의 모습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짝을 찾고 또 번식을 하며 어떤 우여곡절을 겪는지 등,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고 보여줍니다.
3장에 나오는 이야기. 마나킨새를 찾기 위해 수 주, 수개월 간 잠복하거나 관찰하는 그 집요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그 순간들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새들 대부분 수컷이 암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구애합니다. 예를 들어, 청란이라는 새를 보면, 수컷 청란은 암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예비 공연을 여러 번 합니다. 그중에는 ‘땅바닥을 의례적으로 쪼아대고, 선홍색 다리로 사뿐사뿐 우아하게 걷는 동작이 포함’됩니다. 이후 다양한 동작과 퍼포먼스가 이어지는데, 이 다양하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상세히 묘사하고 설명하면서, 수컷이 보여주는 이 몇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여 ‘상상할 수 없는 복잡한 감각 경험을 유발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더욱 재밌는 것은 이토록 열정적인 수컷의 퍼포먼스에 암컷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세상에 별의별 아름다움이 다 있지만, 성적 과시형질이 늘 생존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아니며, 특정 과시형질의 진화가 개체에게 되레 큰 비용을 부과할 수도 있다.’
이것은 청란의 예시이기 때문에, 다른 종의 새들과는 또 다른 양상이겠지만, 자연은 왜 아름다움으로 진화하고 또 어떻게 진화하는지 계속 고민하고 새로운 예시들을 보면서 흥미를 자극합니다.
이후 5장으로 이어지는 오리에 대한 이야기는, 수컷이 암컷을 이겨내는, 동시에 암컷이 수컷을 견뎌내고 이겨내고 저항하는, 자연의 충격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수컷 오리 성기 길이라든가, 그들의 반응, 암컷의 행동들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반하기도 하는 이 책은, 진화생물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아야 할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게 합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한국, 단편소설집) :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최은영 작가의 이 단편집 속에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선 대학교 학생이었던 주인공과 그녀가 만나게 된 강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서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 그 우정이 찬란히 빛날 때와 미세하게 흔들릴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혼란들. 이런 것들이 이야기에 은은한 향기처럼 배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일 년>에서는, 회사 삼 년 차 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과 인턴으로 들어온 다희라는 여성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서로 의지하며 다희에게 차도 태워주는 등 함께 해온 두 사람이 서로의 다른 시간과 감정을 깨닫게 되면서 겪는 사소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무척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한 여성이 그녀가 만나게 되는 다른 여성과 함께 무언가를 겪고 헤쳐나가면서 겪는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감정은 어떤 거대한 사건이나 충격을 겪으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주 사소한 순간들, 감정들, 말들, 행동들로 인해 변해갑니다.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라도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요즈음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종종 놀라곤 한다. 사십 년 동안 자주 사용한 얼굴 근육은 나를 이모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보편적 일상이기에, 무던한 하루이기에, 그저 또 흘러가는 시간이기에, 이런 순간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제 몸에도 제 마음에도 스며드는 듯합니다. 그렇게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이 느끼는 담담함, 한탄, 희망, 절망, 씁쓸함 등, 옅게 새어 나오는 감정이 다시 한번 아릿하게 남습니다.
그 짙은 여운과 감정을 계속 곱씹고 느끼게 하는 뭉클한 소설집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미국, 인문/과학/수필/논픽션) : 과학기자인 저자는 어린 시절, 과거 유명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그가 자라온 환경, 그가 자연과학에 빠지게 된 계기, 과학자가 된 후 그가 이루어낸 업적, 그의 절망, 그리고 성공과 갈등.
‘나는 그날 밤 간이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 위 나무 서까래들을 응시하며 자신의 세계가 재배열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데이비드를 상상했다.’
처음에는 저자가, 어려움에 놓인 자신의 현실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와 비교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여곡절과 꿈을 그리려는 수필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저자가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진짜 모습과 이야기를 그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활약하고 있을 당시, 큰 충격과 센세이션을 일으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진화론이 과학적 중심에 놓입니다. 동시에 그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은 걷잡을 수 없게도 과학적, 역사적 오류와 잘못을 저지르게 되기도 합니다.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야기 중간중간, 진짜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분류했던 수많은 과학적 범주들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과학적으로) 되짚기 시작합니다. 특히 어류라는 범주에 대한 고민과 그 범주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패러다임의 전환과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정말 말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내가 꿈꿔왔고 좋아했던 그 사람의 내밀한 모습을 보았을 때, 진실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 혼란스럽고도 거대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어디서 이유를 찾아야 할까요. 개인의 의지에서, 자연과학에서, 사회 전체 속에서, 역사 속에서...? 저자는 끊임없이 다양한 시선을 불러와 고민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마지막에 이르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마지막까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소재와 주제를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비정상과 정상, 이름과 이름 없는 것들, 우등과 열등, 평등과 차별, 범주에 대한 고민, 역사와 과학, 삶 속의 그 거대한 혼돈, 사랑...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이 책은 작가가 빠져들었던 한 과학자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전기이자 평전이기도 하며, 자연과학 그 자체에 대한 인문과학서이기도 하고, 작가 본인의 삶을 다루는 수필이기도 하면서, 전체가 잘 짜인 플롯으로 이루어진 소설 같기도 합니다(나오는 장르도 드라마, 스릴러 등 다양합니다). 이 각각의 소재와 주제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풍부한 소재와 주제가 첨가되어 있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등장해서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흥미진진하고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