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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신부 강론

2월 17일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2.18|조회수45 목록 댓글 1

2월 17일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 합니다. 


어떠한 구속에서 벗어나서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세상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식구들의 잔소리, 쓸 데 없을 정도의 구속 등에서 때로는 혼자 있는 
자유로움을 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중성이 있어서 또한 구속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때로 신문 광고를 보면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또 다른 구속의 연대를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게 되지요. 

학교 동문, 심지어는 ‘띠 동갑’ 운운하며 서로의 연대를 다지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서로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연대하는 구속을 받으려는 
이중성이 있나봅니다. 

특히 연대에는 다른 사람을 배타시키면서 특정한 구속연대를 지속하려고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별한 테두리를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결속을 하면서도 
타인을 철저하게 밀쳐내는 오래된 관습의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강대국에 예속되어 지배만 받아 오던 
그들이다 보니 ‘이스라엘’이라는 연대를 통하여 철저하게 자기들을 지배하는 제국들 때문에 
‘이방인’이라면 자동적으로 ‘원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무시하고 폄하시키려는 
민족감정을 만들어 나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배타적인 관계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미움과 무시의 대접을 
받은 묘한 부류가 세리입니다.

물론 세금자체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는 데다가 민족감정까지 겹쳐 세리는 
철저하게 동포로부터 질시와 무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로마도 동포도 아닌 재물이었습니다. 

돈을 만지다 보니 당연히 떡고물도 떨어지고 그들은 거기에서 부당한 방법으로도 이익을 보고 
재물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재물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비례해서 사람들과의 벽이 생기고 별개의 계층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정서에 개의치 않으시고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의 신분인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큰 잔치를 벌입니다. 세리들과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합니다. 

바리사와 율법학자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에게 비아냥거리는 
말을 건네지요.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1-32절)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서로를 갈라놓는 두 부류, 의인과 죄인 층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갈라놓은 이 벽을 허물고 서로 평등함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병 든 이를 고쳐주시는 주님께서는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완전하고 죄가 없는 위선으로 행동하는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주님을 필요하지도 않고 오히려 배타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병들고 죄로 얼룩진 이들은 주님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아프지 않거나 죄가 없을까요? 그들의 교만과 위선이 주님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그 반대의 사람인지의 잣 대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로 화해로 이끄는 사람이 그 전자이고 그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편으로 갈라놓고 
흩어지게 하거나 미움의 그룹으로 만들어 버리면 후자이고 그는 사탄과 가깝거나 
사촌간의 되는 셈이지요. 

사탄을 다른 말로 ‘디아볼로’로 하는데 그 어원은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언젠가는 죽어야하는 사람은 사실 죽음의 그늘에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고 죄의 그늘에서 갈등을 갖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세리를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도 부르십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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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2.1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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