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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내 조국에 소련은 없다 - 03(完)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4.23|조회수339 목록 댓글 199

 


 

08. 가장 길었던 하루

 

긴 해외일정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일행들은 도시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총참모부의 니콜라이 라텔 총사령관은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를 부르더니 대뜸 ’최고소비에트 항의방문‘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해방49년(1919년) 3월 카자크 공화국 위수사령관 이반 디오니시오비치 스워지니치니 중장은 카자크 치안대와 외지인 자경대 간의 첨예한 분쟁사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전임 국방장관 사빈코프가 지시하고 당시 총참모장 루즈키 상장이 승인한 이 인사이동은 꽤 의외의 것이었는데, 스워지니치니는 돈-쿠반 카자크 지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미트리 본치브루예비치 총참모장의 말에 따르면“ 스워지니치니 중장은 자경단과 치안대의 대립 속에서 한 쪽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현지 치안 안정’이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치안대 병력을 향해 발포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지인들이 카자크 공화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에는 이런 속사정이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의 입장과 정치권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연합’에서 중앙의 군인이 가맹 공화국의 정식 치안병력을 제거하고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무죄면 연합이 유죄라네.” 압크센티예프 총리는 프랑스 혁명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바레츠노프에게 확실히 주지시켰습니다.

 

민주당, 사회혁명당, 사회민주노동당의 입장(책임자 엄벌, 군의 정치개입 금지, 파견위원제도 제정)이 일본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일치단결된 7월 11일, 드디어 청문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청문회장에 출석한 스워지니치니 중장은 그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습니다. 실내 체육관을 개조한 최고소비에트 건물의 ’관중석‘에는 의원 수보다 많은 군인, 카자크, 유족,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청문회에서 판결을 내리거나 형량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의 증언과 발언이 중장의 실제 처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죠.

 

3대 인민군 체계 개혁안에 자체 합의한 뒤 이를 자축하는 소비에트 의원들

 

사회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의원들이 스워지니치니에게 (유일하게 사형 선고가 가능한)국가반역죄 기소를 주장하는 가운데, 일행들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라면서도 차근차근 사건기록을 반추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부 대표격으로 출석한 크라피엘이 의원들의 반군인정서를 진정시키면서 세레브랴코프의 대질심문을 유도하고 바레츠노프가 군과 정치권의 타협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사회민주노동당 강경파의 두 젊은 요원들은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을 생각했습니다. 본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데이비슨은 애시당초 자유공화국연합 체제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을 수립하기 전 잠깐 거쳐가는 단계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체슬라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가 (일견) 스워지니치니를 옹호하는 것으로 판단한 체슬라프가 스워지니치니를 “학살자”라고 비난하며 군부와 맞서려 하자, 그의 후견인 스탈린은 급하게 그의 발언을 막았습니다. 스탈린이 이끄는 당 지도부는 청문회의 분위기를 극단화해 군부의 분노를 유도, 그 군부를 등에 업고 또 한 번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구상에 적극 찬성한 데이비슨은 체슬라프에게도 계획을 전달했고, 체슬라프는 조직국 서기로서 로스토프의 당 지부에 사건의 상세보고를 요청했습니다.

 

한편,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는 스워지니치니의 진술에서 뭔가 쎄한 점을 잔뜩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내 병력”, “내 부대” 등 사병私兵화를 암시하는 단어를 사용했고, 자신이 “공화국의 혁명정신 유지를 위해 거사를 벌였다”는 등 영웅주의에 경도된 발언을 거듭했습니다. 의원들이 이에 혀를 차며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였죠. 뿐만 아니라 관중석에서는 스워지니치니 중장이 치안대 포로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는 놀라운 증언이 잇따랐고, 군부 측에서는 인사권자인 사빈코프 당시 국방장관이 이러한 사건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상하고 사건사고를 빌미로 군을 통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정치권의 뜻대로 움직일 수도, 군부의 희망대로 중장을 구할 수도 없게 된 세레브랴코프는 군부의 음모론을 그대로 받아 사빈코프의 청문회 소환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뒤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는 그 자신은 물론 크라피엘의 경력마저 끝장낼 수 있을 정도의 선택이었죠.

 

카자크 치안대의 모습. 사진에 찍힌 6인은 로스토프 사건 당시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가 정치인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로스토프의 사회민주노동당 지부 책임자 라브렌티 베리야는 그간 미리 조사해둔 심층보고서의 핵심내용을 요약해 즉각 모스크바로 전달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했는데, 사실 치안대와 자경단의 세력비는 오히려 자경단이 약간 앞서는 수준이었으며 민족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스워지니치니 중장은 자경단을 친위세력화해 ‘임의적 판단’으로 카자크에 대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크라피엘이 의원들을 사실상 윽박지르며 군부-정치권 갈등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데이비슨은 급히 의사당을 나섰습니다.

 

사빈코프와 아까의 그 여인을 증인으로 소환해 소비에트에서도 사건의 진상을 차차 파악해나가는 동안, 길가의 오토바이를 뺏어탄 데이비슨은 곧장 모스크바 근교 크라스노고르스크에 있는 인민군 총참모부 건물로 향했습니다. 단신으로 철조망과 담장을 넘어 경계병 두 명을 기절시킨 뒤 벽을 타고 올라가 니콜라이 라텔 총사령관의 집무실 창문을 통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한 데이비슨은 깜짝 놀란 라텔 장군에게 권총을 들이밀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얼어붙은 라텔은 그녀의 다음 발언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죠.

 

“누.. 누구인가! 사빈코프, 그 자가 보냈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같은 사회주의 동지입니다, 니콜라이 요시포비치 ‘동무’. 저희는 이번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스워지니치니 장군 동지가 투철한 혁명정신을 가진 엄연한 아군이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를 지키지 못하면 러시아 인민군... 아니, ‘붉은 군대’는 영원히 부패한 정치가들의 꽃놀이패로 전락할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원하지 않는 배속을 받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을 뿐인 지휘관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수백명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보는 자리에서 망신주는 것이 ‘사회민주주의 러시아’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군은 더 이상 은인자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부의 중립 같은 것은 반동국가에서나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허섭스레기일 뿐입니다. 니콜라이 요시포비치 동무, 동무께서는 혁명가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전장에서, 현장에서 혁명을 위해 힘쓴...! 그 댓가를 받을 수 없다면, 직접 쟁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비에트의 반동주의자, 그에 찬동하는 기회주의자들을 일거에 쓸어내고 진정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합시다.”

 

소비에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전달받지 못한 라텔 총사령관은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가 위험에 빠졌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틀린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죠. 사빈코프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단지 인민군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군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일으킬 작정임이 분명했습니다. 라텔 상장은 그러한 분석을 전제로 지극히 상식적인 조건을 데이비슨에게 전달했습니다.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에게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을, 자신에게 상황 통제가 가능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달라는 것이었죠. 또한 군사혁명 이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실무진들을 최대한 안배하라는 조건도 추가되었습니다.

 

의원들, 카자크, 그리고 일반 인민들과 엉키며 빠져나가는 군인들

 

그렇게, 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스크바를 경비하는 수도경비단에게는 즉각 수도를 에워싸고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청문회를 참관 중인 군 간부들에게는 즉각 그곳을 빠져나와 (모스크바로 진군 중인)병력에 합류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습니다. 사빈코프와 격렬한 언쟁을 벌이던 세레브랴코프와 크라피엘에게도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군인들이 단체로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바레츠노프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습니다. 단순히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죠. 당연히 총참모부 등에서 지령을 받았을 것이었습니다. 급변사태를 짐작한 바레츠노프는 체레텔리 의장에게 출입구를 봉쇄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회민주노동당 강경파 및 민주당 민족주의파를 따르는 인물이었습니다. 체슬라프가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지시키자 의장은 즉각 봉쇄했던 문을 재개방했죠.

 

차량을 타고 총참모부 방향으로 향하던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는 제3수도경비여단 병력과 함께 있는 데이비슨을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죠. 데이비슨은 병사들을 선동해 두 장군을 헹가래쳐 쿠데타를 막기 위한 행동을 봉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둘의 행동이 더 빨랐습니다. 크라피엘이 거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실패를 감지한 데이비슨은 총참모부에서 했던 가락 그대로 주변 병사들을 제압하고 도망치려 했으나,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죠.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데이비슨은 그대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무선통신장치를 통해 라텔 총사령관에게 “데이비슨이 억류되었음”을 전달한 크라피엘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라텔은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또 다시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텔은 실의에 빠져 지휘권을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에게 이양했죠. 그들은 빠르게 행동했습니다. 체슬라프와 스탈린, 체레텔리, 슐긴 등 “민족공산주의” 연합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여단들의 원거리 포위를 유지하는 한편 약간의 호위병력을 이끌고 소비에트로 복귀해 상황을 ‘수습’하는 방안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09. 반혁명(反革命)

 

수도방위단장 니콜라이 쿠이비셰프 소장에게 병력으로 모스크바를 포위하라는 새 명령서가 전달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 제3수도방위여단장(대령)을 포함한 동원병력의 최선임자들, 그리고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는 모스크바 시내로 진입해 최고소비에트 의사당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여전히 아수라장이 된 채 절반도 남지 않은 의원들이 벌벌 떨고 있던 의사당에서는 유일하게 민주당 자유주의파의 영수 밀류코프만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한 세레브랴코프, “힘 없는 자유주의”를 냉소하게 된 바레츠노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던 크라피엘은 마치 바그다드에서, 마치 프라하에서와 같이 또 한 번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소비에트를 어떻게든 수습하려 하는 파벨 밀류코프 임시의장(컬러 복원)

 

크라피엘의 제안에 따라 인민군 총사령관직을 영구히 폐지하고 예비역 장성이 국방장관을 역임하여 군과 정부의 화합을 도모하는 타협안이 도출되었고, 밀류코프는 최고소비에트 임시의장 자격으로 즉각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정부와 의회가 모두 무력화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극단주의 세력을 일소하고 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한 ‘공안위원회’의 설립을 공식화했습니다. 공안위원회의 위원장으로는 군민 양쪽의 신뢰를 받는 인사, 즉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원수가 추대되었죠.

 

공안위원회는 3년간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데 힘썼습니다. 스탈린, 체레텔리, 슐긴 등에게 국가반역죄가 적용되어 사형이 선고되었고, 데이비슨은 미국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추방 및 송환되었죠. 공안위원회, 그리고 민주당 자유주의파와 사회혁명당 잔존파 등을 규합한 ‘질서자유당(Партия Права и Правды)’ 정권은 “법, 질서, 정의”라는 세 마디를 강조하며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 상태를 되찾았습니다. 변침파, 민족공산주의, 제3국제당 등 기존 좌우익세력을 상징하던 단어들은 그대로 ‘반역’과 동의어로 취급받았습니다. 스워지니치니 중장이 군법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동안 세속국가법은 폐지, 암암리에 유지되던 정부의 기업 경영권 간섭 역시 ‘시정’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0. Epilogue: 법, 질서, 그리고 정의

 

독일에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사회민주당이 군신동맹을 맺고 사민당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모두 포기한’ 기괴한 키메라로 변모해가고 있을 때, 그리고 프랑스가 센 강을 경계로 독일의 괴뢰국과 파시스트 국가로 분단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는 ‘정치’가 차근차근 거세되어갔습니다. 3년간의 육군참모총장직을 끝으로 원수 계급장만을 받아든 채 군문과 정계를 모두 떠난 크라피엘이 자발적 은둔을 선택한 탓에, 정부와 ‘두마’를 조정하는 역할은 세레브랴코프 및 그 추종자들, 그리고 ‘바레츠노프 가문’의 피후견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전자는 구 사회혁명당 출신이자 우익으로 전향한 바딤 루드네프를, 그리고 후자는 러시아 패권주의를 주장하는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등의 정치인들을 후원하며 ‘명사 정치’를 이끌어나갔죠.

 

바딤 루드네프(좌), 그리고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우).

 

정치적 이상, 사상의 차이 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습니다. 어제의 사회주의자가 오늘의 민족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평화주의자는 내일 “즉시 전쟁”을 외칠 수 있는 곳이 바로 1930년대의 러시아였으니까요. 그 말을 증명하듯, 1934년 권력을 되찾은 바레츠노프는 자신의 발언을 세 번이나 정반대로 뒤집었습니다. 쑥대밭이 되어버린 중부 유럽을 정리하고 독일의 폭주를 막기 위해, 서쪽의 파시스트들과 손잡는다는 선택을 내린 것입니다.

 

본래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이가 그 누구보다 권력을 탐하는 법인 걸까요? 정치인들을 불신하던 세레브랴코프는 누구보다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했고,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소비에트에서 홀로 중용과 평화를 외치던 바레츠노프는 누구보다 호전적인 대외정책을 추동했습니다. 심지어 법정 최후변론에서 크라피엘 등을 조롱하며 “권력욕에 솔직해지라”고 발언한 데이비슨 역시 전세계에서 ‘미완성 혁명’을 잔뜩 생산한 끝에 자본주의 세계의 아이콘으로 변모해버렸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참아내는 것이야말로 ‘난세’를 살아가는 교과서적인 방식이나 다름없으니, 치열하게 살다 간 다섯 명(또는 여섯 명)의 인간 군상에게 박수를 보내도 좋을 것입니다.

 

 

Fin.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네요. 모두들 수고 많으셨고, 참가해주셔서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늦지 않게 다음 작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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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4.25 E.E.샤츠슈나이더 사실 이름과 생년월일만 있는 걸 보면 아시겠지만 대부분이 미정입니다 (...) 직업 자체는 변호사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4.25 dear0904 탈라노프 부녀(...)의 피해망상+뉴라이트 기질을 반반씩 섞어놓은지라, 다행히 RPG 와중에 전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ㅋㅋㅋ 불신이 문제겠지만..?
  •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25 "(북진)통일전선 이상없다"의 프롤로그화 표지입니다.

    주인공은 '닥터 리'이며, 매 화마다 그때그때 비중있었던 실존인물들로 대체할 계획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4.25 요주의 인물(박통 등)이 표지에 안나와야할텐데 말이죠 ㅎ..
  •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25 프롤로그화 작성에 2시간 쓰는 건 또 처음이네요. 아무튼 0화 올렸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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