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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

『 역사의 패자 』

작성자피리 부는 사람|작성시간05.01.22|조회수167 목록 댓글 13

1. 들어가며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에 패자들을 철저히 깔아 뭉게는 방식으로 기술됩니다. 그것은 역사를 쓰는 사관이 이미 사관으로서 사명과 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 사람의 사상과 이념에 따라 주관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보통 역사를 남긴 사람은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역사 과정에서 승리한 사람들에 의해서 남겨 집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공정을 기했다고 하더라도, 패자에게 있어서는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의해서 비록 승자일지라도 사상과 이념에 따라서 사실의 왜곡과 사건의 조작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를 한번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2. 패자의 역사

 

1)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에게는 삼천궁녀가 있었는가?

 

 당시 인구는 600만이었습니다. 그중 20~30대 여성 비율이 인구의 비례에 의해서 볼때 노인이 일찍 사망하는 사회구조라고 하였을때 조차도 당시 수도에 살았던 인구가 5만명이었으므로 추산하면 1만명로 정도가 됩니다. 그 중 3천명이 궁녀였을까요?

 

 또한 당시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이른바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의 경우 그 수량과 폭이 좁고 3천명이 몸을 던졌을 때 빠져죽을 구조가 아닙니다. 더구나 백제 도읍에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궁궐터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김부식 감수의『 삼국사기 』를 보아도 의자왕이 당에 포로로 잡혀갈때 백성들이 울며 뒤따랐다고 합니다. 과연 의자왕이 정치를 패악스럽게 하고 3천의 궁녀가 있을정도로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면 백성들이 울며 뒤따르며 배웅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의자왕에 대한 이미지 조작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룩해놓은 공적입니다.

 

참고서적 : 『 패자의 역사 』

 

2) 신돈은 요승이었나?

 

 신돈은 당시 기득권세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으로서 공민왕에 의해서 토지개혁문제등 개혁의 총 책임자를 맡았던 양반입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왕사 곧 스승이었던 사람이었는데, 후에 공민왕은 신돈을 이용하여 귀족세력을 어느정도 진압하게 되자 귀족세력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또 당시 백성들의 신돈에 대한 지지가 미륵불로 칭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신돈을 제거합니다.

 

 후에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 및 조선개국공신들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움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돈의 이미지를 깎아내렸으며, 창왕이 신돈과 고려왕비 사이에서 난 자식이라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조작하여 신돈을 요승으로 만들었고, 이로서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하게 하는 논조로 삼았습니다.

 

참고서적 : 『 패자의 역사 』

 

3) 정도전은 역적이였고, 겁쟁이였으며 무능했나?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만고역신이었습니다. 이는 태종이었던 이방원이 자신의 형제들을 2차례에 걸쳐 죽이고 왕권을 잡은 과정에서 첫번째 제거 대상자이면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정도전을 제거하면서 얻게 된 평입니다. 그 뒤 세종을 비롯하여 역대 조선의 왕들은 정도전이 개국공신이었으며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틀을 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만고역신이라는 평을 내리게 됩니다.

 

 정도전의 아버지는 조선조에서 인정하는 고려대의 5대 청백리중 한사람이었으며, 정도전 또한 한평생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부국강병에 힘쓴 사람이며 유배생활과 함께 고구려의 옛당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외부적으로는 주원장에게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고 내부적으로는 이방원의 강력한 라이벌이면서 한편으로 개국공신이자 이성계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때문에 주원장이 조선에 요구한 친명정책상 정도전은 제거될 수 밖에 없는 대상자였습니다. 한편으로 국내적으로는 이방원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강씨  소생의 배다른 형제인 방석과 방번 형제를 밀고 있는 정도전이 제거되어야 다음 행보로 옮길 수 있는 내외적인 조건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참고서적 : 『 정도전을 위한 변명 』

 

4) 연산군은 폭군이었나?

 

 진시황과 네로는 폭군이었을까요? 이 두사람에 대한 역사왜곡은 유생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이뤄졌습니다. 곧 네로가 어머니와 아내를 살해했고, 로마를 불태우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했다는 것이 네로에 대한 폭군으로서 씌워진 굴레고, 진시황의 경우 분서갱유 및 유가의 왕도사상이 아닌 법가사상에 따른 통치를 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연산군에 대한 이미지도 비슷한데요. 연산군이 박씨 유모를 겁탈했다는 것 부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는 떠넘기기인데, 역사를 보면 왜 이 세사람에 대해서 이러한 평가가 내려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곧 진시황의 경우 기존의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분열되어 있던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도량형과 통치이념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바퀴의 크기 마저도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곧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제국체제의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요, 지금 제국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많이 박혀서 그럽니다만, 지방제후들이 백성들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다시 전쟁을 하는 상황을 종식시키는데는 그것이 필연적인 이유기도 합니다.

 

 분서와 갱유는 다른 사건들이기 때문에 따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인데요, 분서 사건의 요지는 법가 외의 모든 사서를 불태웠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는 다르고 당시 70여명의 박사들이 이 사서들을 보관했으며, 궁실에 보관했습니다. 갱유 사건의 요지는 진시황이 장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불로초를 찼았을때, 희대의 두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것을 깨닫고, 이에 대한 경계령을 내렸었는데, 당시 유생들은 당연이 자신들의 사상과는 다른 법가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때 유생들이 많이 걸려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처음부터 유생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갱유를 했던게 아닙니다.

 

 네로의 경우도 그와 유사한데요, 로마를 불태웠다는 것부터 살펴 보면, 당시 로마 황제의 친위대는 소방수를 겸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대화제의 불을 끄기 위해서 맞불을 놓았는데 이것을 목격한 사람의 입장으로 보았을때는 불을 지르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로 부터 후세 역사가인 귀족 타키투스가 이를 확대 왜곡하였고, 그 뒤로 부터 네로가 로마를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때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게 하였는데, 당시 기독교인들이 공공연하게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로마는 신의 불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 의심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은 300여명 정도에 불과하고 오늘날 [쿠오바디스 도미네]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것 처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 당했다는 것은 사실의 왜곡입니다. 곧 당할만한 일을 평소에 하고 있었고, 상황조건이 맞아 떨어져 당한 것일 뿐이지 네로가 기독교도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뒤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이를 확대 과장하여 부풀린 결과 네로가 폭군이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줄로 압니다. 미국의 부시가 아프간과 이라크를 부순 과정말입니다. 덮어 씌울 뭔가가 없을  때는 이유를 만들어서 덤태기를 씌우는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 추악한 권모술수의 정치현상입니다.

 

 연산군의 경우 2차례 사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중종때는 이보다 더 참혹한 사화를 겪으면서도 폭군이라는 이름이 않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당시 연산군의 경우 성종때 유가의 이념상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국가가 굴러가게 되는데, 신권 세력이 커졌었습니다.

 

 연산군일기는 한 나라의 임금을 연산군으로 끌어내린 세력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연산군이 박씨를 겁탈했다는 것도 연산군일기를 통할때도 그것이 추측으로 쓰여진 픽션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연산군은 신(신하들의 정치권력을 말함)권에서 다시 왕권으로 권력을 되찾아 오려고 하였고, 이것이 신하들의 입장으로 보았을때는 자신들에게 위기적으로 느껴졌고, 결국 기존의 보수층의 반발로 쫓겨난 것입니다. 즉 그를 어리석은 임금으로 볼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폭군이라는 호칭은 역사의 승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참고서적: 『 연산군을 위한 변명 』

 

5) 원균은 무능한 겁쟁이었으며, 나라에 해를 끼친 간신이었는가?

 

 오늘날 이순신 하면 성웅이며 반대편으로 원균하면 이순신을 모함한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이순신의 조카인 덕수 이씨 문중인 이식이라는 자에 의해서 사초도 없이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 따른 평가입니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일기인 [난중일기]를 객관적 사료 비판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당시 전황의 객관적 사실로까지 승화시킨 조선 후기의 문관들과 이병도 이래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역사편찬자들이 이들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걸작품입니다.

 

 사초는 사관이 목숨을 걸고 왕도 함부로 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실록이 만들어지면 사초는 냇물에 담가 글자를 지우고 다시 불에 태워버리는 방식으로 자료를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사초가 중간에 새나간 경우 사초를 작성한 사람이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여 이것이 사화로 까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관들이 남긴 사초도 없이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의 특징은 당시 왕조시대였으므로 왕에 대한 충성으로서 벼슬의 지위가 결정되었는데, 조작을 통해 당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던 의도로 평가 되는 것은, 선조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의 차가 원균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을 추천한 정탁과 유성룡 그리고 조선 시대 뛰어낸 재상들으로 평가 받는 이원익 이항복(오성) 이덕형(한음) 들이 실록을 통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원균은 뛰어난 용장이었고, 당시 임란 근 2~3개월전에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처음 왜구가 처들어 왔을때 10척을 분파하고 역부족이라 당시 임란 1년전에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여러차례 지역이 다르다는 핑계로 돕지 않았고, 결국 원균이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여 그제야 이순신이 원군에 대한 지원을 하였습니다.

 

 곧 원균은 주장이며 이순신은 객장이었던 셈입니다. 원균 이순신 연합군은 여러차례 왜구를 깨뜨리게 되는데, 당시 전 조선군은 왜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는 때였었습니다. 원균이 주로 썼던 전법은 당파라고 하여 조선의 배가 튼튼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반면 왜선은 합판이 얇았던 대신에 속도가 조선배보다 빨랐습니다. 당파는 이를 이용한 것으로 조선의 배로 왜선을 들이받으면 깨어졌습니다. 원균은 이러한 당파를 잘했고, 처음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10여척을 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뒤에 원균 이순신 연합군이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고 승전에 대한 계책을 의논하며 원균장군이 함께 싸웠으니 함께 승전 장계를 조정에 올리자고 하였으나, 이순신은 거절하며 아직 쌓인 공이 적으니 나중에 차차하자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일날 바로 이순신은 승전장부를 작성하여 조정에 올려 버립니다.

 

 이로 인하여 원균 휘하의 장수들이 적잖이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뒤로 부터 원균 휘하의 장수들과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의 공쟁이 잣아지게 되는데요. 이순신은 그 뒤에도 자신의 부하장수가 왜영에 불을 질러 탈취한 승전을 자신의 지휘로 하였다고 조작하여 조정에 허위보고를 합니다. 물론 나중에 사건 조사결과 이순신이 공을 조작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또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의 아들이 12세로 싸울수 없는데도 원균의 아들의 이름을 승전장부에 올려놓았다고 장계를 올렸는데, 당시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18세였으며, 원균을 따라 싸움에 임했습니다.

 

 그 뒤 왜선은 조선의 당파로 인하여 왜선을 보강하여 이전처럼 당파로서 싸우기가 어렵게 되기도 했습니다. 권율은 육군의 총책임자로서 당시 해군보다 육군의 수장이 더 높았던가 봅니다. 칠전량에서 궐율은 전황상 출전하지 않은 원균을 닥달하여 장군된자를 곤장을 쳐서 싸움터에 내 보냈는데, 그 전투에서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원균을 버리고 도망쳤고, 원균은 그 칠전량에서 10여척의 왜선을 분파하다 원래 육장이었기 때문에 육전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배에서 내리자 말자 잠복해 있던 왜구들에 의해 주살당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원균은 외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하고, 이순신의 휘하장수들은 도망갔습니다. 원래 싸움에서 부하된 자로서 상급자를 버리고 도망가면 사형이었습니다. 전후 선조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했던것 같은데, 이들 도망자들의 일관된 진술은 원균은 무능하고 부패해서 먼저 도망갔다고 진술했고,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합니다.

 

 후에 다시 박정희 때에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이순신에 대한 성웅화 작업을 하면서 이순신의 반대편에 있는 입장이었던 원균에 대한 깎아 내리기 작업이 이 때에 절정에 이르러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원균 간신 이순신 성웅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고서적 : 『 원균을 위한 변명 』『 다시 보는 임진왜란사 』

 

 3.  마치며

 

 이는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고, 더 많은 역사가 후대인들의 곡필에 의해서 또는 권력을 잡기 위해 통과의례로서 왜곡되고 부풀려 지고 또 후대인들의 필요에 의해서 입맛에 따라 부풀려지고 과대포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근 이에 대한 복원작업을 통해서 서서히 역사의 진실과 역사과정에서 벌어졌던 그 살벌한 권력싸움에 대한 고발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11월 30일 늦은 1시 9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내용출처 : 『 개벽을 대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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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무지한놈 | 작성시간 05.02.19 의자왕의 삼천궁녀를 듣고 배우고 국사교과서에까지 등장하게 되는것입니다! 일제시대에 뚫어진터널이 나제통문으로 둔갑한것처럼......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의자왕의 삼천궁녀란말은 일제시대이전에는 존제조차 하지않았던겄입니다. 참고로 그노래의 작사가작곡가모두가 한국인이며 가수도 한국인입니다!이런x같은xx들
  • 작성자사부 | 작성시간 05.05.11 님의 원균에대한것은 맞다해도 원균을 명장으로 보기엔 문제가있네요.비록 용장일지는 몰라도 그가이룩한 전과가 너무없다는것이지요.
  • 작성자닌기루 | 작성시간 05.06.16 너무 성급하시네요...저도 원균장군이 졸장이라고 보질 않지만 역사상에 왕이아닌 장수가 올라온것이나 상대나라가 바보가 아닌이상 지네나라 역사에 원균이 아닌 왜 이순신장군을 올렸으며 백성들 입으로 전해져오는 역사라는 것도 대부분 이순신장군에 관한것이고 정치적인 파워도 이순신장군 쪽보다는 원균쪽이었고..
  • 작성자닌기루 | 작성시간 05.06.16 유능한 신하를 의심하는 선조의 성향으로 봐도 그렇고 그분들의 살아온 향배들이나 치밀한 준비자세 모든것들이 이순신장군쪽으로 확실한상황에서 님의 글은 원균은 용장이며 이순신장군은 비열한 겁장이었다는 식의 글내용인데 이런식으로 쓰시면 원균옹호자라는 오명을 받게 되십니다..역사에 관한 글을 쓰시려면
  • 작성자닌기루 | 작성시간 05.06.16 확신이아닌 가설과추측을 내놓으시고 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하세요..100%완벽한 역사적사실은 없습니다.그에 가깝게 가기위해 열심히들 연구하고 분석하고 토론하는거지요.그리고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는 과장보단 훌륭한분이라는 설에 가장 근접한것은 사실이고요..사심없는 권력자란설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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