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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의 실체

칠지도 명문 왜곡

작성자銅頭鐵額、|작성시간07.07.03|조회수922 목록 댓글 2
칠지도 명문 왜곡

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이는 칠지도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자 일본인들이 칠지도를 훼손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감춘 것이다.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칠지도를 왜 훼손하였는지 알기 위하여 칠지도에 적혀 있는 명문을 살펴본다.

「태화 4년(A.D 230년) 5월 16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들에게 줌이 마땅하다. 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온조)백제왕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생겼기에, 성음(구태백제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그 뜻을 후세까지 알려라.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벽百兵宜( )供侯王( )( )( )( )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 )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 )안의 글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나온다.
「신공황후 52년(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秋 9월 丁卯朔丙子(10일) 구저(久저)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칠지도(七支刀)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谷那)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製鐵)하여 길이 성조(聖朝)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貴國)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天恩)을 내리시고, 해서(海西)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和好)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奉獻)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朝貢)하였다.」☞손자 침류왕에게 일러 이전에 적혀 있는 문구는 일부 왜곡한 것이고, 그 이후에 적혀 있는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泰( ) 四年

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七支刀)를 준 시기에 대하여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52년으로 적혀 있고, 칠지도에는 泰( )四年으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가 건국된 A.D 205년에서 야마대연맹이 붕괴된 A.D 247년 사이에 중국의 연호 중에서 泰( )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 四年(A.D 230년) 뿐이다. 따라서 泰( )는 위나라의 연호이고, 구태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연도는 위(魏)나라의 太和 四年이다.
太와 泰는 같이 쓰인다.

위구태(尉九台)는 공손강(公孫康)의 지원을 받아 구태백제를 세운 후 공손씨(公孫氏)가 사용한 후한(後漢)과 위(魏)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일부 사학자들은 칠지도에 적혀 있는 "泰和四年"을 동진(東晋)의 "太和 四年(A.D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신공황후기 55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고, 56년조에 구수왕(仇首王)이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 내용은 실제로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에 관한 사실이므로, 52년조에 나오는 초고왕(肖古王)도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서기의 왜곡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 )月十六日丙午正陽
학자들은 ( )월을 5월로 판독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 삼국시대, 진나라 때 주조한 검 등의 명문(銘文)에 五月丙午라는 문구가 상용(常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양(正陽)은 한낮을 가리킨다.

造百鍊鐵七支刀
위 百은 100이라는 뜻보다 모든, 아주 많은, 여러 개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여러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벽百兵
위 병(兵)은 병란(兵亂)의 해독(害毒)을 뜻한다.
위 문구는 칠지도가 「모든 병란의 해독(害毒)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宜( )供侯王( )( )( )( )作
위 의(宜)를 동사로 보아 「∼함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공(供)은「주다」는 뜻이 있고, 후왕(侯王)은 칼(刀)이나 거울(鏡)의 명문(銘文)에서 주로 고위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사용되었다.

先世以來未有此刀
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는 뜻이다.

百濟王世( )奇生
위 백제왕은 곡나(谷那)에 철광산을 가지고 있던 온조백제왕이고, 세(世)는 당시 온조백제왕 치세(治世)를 뜻하며, 기(奇)는 진기하다는 뜻이고, 생(生)은 생겼다는 뜻이다. 앞에 나온 문구는 「온조백제왕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다」는 뜻이다.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위 성음(聖音)의 성(聖)은 극존칭(極尊稱)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음(音)도 고대에 높힘에 사용된 글자이므로, 성음(聖音)은 아주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성음(聖音)은 구태백제왕을 가리킨 말이다. 또 고위왜왕(故爲倭王)은「왜왕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지조(旨造)는「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전시후세(傳示後世)는「후세까지 알려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구태백제왕이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알려라는 뜻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七支刀) 문구는 성음(聖音)이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문구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왜왕(倭王)은 신공황후이므로, 신공황후는 백제의 후왕(侯王)이었다. 또 신공황후 재위 시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 시기이므로, 야마대연맹은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기에도 임나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때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당시 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는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즉 야마대연맹은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칠지도는 제작년도 등이 지워져 있다.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물품인 칠지도를 훼손(毁損)한 것은 일본서기 왜곡과 관계가 있다.

일본서기 왜곡과 칠지도 훼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 유민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를 만들 때 가장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백제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일본열도왜가 멸망한 백제의 후국(侯國)으로 있었는 사실을 감추고 거꾸로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종주국으로 있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 저자가 그 다음으로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신라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를 만들 당시 일본국의 지배세력은 백제유민들이었고, 이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과 반감이 아주 강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듯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마음으로나마 백제유민들의 한(恨)을 풀고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일본서기 중 왜곡이 가장 심한 신공황후기를 보면 섭정전년도조에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웃에 있던 고구려왕과 백제왕으로부터도 복속을 맹세 받은 듯이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같은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를 짓기 8년 전에 지은 고사기(古事記)나 그 후 김부식님이 지은 삼국사기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므로 왜곡임이 분명하다.

위와 같이 신공황후기를 왜곡해 놓고 그 뒤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를 적는 과정에서 구주왜(九州倭) 사료를 보니 임나(任那:대마도)의 왜가 백제 초고왕(A.D 167-214년), 구수왕(A.D 214-234년)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었다.

「흠명천황 2년(A.D 541년) 여름 4월,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와 졸마(卒麻)의 한지(旱岐)와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가서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중략.."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중략..
록기탄(록己呑)은 가라(加羅)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려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후략」

「흠명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는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那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중략..등을 보내어 아라(安羅)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汗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父兄)으로 알았다"..중략..성명왕(聖明王)이 또 임나의 일본부(日本府)에게 천황이 조(詔)하여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다. 만일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 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 하였다. 후략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는 일본열도에 야마대연맹이 세워져 있었고, 당시 임나(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야마대연맹에 속한 임나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은 임나를 포함한 야마대연맹 전체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을 뜻한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는 일본의 신공황후(A.D 173-247년) 재위시기이다. 따라서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의 여왕인 신공황후가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종주국)로 섬겼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드는 안만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안만려는 신공황후기를 지으면서 신공황후가 백제, 신라, 고구려를 복속시켰다고 왜곡해 놓았는데, 뜻밖에도 흠명천황에 관한 구주왜 사료에서 일본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내용을 부정하기 위하여 구주왜 사료를 전부 없애 버리면,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는 흠명천황기를 대부분 지워야 한디. 그렇다고 하여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지우지 않자니 꼼짝 못하고 신공황후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난제(難題)에 빠지자 일본서기 저자는 꾀를 내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인물이 아닌 것처럼 잡아떼기로 하였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기로 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그 방법으로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원래 연도대로 순서대로 적지 않고 연도를 바꾸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적어 놓았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인 신공황후기 46년조(A.D 246년) 이후에 적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위장은 곧 문제점이 생겼다. 왜냐하면 백제 관련 기사를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적어 놓으면서 그 내용 중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 구수왕에 관한 문구를 지우지 않아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교류한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백제 관련 기사를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로 늦추어 적어 놓은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앞서의 꾀가 실패하자 일본서기 저자는 또 꾀를 내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 구수왕은 사실은 신공황후 시기에 재위한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후대(後代)에 재위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이라고 강변(强辯)키로 하였다. 이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여 백제 초고왕, 구수왕 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자는의도이다.

[참고:이것도 아주 어설픈 위장이었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를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으로 위장하였기 때문에 A.D 173-247년까지 재위한 신공황후가 갑자기 5세기 중반의 인물로 변하게 되어 일본의 천황체계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뒤에 나오지만 일본서기 저자는 뒤죽박죽이 된 일본의 천황체계를 수습하기 위하여 신공황후의 즉위시기와 사망시기를 일부 늦추고, 신공황후 뒤에 나오는 응신천황의 재위연도를 실제연도보다 120년 앞당기고, 또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재위시기를 120년 앞당기는 괴상한 일을 벌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를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로 위장했다가 일본의 천황체계가 억망이 되자 그 다음에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재위시기를 신공황후 재위시기로 앞당기는 촌극을 벌였다. 이렇게 되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지도 못하고 일본 천황 체계만 억망이 되어 버렸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시기의 사람이라고 강변(强辯)하는 방법으로 백제가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내용이 적혀 있는 신공황후기 52년조(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문구 하단에 "손자 침류왕(枕流王:A.D 384-385년)에게 일러..후략" 문구를 삽입해 놓았다. 이는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나오는 초고왕, 구수왕이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침류왕의 부 근구수왕과 조부 근초고왕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침류왕(枕流王)의 조부(祖父)는 근초고왕(近肖古王:A.D 346-375년)이고 부(父)는 근구수왕(近仇首王:A.D 375년-384년)이다. 즉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은 모두 신공황후 때의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신공황후기 52년조에 적혀 있는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후략" 문구는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때 인물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 52년조에 삽입해 놓은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위 왜곡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왕(近仇首王), 침류왕(枕流王)의 즉위와 사망사실을 실제년도에서 120년을 앞당겨서 신공황후기 55년조, 56년조, 64년조, 65년조에 각 적어 넣어면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명칭을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으로 적어 놓았다. 이는 신공황후기 신공황후기 46년조 이후에 나오는 초고왕, 구수왕이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인 것처럼 보강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신공황후 55년(A.D 255년) (근)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
[참고: 255=375(근초고왕이 사망한 해)-120]

「신공황후 56년(A.D 256년) (근)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
[참고: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먼저 왕이 죽은 다음 해를 다음 왕의 즉위년도로 보았다. 256=376(근초고왕이 사망한 다음해)-120]

「신공황후 64년(A.D 264년) (근)구수왕 사망(A.D 384년)하다.」
[참고:264=384(근구수왕이 죽은해)-120]

「신공황후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화(阿花)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참고:265=385(침류왕이 사망한 해)-120]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죽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은 신공황후보다 훨씬 후대에 존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위에 나온 문구는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그 후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을 보니 칠지도를 만들어 왜에 보낸 연도가 "泰和四年"으로 적혀 있었다. 신공황후(神功皇后) 재위시기에 "泰和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四年(A.D 230년)" 뿐이다.

만일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황후에게 보낸 연도가 위(魏)의 "太和四年"인 것이 들통날 경우, 여태까지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과 교류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일본서기 신공황후기를 왜곡해 놓은 것이 모조리 들통나게 된다.

이러한 난제에 빠지자 일본인들은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황후에게 보낸 연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칠지도 명문 중에서 제작년도 등을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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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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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지나가던 客 | 작성시간 07.06.19 삼국사기를 보면 약소국인 신라의 왕들도 연호를 쓰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한단고기를 보면 중국과 한국의 사료에 나오지 않은 고구려의 연호사용 기록이 나옵니다. 광개토태왕 이전까지 고구려를 앞도하던 백제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 조차 칠지도의 태화는 백제의 연호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이 것을 위나라의 연호 태화로 보는 것은 굉장히 문제있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 작성자지나가던 客 | 작성시간 07.10.29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의 왕들과 삼국사기 신찬성씨록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의 왕들은 모두 동일합니다. 북위와 전쟁을 버린 동성왕이 한반도 서안을 지배한 동성왕과 같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고 봅니다. 또 백제가 명망 후 그 땅이 발해말갈과 신라에 각각 속해졌다는 당서의 기록 등과 백제멸망 후 나타나는 신라명칭이 들어가는 지역이 구 백제 식민지였던 중국 동부지역에 나타나는 점에서 볼 때 대륙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와 끝까지 운명을 같이한 한 국가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근데 외 백제를 귀태백제(대륙백제)와 온조백제(반도백제)로 나누어 보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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