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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창작][RPG] 무궁화와 목란화 - (2)

작성자렌지파일|작성시간24.04.16|조회수277 목록 댓글 1,345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 및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그리고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 같은 예도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실제 존재하는 국제적 역학관계를 찬양 또는 비판하거나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 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무궁화와 목란화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지도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것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제1보를 내딛어...

- 이재유
대장장이가 맨손으로 달궈진 철을 잡을 수 없듯이 노동계급은 직접적으로는 권력을 쥘 수 없다
-레프 트로츠키

3. 제네바 평화회담
6.25 전쟁 휴전 후 9개월이 지난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두 가지 문제를 두고 평화회담이 열렸습니다. 바로 한반도 문제와 베트남 문제였습니다. 지난 1953년 말, 6.25 전쟁와 관련된 국가들은 휴전협정에 명시된 사전회의를 열어 유관국이 전부 참가하는 회의개최를 결정하였었죠. 6.25전쟁에 참전한 15개 유엔 회원국과 남북한, 중국, 소련의 외교 대표들이 모여 한반도 통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그 누구도, 어쩌면 타국의 인사들도 실제로 통일정책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북한 내각이 '헛소리하면 중국과 소련이 먼저 동무들을 담가버릴 것'이라고 경고한 가운데, 오승택, 이덕삼, 비우익도 제네바로 향했습니다.

북한 대표단은 80여명의 대표단과 함께 제네바에 와 해외 대표단을 초빙해 매일같이 파티를 열 계획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정확히 대표단의 목적에 대해서 통고받은 것은 없던 3인은 사전조사를 진행했지만, 아무래도 이들은 주변 상황에 대해 대체적으로 잘 알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오승택은 한국의 조선인민당을 박살낸 장본인으로써 악명이 높았고, 비우익은 본인도 전쟁에 참전했으면서 한국이 왜 북한을 적대하는지 잘 알지 못할 정도였죠. 유일하게 이덕삼의 경우 무리한 대남 공작을 하는 대신 사회주의 국가나 중립국 인사들을 만나며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 호소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이념적으로 순수한' 이덕삼이었기에, 그는 북한의 국제적 평판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 파견된 북한 교관들이 아랍인을 상대로한 잔혹행위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중국 외무부장 천이는 그런 이덕삼에게 '그 잔혹행위를 덮어주는 것은 유대자본에 의해 붙잡힌 미국이라며, 그걸 누구라도 언급하는 순간 미국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외교관들의 추측대로, 한국 측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방안을 가져왔습니다. 한국 국회를 유지한 채로 북한 지방에서만 총선거를 추가로 실시하고, 심지어는 유엔군은 잔류하고 중공군은 철수하는 등의 방안이었죠. 미국 국무장관은 이미 귀국해버린 뒤였고, 5월엔 주유엔 한국대사인 임병직만이 3인에게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였습니다.

임병직은 조봉암과 장건상이 뉴델리에서 중립화 통일 방안을 위해 접촉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덕삼을 제외한 2인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고, 이는 두 명이 맞이할 파멸의 전조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임병직은 특히 민족 통일이나 항일 투쟁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오승택과 비우익에게 크게 분노하였죠. 위 아래로 8살은 친구라지만 25살 많은 임병직에게 젊은 소련파 인사들은 그냥 건방진 외국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제정신이던 이덕삼은 문득 휴전협정때를 떠올렸습니다. 재북인사인 강욱중이 기존 재북인사와 6.25전쟁의 국군 포로, 추가적인 납북인사들이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있으며, 임병직의 발언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여파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었죠. 세 명은 결국 이 사건을 덮기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승택과 비우익은 민족주의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고, 항일 독립운동가인 이덕삼은 사회주의를 포기할수 없었기에 내린 선택이었죠.

결국 제네바 평화회담은 한국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가운데 종료되었습니다. 재북인사들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중립화 통일방안도 실현되지 못하였죠. 분노한 재북인사들은 자신들이 아는 남로당 정권의 치부를 폭로하였습니다. 바로 외무상 이강국이 사실 미군과 내통한 경력이 있는 자란 것이었죠. 이강국은 즉시 사임하고 구속되었으며, 그 빈 자리에는 허정숙이 임명되었습니다. 신민당에 가담하지 않은 연안파를 우대하는 것과 동시에, 인망이 높은 허정숙을 통해 정권 지지를 높여보려는 시도였습니다.

4. 아편중독
한국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고, 대통령으로 이범석, 부통령으로 양우정, 총리로 허정이 선출되는 가운데 소련은 또 다시 북한에 무거운 과제를 던졌습니다. 바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던 북한 반체제 인사들의 귀환이었죠. 조만식 장로와 김익두 목사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을 필두로한 이들은 평양에 귀환하자 마자 기념예배를 드리고 북한 정권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참의 논의 끝에, 조만식이 단순 극우인사는 아니라는 현준혁의 비호로 문화선전성의 권력을 크게 키워 종교와 문화사업 전반을 관리할 강력한 권한을 주자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조만식의 경우 복권도 처벌도 따로 없었지만, 공산당의 두 기관지인 정로와 해방일보의 1면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주석인 홍남표와 상임위원단이 조만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문짝하게 실려 상당한 여파를 주었습니다. 조만식에 대한 선전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귀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북한의 복잡한 속내를 보여주는 것이라 주장한 한국 인사들이 남북 교회 교류를 주장하였지만 한국 국회에서 반려되는 일 또한 있었죠.

한편, 조만식의 비서였으며 비정치적 인사로 유명한 백석이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으로 선임된 뒤 제한적인 문학의 자유화를 이끌면서 북한에도 제대로된 문화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 정권의 의중을 아는 것 같다고 조만식에게 시비를 걸다가 최용건에게 끌려 나가고 오승택의 고발 투서까지 받은 비우익은 큰 위기를 가까스로 헤쳐나왔습니다. 비우익은 자신이 '비빌 언덕'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북한 정부는 이러한 종교의 제한적 허용과 문화적 황금기에도 정권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내무성 정치보위국을 국가보위성으로, 조선인민군 안전기관을 정치보위국으로 격상하여 독립 정보기관과 독립된 군 방첩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들은 문화선전성과 손잡고, 여러 도서에 정권의 입맛에 맞게 주석과 해설을 붙이며 간접적으로 검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대단한 충격이나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개신교 교회가 허용되는 동독과 같은 나라도 존재하였고, 무엇보다 교회와 예배가 허용된다고 헌금이나 종교 학교, 전도행위, 모태신앙 문제 등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하였으니까요. 김일성처럼 교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능욕행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문화적 혁명을 주장하는 즈다노프주의 사회주의의 입맛에 종교의 자유나 문화의 자유는 맞지 않았던 것이죠.

5. 재뿌리기, 초치기, 향피우기
한편 북한 외무성은 무척 바빴습니다. 동남아시아 조약기구와 아시아반공연맹을 비롯한 기구들이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공세 수준을 높이고 있었고, 그 와중에 북베트남 특사가 북한에 찾아온 것이었죠. 북베트남은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식량위기가 발생하였고, 아시아 최대 비료공장을 가졌으며 소련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북한에서 비료 수출을 시작으로 여러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모작 이상이 가능한 북베트남에서 왜 식량위기가 발생했는지 알아보자 실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마오쩌둥의 실각 이후 농업국가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이론적 기반이 부족한 중공 인사들은 중국과 북한에서 정통 스탈린주의식 정책, 즉 강경하고 빠른 농업집단화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들의 중심에는 친중 인사인 쯔엉찐 베트남 노동당 제1비서가 있었죠. 그러나, 서구 열강의 산업투자와 함께 진행된 스탈린주의식 중공업화와는 달리 이들에 대한 해외 투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코민테른 산하에 농업정책원을 설치하여 가맹'당'들의 농업정책을 전두지휘하고, 북베트남 농업정상화를 위한 비료 수출과 정책변경을 돕는 것까지는 순조롭게 이뤄졌습니다. 용병 수출국이 되어가는 북한 답게 양국의 상호 교관단 파견도 이뤄졌지요. 이외 북베트남의 잉여인력을 북한에 파견하는 협약 또한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쌀을 북베트남에 수출한다는 북한 외무성의 야심찬 계획은 아무리 일본의 민주당 내각이 독자노선을 추구하더라도 결국 자유주의 진영의 일부라는 사실때문에 좌절되었습니다. 일본이 진짜 제국주의(자본주의의 변종)를 추구하여 급격히 성장 중인 산업 수요를 수출할 시장 개척에 적극적이고, 이 시장은 옛 식민지 및 침략지역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죠.

오승택과 북한 내각은 협의 하에 북한과 일본이 접근하는 모양새를 취해 한국을 동아시아 자유진영 내에서 고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에 한일 수교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정계를 분열시키는 것이었죠. 한국 국회에서 일련의 소동이 일어난 뒤, 이범석 대통령은 평화선 내의 일본 어선 나포를 재개하며 한일 적대를 재개했습니다. 그 와중, 대만과 일본이 반공연맹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퍼져 반공연맹은 엎어지고, 대만에 한국의 특사로 파견된 김신이 장제스 총통과 논쟁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던 재일교포 북송에 이어 북일 민간무역이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이범석은 민단의 수장에 원심창을 앉힙니다. 원심창은 동료 아나키스트 정화암과 함께 섹트를 움직여 새벽 3시, 텅 빈 니가타 일본적십자 센터를 폭파해버립니다. 다음날 이범석이 이를 천벌이라고 발표한 것을 아무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은것은 덤이었죠.

5. 이밥에 고기국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의 식량난이었습니다. 1955년 초, 북한은 참담한 경제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중공업은 만족스러웠고, 경공업이 부진한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식량난이 발생한 것이었죠. 이는 안남미의 수입으로도 충당이 안되는 문제였습니다. 북한 인민들은 박헌영의 별명인 '조선 노동계급의 수령'에 빗대어 박헌영이 죽이나 먹인다고 '죽수령'이라 불렀고, 지도부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습니다.

이는 단순한 농업정책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이 40년대 말에 실시된 후, 북한의 농업은 자영농이 책임졌습니다. 이 자영농들은 양곡 가격 유지와 개인 수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아 높은 식량 생산량과 식량난에 동시에 일조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를 위해 도시로의 저가 양곡 공급을 하는 정책에는 당연히 적대적이었죠.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위로써 조사를 진행한 이덕삼은 충격적인 결론에 맞닥뜨렸습니다. 북한 정계와 사회 내의 복잡한 문제와 맞물려 전후복구 4개년 계획에 치명적 결함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죠. 근본적으로 북한 땅의 중공업 시설은 일제가 일본-한반도-만주가 맞물리도록 건설한 것이었고, 따라서 공장들은 원활한 일본으로의 수출을 위해 해안가에 건설되었으며 농업과 경공업 투자는 거의 없던 수준이었습니다. 광복 후에는 괜찮았지만, 6.25 전쟁을 거치며 산업기반이 한번 박살난 뒤에는 무리한 복구계획이 저가의 양곡공급을 도외시한채 준비되었습니다.

지방의 통제력이 강력하다면 총칼로라도 식량을 수급하면 되지만,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 실험으로 지방 인민위원회의 권력이 강화되고 북한 전역에 권력이 미치던 조선노동당이 쪼개진데다 재북인사와 종교계까지 힘을 얻으며 지방 식량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농촌에선 식량이 남긴 하고 도시에서는 모자란데 이를 분배하려면 비상계엄 외에는 답이 없어 그쪽으로 목소리를 내면 김일성 일파로 취급받게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덕삼의 조사결과를 보고받은 인사들은 농업 정상화 방안을 두고 분열했습니다. 정통 레닌주의자인 박헌영이 마땅한 결론을 섵불리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좌파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인사인 조석중이 농업협동화를 전면 중단하고 식량생산량 자체를 늘려 곡가를 낮추자는 방안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석중의 노선과는 자신의 사상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이덕삼은 박문규의 도움으로 '농협 방안'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일본의 농협에서 착안한 것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경악할 정도의 협동조합주의, 즉 파시즘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이 '농협법'의 원안은 최고인민회의에서 격론 가운데 부결되었고, 티토주의를 지지하는 오기섭이 가장 빠르게 수정안을 만들어왔습니다.

1955년 4월, 오기섭의 방안대로 협동조합을 반쪽짜리 영리단체로 변화시키고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유사 농협으로 탈바꿈하여 전국에 유통망을 설치하는 방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당장의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농민의 작므이 집중된 전농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기 시작하였죠.

북한의 농협 수립은 사회주의 진영에도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이를 말도 안된다고 일축하고, 중국의 경우 일부 인사들이 이러한 농협 방안을 지지하기는 하였습니다. 코민테른 농업정책부는 '농업정책엔 하나의 단일한 노선이 없다'라며 언급을 회피하였죠. 

한편, 이덕삼은 이 전농 설립의 공로로 농업상으로 영전하였습니다. 그는 1955년 6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회의가 열리는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였습니다. 3인방의 목적은 북한에도 원자력 에너지를 도입하는 것이었죠. 

핵개발을 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는 선에서, 일본이 건설한 석탄 중심의 고에너지 중공업 유지를 위해 막대한 전력이 필요했던 북한이었기에 3인방은 계획과 타협안을 준비했습니다. 중국과 손을 잡고 자체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공동으로 개발 및 건설하는 것, 소련의 지원을 받아 별도의 원전을 짓는 것이라는 두 가지 방안이었죠. 문제는 두 가지 방안 모두 원전이 완공되기까지는 10년은 걸릴 것이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전력수요는 충족할 수 없었죠.

재일본조선인연맹과 연이 닿아 있던 오승택은 어차피 수풍댐을 비롯한 북한의 발전소는 일본 기술로 지어진 것이니 과감히 일본의 기술과 기계를 도입해 빠르게 기존 발전시설을 보수 및 개량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모두가 이 방안에 동의하였지만, 민족주의자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이덕삼은 '조금이라도' 일본과 타협하는 모양새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국이 동아시아 자유진영에서 고립되면서 한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북한은 한국과 반대로 일본에 상대적으로나마 유화적일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일본에서 북한과 접촉을 원하는 이들이 옛 일제시대의 사회주의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일본과의 기술교류 방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며 일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거기서 끝났다면 괜찮았겠지만, 오승택은 그 소식을 듣고 이덕삼의 사임이나 해임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마치 이덕삼이 불세출의 영웅이자 천재인것 처럼 적은 기고문을 뿌려 이덕삼을 해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둘 중 하나만 일어났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진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3자이자 3인방의 상관인 박헌영이 볼때 이 모습은 마치 둘이 손 잡고 자신을 엿먹이는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방북을 원하는 일본 사회당 의원 후루야 사다오로부터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변호를 받은 경험이 있는 박헌영은 '나도 친일 매국노냐'면서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오승택의 기고문이 없었다면, 민족주의자인 이덕삼이 그냥 욱했거니 넘어갔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죠. 서른 한살의 이덕삼을 농업상으로 고속 승진시켜주었던 박헌영이 느낀 배신감은 강렬했습니다.

조석중은 재빠르게 오승택과의 연결고리를 잘라내었고, 이덕삼과 오승택은 즉시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결정권자가 아니었던 비우익은 졸지에 모든 결정권을 떠맡았고, 이덕삼과 오승택이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논의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쉐썬 박사와 미국 유학파가 귀국할 것이라는 중국의 말을 믿고 중국과의 원자력 공동연구, 일본산 경공업 제품을 밀수하여 소련 지도부를 움직여 북한 내 원전건설을 우선순위에 두게 할 것, 이덕삼이 반대한 '대일외교의 온건화'가 이 세자기였습니다. 

결국 세 가지 방안이 모두 채택되었습니다. 평안북도 영변군의 원자력 연구소, 조중 공동연구 원자로 1호가 들어설 영변군 인군의 태천군, 2호가 들어설 중국 랴오닝성 다롄, 함경남도 북청군에 소련이 지어줄 원자력 발전소가 계획되었고, 영변-태천-북청의 전력생산은 10년동안 차근차근 준비될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을 중심으로 일본의 고도발전에 편승하기 위한 기업들이 수립되었습니다. 이 기업들은 주로 사회주의 진영으로의 밀수사업인 '애국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죠. 남북 밀수루트가 정지되는 예상 외의 피해가 있긴 했지만, 소련과 중국에 북한이 영향력을 미칠 새로운 방안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의 젊은 당원들이 이에 반발하여 대거 탈당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죠.

하지만 비우익을 제외한 2인은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막간. 두 명의 운명
이덕삼을 해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각 수상 박헌영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최고검찰소의 지시로 내무서(경찰)에서는 이덕삼과 오승택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패와 뇌물수수부터 시작해 붙일 수 있는 것은 다 붙인 혐의들이었죠. 조석중은 인민공화당 기관지 광명일보에 이덕삼을 온건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직접 올림으로써 조석중과 오승택, 이덕삼이 관련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덕삼은 온갖 혐의와 그에 붙은 반혁명범죄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공무 중에 할 수 있는 발언이라며 범죄 구성 요건은 있지만 위법성 조각 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최고검찰소에서 불기소 처분이 결정되었습니다.

오승택은 그러나 반혁명적 범죄로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는 기소유예와 비슷하면 오승택이 행동을 잘못하면 언제든 동일한 혐의뢰 재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오승택은 헌법의 실시를 감독하고 현행 법령을 해석할 권한이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최고검찰소의 처분이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즉 헌법의 잘못된 실시) 헌법소원을 신청하였습니다.

오승택은 법관들이 참석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특별회의, 사실상의 헌법재판에서 기나긴 변론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말은 어느정도 근거와 논리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특별회의 인사들이 오승택에게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단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반혁명범죄자가 아니다 라는 말은 그럴듯했지만, 본인은 기고문으로 박헌영에게 엿을 먹인 다음 정작 박헌영이 재판으로 이덕삼에게 망신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 문제였죠. 또한 오승택은 공개재판을 요구하였지만, 상임위원과 법관들은 그랬다간 또 어떤 발언을 할지 모른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오승택의 체제비판적 발언이 공개되면 오히려 인민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에만 일조할 것이란 거였죠.

오승택이 소련 모처의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동안, 이덕삼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일본을 적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분노보다도, 그는 오승택이 '희생'했다고 결론내렸고, 이 결론은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을 터였습니다.


6. 태양이 질 때
1955년 5월, 소련 중심의 군사 동맹기구인 베오그라드 조약기구가 탄생하였습니다. 한국 정계가 자유인민당-자유당-민주당으로 분열되는 동안, 독재국가 남베트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루야 사다오를 대표로 한 일본 국회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박헌영과 재회하였죠. 김일성이 귀국을 막았던 재북 일본인들이 북한으로 귀환하며 북일관계의 해묵은 문제점 중 하나가 해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에는 아직 큰 사건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1953년 7월에 사임하고 기소된 김일성의 재판이었습니다. 검찰측은 헌법 14조, 27조와 28조, 55조 7번의 위배,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허위사실 유포, 반혁명적 의도로 사회주의 동지들을 탄압한 혐의로 15년의 유기노동교화형, 5년의 선거권박탈형, 재산몰수, 원수자격 박탈을 구형하였습니다. 사형과 무기노동교화형 아래의 최고 형량이었죠.

김일성의 변호사인 방학세는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 양일천의 회고록을 가져와 반박했습니다. 그가 반박하고자 한 혐의는 '항일 독립운동 위조'혐의였죠. 회고록의 내용은 과장 섞인 김일성의 증언에 양일천이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것이었기에 신뢰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재판 도중 이덕삼에게 접촉한 박금철은 지난날의 반목은 잊고 남로당과 연계되지 않은 국내 항일투쟁파로써 '정통파'가 다시 뭉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민족보위성 부상이자 남로당파의 간부 중 한 명이지만 갑산파와 함께 활동한 경력이 있는 조일봉이 증인으로써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항일활동에 대해 증언하는 동안, 이덕삼은 박금철의 함께하자는 제안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박헌영과 다시 접촉하였습니다.

박헌영은 이덕삼에게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진 오승택의 이름을 팔아 재판을 손쉽게 끝날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었습니다. 김일성의 항일활동이 가짜라고 증언한 강위룡을 처음 초청한 것은 오승택인데, 오승택이 '증언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가 왜 강위룡을 초청했는지 알 수 없었죠. 박헌영은 이 '모호함'을 이용하여 김일성의 항일활동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어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도리어, 오승택과 박헌영과의 사이가 최악이란 사실은 알려져있었으니 박헌영은 이 문제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도 있었죠.

이덕삼은 그럴 바에는 '옳은 길'로 가야 박헌영 정권의 정통성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박헌영과 이덕삼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은 채였고, 박헌영은 이덕삼이야말로 '북한을 위한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경고하였지만 그의 말을 따라 김일성의 항일 독립운동이 조작되었다는 혐의를 철회하라 지시하였습니다.

김일성에게는 결국 5년의 유기노동단련형(기본권 제한 없는 교화형의 한 형태), 5년의 선거권박탈형, 막대한 벌금, 원수자격 박탈이 선고되었습니다. 


7. 비밀 연설
북한이 김일성 격화를 끝낸 동안, 소련에선 더 큰 일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죽음과 베리야의 제거 이후, 소련의 강제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무차별적인 탄압이 중단된 사실은 이미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죠. 스탈린의 오른팔이자 온건파로써 스탈린의 무차별적 숙청에 제동을 걸면서도, 세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문화예술을 철저히 탄압한 즈다노프가 최고 지도자에 오른 지금 소련의 모순적인 분위기에는 언뜻 기대감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김일성 실각에 도움을 주었던 소련공산당 제1비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신과 함께 김일성 격하 연설문을 작성하였던 박정애를 필두로 한 북한 대표단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흐루쇼프는 트로핌 리센코의 농업이론을 소개하며 몇몇 인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진짜 목적은 스탈린 격화와 관련하여 북한 인사들의 경험을 '수확'하려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베리야를 제거하고 말렌코프를 길들이면서 즈다노프 정권의 2인자로 떠오른 흐루쇼프로써는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북한의 '민주주의 실험'을 밀어준 장본인 중 한 명으로써 스탈린주의 통치를 지속하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고, 그렇다고 북한의 경험을 버릴 이유도 없었죠. 비우익, 이덕삼, 조일봉 3인은 나름의 의견을 내었습니다. 스탈린 이름 석 자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의견은 '그럼 스탈린 없는 스탈린주의' 통치가 계속될 수 있다는 의견 때문에 반려되었고, 결과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트로츠키주의'였습니다.

정확히는 트로츠키의 말년에 배반당한 혁명을 중립으로 규정된 '볼셰비키레닌주의'라는 노선이었기에, 1920년대에 트로츠키가 보여주었던 군사독재자적 모습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는 사실 트로츠키의 이름을 빌려 스탈린을, 그리고 필요하다면 레닌까지 비판하며 전면적인 개혁정책을 펼치기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습니다. 실제로 트로츠키가 복권되고 트로츠키파 인사들이 대거 초청받기는 했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스탈린 정권의 중핵이었던 흐루쇼프가 있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였죠.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즈다노프는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를 발표하는 연설 자리에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던 러시아 혁명의 영웅 중 한 명인 니콜라이 부하린을 초청했습니다. 70이 다 된 고령의 부하린은 혁명의 지도자로써 기립박수를 받았고, 즈다노프는 자신의 노선이 실제로 부하린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사실 여부와 별개로 밝히며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해석'에 기반한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가 보장되었습니다. 이는 즈다노프-흐루쇼프의 결별이라기 보단, 정치적 반대파들의 분노를 누르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갈라서기'였죠.

그러나 이것이 소련에 정말 소비에트민주주의나 다당제 정치가 도입되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멘셰비키, 즉 사회민주노동당과 옛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와 유대노총(분트) 등이 복권되고 재건되었지만 이들은 결국 공산당이 '활동할 수 있게 허가한' 단체들에 불과하였습니다. 과거의 노선과 과거의 당원들이 돌아왔지만 그뿐이었죠. 사형제가 폐지되고 강제수용소가 줄고 있지만 정치범들은 이제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이 불편한 속내를 감추며 스탈린 격화에 발맞춰 즈다노프 쪽을 지지하는 동안, 흐루쇼프는 경제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농업의 제한적인 자유화를 비롯한 온갖 정책이 시작되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각 지방의 경제계획에 개별 인민이 소비에트를 통해 직접 참가할 수 있게 한 것이었죠. 이는 티토주의의 시장사회주의와는 또다른 '분권형 계획경제'의 개념이었습니다.

흐루쇼프가 지나가듯 언급했던 리센코가 사이비 과학자란걸 눈치챈 북한 대표단이 일찍이 리센코의 용불용설을 비판하였던 계응상 박사와 소련 모처에서 요양 중이던 유전학의 거두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불러온 공세에 처참하게 몰락하는 동안, 태생이 군인인 조일봉은 모스크바 주의 칼리닌그라드에 위치한 OKB-1 비밀 연구소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 버금가는, 어떤 부분에서는 더 뛰어난 로켓 기술을 가진 소련은 거대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 중이었습니다. 군인으로써 거대한 미사일에 혹해버린 조일봉은 미사일 도입을 주장하였습니다. 리센코의 몰락을 지켜본 뒤 찾아온 외무부상 비우익과 농업상 이덕삼은 몇가지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미사일 기술 담당자인 소련 방산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대장은 우주개발에 필요한 로켓인지 미사일인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명확히 할 것, 대륙간 탄도 미사일 기술은 줄 수 없음 등등 여러가지 조건을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이덕삼이 오승택을 잘못 언급하였다가 한국어를 수상하게 잘 하는 우스티노프의 통역관에게 '오승택 곁으로 갈 수 있다'라는 경고를 받는 사이, 비우익과 조일봉은 결국 단일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조일봉은 차라리 즈다노프가 직접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요청하였고, 우스티노프는 웃으며 '상신하겠다'라고만 밝혔습니다. 이덕삼의 발언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던 평양에서도 기뻐할 결정이었습니다.

 

동유럽의 국경이 재조정되고, 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동요하는 동안 조석중 또한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민공화당을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옛 이름으로 개명한 뒤, 단일 원내교섭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탈퇴를 발표하고, 신민당과의 선거연대 및 통일된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천명했습니다.


조선공산당(남로당파), 인민민주주의 :박헌영, 이현상의 남로당파는 조선 본토에서 초기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극좌 정파입니다. 이들은 소련 노선을 북한 땅에 맞게 해석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갖췄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콤그룹), 정통맑스주의 :이관술, 이순금 등의 콤그룹은 남로당파가 일제의 탄압으로 은신해 있을 때 일제에 맞서 투쟁한 투사들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정통마르크스주의 성향이 있으며 이상적이고 급진적으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파에서 기원한 남로당파와는 달리 고려공산당 상해파에서 기원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이북 국내파), 볼셰비키레닌주의 :현준혁 등 일찍이 김일성을 반대했다가 실각했던 이북 국내파는 우익과의 합작에 적극적인 온건파 집단입니다. 이들은 남로당파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북한에 지지기반이 있기 때문에 남로당파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정통파), 스탈린주의 :박정애, 최용건을 비롯해 본래 김일성 지지파였던 이들은 주로 북한에 지역기반이 있는 군인과 기술자들입니다. 이들은 북한의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자급자족과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기관지 :정로]
조선공산당(소련파), 레닌주의 :허가이, 정상진을 비롯한 소련계 고려인 인사들은 북한 내 지지는 별로 없지만 소련에서의 국가 및 당운영 경험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본래 김일성을 지지했지만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기관지 :정로]
조선민족혁명당, 부하린주의 :의열단의 후신인 조선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의 정당으로써 인민공화당이라는 과도기의 이름을 버렸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조선신민당과 화해하고 세를 크게 불리고 있습니다. [기관지 :광명일보]
조선신민당, 신민주주의 :최창익, 김두봉 등으로 이뤄진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북중국에서 반일 투쟁을 펼친 조선신민당은 연안파라고도 불리며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세력입니다. 어느 정도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은 경공업 자급자족 노선을 지지하며, 반대파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합니다. [기관지 :전진, 독립신보]
천도교청우당, 혁명적 민족주의 :주로 청우당이라 불리는 이 정당은 민족주의 정당이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지지합니다. 천도교 종교색은 생각보다 약하며, 독립운동 당시의 전설적 경력 때문에 ‘말 잘하는 청우당’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기관지 :개벽신보, 당성]
조선민주당, 기독교 민주주의:이들은 기독교 민주주의, 민족주의 정당입니다. 사회주의 북한에서 이들의 입지는 넓지 않지만, 북한 땅은 본래 엄청난 기독교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는 조선민주당으로 향합니다. [기관지 :조선민주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티토주의 :오기섭, 허성택 등이 있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직후 조선 내 공장을 노동자 자주관리로 장악한 경력이 있는 직맹은 지금도 노동자 자주관리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단체입니다. 조선공산당의 '부활' 이후, 조선직업총동맹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습니다.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조선인민당, 중도맑스주의 :여운홍, 장건상, 강기덕의 조선인민당은 콤그룹, 이북 국내파와 사이가 친한 민주사회주의 정당입니다. [기관지 :조선인민보]
민족자주연맹, 진보주의 :중도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평화주의, 진보주의 단체인 민족자주연맹은 비공산주의-비자본주의 중립국가로써 남북한 평화통일을 지지하지만, 현재로써는 북한 측에 기울어진 정치단체입니다. [기관지 :조선중앙일보]
한국독립당, 삼균주의 :전설적인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좌익 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정당입니다. 옛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기관지 :독립당당보]

 

 

여러분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1) 한반도 내에서 어떠한 형태, 어떠한 규모로든 '독립된 자주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 수호할 것.
2) 일왕 숭배의 연속선상에 있는 개인숭배, 일인 독재 체제를 철저히 혁파하고 다시는 비슷한 체제가 등장하지 않게 할 것.
 
[최종 목표 1 :독립된 사회주의 체제 건설 및 수호] :진행 단계 2/6
[최종 목표 2 :개인숭배와 일인 독재 혁파 및 재발 방지] :진행 단계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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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32 new E.E.샤츠슈나이더 터키에서 체포된 인구 수가 인구비례대로 헝가리혁명때 잡혀간 수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18:33 new 렌지파일 진짜... 억압 테크로 갔다가 부활 시킬라면 제대로 조져야죠 ㅋㅋ 진짜 자연스럽게 할라면... 어휴 ㅋㅋ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18:36 new E.E.샤츠슈나이더 당하고도 정신 못차리는 바보들이 있죠 ㅋㅋ... 사실 민족 볼셰비즘이면 낫지 나치 (소시민 지도자 파시즘. 군부 지도자 민족주의(...)) vs 공산 (노조 공산주의 지식인 공산주의.) 였으므로 참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ㅋㅋㅋ

    + 아 근데 영향권 진짜 언제 나올지 ㅋㅋㅋ... 계획은 영향권 조지다가 유로파 4 한글 패치 나올즈음 갈아타는건데 반대가 되겠어요 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시간 19:06 new dear0904 ”재산 안뺏겠음“ 원툴로 집권 ㄷㄷㄷ
  •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30 여담으로, '함정 선택지'는 대체역사 루트로 간 이상 좀 줄어들 예정입니다. 특히 이전 의회민주주의 루트처럼 노골적인 함정(발칸엔딩) 같은건 앞으로 없을....없..아마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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