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리더스 칼럼

'생존'에 대한 철학적 고찰!!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2.11.03|조회수920 목록 댓글 9

오늘은 시간이 좀 있어서

우리카페 취지(?)에 맞게 생존에 관한 글을 하나 써볼려고 합니다.

물론 제가 생존에 관한 실무적(?) 지식이 미천하야

생존의 철학적 고찰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제 글은 다음 4개의 소주제로 이어질 것입니다.

지루하고 논리적 비약이 좀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세용!..^^

(혹시라도 반응이 뜨거우면 2탄도 갑니다..ㅋㅋ)

..

1. 다윈의 적자생존에서 생존의 의미

2. 데이빗 버스의 생존을 위한 악의 회로

3. 화이트헤드가 바라본 생존을 위한 이성의 기능

4. 생존이 갖는 의미에 대한 고찰

..

일단 생존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다윈의 적자생존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윈은 진화론을 통해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개체만이 살아남게 되고,

이 두 가지 생존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종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고 보았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인구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맬서스입니다.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는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보다

40년 정도 앞선 학자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을 제시한 학자이지요.

사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농동자계급의 빈곤에 대한 책임을

악덕한 기존시스템에 돌리고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당대의 고드윈과 같은 진보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잡한 경제학적 비관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맬서스의 이론의 최대 단점은 그런 정치적 꼼수가 아니라

이론 자체가 갖고 있는 ‘양적 사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 그리고 그 안의 다양한 계층과 계층간의 생존력 차이를 배제하고

모든 인류를 ‘인구’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 당시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엘리트 계층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지요.

문제는 찰스다윈이 이러한 맬서스식의 ‘양적 사고’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입니다.

..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환경에 대한 적합과 부적합이라는 이분법 개념입니다.

하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생존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동어반복으로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왜 강력한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는 개체는 멸절하고

반면 환경 변화에 취약한 개체가 살아남아 문명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은

유기체 탄생의 근원에 대한 고찰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배제한 채

진화과정에 발생하게 되는 유기체 간의 경쟁이라는 좁은 틀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건강하고 많은 후손을 만들어 내는 개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데

실제 진화의 과정에서 보여준 상향의 힘은 개체의 절대수보다

각 개체들이 취한 생존전략 또는 대의가 더 중요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또한 진화론이 주장하는 적자생존의 가장 큰 문제는 생존의 도덕성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카페의 경우 만약에 있을 재난적 환경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식량을 준비하고 각종 물품을 준비하며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만

외부 사람들이 봤을 경우 그 준비의 근거가 나름 타당하다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역시 자신들의 생존만을 도모하이 이기적 인간들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말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옆집 아이가 굶어죽게 되었을 경우

우리가족만 몰래 먹던 음식을 나누어 줄 것이냐

아니면 가슴이 아프지만 모른 척 하며 우리가족의 생존만을 도모할 것이냐의

현실적 문제도 존재합니다.

만약 이웃을 위해 음식을 나누어 줄 경우,

위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식량을 달라고 달려들 것이고

이런 상황은 준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결론적으로 상호공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즉, 생존에는 자비가 없는 법이죠.

현실적인 관점에서 재난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개체가 생존할 확률이 더 높다는 관점에서

적자생존이란 개념은 개체와 개체간의

제한된 식량 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을 의미할 뿐 아니라

약탈과 속임수, 그리고 무자비한 존재들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관점에 더욱 무게를 더해주는 학자가

텍사스 주립대학의 David Buss교수입니다.

유명한 진화 심리학자인 버스는

인간의 두뇌 속에 악의 회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많은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연쇄살인범은

사실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며

사랑이 넘치는 가장이며 성실한 직장인인 우리가

언제든 살인마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우리 뇌에 강력하게 각인된

악의 회로가 평상시에는 숨어있다가 생존의 순간이 되면 강하게 작용하며

악의 회로가 강력하게 작용할수록 후손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론적 주장일 뿐 아니라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살아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사라진 다른 이들의 조상보다 더 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상 가장 악하다고 생각했던

정복자나 독재자들일 수록 더 많은 후손을 퍼뜨렸고

더욱 강력한 악의 회로는 후손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세상을 더욱 악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인류의 문명은 진화되어왔고

과거의 학살과 악행들은 오히려 사라져왔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악의 회로는 생존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활성화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문명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악이 판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

저는 개인적으로 데이빗 버스의 이론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극단의 이기적 선택을 하게 되는

개별 생명체의 생존 메커니즘을 증명할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다윈의 적자생존의 큰 틀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문명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두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악의 회로가

많이 후퇴했거나 현실에서 작동될 일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한 인간들이 더욱 많이 생존했고

우리는 잠재적 악당들, 혹은 피에 굶주린 좀비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표면상 문명의 진화과정은 그러한 악의 회로를 퇴화시키고

최소한 대뇌 피질에서 활성화 되는 것을 차단시킬 정도의 문명을 일구어왔다는 점에서

단지 적자생존의 경쟁 하나로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저의 그러한 고민에 대해 일종의 탈출구를 제시해 준 학자가

바로 Alfred North Whitehead입니다.

[과정과 실재]라는 저서로 유명한 화이트헤드는

수학자, 물리학자이자 유명한 과학철학자로

1929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The Function of Reason]에서

다윈의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생존의 메커니즘을

다윈의 이전투구식의 치열한 경쟁의 틀에서 끄집어내어

이성의 기능을 통한 삶의 기술을 증진이라는 철학적 대상으로 고양시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화이트헤드를 생존에 대해 처음으로 철학적 고찰과 분석을 한

최초의 학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화이트헤드는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유기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물리계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옮겨감을 의미)에

위배되는 진화상 최초로 상향의 방향을 갖게 되는 계기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실증적 관점에서 진화의 과정이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경에 취약한 개체들이

환경을 자시들에게 맞게 변형시키는 능동적 개변을 통해

생존을 도모해왔고 결국 무기물에서 유기체로

그리고 고등생물로 발전하는 상향의 흐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진화의 원동력은 바로 ‘이성’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인간과 같은 고등생명체가 보여주는 ‘이성’의 힘은

정체된 삶의 단계를 넘어서 상상속의 ‘목적’을 이뤄내기 위해

이성의 기능을 능동적으로 작용시켜 환경을 개변시키고

자신의 삶의 증진을 도모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생존이라는 물적조건을 넘어서

요즘식으로 말하면 웰빙을 향해 나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데이빗 버스가 말한 진화의 원동력인 악의 회로와 대조되는

긍정적인 진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윈과 버스가 생존이라는 틀 속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결과로서 진화를 본 반면

화이트헤드는 환경의 제약과 물적 생존이라는 미개한 틀을 넘어서

좀 더 의미 있는 삶, 그리고 인간의 물적 조건에 국한되지 않는 이상적 삶을

진화의 종국 목표로 삼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작동하는 ‘이성’의 실질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성이란 실천이성의 개념으로 동물적 생존전략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함으로서

인간의 물적 조건을 초월하는 초월적 이론이성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화이트헤드의 이론에 의하면 다행히도 생존욕구란 그렇게 저열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최소한 칸트에게 있어서는 실천이성이 절대적 윤리의 근거로서 추상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개념을 생존의 문제로 끌어내려 이론이성과의 간극을 좁혔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관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관점에서 ‘생존’이란 화두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은 아전인수격 해석인지는 몰라도

후자, 즉 생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철저히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닐가 싶네요..ㅋㅋ)

사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서구식 발전사관, 또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물에서 유기체를 만들어내고 또 고등생명체로의 진화를 이끈 이성의 힘 뒤에

좀 더 큰 과점에서 우주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의한 환경파괴나 진화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살육 또한

우주적 관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지요.

우리 개인들 또한 본인의 강력한 생존욕구에 스스로 당황할 때도 있구요.

어쨌든 이성의 기능이 생존에서 웰빙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될 이상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집단 지성이 성취해야 될 궁극적인 어떤 목적이 존재할까요?

단지 인간의 세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존의 게임일 뿐이라면

너무 허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ㅠㅠ

..

최소한 지난 몇 천년간 인간의 멸종사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차례 문명의 붕괴나 대자연재난, 혹은 흑사병, 세계대전과 같은 위기들은 많았지요.

재미난 것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상황에서,

좀 더 근사하게 말하면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는 물적 생존에 집중한 개체들 보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추상적 사유능력을 극대화 시킨 존재들,

혹은 기존의 시스템에서 버그로 취급되었던 존재들이였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 다양성은 늘 생존을 위한 자연의 배려였다는 점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봅니다.

예를들어 전 세계 기아의 극복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식용 바나나의 종이 단 1종이여서

병충해가 휩쓸 경우 전멸해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획일화된 문명과 획일화된 사회는 전성기에 최고의 번영을 누릴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 대한 대비라는 면에서 매우 불리한 조건에 놓이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평화(?)의 시기에 문명의 붕괴를 걱정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분들은 일종의 버그일 것입니다.

버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게될 시기가 올해 닥칠지 아니면 100년 후에 닥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서

생존을 위한 악의 회로와 실천이성의 기능이 동시에 작동되고 있다는 걸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삶과 생존이라는 화두를 통해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살아남기 위해 준비한다면,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리고 살아남는 것이 같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살아남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단지 시간낭비는 아니겠지요?

지금까지 비빔밥의 개똥철학이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미기(여수) | 작성시간 12.11.03 삶에 대해 얘기할때 유전자적으로 이미 각인된 본능의 추구와 그리고 전통적 가치관에 따른 가치 추구 그리고 그 두 가지 외에 우리가 창의적으로 생각해 내고 선택하여 미래를 열어가는 의미의 추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어떤 명석한 위인은 살면서 중요한 어떤일을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즐겁고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사용하라고도 하고.
    그러기에 즐거우면서도 본능에 의한 짓 사랑하고 그리고 공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나의 하고자 했던 꿈이든 욕망이든 간절이 원하던 사유든 소유든, 아직도 발견하거나 생각해 내지 못한 이상을 성취하여 행복해 지기 위해 살아 남고 싶습니다. 옥여사님께서 "생존은 퍼스트 취미생활이다"라고 정의.
  • 작성자길벗(포항) | 작성시간 12.11.04 가까이는 독재자에 의해 유린된 빛 고을 광주 그리고 6.25 동족상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 황톳벌 동학의병.... 임진왜란.... 그리고 또..
    눈물나는 불가항력 고난의 연속사 입니다.
    생존시대, 제가 사는 이유는
    우리 조상들 처럼
    내 아버지 같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 갈 이 터를 잘 지켜내는 것 입니다!!

  • 작성자홍이야 | 작성시간 12.11.05 생존논문 감사합니다^^ 박사님~
  • 작성자코난(경기) | 작성시간 12.11.07 좀 어렵지만 좋은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Keane[아산] | 작성시간 12.11.07 잘 봤습니다. 해박하시니 항상 여러모로 도움을 받는 것 같네요..^^ 궁금한 것이..
    이성으로 생존을 도모하건 악의 회로로 생존을 도모하건 이는 모두 타당 한 말 깉습니다. 그렇다면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생존을 보다 심도있게 연구된 것은 없나요?
    생존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악도 악이 아닌게 되는데 그렇담 정의란 생존에 있어 어떤 의미일까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