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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京城、昭和35年の秋 - 02 : 제국의 역습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8.19|조회수398 목록 댓글 848

 

 

 

03. Build-Up

 

1961년 4월의 봉기는 잔혹한 진압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알제리를 곧 독립시켜야 하는 처지였던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들을 강제로 독립시키는 데 압력을 행사했었던 일본을 향한 복수를 준비했습니다. 국제연맹 총회에서 프랑스 대표단은 일본 제국의 강경진압을 비난하는 한편, 영국과 함께 상하이에 정보기관의 화이트 요원들을 보내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하려 했죠.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드빌이 원래는 ‘이소성’이라는 이름을 쓰던 공산당원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이들은 모종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과 접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조직’의 2인자와 3인자로 가장한 창경원과 오라클은 주상하이조계 프랑스대표부 공사 라울 파스칼, 그리고 영국대표부 참사관 이언 파월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만 일행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영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확히는, 프랑스 쪽에서는 꽤 열의가 있었으나 영국 쪽은 상당한 신중론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은 정부승인 불가(대신 교전단체로 승인), 독립 프로파간다 방송국 건립 지원은 내용 검열 하에만 허용, 무기 지원 불가라는 제한적인 조건만을 내걸었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은 창경원과 오라클은 영국 쪽을 적당히 넘기고 프랑스 공략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오랜 정보기관 및 외무부 경력으로 잔뼈가 굵었던 라울 공사 역시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알아채고, 보다 진지한 태도로 교섭에 나섰죠. 결국 문제는 조선의 독립투쟁이 어떠한 중심적 실체도 없고, 무장단체도 산발적이며, 한마디로 “믿고 지원해줄 담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연히 일본의 분노만 사고 얻는 건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었죠. 결국 라울 공사는 “무기를 당장 직접 지원해줄 수는 없지만, 어딘가(즉 중국)에서 만들어진 무기를 조선으로 반입하는 것을 묵인해주겠다”는 제안을 꺼냈습니다. 즉 프랑스나 영국 국기를 단 상선으로 무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었죠. 나머지 조건들은 향후 다시 교섭하기로 하고, 이들은 일단 작별을 고했습니다.

 

외부의 도움은 역시 조건부였습니다.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된 실체가 필요했죠. 첫 번째는 군대, 그리고 두 번째는 정부였습니다. 군대를 창설할 적임자는 대한의용군을 운영하는 백악관, 그리고 그 자금과 수완을 제공해줄 수 있는 베르사유였습니다. 진압군에서 조선인들이 적잖게 탈영해 양적으로는 산발적 독립투쟁가들이 불어났지만, 그들을 한 깃발 아래 묶을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품이 많이 들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간부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해 의용군의 존재를 알리고 가맹을 권하는 것이었죠. 이렇게 대한의용군은 ‘대한 공화국군’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고, 리더가 필요했던 각지의 게릴라들은 공화국군의 명목상 휘하 부대가 되었습니다.

 

 

무기 공급 역시 당연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수송 루트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교섭으로 확보했으니, 생산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베이징의 중화연방국 중앙정부(그리고 수십만명의 병력으로 그 배후를 자임하는 일본)를 적으로 두던 동부오성연군 사령관(난징 군벌) 천청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베르사유를 만난 천청은 “일본 놈들을 회치는 일이라면 얼마든 협조하겠다”며, 공장에서 생산되는 무기를 50 대 50으로 나눈다는 조건으로 관할지에 공장을 세우는 데 동의했습니다. 프랑스제 MAT-49 기관단총, 그리고 소련의 14.5mm 블라디미로프 대구경기관총(KPV) 복제에 성공한 공화국군은 빠르게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고, 이들은 열띤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혀댈 준비를 마쳤습니다.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맡은 것은 드빌과 아고라. 임시정부 잔존세력으로 대표되는 우파, 각지의 비공산주의 좌파, 그리고 소련에서 온 박헌영을 따르는 친소 좌파의 대표들이 모처에 모였습니다. 미하일 로디오노프 주석이 이끄는 소련은 자신이 독립시킨 식민지들을 다시 괴뢰국으로 삼는 ‘적대적 M&A 전문가’였기 때문에, 박헌영이 세력을 잠식한다면 독립투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들에게 잠식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비공산 좌파의 거두 장건상 선생을 주석으로 추대하려던 임정 및 기타 세력들의 제안을 박헌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민주적 선거를 명목삼아 자신들이 조직을 장악하려는 속셈이 뻔했죠.

 

호랑이를 잡으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드빌은 박헌영과 직접 대면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드빌은 소련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박헌영에 관한 사항을 문의했습니다. 뜻밖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소련 측은 “박헌영이 고위당원을 살해하고 허가 없이 조선으로 도망간 범죄자”라는 사실을 흔쾌히 알려줬습니다. 또한 일본 당국을 대신해 그의 신변을 인도해준다면 사례하겠다는 제안 역시 보내왔죠. 이미 명분에서 이기고 들어간 드빌은 권총을 보여주며 박헌영을 압박했고, 한편으로는 백악관에게 연락해 공화국군 병력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한 박헌영이 전위대를 동원해 드빌을 살해하려고 할 때, 때마침 백악관과 공화국군 병력들이 KPV 중기관총을 설치한 픽업트럭을 타고 도착해 위협사격을 가해왔습니다. 마치 포성과 같은 KPV의 묵직한 발사음을 들은 전위대들은 혼비백산하여 주저앉았고, 박헌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권총을 겨누다가 사살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이름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원안대로 주석은 장건상, 부주석은 구 임정 출신의 선우진, 그리고 책임서기로 이소성(드빌)이 선임되었죠.

 

모든 준비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새 극동 담당관으로 임명된 ‘전쟁영웅’ (그리고 고려인) 알렉산드르 민은 연해주 등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75만명의 고려인들을 조선 문제에 동원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화국군이 건국동맹의 위세를 압도해 마치 군이 정부를 가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문제점이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병력을 30만명까지 모으고 무장을 마쳤다 한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나중에라도 꼭 해결해야 하겠죠.

 

 

04. 제국의 역습

 

시간은 어느덧 흘러 1962년 2월이 되었습니다. 공화국군 완장을 찬 자생적 무장집단들은 지리산, 태백산맥 일부, 낭림산맥 일부 지역에서 자체적 해방구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해방구들 중 대부분은 일본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와해되어 산악 게릴라로 전환되었지만, 주민들에 대한 포섭을 최우선시하던 게릴라 투쟁가들의 전략 덕분에 진압작전은 생각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어떤 해방구들은 게릴라 대원들이 그대로 마을을 몇달동안 통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건국동맹 및 공화국군에 가담한 세력 및 지도자들 중에는 그리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지리산 일대를 점거한 공화국군 남부지대 지휘관 '이현상'은 호남 지역의 토호이자 자치론자였던 송진우를 납치해 인민재판을 개최, 참혹하게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한때 춘원 이광수로 알려졌던 자치론자 '가야마 미쓰로' 역시 평양에서 테러로 살해당했습니다.

동경의 이케다 총리는 공화국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시에, 조선 자치령화 안건을 꺼내들었습니다. 골자는 이렇습니다. 1) 조선총독부를 조선특별행정청으로 개칭, 행정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체제를 구축한다.(행정장관은 일본국 총리대신이 임명한다) 2) 직능별, 지역구별로 선출한 의원들로 하여금 자치의회를 구성케 하여 내정에 관련한 사항을 자문하게 한다. 3) 조선적을 가진 모든 이들의 국적은 일본으로 한다. 4) 조선 자치정부는 제국정부의 감독 하에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 5) 4항에도 불구하고, 외교와 국방, 통화정책, 사법권 등은 중앙정부에 위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본의 이러한 분열책은 어쩌면 조선 민중을 분열시켜 동경의 입맛대로 일이 진행되게끔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심각성을 느낀 건국동맹과 공화국군 간부들, 그리고 각 부문의 간사였던 일행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나섰습니다. 이광수가 살해당한 것이야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였지만, 송진우까지 살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꽤나 여파가 컸기 때문이죠. 좌익 투쟁가 이현상 휘하의 공화국군 남부지대 병력이 송진우를 납치 후 살해하고 다른 지주 및 부유층에 대해 인민재판을 강행, 그들 역시 살해하거나 조리돌림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중앙의 의사와 다른 군 병력의 일탈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므로, 모인 이들은 통제를 위한 수단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건국동맹 측은 정부 측 인물인 파견위원(즉 정치장교)을 파견하는 안, 공화국군 측은 군 간부인 행정참모를 파견하는 안을 제시했죠. 여러 논의가 오갔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군에서 행정참모를 파견하되 최종선발절차에 관한 사항은 정부가 관장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또한 6개월 뒤에는 각 해방구 및 지대에 행정관을 파견해 제반사항들을 관리하기로 했죠. 지휘관 이현상 역시 일단 보직해임하고 현지에서 군법재판을 치르는 안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일단 수습은 이렇게 하고, 일본의 이간책에 대한 대응 역시 논의해야 했습니다. 모두의 공통된 의견은, “응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였습니다. 특히 창경원은 이따위 제안을 보낸 수상을 암살해 욕보여야 한다는 말까지 꺼냈죠. 회의 참가자들은 일본이 굳이 이 시점에 이런 제안을 날린 이유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지만, 내부 분열을 만들 수는 있는 제안이라... ‘시간 벌기’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서 시간을 벌면서 꼭 해야 하는 일은, 중국의 일이었죠. 중국에 파견되었던 병력이 조선으로 대거 재배치되면서 베이징 정부의 영향력은 급감했고, 난징 군벌 천청이 남방대원수이자 중화인민보국군(中華人民保國軍) 대원수를 자칭하며 남중국 군벌들을 규합한 상황에서, 일본은 무엇을 할 계획이었을까요?

 

백방으로 연통을 돌려 알아본 결과, 일본은 아예 천청에게 중국을 넘기고 조선과 만주를 공고히 지키며 출구전략을 실현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보국군과의 협상이 잘 풀린다면 일본은 조선 독립세력을 말려죽일 수 있을 것이고, 이 기회를 날린다면 조선은 두 번 다시 독립을 꿈꿀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이 회의를 반드시 실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말입니다...

 

 

05.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지난 회의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무슨 일인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소피아가 갑자기 난입, 베르사유의 멱살을 잡고 폭행하며 폭언을 퍼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 바로 회의장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연락을 피하던 소피아였지만, 건축가와 동료들의 갖은 설득은 그녀를 다시 회합에 참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소피아의 요구조건은 간단했습니다. “베르사유를 추방하지 않으면 자신은 더 이상 대의에 참가할 수 없으며, 베르사유같은 기회주의자이자 이기주의자가 고위직으로 있는 독립된 조국에서 사느니 어머니의 조국인 일본의 자치령에서 살겠다” 베르사유는 이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소피아의 이스탄불 살롱을 쑥대밭으로 만든 잘못, 그리고 어릴 적부터 배어온 부유층의 습관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대의에 투신하겠다는 다짐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그도 보통 사람이었기에 흔들릴 때가 없진 않았으나, “전재산을 건국동맹에 기부하고 귀족원 의원직을 사퇴하며 건국동맹 재정부장으로 취임함으로써 독립투쟁 가담 사실을 공표하라(즉,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와 동지들의 신뢰를 얻어라)”는 건축가의 제안 역시 고민 끝에 수락했습니다. 백지수표와 함께 말이죠.

 

그러나 조선인과 내지인 양쪽으로부터 배척받은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았던 소피아는 끝까지 베르사유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설전이 사실상 비난전으로 향해가던 중, 보다못한 창경원은 그들의 머리채를 잡고 책상에 이마를 강하게 찧어 기절시켰습니다. 건축가는 창경원을 가볍게 질책하며, 둘 간의 화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둘 중 누구를 남길 지에 대해 투표로 정하자고 제안했죠. 그러나 동료들은 사실상 투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동지를 축출하는 것에 대한 생득적 거부감을 가진 드빌, 그럴 필요까지 있냐던 창경원, 감정싸움 자체를 비생산적으로 보던 아고라... 백악관과 오라클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자 건축가는 “민주적으로 결정할 생각이 없다면, 이 회합의 책임자로서 ‘조직과 대의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강행하겠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베르사유를 살해하고 재산을 가로채자는 오라클의 제안에도, 건축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죠. 결국 모두가 의견통일에 실패하자... 건축가는 권총을 빼들어 베르사유를 처형했습니다.

 

베르사유. 그가 ‘죽을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매국노의 자손으로 태어나 호의호식한 점, 동지에게 개인적인 피해를 입히는 실수를 저지른 점, 옛 버릇을 미처 고치지 못해 동지들에게 밉보인 점은 있었으나, 그것이 ‘죽을 죄’였을까요?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릴 결심을 하고도 동지에게 불신받은 이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는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죠.

 

이후 동지의 운명을 인질삼아 과도한 주장을 강요한 소피아에 대한 추방 역시 논의되었으나, 이는 동지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 점을 깨달은 소피아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약간이나마 치유되는 것을 느꼈고, 다시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뜻한 남쪽에서 휴식기를 가지고 복귀할 소피아는, 해방된 아버지의 조국에서 어머니의 후손들이 가혹한 처우를 당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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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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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8.22 dear0904 권력욕과 야망이 쩌는놈이 최고 지도자 자리 넘본다면 그걸 부추겨 하극상 퍼레이드를 시작할수도 있겠죠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08.22 dear0904 맞다. 🏅1⭐️이 여기에 있지...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8.22 dear0904 분리글에 이벤트 올라왔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하일레 셀라시예 | 작성시간 22.08.22 E.E.샤츠슈나이더 최교수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고, 군혁위와 이왕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정보를 접한 후에 판단을 내릴것입니다만...

    1. 군혁위가 이왕가를 온전한 허수아비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이왕가에 어느정도 힘이 존재하는가?
    2. 군혁위는 독립이후 자발적으로 정권을 민주, 혹은 왕당파에게로 양도할 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3. 이왕가 내부에서 의친왕 이후 독립운동에 힘썼고 승계서열도 낮지 않아 왕으로 옹립할 만한 자가 있는가?

    위의 세가지 조건이 전부 만족할시 완전 찬성. 한가지라도 부족할시 찬성하고 주도권 경쟁. 셋 다 글러먹었을 경우 일시 합류 이후 통수각

    + 입헌군주주의+능력중심 관료주의자 최교수는 사실 엄청 고민중이긴 할겁니댜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2.08.22 하일레 셀라시예 아 글이 아니네요 다른글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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