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白夜)
부제 : 한 몽상가의 기록
문학의 문외한인 나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등 러시아의 대문호 이름 정도는 읊을 줄 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이들의 그 많은 저서들 중 단 한권만 끝까지 읽어 봤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白夜)'이다.
이유는? 당연히 얘기가 길지 않은 단편이기 때문.
러시아 작가들의 글들이 워낙 장편들이어서 인내심이 적은 내게 맞지 않았었다.
그럼 단편보다 훨씬 짧은 푸슈킨의 시는? 시집을 통째로 다 읽은 적은 없다. 뭘 읽을지 기준을 시인 위주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페이지가 많더라도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고전은 재미있는 영웅담이어서 여름방학 며칠을 밤새워서라도 완독했었다.
이나마 아득한 내 10대 시절에서나 가능했다. 내가 고1학년이던 70년대 중반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과제로 고전명작을 읽고 독후감을 의무적으로 써 오게 하던 때였으니까.
(그렇더라도 제대로 써본 기억은 없다. 책 서두의 요약 부분을 그냥 베껴 냈다).
그 이후론 문학과는 영원히 '바이바이'. 이유를 묻는다면,
대학진학에 입사준비, 또 바쁘고 고달픈 직장생활을 핑게 대련다.
그런 내가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한 문고판을 고르다 우연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을 발견했다.
'이 양반이 단편도 썼네!' 부담없이 책을 뽑은 그날로 끝을 보았다.
글은 몽상가를 자처하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물의 도시(水都)에 그려지는 순수한 영혼의 꿈같은 사랑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습지에 도시가 세워진 탓에 수많은 운하와 다리, 울창한 자작나무숲들로 '북국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이곳에
봄이 온다(봄이지만 달수로는 5월쯤이 될 것 같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네바강(江)은 겨우내 꽁꽁 얼었다가 이제사 겨우 녹기 시작한다.
잿빛 하늘은 한밤중임에도 초저녁처럼 밝다.
창밖이 밝으니 잠못 이룬 사람들은 거리를 서성인다.
연인간에는 운하를 끼고 걸으며 밀회를 나누는 모습이 평화롭다.
긴긴 겨울을 하숙방에서만 뒹굴었던 주인공 청년 또한 생동하는 봄기운을 맞으러 강변에 나선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본 아리따운 한 처녀.
모두들 계절의 변화에 들떠 즐겁건만 외떨어진 다리 난간에 기대어
강물에 하염없이 시선을 두고 있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가만히 지켜 보자니 웬걸 표정이 너무 어둡다.
종내는 눈물을 글썽이다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질 것 같은 위험한 예감까지!
숫기 없는 청년도 이 상황에서는 뭔가 말을 걸어 투신을 막아야야 겠다는 생각에 처녀에게로 과감히(?) 다가선다.
그 사연을 듣고보니 실연(失戀)의 아픔으로 죽고 싶다고 한다.
이럴 경우 마음을 돌리도록 끈질기게 설득 작업을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주인공은 처녀의 남자친구가 약속장소에 오지 못하는 데엔 반드시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이런저런 말로 달랜다.
뭐 아직 딴곳의 강물은 덜 녹아서 배가 운항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배가 이 도시와 타지를 잇는 주된 교통 수단이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청춘남녀의 만남이 이뤄지는데, 다리 위의 그 장소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유일한 무대가 된다.
처녀가 애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장소에 청년도 안쓰러운 마음에 매일 같은 시각에 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아, 이건 단막 연극무대에 올리기 딱 좋은 소설'이란 생각을 기특하게도 떠올릴 수 있었다.
등장인물도 2명! 여자의 애인이란 자는 스토리의 말미에 멀리서 '나 왔어'라는 식으로 살짝 모습만 비치면 충분하다).
하지만 스토리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두 사람의 심정은 백팔십도로 뒤바뀐다.
처녀는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연인이 마침내 모습을 보이자,
내가 언제 상심에 빠졌었느냐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청년에게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달콤한 몽상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이런 때가 올 것임을 예견했을 리가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자기가 물에 빠진 상황.
그래도 이별의 진한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간직하고자 하고자 한다.
그동안 처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로해서 자신이 정말 행복했었다고 돌이킨다.
고마움을 표할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아닌가 돌아본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밤을 잊고 다감하게 나눴던 얘기들,
만날 때마다 셀레였던 그 순간들마저 없었더라면 자신의 삶은 얼마나 공허했을까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그렇게 감정을 애써 추슬리는 주인공의 독백에 내 가슴이 그저 '짠' 했다.
그 나이 때 풋사랑의 경험도 없었는데 말이다.
<네바 강. 모두가 겪는 '사랑'의 진한 아픔도 이 잔잔한 강물에 투영되면 아련한 추억으로 엷어질 것 같다>
작가가 한 낭만적인 몽상가의 일기를 빌어 얘기하는 사랑의 본질.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고 아름답다. 가지려고 꺾어 버리면 금방 시드는 꽃과 같지 않겠나'
그런 메시지가아닐까?
낮이 길어 여름은 무척 길 것 같지만, 겨울에 비한다면 여름은 금방 가버린다.
길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혼자서 우울하게 보낸 몽상가가 첫외출에서 만난 꿈 같은 사랑도 그렇다.
아쉽게도 그 사랑의 기쁨은 여름날의 백야처럼 짧기만 하다.
한 인생의 단면을 담담히 그러나 섬세하고 예리하게 그려낸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지금 같은 여름, 먼 북국의 하늘은 예나 다름없이 백야로 변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하얀 밤을 지새며 사랑을 엮어가는 그곳
연인들이 절로 정감있게 떠올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