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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상

이제 그 옹이들은 다 빠졌을까

작성자마음자리|작성시간24.04.27|조회수190 목록 댓글 31

누구에게나 가난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너무나 주관적이라, 객관적으로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말하기가 참 어렵다.
내 기억 속의 아픔도 남이 들으면 그 정도가
무슨 아픔이라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속의 아픔이었고, 그 아픔들이 옹이로
내 가슴 어딘가에 박혀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즘 먼 길 다니다가 문득 생각 나 찾아보았더니
옹이가 있던 그 자리엔 뻐꿈한 구멍만 남아있고,
그곳에선 바람이 지나다니며 내는 소리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났다.

**
휘파람 소리가 된 옹이 첫째 <공납금>

누구에게나 있는 기억이 아닐지...

교무실 앞에서 몇 번을 서성거렸다.
종례가 끝난 직후라 선생님들 여러분이 모여서
한가롭게 말씀들 나누고 계셨다.

고등 1학년. 국민학교 1학년 때 살던 집을 판 후
8번의 이사 끝에 드디어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은행 융자를 많이 끼고 산 집이라 집으로 들어오는
돈이란 돈은 거의 융자를 갚는 데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공납금을 제달에 낸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한 두 달을 미루어서 냈다. 선생님이 내일까지
미룬 친구 중에 내일까지도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지만 들지 않았다.
아침에 아버지 봉급이 며칠 늦어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손을 들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좀처럼 혼자 계시지 않았다.
계속 이 책상 저 책상 옮겨 다니시면서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셨다.
교무실 문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고 서성대다가
결국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봉급이 제발 오늘 나왔으면...

다음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몇 술 넘기고 간 학교의 조회 시간.

'약속을 못 지키면 미리 말하라고 했잖아. 인마~'
출석부로 머리를 몇 대 맞는 동안 나는 정말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사춘기... 불만과 아픔들이 하나로 뭉쳐 옹이로
박혀있었는데, 그 빠져나간 빈자리에서 휘파람
소리만 들려오니 세월이 약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구나 싶다.

**
휘파람 소리가 된 옹이 둘째 <닭고기와 쇠고기>

재수시절 가뜩이나 부모님께 죄송한 판에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참다가 참다가 결국 못 견디게 아파 받은 수술이라
속에 염증이 생겼다.
은행 융자는 여전히 우리 식구들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은 상태였고, 고름제거 치료를 하던
대학병원의 레지던트가 빨리 고름을 제거하고
상처가 아물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익아~ 엄마가 고기 사 왔다 많이 묵어라~'
상위에 놓인 통닭 한 마리를 미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기려들면 어머닌,
'니 다 묵어라~ 어여 묵고 빨리 나아라~'

다음 치료 날,

'와 이래 진도가 안 나가노? 고기 묵었더나~?'
'닭고기 묵었심더...'
'닭고기 묵어가 되나~ 쇠고기 묵으란 말이야~ 쇠고기~!'
'......'
'알았나~?'
'......'

내 속에 옹이로만 남기고 말걸...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쇠고기 묵으라 캅디다. 닭고기는 잘 안 아문다고...'

난감하고 미안해하던 어머니의 그 표정...
옹이로 내 가슴에 박혔다.
어머니 가슴엔 더 깊이 박혔을 것이다.
**

늘 가난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픔들은 세월이
지나면 웃으며 돌아보는 추억거리로 남지만
더러 가슴 한구석 옹이로 박혀 쉬 지워지지는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런 옹이들조차도 이젠 먼 휘파람 소리가 되어
버렸는데 의문 하나가 남는다.

내 아픔은 그나마 받지 못해 생긴 아픔이라
그렇게 세월 따라 지워졌지만, 주지 못해 생긴
어머니 가슴에 박혔던 수많은 옹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하늘나라 사시면서 그 옹이들 다 빼셨을까?

오늘 쏟아붓듯 큰 비가 내렸는데... 어머니가
이승에서 못 빼고 가신 모든 옹이들이 다 빠지는
비였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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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꽃마루 | 작성시간 24.04.28 누구나 옹이가 몇개씩은있지요.
    이젠 추억이된 옹이일뿐이지요.
    댓글이 길어져 답글이 되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음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8 네. 기억이야 남았지만 아픔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남아있지
    않더라구요.
  • 작성자석촌 | 작성시간 24.04.28 오늘 여긴 일요일인데
    거기도 좀 한가한 주말인가요?
    살아가다가 가끔은 옛일들을 들춰보게 되지요.
    잘 견뎠어요.
  • 답댓글 작성자마음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8 전 금.토가 한가하답니다.
    모든 분들이 다 잘 견뎌내셔서
    지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둥실 | 작성시간 24.04.29 우리세대에서는 많이 겪었음직한......^^
    몇 해 전 수락산 산행중 고딩친구들과 이야기중에
    서울서 태어났지만 중학교 들어가서야 '점심'이란걸 알았다고 말하니
    마음여린 한 친구가 갑자기 눈물을 보여서 다같이 웃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은 그 힘든 시기에 날마다 자식들 끼니를 걱정했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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