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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to live! to live well!! to live better!!!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2.11.20|조회수591 목록 댓글 30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닭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닭이 한 마리 있다.

주인은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닭은 그런 주인을 보면서

주인을 자신의 조력자 또는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인, 즉 인간이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주인은 칼을 가져와 단칼에 닭의 목을 베어버린다.

닭은 자신의 목이 달아나기 하루 전에도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

이후 이 닭 이야기는 칠면조 이야기 등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산 됩니다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경험으로 체득하는 귀납적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며 세상을 이해하지만

그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바로 기존 사회 시스템이며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 기존 시스템에 더욱 동화되어 갑니다.

그러다 기존 시스템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존의 지식과 경험은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거지요.

..

최근 조명을 받고 있는 행동주의 경제학자들은

인간들이 손쉬운 생존의 방편으로

주로 생물학적 본능이나 직감을 따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기존사회 관념이나 생물학적 본능에 즉각적으로 반응함으로서

생존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의도적인 사고

즉 계산, 논리, 추론을 통해 상황을 능동적으로

분석해 가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20세기 초 물리학자인 화이트헤드가

그의 ‘과정과 실재’라는 거대한 철학 사유 속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성의 기능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실천이성의 개념과

좀 더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성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이 둘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성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 합니다.

바로 (1) to live, (2) to live well, (3)to live better의 과정으로

생리학적 몸의 기능과 이성의 추상적 형이상학의 역할을

다른 기능과 목표를 가진 상반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to live better하기 위한 동일한 기능으로 보고 있습니다.

..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to live나 to live well하는

생리학적 관점의 실천이성에 주로 집착을 하는 반면

삶의 근본적 물음과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이성의 형이상학적 기능

즉, to live better 하기 위한 이성적 기능을

단지 철학자들의 유희나 사변적 낭비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지요.

사실, 삶의 근본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고민은

동양철학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다룬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식 물질문명에 오염되면서

오히려 서양보다 더욱 물질에 집작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창진적 기능이 발휘되지 못하는

딱딱한 물질적 사회로 점점 추락하게 된 것이죠.

..

우리는 홍익인간을 말하고 인내천 사상이 우리 문화의 근간이라고 배우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아귀다툼의 진흙탕 그 자체입니다.

아직도 철학이나 역사는 그다지 필요 없는 고리타분한 학문이고

순수 학문은 도외시한 채 오직 돈을 벌기위한 실용학문에만 매달립니다.

우주의 원리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엿보기 위한 틀인 수학을

단지 점수를 얻기 위한 계산 과목으로 추락시켰습니다.

똑똑한 고등학생들은 오직 경영대나 의대로만 몰립니다.

아이들의 잘 못이라기보다 부모들의 잘못이고

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는 창피한 결과입니다.

..

나심 탈레브는 그의 책 ‘블랙스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타이타닉 호의 선장이었던 E. J. Smith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사고라 할 만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라고는 단 한 척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배의 조난을 목격한 일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재난의 주인공이 되는 사고를 겪은 적도 없었다.

..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버스를 탈 때마다

사고가 날 확률을 생각하며 염려로 걱정하고

길을 건널 때마다 위험을 인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기존 사회의 통념을 따르고

생물학적인 직감을 따르는 이유는 삶의 편리성을 위해서이고

굳이 그 모든 편리함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걱정에 대해 탈레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마라!”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관행에 익숙해져서

눈을 감을 채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눈을 감고 길을 건너고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패러다임 변화 같은 이야기는

쓸데없는 웃기는 얘기일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헛소리인 것이지요!

..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표현입니다.

제 글을 읽어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새 시대!

어쩌면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고양시켜줄

새로운 시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이 망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말론자들은 세상의 완전한 멸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자신에게 유리한 시스템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저의 개인적인 소망과 바램이

세상을 보는 저의 틀에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비관적인(사실은 희망적인) 견해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늘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

화이트헤드가 말한 이론 이성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성의 기능을 통해 일단 세상을 이해하는 일정한 틀이 만들어지면

우주는 그 틀에 맞추어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는 1930년대에 주장하기를 근대 과학자들의 방법론에는 오류가 없지만

그들이 분석하는 세상은 그들이 보고 싶은 틀에 의해 만들어지는

오류 가득한 결과들뿐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학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과학의 역사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와 수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권력싸움으로 분석합니다.

이처럼 이미 그는 ‘과정과 실재’라는 1930년대 그의 저작에서

패러다임 개념을 내놓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창시자는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자이지만

제가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

자..우리는 모두 자신이 보고자 하는 틀 안에서 세상을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는 틀을 통해 모든 정보가 재구성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확실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경제 위기의 모습을 어디까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

제가 어제 쓴 글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과거의 역사를 통해 누구는 디플레이션 발 대공황을 유추해내고

또 누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하이퍼 발 대공황을 유추해 냅니다.

더 나아가 과거 문명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통해 경제 붕괴의 시나리오,

아예 수메르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우리를 만든 창조자와의 조우까지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한계상,

어쩌면 우리는 애석하게도(?) 어떠한 붕괴도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을지도 모릅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멋진 저작을 남긴 칼 포퍼는

우리 인간의 정신을 폐쇄적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플라톤을 지목하며

그는 세상의 본질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세계는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곳이라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자 하는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정보들을 습득하지만

오히려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스스로 만든 가설의 노예가 되어

잘 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지적 한계(확인편향의 오류)에 더해

각종 뉴스나 통계를 혼란을 더해갑니다.

똑 같은 사건이 호재가 되기도 하고 악재가 되기도 하니까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며 대비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결국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

1999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70대 후반의 한 노인이

종말을 예견하여 혼자 살아남겠다고 산에 들어가 굴을 파고

혼자서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처량하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노인이 예측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마도 그 노인은 그가 꿈꿔온(?) 세상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아마 자연사, 또는 병사로 운명을 달리했을 것입니다.

2012년 12월을 두고도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우주적 대격변이 발생한다!

경제 붕괴가 발생한다!

차원 상승이 일어나서 지구가 새로운 별이 된다!

예수가 재림하여 휴거가 일어난다!

어쩌면 그러한 많은 다양한 종말론 버전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현 시스템에 지쳐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역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살아남고자 도를 닦던 지하 벙커를 준비하던

혹은 금과 은을 사고 비상식량을 준비하던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는 것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준비의 모습들을 보고

비웃기도 하고 또 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 오히려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열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봅니다.

절망은 늘 희망의 씨앗이 되지요..

..

만약 새시대의 열망이

지금의 세상을 부숴버리길 원할 정도로 강렬하다면

새 시대의 도래는 필연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시대!

소수의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

더 많은 창조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요?

..

가끔 혼자만의 공상이지만 이런 식의 의식 혁명을 꿈꿔보기도 합니다.

..

어쩌면 우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부지불식간에 미래를 창조해가는 더 큰 능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뇌피질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미래 예측은

늘 우리의 영혼이 창조해 내는 미래와 다른 건지도 모르지요.

..

흠..

원래는 러셀의 닭 비유를 통해

갑작스럽게 닥칠 미래에 대한 준비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는데

쓸데없는 잡설로 이야기가 새버렸습니다.

철학적 논쟁을 하자는 의미로 쓴 글은 아니니

취할 건 취하시고 버릴 건 버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정확한 미래의 예측은

인간의 생리구조, 또는 인지구조상 불가능하더라 하더라도

to live better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류를 수정해가며

미래를 예측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의 파편 하나하나가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 창조의 시나리오가,

붕괴, 즉 추락을 통한 재창조가 아니라

연착륙을 통한 새로운 이륙이었으면 더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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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21 물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부끄럼이 없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다고 봅니다. 세상엔 70억의 인구만큼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니까요. 신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최소한 돈에 자존심과 양심을 판적은 없습니다. 흠..쓰다보니 왠지 제 자랑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만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ㅋㅋ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21 끝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악'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의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과 사랑..하지만 그 두려움 또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악은 하나의 체험이고 악한 인간들 또한 내 의식의 반영일 뿐입니다. 왕의 체험을 하건 거지의 체험을 하건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신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이 창조한 선과 악의 현실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인 신을 비난하지요. 그리고 사랑의 신답게 굴라고 명령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21 시궁창인 현실과 인간의 세세한 삶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는 도도한 우주의 흐름..
    현실에서 날카롭게 대비되는 선과 악의 모습,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악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와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마어마한 욕망, 그리고 좌절..
    이상은 늘 안드로메다인 현실이지요!
    거기에 창조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려버리면 더 꼭지가 돕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환영인 것은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너무나 실제같아 벗어날 수 없지요..
    ㅋㅋ..갑자기 이상한 댓글이 됐군요..그냥 저의 넉두리로 들어주세요!!
  • 작성자미기(여수) | 작성시간 12.11.21 아무튼 잘 읽고 있습니다.^^ 댓글들도 참 재미있고 볼만합니다.
    이렇게 침착하게 장문들을 정리해 주신 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카페가 좋습니다.
    님들이 계시어서..
  • 작성자머루다래(강원) | 작성시간 12.11.21 오늘은 본문이나 댓글이나 읽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훌륭한 본문과 댓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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