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광화문에서 시작해 조계사를 거쳐 인사동까지 걷는 것이 나의 주말 도심 산책이다.
비가 내리는 오늘 인사동 전시장 몇 군데를 돌았는데 백악미술관에서 인상 깊은 서예 전시회를 관람했다.
일중서예대상을 받은 김양동 선생의 초대전이다. 1943년 생인 김양동 선생은 글씨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보여줬다.
정통 서예뿐 아니라 수묵화의 확장으로 현대적 느낌의 화풍을 보여준 작품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김양동 선생은 서예 하시는 분이라 당연 한시에도 일가견이 있을 터, 오늘 본 작품 중에서 김시습의 시를 인용한 그림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서예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없기에 넘어가고 마음에 깊이 와 닿은 김시습의 시와 그의 인생 이야기다.
*김양동 작품, 김시습 시 부세풍파(浮世風波)
김시습을 안 것은 오래전에 이문구 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읽고서였다.
그동안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쓴 사람이라는 정도였는데 이 소설로 김시습의 일생에 관심이 생겼다.
일천한 내 한문 실력으로 더듬더듬 그가 남긴 한시를 읽었다. 김시습을 알자 여행지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 갔다가 그의 부도비를 봤고 그가 금오신화를 썼다는 경주 남산 용장사지에서 그의 흔적을 바람결에 더듬기도 했다.
1435년 한양에서 태어난 김시습은 스무 살 무렵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중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다.
보던 책을 불사른 후 머리를 깎고 조선 팔도 곳곳을 떠돌게 되는데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의 시를 읽어 보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뿐 아니라 금강산, 묘향산 등 북쪽 지방까지 떠돌았던 광활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유랑하는 중에도 늘 조정에 대한 관심을 갖고 사는데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을 묻어주기도 한다.
김시습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한 지인이 물었다.
속세를 떠나 살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절간에 조용히 머물면서 살지 왜 그리 고단하게 세상을 떠도느냐는 말에 그가 답하는 시가 바로 부세풍파다.
浮世風波如許闊 (부세풍파여허활)
靑松白石遠人間 (청송백석원인간)
舊遊踪跡如春夢 (구유종적여춘몽)
得失多慚不出寰 (득실다참불출환)
뜬 세상 풍파가 이같이도 드넓다니
푸른 솔과 흰 돌은 인간 세상에서 멀고말고
옛 놀던 자취는 봄날의 꿈만 같아
세상 못 벗어난 잘못 부끄럽다오
김시습은 1493년 58세로 세상을 떠나는데 말년에 그가 병든 몸을 의탁했던 무량사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파릇한 스무 살 청년이었던 김시습은 평생 부끄러움 속에 떠돌며 살다 설잠(雪岑) 스님으로 이곳에서 입적했다.
김시습은 후손도 남기지 않았고 무덤도 없다. 대신 무량사에 가면 그의 부도탑을 볼 수 있다.
출생 시기가 다름에도 인연이란 이렇게도 묘한 것, 김양동 선생 서예 작품 속에서 김시습을 만나 나의 옛 추억을 돌아본 날이다.
나같은 따라지 인생은 풍파가 있기에 더 살아 볼 만하지 않겠는가.
김양동 작, 翰墨游戱(한묵유희) - 붓과 먹을 가지고 즐기는 것을 말함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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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11 ㅎ 운선님도 매월당 선생을 좋아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도 오늘 전시회 때문에 오래전 읽었던 김시습 시를 생각했지요.
제 삶이 미천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습니다.
5백년 전 한국 사람도, 3백년 전 터키 사람도, 백년 전 아르젠티나 사람도,,
참, 에전에 강릉 매월당 기념관을 갔었는데 그때 운선님을 알았더라라면 커피 한잔 하자고 연락하는 건데요.
좋은 날들 모쪼록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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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수피 작성시간 24.05.12 유현덕님 덕분에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유현덕님 폭넓은 지식 세계에 늘 감탄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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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12 수피님 일찍 일어나셨군요.
고요한 새벽에 읽은 제 글이 조금이라도 공감을 하셨다면 저도 글 쓴 보람이 있습니다.ㅎ
직접 경험하면서 배울 재주가 없어 옛 사람들 글을 읽고 많이 공부하네요.
화창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좋은 날 되시기를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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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자연이다2 작성시간 24.05.12 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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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13 넵! 감사합니다. 자연이다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