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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동상이몽! : 시스템의 원리에 대하여..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4.10.01|조회수835 목록 댓글 22

 

 

제가 글을 쓸 때 '계급'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다보니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지나치게 계급의식에 경도되어 있다!

지나치게 선동적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를 이해하는 틀로서

계급에 대한 이해는 매우 유용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계급에 대한 이해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일 뿐,

좀 더 의미 있는 성장을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분법적 피아식별의 단순한 갈등관계를 넘어서

더 큰 틀에서 작용되는 근본적인 시스템의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시스템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고

우리 삶 속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자신의 삶의 변화나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작고 큰 많은 노력들이

오히려 내 자신의 현실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거나

기존의 시스템의 유지와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오늘은 시스템의 원리라는 제목을 갖고

오랜만에 다소 지루하고 긴 글을 써볼까 합니다.​

..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계급의식이란

칼 막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급이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따라 다니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

그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살고 죽기 때문에

그 존재를 명시적으로 인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과거 봉건사회의 지배 계층은

단순한 종교적 교리만으로도

쉽게 피지배 계층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다음과 같이 위트 있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 계급 제도가 고정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최하위층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구분이

신의 명령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류 계층을 질투하지 않는다.

거지들은 자기보다 벌이가 좋은 다른 거지를 질투하지만

정작 백만장자를 질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사회주의 평등의 원리가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사회 신분의 불안정성이 크게 확대되어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적 갈등은

과거 막스가 생각했던 노동자 vs. 자본가의 이원적 갈등구조가 아니라

피지배 계층이 서로 무한 분열하는 복잡한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생성소멸하는 유기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자본주의 초기의 명확한 이원적 갈등구조는

사회 시스템의 성장 단계인 것이며

추후 사회 구조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자본주의 초기 기존의 계급 갈등의 분열적 에너지가

오히려 지배계급의 지배 에너지로 흡수됨으로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은 더욱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그람시는 지배계급의 문화 헤게모니 이론 속에서

빠르게 변화한 사회 환경 탓을 하며

막스의 이론에 대해 나름의 옹호론을 펼쳤지만

사실 좀 더 냉철하게 말하자면

막스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계급 혁명 이론이나 노동 운동 자체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필요한 하나의 단계였던 것입니다.

..

잠시 문화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볼까요?

사람들은 부자들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부자들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을 너무 동경한 나머지

한국의 드라마에는 재벌이 나오지 않으면

아예 스토리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즉,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재벌2세와 신데렐라의 만남이라는 진부한 이야기가

핵심구조로 표준화(standardization)되어

다양한 스토리로 확장되어 나갑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사람들 중에서

그들(재벌 혹은 지배계급)의 삶과 사고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재벌들의 모습은

언론에서 비춰지는 재벌의 이미지에

자신들의 억압된 욕망을

있는 그대로 투영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속의 재벌의 모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와 성공에 눈이 먼 악랄한 악당인 동시에

정 반대로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일종의 메시아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부자 혹은 기득권에 대한 이중적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피지배 계층들은 일종의 정신적 분열을 겪게 됩니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상호 양립하기 어려운 상반적 이미지는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킬 뿐만 아니라

드라마상의 인과응보의 과정과

신데렐라 성공 이야기를 통해

대중들의 억눌린 욕망을 해소시키기 대문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욕망의 해소과정은

순수한 문학적 카타르시스와는 괴리가 있는데,

막장 드라마가 보여주는 비현실적 스토리는

개인의 억압된 욕망에 대한 해소가 될 수는 있을망정

공동체적 관점에서 어떠한 순기능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계급의식조차

잉여 감정의 해소 과정에서 함께 씻겨 내려가면서

시청자들은 정체성을 상실한 표준화된 대중으로 일원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적은 지배 계급, 혹은 재벌에서

단지 나보다 좀 더 잘사는 이웃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정을 지배계급의 음모나

사악한 의도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의 문화 헤게모니 장악 과정은

일방적이고 조작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실 대중들의 숨겨진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에 자연스럽게 부응한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막장 드라마라 욕해도,

그 드라마를 소비하는 거대한 시청자 층이 없다면

막장드라마는 팔리지 않는 실패한 문화 상품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문화 산업의 상품들을 소비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명확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문화 상품들의 소비과정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대중들의 계급의식과 투쟁의식을 산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 고유의 정체성은 물론

자신의 삶 또한 현실과 괴리되어

개인의 관점에서도 정체성 상실을 겪게 됩니다.

(반대로 정체성을 성립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무분별하게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에 대한 컨트롤키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꼴이니까요.)

..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매우 짧은 기간에 한민족의 오랜 전통과 정체성을 모두 상실하고

뚜렷한 정체성이 없는 글로벌 노마드(nomad, 유목민)로

변화해 오게 된 것도 문화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한류란

한국인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국적 없음’, ‘정신적 경계 없음’의 21세기 노마드 문화를 대표하며

나름 우리 사회의 다문화 진입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문화적 흐름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역사적 특수성을 기반으로

우리나라 지배계급과 그 뒤에 있는 글로벌 패권 세력들의

장기적 계획이 맞물려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람시의 말처럼 지배계급의 대중문화 헤게모니에 의해

피지배계급의 욕망은 처리되고 재배열되며 안정을 찾아가는 것인데,

한국의 경우 다른 국가나 문화들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지배계급의 문화적 음모만 비난할 수 없는게,

국민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헌신짝 처럼 버려왔으니까요.

..

어쨌든 지배계급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희망고문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지배계급의 희망고문의 메커니즘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과 실망이 무한 반복됨으로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희망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매우 잔인한 구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희망고문의 구조는 일종의 악순환(vicious cycle)을 보여주는데

앞서 언급한 문화적 표준화(standardization)에 기반을 한

무한 반복(repetition)의 형태를 가짐으로서

그 문화를 즐기는 개인들 역시 표준화시켜버리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일단 표준화된 개인들은

자신들이 보수라 생각하던 아니면 진보라 생각하던

기존의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의 유지와 발전,

혹은 때때로 필요한 갈등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시스템 내재적 ‘기제’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다는 점이지요.

더군다나 시스템 구성원이

지적으로 매우 예민하지 못하거나

감수성이 메말라 있게 되면

(따라서 예술 교육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 내포된 은밀한

자기 수정적인(self-repairing) 장치(혹은 메커니즘)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트랩 안에 갇혀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적 혹은 아군이기 이전에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장기의 말일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문화상품에 의해 표준화된 개인들은

이상적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그 순간에 조차도

기존 시스템을 위해 존재하고 있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시스템을 매트릭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매트릭스의 복잡한 심층구조는

표면적 단순함 뒤에 숨겨져 있어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리 것 처럼 매트릭스 구조 특성상 

우리 편이 사실은 우리의 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틀에서 볼 때 겉으로 보이는 피아식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들어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 레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함으로서

매트릭스를 벗어나 ​진실과 마주하고

매트릭스에 선전포고를 하지만

영화 끝에서 결국 매트릭스를 향한 그동안의 모든 투쟁이 

매트릭스 안에서 설계자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자신에게 운명을 알려주고 설계자와 싸울 방법을 알려준

오라클 또한 사실은 설계자의 거울 이미지로서

매트릭스의 존속을 위해 설계자가 준비해 놓은 

자기 수정(​self-repairing) 장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쉽게 말해 매트릭스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사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항상 오래 지속되는 시스템이란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갈등과 화해의 작고 큰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은밀한 자기 수정 장치를 통해

결함들을 수정해 나가는 시스템이며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모든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요즘 한국 사회는 빠르게 분열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헛된 욕망이 가상의 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극단적인 사고와 행동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저질 대중문화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마땅히 한 방향성을 가져야 할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분노가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문화의 자기 증식적인

Culture Mirroring을 통해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이웃들에게 반영되면서

서로 자멸적인 에너지를 발산시키게 되는데,

지배계급은 그 에너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분노를 장벽삼아

그 뒤에 숨어 버릴 수 있습니다.

최근의 세월호 사태는 지배계급이 어떤식으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실제 사례입니다.​

아무리 큰 틀에서 피아식별이 큰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때론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피아식별이 필수지만

싸구려 저질 대중문화와 우민화 교육에 영향을 받아

그 기본적인 생존 매커니즘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물론 항상 상황 조작을 위한 명목상의 표적은 필요하기 때문에,

몇 몇 회장님들이나 정치인들, 혹은 성공한 연예인들이

공개적인 대중의 표적이 되곤 합니다.

(이 부분은 종교적 희생제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부분에 대해 더 얘기해 볼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적 헤게모니의 틀을 벗어나

일종의 현대판 계몽운동을 펼치는 소수의 지식인들은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

일단 그들은 시스템의 관점에서 갈등 유발자로 볼 수 있습니다.

대중의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흡수하여 괴물처럼 팽창해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관점에서

반사회적인 성향의 소수의 지식인들과 행동가들은

시스템의 명시적 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 분열의 에너지가

반드시 기존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는 시스템의 내적 한계와

외부의 공격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볼 때 세부사항, 즉 디테일이 ‘재편’되고 있을 뿐입니다.

재미난 것은 많은 역사가들은

이 디테일(details)의 재편을 거대한 역사적 변화로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바꾼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덕분에 대중들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우리가 과거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지요.

안타깝지만 이 왜곡된 대중들의 사고 덕에

우리는 결코 지배 계급의 지배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들에게서 역사적 주도권도 빼앗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지배, 피지배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원리는 아는 사람들은 늘 지배계급이었으며

그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늘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피지배계층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지배-피지배의 구조 속에서

세부적인 디테일(detail)의 변화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외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시스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표면상 혁명의 구조를 갖곤 합니다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절대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금과옥조로 여기게 되고

민주주의의 표면적 틀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서

지배계급의 내면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왜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이 지나치게 민주주의 원리나 도덕성에 집착을 하다가

항상 스스로 자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타락 과정은

기존 시스템의 붕괴 과정이 아니라

기존 시스템의 유지를 위한 디테일(detail) 변화의 과정이고

그 반대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변화의 방향성이

상향이던 아니면 그 반대로 하향이던

그것을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반대로 민주주의의 위협이라는 한 측면에서 볼게 아니라

기존 시스템의 영속을 위한 과정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

원래 좋은 삶이란 과거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방법론 속에서 대비들(contrasts)의

향유(enjoyment)로서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비(contrasts)는

일정한 ‘질서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틀은 늘 자기기만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비는 늘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일정한 주기를 갖고 있는데

이러한 주기적 변화가 시스템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부정의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정화하며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모든 성공적인 시스템은

self-repairing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음악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과거부터 작곡가들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간단한 테마​를

다양한 변주와 음악적 기만 수단을 통해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10분짜리 대곡으로 만드는 법을

잘 알고 활용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바흐의 음악은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근본 원리를

가감없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올린 바흐의 BWV 1004 샤콘느나

일전에 올려드린 BWV 1000 푸가가 대표적인 곡들입니다.

바흐의 음악에는 우주 창조의 원리와

모든 시스템의 근본 원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이 우주를 만든 원리로

인간들이 음악을 만들어왔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근본적으로 사회 시스템 자체를 공격하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대다수 반사회적 운동들은 오히려 기존 시스템의 강화하거나

시스템의 은밀한 방향성에 더 큰 에너지를 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판을 엎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제대로 판을 엎기 위해서는 최소한 우리는 판 밖에 있어야 하며

판을 뒤 짚는 힘 역시 판 밖에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시스템 내부적인 힘으로는 자신보다 더 큰 판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뒤엎었다고 착각은 할 수 있지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시스템의 디테일에 대한 공부는 많이 시키지만

그 시스템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숨겨진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정형화된 학계에 오래 머물 수 없으며

늘 이단으로 지목되어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의심하는 것 자체가 금기되듯이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자부하는 현대의 많은 학문들도

큰 틀에서는 자기 기만적인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늘 세부 사항은 가르쳐 주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이해하고자 노력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온 학자들이 있고

나름 큰 성과를 낸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들의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며

운 좋게 그들의 책을 접한 사람들도

단지 말장난이라고 느끼게 되거나

진지하게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복잡한 철학 체계와

난해한 표현 앞에서 좌절을 겪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12년을 공립학교 시스템에서만 보낸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장난이나 외계어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장난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하며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것을 종요하지만

세상을 변화시켜온 모든 행동 뒤에는 나름의 사상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상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리큘럼에 철학이 빠져있는 공교육은

그 자체로 우민화 교육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시스템이란 항상 우리의 이해 수준을 넘어 있습니다.

이는 시스템 자체가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는 표면과 다른 이중적 구조가 내면화 되어 있는데

그 누구도 이면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시스템은 자기 기만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12년 공교육 과정에서 그 이중적 구조를 배울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며

이런 상황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시스템 속에서 같은 것은 다른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것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디테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첩적 시스템 속에서

일정한 구조를 잡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러다보니 기존의 시스템에서 탈피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많은 사회적 운동들이 오히려 기존 시스템의 생존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시

1%를 비난했던 Occupay Wall Street운동과 같은

대표적인 시스템 속 반시스템 운동들은

그들의 명시적 의도와 상관없이

오히려 기존 시스템의 유지에 도움을 주곤 합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나마 더 성공적인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면

의미 없는 정치적 구호를 집어던지고

현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적 약점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은행에서 돈을 빼기 운동이라던지

그 돈으로 실물 사기 운동을 벌였다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스템의 약점을 공략했더라면

최소한 기존의 시스템으로 부터 더 많은 댓가를 얻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촛불시위도 원점에서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시스템을 공격하는 많은 사람들은 시스템을 뒤엎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스템을 협박하여 어떠한 형태의 댓가를 얻기 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특히 다양한 시민 운동의 지식인 리더들이 그렇지요..

뭐 여당과 야당이 공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이처럼 표면상 사회의 문제점들을 들추어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깨어있는 사람들의 많은 노력들이

오히려 시스템 자체의 정화작용의 일부로서 이루어지며,

원래 의도와 다르게 다른 방향으로의 힘을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고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크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작동되는 방향은 항상 양방향으로

항상 자신에 대한 보호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반대로 자신에 대한 공격의 메커니즘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때로는 스스로를 공격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공격 메커니즘은 시스템에 대한 표면상의 위협이 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시스템의 안정과 영속성에 기여하게 됩니다.

즉, 사회 시스템이란 늘 이런 식으로 작동되며

 

질서와 균형을 잡아가는데,

문제는 사회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은

대부분 사회의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 쪽인 것인 반면

반면 이러한 변화를 직,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기득권 입장에서는

사회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응축된 에너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이기에

그들은 ‘질서’, 혹은 ‘무질서’의 관점이나

‘공정’, 혹은 ‘불공정’의 관점으로 시스템을 보지 않습니다.

이처럼 피지배 계층은 항상 한쪽 방향에 집중하는 반면

지배 계층은 늘 양방향을 봅니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사회적 에너지를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할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시스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지배계층으로 올라라게 되는 것이지요.

..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사회에 큰 혼동을 가져오는 경제 위기에 대해

시스템 붕괴라는 관점에서 두려움을 갖는 반면

지배계층은 시스템 붕괴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아고라의 단골손님인 부동산 붕괴 시나리오에 대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시스템 붕괴에 대한 공포감을 갖는 동시에

지배 계층에 대한 가까운 미래의 응보(retribution)로서의 짜릿함을 느끼지만,

정작 진정한 지배 계층은 부동산 붕괴나 주식 붕괴,

달러 붕괴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폭우가 쏟아져 붕괴 직전인 저수지 옆에서

여유롭게 내리는 비를 즐기며

저수지 붕괴 후에 쓸려서 사라질 마을을

어떤 식으로 새롭게 건설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과 유사합니다.

물론 홍수로 쓸려나갈 자기 집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경제가 망하던 말든 관심 없어! 라고 말하는 듯 보이게 마련이지요.

사실 돈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실체’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돈이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싸우게 되면

당연히 후자가 100전 100승하는 것입니다.

..

이처럼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동상이몽을 꾸는 것은

피지배 계층의 동상이몽이 결과적으로 지배계층의 이익에 도움이 되며

자신들을 비난하는 피지배 계층의 강력한 비난의 목소리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다음의 과정을 끌어내기 위한 절차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사실상 허상위에서 만들어진 종이 조각을 갖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대중들로 부터 숨기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배 계층들은

늘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시스템의 주기를

혼돈스러운 구체적 디테일(concrete details)로 감출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절대로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주기 내에서 대비(contrast)를 최대한 끌어올려

자신들의 쾌락을 극대화한 이후에

기존의 판이 끝날 때쯤에

새로운 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더 큰 그림에서 보면 그 새로운 판 또한

기존 시스템과 디테일상의 차이를 보일 뿐

기존의 시스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은 것이니

같은 판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피자로 따지면 토핑만 바뀌는 것이지요.

다만, 지배 계층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피지배 계층이

허황된 희망을 갖는 것이고

가짜 스테이크에 만족하는 몸의 욕망과

현실과 괴리된 헛된 정신적 욕망에

지금처럼 계속 집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지배계층이 스스로의 힘으로

판 자체를 뒤집어 버릴

정신적 에너지를 축적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 변화는

지배계층에 의한 그리고 지배계층을 위한 변화일 뿐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히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헛된 희망을 먹고 자라나는 버섯과 같은 존재들이며,

우리의 헛된 희망은 우리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니

우리가 그들의 배터리임을 알면서도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만약 지구가 감옥 행성이라면

그 지구를 감옥 행성으로 만드는 것은

악한 존재들의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아니라

결국 세상을 창조하는 근본적인 힘인

각자의 정신적 힘을 통제하는 능력의 부족입니다.

무한한 에너지는 갖고 있되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 법을 모르니

그 에너지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종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배계급의 힘의 근원은

각자의 정신적 힘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인 것입니다.

즉, 모든 사회 변혁의 힘은

결국 자기를 이해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공허한 유교의 이론이 아니라

우주의 생성과 변화원리에 대한 이해를

작은 우주인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된다는

매우 의미있는 가르침인 것이지요.

..

선과 악이란 에너지의 관점에서

에너지를 뺏기는 쪽과 빼앗는 쪽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뺏기는 입장에서

자신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어떠한 사회적 운동이 아니라

먼저 시스템의 원리를이해하고

자신의 무한한 정신적 힘을 컨트롤하는

지식과 방법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그 것을 직접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고대의 종교들은

모두 그 에너지의 존재와 활용법에 대한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100% 과거의 내가 만들어 낸 것이며

여기서 늘 등장하는 적들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욕하는 저 나쁜 사람들은

사실 우리의 은밀한 욕망의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정의를 위해서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좌절이 만들어낸 환영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외부에 적을 만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부의 적들과 싸워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에너지로 적의 크기를 더욱 키워가게 됩니다.

결국 지금의 나의 현실에 대해 전적으로 내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삶 속에서 피아식별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삶은 전쟁이 아니라 체험이란 말의 참 의미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진 것 마저 모두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언급한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고,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하게 된다‘는 말은

정신적 에너지의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실제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현실은 항상 정신의 거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P.S. 시스템 변화를 위한 모든 노력이 무의미 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모든 사회적 노력은 명시적인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정치적 욕망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단지 디테일의 변화가 목적인지

아니면 기존 시스템 자체의 폐기가 목적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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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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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논산댁 | 작성시간 14.10.02 자기를 아는것.. 첫 출발이겠지요.. 잘읽었습니다.
    요즘 정신줄 잡고 읽으려고 하는 책과도 일맥상통하네요.
    건강하십시오.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0.06 혹시 요즘 읽으시는 책 제목 좀 알려쥘 수 있으신지요??
    참! 쪽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미래청년쾌남(서울) | 작성시간 14.10.18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

    옛날에 읽었던 요 글이 갑자기 떠올랐어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4446405

    시스템을 깨닫든 못 깨닫든
    낙담하지 말고
    (어떤 분들은 이런 글 읽으면 '역시 뭐 해도 소용없는 거구만~' 이러고 오히려 순응해 버리시거든요.)
    불씨는 꺼뜨리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비빔밥님이 기술하신 대로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미래청년쾌남(서울) | 작성시간 14.10.18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종교적 희생제의에 대해 글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약자 또는 순수한 자를 번제(ex: 깨끗한 어린 양)함으로서 풀어내는 사악한 성향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태고적부터 내려온 인류의 스트레스, 혹은 문제 해결방식으로서 역사속에나 현재의 문화속에서도 익히 나오고 있죠.

    근데 카톨릭에서 매주 행해지는 예수의 '내 피와 몸을 받아먹어라'라는 성찬의 전례=희생제의는
    바로 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인간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닌 '신이 인간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로서 인류의 그 기나긴 잔혹사를 역전시키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 작성자미래청년쾌남(서울) | 작성시간 14.10.18 상징적 과정,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과정이 아닌가 하고요.
    다른게 원죄가 아니라 이 희생양 메카니즘이 바로 인류의 가장 큰 원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이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고, 물론 시스템은 요걸 다른 방식으로 이용해먹죠.ㅋㅋ

    (뭐 서양 중세시대에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대놓고 했다면 당장 종교재판가서 손톱 다 뽑히고,
    지금 현대에도 교회에서 이런 얘기하고 다니면 이단이라고 좋은 소리 못들을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세에서나 현대에서나 어떤분들은 알고 있었을 얘기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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