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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썩은 밀알도 약이 되는 신비/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4.03.29|조회수132 목록 댓글 4

◼요한 12,20-3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원래 교우들이 공식적으로 와서 미사를 드리는 2주 4주가 아니라 혼자 미사를 드리는 날인데,

그토록 보고 싶어 꿈에도 그리던 서운동 자매님들 6분이 오시어 경당에서 함께 미사 드리고 있습니다.

오시니 좋고 신부님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생각이 들죠?

뒤돌아보면 고생 많이 했던 때가 기억나고 그래서 재밌게 살았던 내가 기억나요.

사제는 첫 본당과 마지막 본당이 아주 중요해.

첫 번 땅에 실패하면 계속해서 그 트라우마가 쫓아다녀요.

그리고 마지막 본당에서 상처받으면 은퇴하고 난 다음에도 행복하지 않다고 해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나는 은퇴 성당에서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상처가 많이 은퇴했을까요?

맞아요. 행복해하며 은퇴했어요.

그래서 서운동 신자들 늘 보고 싶고 생각이 나죠.

그렇지만 은퇴한 신부님들이 자기 있던 본당에 안 가는 것은 가톨릭의 전통이에요.

나도 엎어지면 코 낳을 곳에 감곡 성지가 있지만, 혼배 때문에 딱 한 번 가고 안 갔어요.

가보고 싶어도 혹시라도 현재 일하는 신부님, 더군다나 지금 본당 신부님은 내 아들뻘 되는 아주 젊은 신부님이시죠.

신부님이 필요할 때 날 부르면 내 도와주겠다, 그런데 부르지 않죠.

그러니 그만큼 어려운 거죠.

아무튼 여러분들 보니까 4년 동안 서운동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쭉 지나가요.

코로나 때문에 다 힘들었고 미사도 못 하고.

하지만 유튜브 강론을 계속했는데, 피정 때 신자들을 만나보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미국에서 왔는데 코로나 확진돼 병원에 끌려갈 때 신부님 유튜브 들으며 고비를 넘겼다.’,

‘정말 자살 충동까지 있었는데 신부님 유튜브를 우연히 전해 듣고 정말 힘든 시기를 넘겼다.’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참 하느님께 감사드리죠.

정말 기를 쓰고 유튜브 강론했었으니까요.

신자들이 이렇게 찾아와서 만나고, 즉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나이가 안 들어 보여도 이제 하나하나 시원치 않은 곳이 나타나거든요.

앞으로 10년이면 80인데, 건강관리 잘해도 앞으로 15년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피정도 1년에 10번 이내로 줄이고 있지만,

그래도 팔다리가 망가져서 못 움직여도 마지막까지 입은 살아있을 테니,

유튜브 방송만큼은 침대에 누워서라도 몇 마디라도 전하리라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담이었고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제일 중요한 구절이 ‘밀알’이죠.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입니다.

 

옛날 시골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잔치를 벌이곤 했어요.

어느 마을에서 내년 정초에 모일 때는 술을 사 오지 말고 각자 담근 술을 가져오자 했어요.

그래서 다들 내년의 모임을 위해 열심히 술을 담갔겠죠.

이제 동네 잔칫날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옷도 잘 차려입고, 돼지도 잡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각자 담근 술을 가져와 큰 독에 모두 부었죠.

‘맛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정성껏 했으니, 올해는 다른 해와는 분명히 다를 거야.’

모두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고 술독에서 술을 퍼서 한 잔씩 다 돌렸습니다.

그런데 ‘건배’하면서 딱 들이켰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 맹물이었어요. 술맛이 하나도 안 난 맹물이었어요.

‘왜 맹물이지?’ 아무도 말 못 했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맹물을 마치 맛있는 술처럼 시늉하면서 마실 수밖에 없었어요.

내막이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짐작이 가시죠?

‘남들이 다 술 가져올 텐데 나 하나쯤 맹물 붓는다고 표시가 나겠어?’

동네 사람들이 전부 다 그 생각하고 맹물을 부은 거죠.

술을 가져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날 공개적으로 왜 물 가져왔냐는 얘기는 한 사람도 얘기할 수가 없어.

왜? 동네 망신이라.

이웃 동네에서 온 사람은 달래서 이제 보낸 거죠, 소문내지 말라고.

이렇게 개망신을 당하고 난 다음부터 그 동네 사람들은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합니다.

‘나 하나쯤’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나만이라도’라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모두 ‘나만이라도 해야지’라고 생각하니 동네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야.

왜냐하면 그날 동네 사람이 다 충격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렇게 못됐구나. 남들이 다 거짓말해도 나만이라도 진실하게 살자.’ 다짐한 거죠.

다른 사람들이 요령을 피워도 나만큼은 난 요령을 안 피우겠다는 마음들을 가지니

동네에서 합심해서 일을 할 때도 빠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동네에서 누가 장가를 가지고 잔치를 벌여도, 다 하나같이 일손 걷어들고.

그전 같으면 요리 핑계, 조리 핑계가 안 나오던 사람들도 새벽부터 나와 일을 하면서 정말 다른 동네에 모범이 되었죠.

그러니까 오히려 맹물 사건이 그 동네에 전화위복이 된 거죠.

맹물을 가져옴으로써 참 살기 좋은 동네를 이루었다고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오.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하시죠.

우리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 삭막하고 썩어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밀알처럼 썩으라고 명하시지요.

순조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썩으라 그러시나?

그런데 주님께서는 역설적인 얘기를 많이 하셨죠.

5리 가자면 10리 가주고, 오른뺨 치면 왼뺨도 대주고, 겉옷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줘라.

세상 사람들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주님은 하셨어요.

밀알처럼 왜 썩어야 하지?

예수님의 삶이 입으로만 얘기하시고 당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공염불이 되지만

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같았죠.

당신이 그렇게 살다 가셨어요. 밀알처럼.

 

현대 영성의 위기는, 나는 썩지 않고 다른 사람만 썩으라고 강요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성당에서 강론 들을 때 가슴에 와닿아요.

그러면 그것이 내 이야기라 생각하고 자기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을 쿡쿡 찌르죠.

‘졸지 말고 들어, 인간아. 네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이게 현대 영성의 위기야.

5리 가자는 사람에게 10리 가줘라. 오른뺨 치면 왼뺨도 대주라.

사실 이런 것은 많이 알고 있죠.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힘들어요.

이론적으로는 우리 별것을 다 알지만, 솔직히 우리 몰라서 행하지 못합니까?

그것을 행하는 데는 너무나도 힘이 들고 시도조차 못 해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죠.

 

이렇게 시도조차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우리한테 뭐가 부족해서 성경의 좋은 말씀은 다 알고 있는데 막상 현실로 내 앞에 딱 들이닥치면,

왜 내 탓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상대편의 검사 역할을 할까?

뭐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어서 그래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내가 듣고 배운 것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생기죠.

그리고 절제력이 생기고 분별력이 생기죠.

사제도 마찬가지죠,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사제는 그냥 직업이에요.

성령을 체험하지 않으면 사제도 미사 드리는 기계, 얼굴엔 기쁨이 없어요.

‘우리 신부님 몇 년을 같이 지켜봤는데 생전 웃는 걸 못 봤어.’

‘우리 수연이, 내가 몇 년을 같이 옆에서 살았는데 너무 차가워, 하는 말마다 상처를 줘.’

‘저 수녀님 오시고 난 다음부터 신자들이 더 냉담해.’

하지만 성령을 체험한 신부님이 오시고 나면 ‘신부님 오신고 사람들이 많이 나오네.’

왜? 따뜻한 것은 전염이 되거든.

그런데 우리 얼굴에서 이방인이 볼 때 기쁨이 없고 성당 나간다고 하는 사람이 외인 동네에서 살면서 손가락질을 받고,

‘입만 열면 남 험담하는 사람 저 사람 천주교 신자래, 돈 빌려 가면 안 주는 저 사람은 천주교 신자래.’ 한다면,

이것은 그 천주교 신자만 욕 얻어먹는 게 아니죠.

우리 뒤에 예수님을 시궁창에 빠뜨리는 거거든.

그래서 우리가 정말 분별력을 갖고 주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밀알처럼 썩으라는 것을 못 하는 이유는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기억나세요? 내가 크리스천 영성을 세 가지라고 그랬죠, 뭐죠?

첫 번째 바보의 영성, 두 번째 연탄불의 영성, 세 번째 걸레의 영성.

바보의 영성. 예수님이 바보처럼 살았던 것처럼,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라 지혜로운 바보이고 분별력이 있는 바보죠.

또 연탄불의 영성은 뭐예요? 시커먼 놈 붙이려면 불기가 있는 놈이 밑으로 내려가야 하죠.

나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위에 버티고 있으면 그 불붙은 놈마저 꺼져요.

맞죠? 시커먼 놈에게 불붙이려면 내가 밑으로 내려가야 해.

냉담하고 있는 내 남편, 냉담하고 있는 내 며느리, 외인에게 하느님 알게 하려면 내가 밑으로 내려가야 해.

시어머니가 며느리 밑으로 내려가야 해.

예수님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갔잖아요.

우리 보스가 내려가는데 왜 우리는 못 내려가요, 그렇죠?

봉사라고 하는 게 입으로 하는 봉사가 아니라 남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죠.

서운동성당에 처음 가서 ‘참 저분 대단하다.’ 생각한 것이 신부님 아버지.

택시 운전하다가 틈만 나면 오시어 화장실 청소 다 해.

처음엔 누군지 몰랐어요. 그런데 신부님 아버지시래요.

아마 그 신부님 아버지는 아들 신부를 위해 희생을 바치고 있을 거예요.

‘우리 아들 신부가 흔들리지 않게, 주님, 이 애비의 작은 희생을 보셔서 우리 아들 신부 올곧게 살게 도와주십시오.’

그런 희생이 바로 연탄불의 영성이고 걸레의 영성이야.

밀알로 썩으라는 얘기는 바로 이거거든.

걸레는 뭐예요?

항상 더러운 거 닦는 게 걸레죠.

사용하고 잘 모셔둡니까? 한적하다 이렇게 툭 던져놔요.

그렇다고 걸레가 항의 안 하죠. 나 왜 이렇게 대접하느냐 걸레는 항의 안 해요.

‘저를 실컷 쓰시고 아무렇게 두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전 언제든지 준비하고 있어요.

내 몸에 똥을 묻히셔도 되고 더러운 것을 묻혀도 상관없어요.’

걸레 존재 이유는 더러운 것을 닦는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로 세상에 더러운 것을 다 닦아주시다가 가셨잖아요.

우리가 닮아야지요.

그래서 본당에서도 걸레처럼 살아야 하고, 연탄불처럼 살아야 하고,

작은 바보가 돼서 예수님 닮은 작은 바보, 지혜로운 바보가 돼서

행복 바이러스를 내 주변에 퍼뜨리고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그런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바로 밀알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사람 살아가는 유형이 세 가지 있다고 그래요.

첫 번째는 거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개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고,

세 번째는 벌이나 나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대요.

 

거미는 벌레가 걸리기 쉬운 쪽으로 공중에서 실을 빼 거미줄을 친 다음 벌레가 날아들기만을 기다려요.

그리고 칭칭 감아놓은 다음 아주 그냥 진을 다 빼먹잖아.

다시 말하면 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못된 인간들도 세상에 너무 많아요.

양심에 아무 가책도 없이 내가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사는 인간들 많아.

한국말 중에서 제일 위험한 말이 뭔지 압니까?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살자’는 말이에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벌어서 살 때는 폼 나게 살자, 그거예요.

이 말만큼 무서운 말이 없어.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 그죠?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과정이 악하면 그건 악이에요.

거미는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서 거미줄을 치고 이기적으로 살아요.

 

두 번째가 뭐라 그랬어요? 개미.

개미 무지하게 부지런하죠.

그런데 개미의 제일 큰 약점은 뭐예요? 옆을 안 봐요.

자기한테는 무지하게 충실한데, 옆에 누가 도와달라고 해도 그냥 계속 걷던 길만 걸어요.

절대 옆에 안 봐.

현대인들이 바로 개미 같아요. 극단적인 이기주의.

‘나 너한테 해 안 끼쳐, 너도 내 일에 간섭하지 마.’

‘너 어려워한 거 네가 해결해. 난 나 살기도 바빠.’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야.

다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그러니까 요즘은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면 올까요, 안 올까요?

옆집에서 안 와요.

내 방문부터 확인해요. 우리 집에만 안 들어오면 돼.

그래서 요즘은 ‘불이야’ 하고 소리 질러야 해.

그러면 자기 집에 불붙으니까 뛰쳐나와요.

도둑이야 하면 안 나와요, 해코지당할지 봐.

요즘은 길거리에서 어떤 행인이 젊은이한테 얻어맞아도 그냥 가요.

차 안에서 소매치기하는 것을 앉아 있는 사람이 보면 소리 지를까요?

안 질러요.

딱 보고서 ‘ 이고 저 소매치기네’ 하면서 다른 곳을 보든지 잠자는 척해요.

당하는 놈 니가 알아서 해결해라 이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 몇이 힘을 합치면 제압할 수 있는데도 용기가 없어.

현대인들은 정말 분노해야 할 때는 비겁함 때문에 찍소리 못하고,

참으면 덕이 될 것에는 그저 자기 손해 볼까 얼마나 차갑게 삽니까?

개미가 바로 그런 존재거든.

 

마지막 세 번째가 벌이나 나비.

벌과 나비는 자기 일에도 충실하면서 큰일을 하죠.

뭐? 꽃이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잖아.

아인슈타인이 그랬어요. ‘이 지구상에서 벌이 없어지면 그때가 멸망할 때다.’

그런데 요즘 꿀벌이 없어지잖아요? 안 돼요.

과학자들이 왜 벌들이 자꾸 죽는지 분석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전류 때문에

벌이 나갔다가 집을 못 찾아온다. 또는 오염 문제도 이야기해요.

벌이 그만큼 인류한테 중요한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벌처럼 살아야 해요.

자기 일에도 충실하면서 가끔은 나보다 더 힘든 사람한테 얼굴을 돌려야죠.

얼굴만 돌리는 것이라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뭐가 필요한지를 알아서 도와주어야 해요.

돈이 필요하면 내 돈을 쪼개서 줘야 하고 쌀이 필요하면 쌀을 줘야 해요.

옆집에 아파서 힘든 사람이 있는데 나는 내 집에서 ‘성모님, 옆집 좀 도와주세요.’ 기도만 해?

그러면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냥 귀퉁배기 한 대 갈겨요.

‘저 사람 둘러업고 빨리 병원에 가. 나는 너를 통해 저 사람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냥 기도만 한다고 해결이 돼?’

그게 살아있는 신앙이에요. 그죠?

우리의 기도에는 분명히 결과가 있어야 하거든요.

밀알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라는 얘기죠.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님 아시죠?

아마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역사상 최단 시간에 성녀가 되신 분이 그분일 겁니다.

나는 군종신부 마치고 제일 먼저 꽃동네 원목 신부로 갔어요.

갔더니 걸인들은 잔뜩 모여있는데, 봉사자들을 보니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지명수배 피해 도망 온 범법자들도 있고, 전과 몇 범인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때는 오 신부님이 혼자 이런 것을 모두 선별할 능력이 없지.

오 신부님 머릿속에는 1년에 건물 하나를 지어야 하는데, 건물을 지으려 정치인들도 알아야 하고 로비도 해야 하니

환자를 돌볼 수도 없고 봉사자를 선별할 수도 없는 거예요.

처음에 갔더니 꽃동네 병원 있잖아. 그때 초창기였어요.

환자들이 숨을 못 쉬는 거야. 산소호흡기가 없는데.

산소호흡기 하나 가지고 1층부터 위에까지 돌아가면서 그걸 쓰고 있네.

어떡해요.

그때 내가 포니2 군종 제대하며 샀는데 그거 팔았어요.

그거 팔아서 각층 산소호흡기 하나씩 올려놓았죠.

그때도 오 신부님과 의견이 안 맞았던 것 중 하나가, 오 신부님은 자꾸 확대만 하는 거예요.

나는 반대했죠. 현재 여기 있는 사람이라도 질적으로 정성을 다하자.

그러면서 ‘신부님, 저는 인도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정부에서 돈을 주려 해도 안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전 세계에서 오는 자원봉사자의 도움만으로 유지가 된다고 하셨죠.

데레사 수녀님이 엄청나게 위대한 일을 한 분이 아니에요.

인도는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 크니까 골목마다 아침에 보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죽기 직전의 그 사람들을 데려다 목욕 깨끗이 시키고 옆에서 임종을 지켜준 거예요.

그리고 손을 잡아준 거예요.

이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이 죽어요.

얼마나 슬픈 일이야.

그래서 이런 사람이 적어도 죽기 전에 ‘나도 이렇게 사랑을 한 번 받아보고 죽는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지

치유하려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어요.

옆에서 그냥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 미소 지으면서 지켜봐 주고

고통이 있는 사람한테 폐인 컨트롤하는 약 주면서 덜 아프게 한 거죠.

데레사 수녀님 수도회는 지금도 인도 정부로부터 한 푼도 안 받아요.

그래서 내가 오 신부님한테 이렇게 우리들이 혈세를 자꾸 받기 시작하면

이것이 우리를 분명히 옥죄일 때가 있을 것이라 말씀드렸죠.

왜냐? 데레사 수녀님이 그러셨거든요.

‘인도 정부에서 세금으로 들어온 돈으로 원조해 주면 연말에 분명히 감사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이 그 준비해야 해요. 그것 안 받고 그 시간에 나가서 일하겠다 이거예요.’

저는 그때 꽃동네의 목적은 꽃동네를 없애는 것이라 했어요.

왜요? 꽃동네가 필요 없는 세상이 돼야 하죠. 그것이 선진국이죠.

꽃동네가 있는 한 ‘꽃동네’가 아니라 ‘고통네’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살다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거기서 치유받고 따뜻한 밥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잠자고.

오 신부님 큰일 하시는 거죠.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들은 밀알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숨은 밀알들이 있죠.

꽃동네 봉사자들, 또 제천에 가면 프란치스코의 집도 비슷해요.

그리고 서울에도 여러 군데 평신도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정말 자기 재산 다 털어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노숙자들 일주일에 두 번씩 점심 먹이고, 정말 숨은 밀알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밀알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품어요.

 

우리 각자 무슨 큰 시설 지어 큰일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집에서 성가정을 이루는데

우리 식구들 하나하나가 한 알의 밀알로 썩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거예요.

내가 주부로서 엄마로서 하나의 밀알이 되어 내 가정을 성가정으로 이루는데 한 알의 밀알로 썩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어떻게 썩을 것인가를 늘 묵상해야 해요.

또 남편도 아내 앞에서 어떻게 썩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성가정은 이탈리아제 십자가만 방마다 걸어놓는다고 성가정이 아니죠.

천주교 교우의 집 문패가 붙어 있다고 성가정이 아니죠.

그것은 다른 문제죠.

 

항상 자기는 안 썩고 상대편만 썩기를 강요할 때 상처라고 하는 것이 생겨요.

나 하나쯤 맹물을 떠와도 될 것이라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항상 분열을 가져와요.

성당에서도 그렇잖아요? 어느 성당에서도 보면 일하는 사람만 일하죠.

차려놓으면 와서 항상 불평하고만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설거지통에 손 한 번 안 담그면서, ‘뭐 이렇게 했어?’ 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인간도 꼭 있어.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 보고 상처받을 필요 없어요.

그런 사람은 그것이 악습이죠.

 

이제 2주간 남은 사순절 동안 내가 하느님과 이웃 앞에 얼마나 썩고 있는지,

반성의 허리띠는 제대로 묶여 있는지 아니면 풀려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주님 앞에 거룩하게 썩을 은혜를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4년 사순 제5주일 (3/1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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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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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Lee MY | 작성시간 24.03.29 걸레는 온갖 더러운 것을 다 안아도 불평을 말하지 않아요
    그리고 촛불은 자기몸이 뜨거운 불로 태우며 뜨겁지만 눈물을 흘리며 남을 환하게 해요
    이렇게 살아야 한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 하고 남을 사랑하는것이 나를 사랑하는것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29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별초롱 | 작성시간 24.04.03 신부님 강론 말씀 늘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4.05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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