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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비박/백패킹

선자령(고립,탈출 또는 조난)

작성자몰디브.|작성시간24.02.29|조회수1,888 목록 댓글 14

https://youtu.be/XQlcSc3rr4M?si=9Ho-lj5Dp82YbJDO

 

 

 

 

 

 

 

 

 

 

 

 

 

 

 

 

 

 

 

 

 

 

 

 

 

 

올겨울은 깊고 굵은 설산 백패킹을 하지 못해 아쉽던 차에 대관령 인근에 며칠 동안 큰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뜹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매년 겨울 한 번씩은 가 본다는 선자령으로 향합니다.

 

대관령 톨게이트를 지나자 눈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더니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눈발이 굵어집니다. 평일에도 눈 소식이 있으면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오늘은 한가합니다.

 

예보 상 많은 눈이 내린다고 하니 내일 아침이면 아마 온 산이 눈으로 덮여 등산로가 없어질 듯합니다. 내일 아침 러셀을 하며 첫길을 오르는 분을 위해 애매한 곳 몇 군데에 저의 안녕 몰디브시그널을 달아 놓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 새벽 어두운 탈출 길에 나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정상이 가까워 지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뚝 끊기며 선자령은 안개 속 적막에 휩싸입니다. 정상 400m 전방 이정표에 이르러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풍차 초원길을 가로지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박지인 바람의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곳은 평일에도 백패커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인데 오늘따라 백패커들이 한 명도 없습니다.

 

초원 평지부터 바람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하얀 크리스마스트리 침엽수 숲길은 겨울 선자령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양떼 목장 초소가 나옵니다. 초소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니 오늘의 박지인 바람의 언덕, 넓은 순백의 평원이 펼쳐집니다. 아무도 없는 이곳, 홀로 던져져 있다는 적막감이 선한 전율로 다가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니 내가 만든 발자국, 빨간 내 텐트, 그리고 나 뿐입니다. 박지 주변은 인적이 뜸 하여 그동안 쌓인 눈으로 허벅지 깊이까지 몸이 빠집니다. 텐트를 설치한 후 내일 하산을 위해 등산로 합류점까지 여러 번 발자국을 내어 길을 다져 놉니다. 어두워질 무렵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하여 혹시 몰라 적설량을 체크 하기 위해 세워둔 스틱에 눈금 표시를 해 둡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적설량이 30cm를 넘어섭니다. 아침 9시쯤 하산을 할 예정인데 적설량이 50cm가 되면 허벅지 깊이까지 빠져 5km 하산길을 러셀을 하며 걷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등산로에 눈이 50cm 쌓이면 등산로를 벗어난 곳은 허리 깊이까지 몸이 빠지게 됩니다.

 

새벽 4시경 적설량이 40cm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40cm면 무릎 높이입니다. 고민이 깊어집니다. 몇 번의 경험이 있는 1~2일 자발적 고립(산에서 며칠은 굶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을 택하고 싶지만 다음날에 어머니를 모실 일이 있어 하산을 해야만 합니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걷고 급하게 배낭을 챙겨 하산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등산로는 아직 까지는 눈이 무릎 정도까지의 깊이라 러셀을 하며 걷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은데 많은 눈이 내리고 있고 강한 바람이 불고 있어 렌턴에 비치는 하얀 눈발 때문에 전방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감과 느낌으로 진행을 하다 보니 등로를 살짝살짝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허벅지까지 몸이 빠져 하산이 지연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곳에서는 눈 속에 허리까지 몸이 빠져 손으로 눈을 파내고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걱정은 없습니다. 자주 다니는 길이고 기상이 좋지 않거나 초행길, 비탐길에서는 트랭글(산악 gps)을 켜고 산행을 하기 때문에 되돌아 가기 궤적을 따라 내려 가고 있고 어제 간간히 달아둔 시그널을 확인하며 하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번 눈 속에 빠진 뒤로는 스틱으로 전방을 찔러가며 등로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등로 벗어나지 않기 놀이를 하다 보니 어느덧 임도에 들어섭니다. 한숨은 돌렸지만 이미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습니다. 그즈음 여명이 밝아 오고 눈도 차츰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다행인 것은 새벽부터 KT 송신서 기지국 등 시설물 진입을 위해 제설차가 제설작업을 해놔서 길에 쌓인 눈이 많이 걷어져 하산길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힘겨웠던 어두운 길은 잊어버리고 긍정의 눈으로 이 길을 즐기기로 합니다. 새벽녘 임도 따라 길게 늘어선 하얀 침엽수 숲길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이 멋진 길을 따라 즐기면서 1km만 더 내려가면 빨간 애마 종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차에 따뜻한 히터를 틀어놓고 젖은 몸과 옷을 말리고 시원한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습니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봅니다. 선자령에서 비박을 한 3명이 하산 중 조난을 당해 6시간 만에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내가 러셀을 하면서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등로를 벗어났거나 다른 곳에서 비박을 한 모양입니다. 그 후에도 몇 건의 선자령 조난 소식이 더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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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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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몰디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1 감나합니다.
    대부분은 사진만 보시는데
    산행일지도 보셨군요.
  • 작성자송월 작성시간 24.03.01 대단하고 결정 휼륭합나다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몰디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1 예전 처럼 리딩하게 되었어도 하산을 했겠죠.
    아마 초보 동생들에게 "자 짐싸고 이제 부터 발자국 놀이를 할테니
    내 발자국을 잘 따라와"라고 농담하며 안심을 시켰겠죠.
  • 작성자하로동 작성시간 24.03.04 즐거움보다 순간 느껴지는 공포감어 더 앞섰을수 있으셨을텐데 정말 대단 하십니다
  • 답댓글 작성자몰디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5 감사합니다.
    잘 아는 길이고, 장비가 있고,
    몇 번의 큰 눈 경험들이 있어
    공포감은 없었지만 좀 번거로울 수 있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산은 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니
    항상 조심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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