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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에 나오는 몽고리(蒙古里)가 몽골의 이두문인 듯

작성자새끼줄 악서|작성시간18.01.19|조회수49 목록 댓글 3

 

단군세기 중 4세 오사구 단군(BC 2138~2100) 조에,

 

(오사구 단군의 즉위년인) 갑신년에 단군의 동생 오사달을 몽골의 칸으로 임명했다. 지금의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는 말이 있다.

(甲申元年, 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단군 조선의 새끼줄 정사에 몽골한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암이 그를 몽고리한(蒙古里汗)이라고 이두문으로 한역했지요. 다음 문장에 다시 몽고(蒙古)라고 나오는데, 이는 단군 조선의 새끼줄 정사에는 없었던 문장입니다. 한역자 이암의 설명문입니다. 그래서 1363년의 일반적 명칭이었던 몽고족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 새끼줄 악서였어요. 말의 발음을 사운드 코드로 바꿔, 새끼줄에 매듭으로 기록하는 원시적 방법이었어요. 6,000년 전의 조상들이 창제하여, 1762년까지 무려 5,650년이나 썼던 기록 방법인데, 250년 만에 온 민족이 철저히 망각했지요. 그래서 큰 혼란이 빚어졌었는데, 제가 새끼줄 악서를 다시 되살렸어요. 차차 혼란이 정리되리라고 봅니다. 제 책의 내용을 요약한 2건의 pdf파일을 첨부하니, 읽어 보세요.

 

환단고기의 고기가 우리말 새끼줄 악서라는 뜻입니다. 두 편의 삼성기, 북부여기, 단군세기 등이 모두 우리말 새끼줄 악서의 한역본들입니다. 끝의 태백일사는, 5,300년 동안의 새끼줄 사서를 정리한 한문 문서로, 당연히 우리 민족의 최고 사서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는 환단고기만 읽으면 됩니다. 상고사는 배달유기를 읽어야 하는데, 1년 안에 공개되리라고 봅니다. 배달유기가 세종의 재위 시에 발견돼 한역됐습니다. 태백일사의 지은이인 이맥의 직계 후손이 배달유기를 보관 중이겠지요.

 

고기 말고 우리말 새끼줄 악서의 한자 이름이 9가지가 더 있습니다. 결승, 향악, 비기, 내서, 비서, 고기, 언전, 미문, 초기, 내기 등입니다. 너무 많아요. 모두 외우지 않으면, 착오를 일으키기 쉬워요.

 

,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기본 사서가 우리말 새끼줄 악서였어요. 통일 신라의 조정이 고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라는 이름으로 한역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근대 조선의 조정 내 문헌을 몽땅 훔쳐 갔습니다. 그거 돌려받는 게 큰일입니다. 고려와 근대 조선의 기본 사서가 우리말 새끼줄 악서였습니다. 사서보다는 사료라고 표현함이 낫겠네요. 사서다운 구성이야 한역 후에 진행됐을 테니까요. 아무튼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이 대체로 우리말 새끼줄 사료의 한역이었습니다.

 

1급 비밀 한 가지. 이는 우리 한국인들만 알고, 외국인들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근대 조선의 임금들이, 결승 이동 장치에서 흔들리며 이동하는 결승을 악사의 발음으로 들으며 일을 봤어요. 실화입니다. 그거 아는 순간, 너무 창피해서 자살하고 싶었어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까닭이요? 우리말 새끼줄 악서의 해독이 너무 느리기 때문이었어요. 한 음절의 이해가 문서보다 20~30배나 느리니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요?

 

우리 민족의 문서의 시대는 실질적으로 250년 밖에 안 됐어요. 그 전 5,650년은 새끼줄 악서의 시대였습니다. 문서의 시대의 시작이 그토록 늦어진 까닭이 있어요. 속문(屬文)의 어려움 탓이었어요. 속문은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분석하기를 말합니다. 속문을 못 하면, 훈민정음을 못 배웁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에 대다수의 백성이 훈민정음을 못 썼어요.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분석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어요. 그 분석을 하려면, 몇 년간 속문을 배워야 했는데, 그게 귀찮아서 백성이 그런 분석의 기술자인 악사에 의지하여 계속 새끼줄 악서만 썼어요. 300년을 지켜봐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자, 영조가 결단했어요. “새끼줄 악서를 없애야, 백성이 속문을 배운다.” 1762년 영조의 어명으로 5,650년간 지속됐던 새끼줄 악서의 시대를 강제로 끝냈어요. 그 후 250년 만에 온 민족이 새끼줄 악서를 철저히 망각했지요.


새끼줄 악서를 우리 민족만 썼던 게 아닙니다. 중국은 순 이전부터 공자 이후까지 2,000년 이상 사용했습니다. 물론 우리 조상들에게서 배워 사용했지요. 중국도 순 시대에 말의 기록이 가능했어요. 서경 중 요전과 순전이 새끼줄 악서의 문서본입니다. 한문에서 새끼줄 악서와 문서를 구별하는 명명 관행이 있었어요. 새끼줄 악서는 끝 자로 기록할 기() 자를 썼고, 그 문서본은 끝 자로 벼리 기() 자를 썼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벼리 기() 자로 끝나는 책 이름이 많은 게 그 탓입니다. 사마천이 새끼줄 악서의 문서본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새끼줄 악서를 몰랐어요. 그래서 책 이름의 끝 자가 왜 벼리 기() 자인지를 모른 채 따라 썼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그 명명 관행을 따랐어요. 그래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삼국사기에서는 끝 자가 기록할 기() 자이고, 그 한역본은 끝 자가 벼리 기() 자입니다. 달리 말해, 김대문의 원본 화랑세기는 우리말 새끼줄 악서였고, 현재 유통되는 한문 책은 그 한역본입니다. 일본도 당연히 새끼줄 악서를 썼어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끝 자가 벼리 기() 자인데, 한역본이기 때문입니다. 한자의 출현 전에는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새끼줄 악서를 썼다고 보세요. 흉노족과 몽골족도 썼음이 확실하고, 인도도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나라가 다 망각했어요. 새끼줄 악서의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최후로 망각하며, 영원히 망각할 위기였는데, 제가 기적처럼 되살렸네요.

 

아직 우리말 새끼줄 악서가 안 믿기세요? 이러면 믿길지 모릅니다. “말 끝마다 토를 단다가 원래 말 끝마다 새끼줄을 단다는 뜻이었다면, 믿기세요?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중 가림토가 밑변이 (긴 새끼줄로) 가려진 결승이라는 뜻이었다면, 믿기세요? 차차 더 많은 증거가 나오리라고 봅니다.


아무튼 우리말 새끼줄 악서를 알아야, 우리 역사가 제대로 이해됩니다. 또 환단고기를 위서로 의심하는 자를 이 돌대가리야, 뭘 좀 알고 나불대라!”고 꾸짖을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이 글을 복사하여 널리 퍼뜨려도 좋습니다. 첨부된 2건의 pdf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첨부파일 삽지 광고, 새끼줄 악서, 인터파크.pdf

첨부파일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은 새끼줄 악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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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새끼줄 악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20  1762년에 새끼줄 악서의 시대를 끝냈던 영조의 어명을 설명합니다. 영조가 1762년에 우리말 새끼줄 악서를 보관하거나 내보이는 자를 섬으로 귀양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그 가혹한 처벌에 겁먹은 백성이 일제히 보관 중인 새끼줄 악서를 불태웠겠지요. 그러면서 새끼줄 악서는 우리나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물건이 됐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말로 설명해 주는 옛 추억이 됐습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 250년 만에 아무도 모르는 옛 일이 됐어요.
  • 작성자새끼줄 악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20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결승이 발견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출토돼도 보고가 되지 않았겠지요. 국민들이 결승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으니까요. 이런 문제를 책에서 다 다뤘어요. 이 게시물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글이라 요점만 썼습니다.
  • 작성자새끼줄 악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20  그리고 새끼줄 악서가 정말로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었어요. 사서,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증거가 너무 많아요. 여러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를 못 이깁니다. 제가 정확히 되살렸어요. 단군세기가 단군 조선의 정사의 한역본이 틀림없고, 5,914년 전의 우리나라인 배달의 정사인 배달유기도 현존합니다. 250년간의 망각으로 혼란을 겪었어요. 이제 사실대로 알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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